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170화 (170/203)

170. addiction - 탐닉, 중독 (3)

170.

***

나는 내가 생각해둔 대안에 대해 말했다.

“손 선생님 어떠신가요?”

“아, 손주환 작곡가님이요?”

“네, 지난번에 작업실에 놀러 갔는데 괜찮은 곡을 들었거든요.”

잠시 고민하던 정은미 피디가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손 작곡가님이면 저도 기대가 되는데요? 뮤지컬 때 들은 넘버 7은 아직도 즐겨 듣고 있거든요.”

기분 좋게 흥얼대는 모습을 보니 괜한 소리는 아닌 모양이었다.

“다행이네요. 그럼 제가 손 선생님이랑 연락해보겠습니다.”

“아, 제가 처리해도 되는데...”

“아니에요. 피디님 요즘 많이 바쁘시잖아요.”

“어머, 우리 작가님 배려심 봐.”

내 말에 정 피디가 웃는다.

“손 선생님과는 제가 연락해둘 테니 좀 더 작품에 집중해주세요. 어차피 곡 콘셉트에 대해 의논할 것도 있어서요.”

“흠.”

잠시 고민하던 정 피디가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면 염치없지만 부탁 좀 드릴게요. 덕분에 한시름 놓겠네요.”

모처럼 촬영이 없는 날이라 그런지 정 피디의 표정이 한결 가벼워진다.

“참, 다른 별일은 없나요?”

“...네?”

“솔직히 OST보다는 다른 용건이 있는 거 같아서요. 혹시 촬영장 분위기가 별로인 건가요?”

“...”

내가 묻자 정 피디의 표정이 순간 굳어진다.

촬영장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정 피디는 쉽게 입을 열지는 않았다.

하긴 누워서 침 뱉기나 다름없는 상황을 먼저 꺼내기란 쉽지 않겠지.

이쯤에서 더 쉽게 말을 할 수 있게 도와줘야 했다.

“안 그래도 이경민 배우님이 영화는 처음이라 좀 의견 차이가 있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거든요. 한 달 전에 부재중 전화가 한 통 오기도 했고요.”

“...”

가만히 듣고 있던 정 피디가 이내 찬물을 한잔 들이킨 뒤 입을 연다.

“하아, 역시 작가님 눈은 속일 수가 없네요.”

잠시 고민하던 정 피디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말씀대로 이경민 배우와 올란 감독님 사이에 살짝 마찰이 있어요. 연기에 대한 배우와 감독의 이견이라 주변에선 나서기가 좀 어렵더라고요. 지금까지는 그럭저럭 넘어가고 있는데, 이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상황이라... 걱정이 되긴 하네요.”

역시 내 예상대로였다.

정 피디가 걱정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이경민 배우는 결코 참는 사람이 아니니까. 자신의 커리어에 대한 확신도 있었고, 연극배우 출신이라는 자부심 역시 엄청났으니까.

‘한번은 직접 보는 게 좋겠어.’

나는 자연스럽게 이경민 배우의 촬영 일정을 확인했다.

***

늦은 밤.

숙소로 돌아온 이경민은 가만히 침대에 누웠다.

눈을 감고 있지만 귓가에선 같은 소리가 반복해서 울린다.

컷, 다시.

컷, 다시.

컷, 다시.

환청처럼 들리는 소리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하아.”

끝내 침대에서 일어난 이경민은 위스키를 병째로 입에 들이붓는다.

“야, 야. 경민아, 뭐 하는 짓이야?”

소파에 앉아있던 매니저가 그 모습을 보고 놀라 다가온다.

“그냥 둬. 취하지 않으면 잠도 못 잘 거 같으니까.”

매니저의 손을 뿌리친 이경민은 그대로 두 모금을 더 마신 뒤에야 병을 내려놓았다.

“배우가 도구야? 대체 왜 내 해석을 존중해주지 않는 건데?”

성난 이경민의 모습에 매니저는 어쩔 줄을 몰랐다.

“경민아, 너무 신경 쓰지 마. 올란 감독이 외국인이잖아. 그래서 우리나라 연기를 잘 모르면서 하는 소리야.”

“그게 말이 돼? 헐리웃에서도 연출력으로 유명한 감독이야. 게다가 연기에서 국적이 뭐가 중요한데?”

이경민은 다시 한번 올란 감독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저희가 뽑는 건 연극배우가 아닙니다. 다시, 제대로 연기 해주시죠.’

아무리 곱씹어도 그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

‘대체 내 연기가 어디에 문제가 있는 건데?’

명치가 불에 탄 듯 쓰렸다.

울컥거리는 감정을 어렵게 삭이느라 주먹을 움켜쥐었다.

폭발 일보 직전인 활화산과 같이 머리가 뜨겁고 이를 악물었다.

