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 addiction - 탐닉, 중독 (2)
169.
***
-드라마 OST 관련해서 몇 가지 상의 드릴 게 있어서요.
OST 선택은 전적으로 감독의 권리였다.
굳이 작가에게 물어볼 이유는 없었다.
“OST요?”
내가 되묻자 정 피디가 말을 잇는다.
-네, 곡 몇 개를 받았는데 올란 감독님이 작가님의 의견을 물으셔서요. 아무래도 이 작품의 전체적인 이미지를 가장 잘 아시는 분이니까 생각이 궁금하신 가 봐요.
그런 의도라면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누구보다 작품에 어울리는 OST를 선택하고 싶은 사람이 바로 나였으니까.
“그런 거라면 언제든 환영이죠. 혹시 토요일 어떠세요?”
-오, 토요일이면 마침 회사에 갈 일 있어서 좋을 거 같아요.
정은미 피디는 요즘 거의 촬영장 근처에서 숙식하는 중이었다.
외국인 감독과 스태프들과의 공동 작업이기에 여러모로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은 모양이었다.
“그럼 제가 타이거 스튜디오로 갈게요.”
-아이고, 아닙니다. 제가 작가님 작업실로 가도 돼요.
“괜찮아요. 저도 오랜만에 하 본부장님하고 진 CP한테 인사도 드릴 겸 가려고요.”
-아... 감사합니다. 매번 이렇게 배려해주셔서요.
“별말씀을요. 그럼 그날 뵙겠습니다.”
나는 주말 오후로 약속을 잡고 전화를 끊었다.
‘아마 지금까지 받은 OST가 아쉬운 모양이야.’
만일 마음에 드는 곡이 있다면 굳이 나한테까지 의견을 구할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OST 얘기가 나오니 자연스럽게 한 사람이 떠오른다.
***
사방이 앨범 포스터로 둘러싸인 작업실.
손주환 작곡가는 진지한 표정으로 코드 구성을 다시 살폈다.
‘이 정도면 된 거 같은데?’
코드 구성을 어느 정도 마친 후 마우스를 움직여 베이스 소스를 선택한다. 이런저런 악기와 소리를 고르면서 베이스를 어떻게 찍을지 각을 본다.
작곡가라고 하면 건반을 온종일 칠 거 같지만 사실 키보드와 마우스질을 더 많이 하는 게 현실.
‘좋아. 이 정도면 됐어.’
구성을 마친 손주환 작곡가가 뻑뻑한 눈을 잠시 비비다가 이내 스페이스 바를 누른다.
동시에 모니터 위로 타임 테이블이 지나가고 본인이 직접 구성한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정면 좌우에 높이 세팅된 스피커에서 둥둥거리는 베이스와 함께 리듬이 시작된다.
행진곡 느낌의 흥겨운 리듬.
그러나 어딘가 심심한 느낌이 들었다.
‘흠, 너무 단조로운데?’
손주환 작곡가는 멜로디를 몇 개 더해본다. 코드 구성도 다시 해보지만 표정은 그다지 밝아지지 않는다.
“흠. 이게 아닌데...”
팔짱을 낀 채 모니터를 가만히 바라본다.
답답함에 이를 딱딱 부딪쳐 보지만 괴로움만 더해갈 뿐이다.
‘수수한 악기들로 동심을 상징하되 전체 톤은 무겁게 가자라...’
숨을 길게 내쉬며 다시 한번 권서준 작가의 말을 되뇌어 본다. 분명 그 당시엔 알 것 같았는데 쉽게 나오진 않았다.
‘그때 말씀하신 게 캐스터네츠와 리코더였지?’
같은 캐스터네츠라고 해도 어디에 들어가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심사숙고하며 작업하지만 이번에도 원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후우...”
조건반사적으로 긴 한숨이 흘러나온다.
그러나 이대로 포기할 순 없었다.
할 수 있어.
아니 해내야 해.
자신에게 기대하는 권서준 작가.
그 기대는 손주환 작곡가에게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다시 해보자.’
에너지 드링크 한 캔을 단번에 비우고는 스트레칭을 한다.
손주환의 눈동자에 또다시 열정이 떠오른다.
***
며칠 뒤.
황태규는 이삿짐센터를 불러 월셋집 짐을 옮겼다.
“수고하셨습니다.”
막 마지막 상자를 실은 트럭이 출발하자 휴대폰이 울린다.
권서준이었다.
-이사 잘하고 있어?
“네, 형. 조금 전에 짐 다 뺐어요.”
-그래. 잘했네. 참, 오늘 내려간다고 했지?
“네. 짐 정리 대충 끝나면 내려가려고요.”