이경민은 또다시 술병을 집어 든다.

터질 것 같은 화를 가라앉힐 수 있는 건 오로지 술뿐이었다.

***

며칠 뒤.

나는 장현웅과 함께 춘천을 찾았다.

일성 그룹 소유의 아트 갤러리.

극 중 현성 그룹 일가의 저택으로 나오게 될 촬영지였다.

‘몇 년 만이지?’

4년 전쯤, 조예슬과 함께 데이트 코스로 왔던 곳이었다.

오랜만에 찾아왔지만 관객을 압도하는 스케일만큼은 여전했다.

“우와, 진짜 으리으리하다.”

장현웅이 감탄을 터트린다.

예술과 콘텐츠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조태강 회장의 경영철학답게 거대한 성을 방불케 하는 스케일이었다.

“작가님, 이쪽입니다.”

조연출의 안내로 우리는 한창 촬영 중인 현장으로 향했다.

거의 백 명에 가까운 스태프들.

그리고 그 한쪽에 메가폰을 잡은 크리스토퍼 올란 감독과 정 피디의 모습이 보인다.

사뭇 진지한 현장 분위기에 나는 정 피디와 눈인사만 간단히 주고받은 뒤 현장을 지켜봤다.

“...분위기 장난 아닌데.”

장현웅의 말대로였다.

이 정도 규모의 영화 촬영 현장을 직접 본 적은 없었지만 딱 봐도 엄청난 규모였다.

‘이게 엔플릭스의 클래스인가?’

이번 작품에 그만큼 투자를 아끼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이경민의 역할을 그 어느 때보다 중요했다.

‘윤서원이라는 캐릭터가 돋보이기 위해선 그만큼 윤정호의 비열함이 살아야 하니까.’

내가 직접 찾아온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그리고 잠시 뒤,

올란 감독의 사인과 함께 이경민의 연기가 시작된다.

극 중 공장에서 사고를 당한 노동자가 저택까지 찾아와 1인 시위하는 장면이었다.

윤정호를 연기하는 이경민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노동자에게 다가간다.

“대체 이러는 이유가 뭐야?”

귀를 휘적거리며 무심한 듯 던지는 질문.

노동자는 헐렁이는 바짓단을 흔들며 원망 어린 목소리로 답한다.

“사, 상무님. 내 다리가, 내 다리가 왜 이렇게 된 줄 아십니까? 이게 다 문제 있는 기계 때문이었다고요! 그럼 정당한 보상을 해줘야 할 거 아닙니까!”

억울함에 노동자가 윤정호의 옷깃을 잡는다. 순간 윤정호의 눈에서 불길이 인다.

“아니, 이게 어디서 더러운 손을...”

윤정호는 노동자를 거칠게 밀쳐내며 거칠게 걷어찬다.

“그럼 그만두지, 왜 돈 벌고 싶어서, 기어들어 와 놓고, 내 탓 하는 건대? 지 다리 지가 간수 못하고 왜 나한테 지랄인 건대!”

한마디, 한마디마다 발길질이 이어진다.

윤정호의 잔인한 성격이 드러나는 장면.

그러나 지켜보던 올란 감독의 표정은 그보다 차가웠다.

“컷, 다시.”

그 한마디가 촬영장을 싸늘하게 만든다.

“...”

순간 연기를 멈춘 이경민이 올란 감독을 노려본다.

“뭐라고요?”

“다시 가자고요.”

올란 감독 역시 지지 않았다.

“다시 하라고요?”

“네.”

팽팽한 기 싸움에 촬영장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는다.

폭풍전야처럼 심각한 분위기.

그때,

이경민의 어깨가 갑자기 훅 내려온다.

“하아. 그렇게는 못 하겠네요.”

“뭐라고요?”

“저, 하차겠습니다.”

충격적인 발언에 놀란 쪽은 정 피디였다.

“...네? 이경민 배우님...”

“아무래도 감독님과 제가 생각하는 연기가 다른 거 같네요. 작품에 더 피해주기 전에 하차하겠습니다. 그럼 수고하십쇼.”

이경민은 거칠게 몸을 돌려 촬영장을 벗어났다.

“배, 배우님!!”

정 피디가 뒤늦게 쫓아가려 했지만 이미 차는 저 멀리 떠나고 있었다.

“하아. 이거 어떡하죠?”

당황하는 정 피디는 안절부절못했다.

나는 그런 정 피디를 진정시켰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어디 갔는지 알 거 같으니까.”

다행히 한 군데 떠오르는 곳이 있었다.

***

대학로 극장가 뒤편 선술집.

어려운 연극계 후배들을 데리고 자주 찾던 곳이었다.

그런데 오늘 이경민은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시발...”

입에서 욕이 나온다.

올란 감독을 향한 욕은 아니었다.

그저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인생을 향한 분노의 표현이었다.

“하아.”

단순히 자존심이 상해서 화가 나는 건 아니었다.

그보다는 도무지 올란 감독이 원하는 연기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 더 늦기 전에 하차하는 게 맞아...’

엄청난 기회였지만 피해를 줄 순 없었다.

오히려 자신의 연기 커리어에도 영향을 줄 수 있고.

그러나 그럴수록 후회가 밀려든다.

‘이 작품만큼은 정말 하고 싶은데...’

권서준의 작품.

배우의 숨은 욕구를 자극하는 대본이었다.

아쉬움에 밤이 깊어가는 줄 몰랐다.

“후우.”

한숨을 내뱉으며 다시 소주잔을 든다.

술을 마시기 위해 고개를 젖히는데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궈, 권 작가님?”

뜻밖에도 권서준 작가였다.

“합석해도 될까요?”

“네? 아, 네. 물론이죠.”

“여기 계실 줄 알았습니다.”

권서준 마치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말투로 맞은편에 앉았다.

“그만두신다면서요?”

권서준의 한 마디에 이경민의 표정이 굳는다.

“...정 감독이 말했나요?”

“아뇨. 아까 촬영 현장에서 봤습니다.”

“...”

그 자리에 있었다니.

이경민은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치부를 들킨 듯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럼, 어떻게 된 상황인지도 아시겠네요?”

“네, 어느 정도는요.”

이경민은 다시 술잔을 넘겼다.

그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솔직히 처음엔 올란 감독이 말하는 모든 걸 받아들였습니다. 감독이니까, 영화판에서는 그게 맞으니까 들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더는 못하겠더군요.”

말을 끝내자마자 다시 술잔을 기울였다.

유일한 진통제는 술인 양 빠른 속도였다.

“아무리 영화가 감독 놀음이라지만 연기에 대한 관점이 너무 다르더군요. 그래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올란 감독에게는 모르지만 권서준을 향한 사과만큼은 진심이었다.

그런데 그때, 가만히 듣고 있던 권서준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흘러나온다.

“연기에 대한 관점이 다르다라... 과연 그 문제 때문이었을까요?”

“...네?”

뭔가 알고 있는 권서준의 질문 아닌 질문.

그 질문 하나에 이경민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

늦은 밤.

와이즈 출판사 편집실.

권서준에게 전화를 걸던 주상진 편집장은 이내 들고 있던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벌써 주무시나?’

슬쩍 시간을 확인해 보니 벌써 11시가 넘어있었다.

기쁜 소식을 전달하려다 보니 시간도 잊고 말았다.

‘그나저나 믿기지 않는군.’

주 편집장이 바라보는 건 최근 한 달간 권서준 작가의 작품 판매량이었다.

그야말로 폭발적인 수치.

매대에 꽂아놓으면 곧바로 나가는 수준이었다.

15년 넘게 와이즈 출판사의 출판만 전문적으로 하는 인쇄소 사장의 입에서도 감탄을 터트릴 정도였다.

‘정말 엄청난데요? 이거 예전에 한창 출판계가 호황이었을 때보다 더 바빠요.’

엄살이 아니었다.

정산 프로그램에 매일같이 올라오는 숫자가 객관적인 지표를 말해주고 있었다.

‘벌써 35만 부야.’

요즘 같은 불황기에 10만 부면 대박이라고 말할 수 있는 수준.

그런데 이미 권서준 작가의 작품은 목표량의 세 배를 훌쩍 넘어있었다.

‘더 놀라운 건 아직도 판매량이 줄고 있지 않다는 거지.’

어느 정도 팔리고 나면 완만하게 판매량이 줄어드는 게 자연스러운 현상.

그러나 권서준 작가의 작품은 오히려 소폭 상승하며 롱런하는 중이었다.

편집장으로서 이보다 더 뿌듯한 순간은 없었다.

작품을 보는 안목, 그리고 마케팅, 셀링 포인트까지 정확히 봤다는 뜻이니까.

‘물론 권 작가의 작품 자체가 대단한 거지만.’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권서준은 이미 다음 작품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것도 세상을 아주 미치게 만들 작품을 말이지.’

동화.

처음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보자마자 무릎을 탁 치며 역시 권서준이라고 외칠 수밖에 없었던 작품이었다.

‘그 작품이 세상에 나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리고 문득 잊고 있던 일정하나가 떠오른다.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상.

국제아동청소년도서협의회(IBBY)에서 2년마다 아동문학에 기여한 글 작가 1명과 그림 작가 1명을 선정하는 상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년이 딱 2년째 되는 해지?”

일정을 확인하던 주 편집장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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