-잘 다녀와. 일정 괜찮으니까 충분히 쉬다 오고.
“그럴게요, 형. 고마워요.”
전화를 끊은 황태규는 가만히 휴대폰을 바라봤다. 배려심 깊은 권서준의 말에 또다시 고마움이 솟구친다.
“후우.”
숨을 크게 내뱉으며 월셋집을 바라본다.
“내가 드디어 여길 떠나는구나...”
짐을 다 뺀 지금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황태규는 계단을 내려가 자신이 살던 방안을 가만히 둘러봤다.
짐을 빼고 나니 곰팡이로 얼룩진 벽면이 흉물스럽게 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겉으로는 괜찮아 보였지만 속은 엉망진창 망가지고 있던 집. 어쩌면 자신의 모습과도 같았다.
‘꿈을 좇는다는 핑계로 열심히 달렸지만 그 속은 지워지지 않는 얼룩으로 엉망이 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자신도, 하나뿐인 동생과 할머니와의 삶도 놓치지 말아야 했다.
‘모두 서준이 형이랑 현웅이 형 덕분이야.’
두 사람의 도움으로 이 시궁창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일 년 만에 시골에도 다녀올 수 있었고.
황태규는 서둘러 작업실로 돌아가 이삿짐 정리를 서둘렀다.
사실 짐이랄 것도 별로 없어서 정리를 마치자마자 고속 터미널로 향했다.
티켓을 예매하고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건다.
신호음이 채 몇 번 울리기도 전에 동생이 전화를 받았다.
-형!
한껏 올라간 목소리.
황태규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떠오른다.
“어, 성환아. 형이야.”
-응. 근데 무슨 일이야? 원래 이 시간에 전화 못하지 않아?
동생의 말 대로였다.
원래 대로면 상차 아르바이트 끝나고 항상 잠들어 있던 시간이니까.
“그때 형이 말한 거 기억하지? 계약했고 했던 일.”
-응.
“그래서 이제 상차 알바 안 하거든. 덕분에 시골도 내려갈 수 있을 거 같아.”
-어? 그럼 언제 오는데?
“음. 아마 두 시간쯤 뒤에?”
-정말? 진짜야?
“응. 이제 차 탈 거야.”
-야호!
신이 난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로 들려온다.
형을 만난다는 말에 잔뜩 들뜬 동생을 보며 마음이 괜스레 먹먹해진다.
“그래. 내려가면 형이 맛있는 거 사줄게. 참, 뭐 먹고 싶어?”
-음. 돈가스!
“또.”
-또?
“그래, 먹고 싶은 거 다 말해봐. 눈치 보지 말고.”
-그럼 피자! 아, 치킨도!
동생의 입에서 줄줄이 음식이 흘러나온다.
한껏 신이 난 동생의 목소리를 듣던 황태규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다.
‘이젠 다 사줄 수 있었으니까.’
그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넉넉해지며 행복감이 밀려온다.
“또 없어?”
황태규는 미소를 지으며 또 물었다.
-또? 음...
동생은 잠시 고민에 잠긴다.
아마 좋아하는 메뉴는 다 나온 듯 보였다.
그러나 뭐라도 더 사주고 싶은 마음에 황태규는 가만히 동생의 대답을 기다린다.
그래.
고작 해봐야 저녁 메뉴를 고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별거 아닌 대화에 시골로 향한 2시간이 꽤나 즐거울 것 같았다.
‘이게 행복이지.’
황태규의 입가에 또다시 미소가 떠오른다.
***
오후 여섯 시.
황태규가 나와 장현성을 초대한 단톡방에 사진 한 개를 올렸다.
소박하지만 정성 가득 담긴 한식.
그리고 피자와 치킨이 한가득 놓인 상이었다.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 저녁 식사 맛있게 하세요!]
사진을 보던 장현웅이 미소를 짓는다.
“이야. 맛있겠다. 군침 도네.”
뒤이어 사진 한 장이 더 올라온다.
할머니와 동생과 함께 찍은 사진.
시선을 사로잡는 건 황태규의 밝은 표정이었다.
“태규 자식, 얼굴이 환해졌네?”
“그러게. 역시 마음이 편해야 표정도 밝아진다니까.”
“너처럼?”
“어?”
내 말에 장현웅이 거울을 바라본다.
턱을 매만지며 제 얼굴을 보던 녀석이 이내 피식 웃는다.
“하긴 나도 많이 폈지. 고맙다. 이게 다 네 덕이야.”
“고맙긴 나도 덕분에 꽤 쏠쏠하다고. 이번 달은 특히.”
“아, 맞다. 오늘이 입금 날이구나?”
장현웅이 서둘러 계좌를 확인한다.
웹툰의 원고료와 굿즈 판매만으로도 꽤나 큰 금액이 들어와 있었다.
“와우, 추 팀장님이 굿즈 판매가 많이 늘었다던데 정말 대박이네. 이번 달도 아주 행복하군.”
금액이 마음에 드는지 장현웅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진다.
“그렇게 좋냐?”
“그럼 좋지. 솔직히 말하면 돈도 돈인데 다른 게 더 좋아.”
“다른 거?”
내가 묻자 씨익 웃던 장현웅이 휴대폰을 내민다.
“이거 봐라.”
장현웅이 내민 건 바로 부친의 SNS 프로필이었다.
큼지막하게 박혀 있는 웹툰 표지.
게다가 그 아래 짧은 메시지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제가 왓슨 작가 아버지입니다.]
“웃기지? 이게 다 친척들 보라고 일부러 이러는 거야. 솔직히 그동안 친척들한테 무시 많이 당했거든. 이제야 기를 펴신 거지.”
장현웅의 얼굴에 자연스럽게 미소가 떠오른다.
부모님의 자랑이 되었다는 게 얼마나 큰 기쁨인지 느껴본 덕이었다.
“참, 그나저나 넌 얼마나 들어왔어?”
내 웹툰 수익이 궁금한지 장현웅이 넌지시 묻는다.
“몰라. 웹툰 관련 금액은 다 후원 계좌로 들어가서.”
“후원 계좌?”
“어. 우리처럼 힘든 얘들을 위해서 조금이라도 나누면 좋을 거 같아서.”
“헐... 진짜? 언제부터?”
“음. 웹툰 계약했을 때부터?”
“대, 대박...”
장현웅이 놀란 듯 나를 바라본다.
사실 후원을 하고 있다는 건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애초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행동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도 내가 꽤 큰 금액을 지속해서 후원하고 있는 이유는 두 번의 인생을 통해 깨닫게 된 진실 하나 때문이었다.
필요 이상의 돈은 불행의 원인이 된다는 것. 오히려 그 돈을 적절한 곳에 흘려보냈을 때 행복의 이유가 된다는 것.
‘그리고 나 역시 그런 도움을 받았으니까.’
그렇게 나는 내가 번 돈의 일부를 보냈다.
그 시절 나를 도왔던 그 후원자들처럼 아낌없이.
***
다음 날, 오후.
나는 영화 OST 관련 미팅을 위해 타이거 스튜디오를 찾았다.
정은미 피디를 기다리며 잠시 휴대폰 통화 목록을 확인했다.
오늘 미팅의 명목은 분명 OST였지만 그 안에 담긴 숨은 의도를 알 수 있었다.
나는 문득 한 달 전 휴대폰에 찍힌 이경민 배우의 부재중 전화가 떠올랐다.
“어? 작가님 벌써 오셨어요?”
그때, 노트북을 들고 오던 정 피디가 나를 보며 환하게 웃는다. 얼굴엔 피곤이 가득했지만 열정 가득한 표정은 오히려 밝아 보였다.
“안녕하세요, 피디님. 오랜만에 뵙네요.”
장현웅이 인사를 하자 정 피디가 웃는다.
“그러게요. 두 분 다 오랜만에 뵙네요. 요즘 워낙 정신이 없어서 연락도 통 못 드렸네요.”
“그거야 촬영 시작했는데 당연하죠. 분위기는 어때요?”
“아... 뭐, 괜찮아요. 몇 가지 사소한 문제가 있지만 딱히 큰 문제는 아니라서요.”
순간 정 피디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물론 나는 그 찰나의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문제가 생긴 게 분명하군.’
물론 내가 예상했던 시나리오라 크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참 OST 선정 때문에 보자고 하셨죠?”
나는 자연스럽게 오늘 미팅의 목적을 상기시켰다.
“아, 네. 일단 예상 테마곡은 15곡 정도 돼요. 그중에서 메인 테마곡 포함 3곡이 나온 상태고요.”
“생각보다 곡이 빨리 나왔네요?”
“올란 감독님과 처음 미팅했을 때부터 의논했거든요. 발 빠르게 준비해야 작품 분위기도 더 녹일 수 있을 거 같아서요.”
마치 오른발 왼발처럼 두 사람의 합은 기대 이상으로 잘 맞아 보였다.
여러모로 다행이었다.
“한번 쭉 들어보시겠어요?”
“좋죠.”
“잠시만요.”
정 피디는 OST 목록을 내밀고는 이내 음향 시스템에 연결해 곡을 틀었다.
헐리웃 유명 OST 제작자와 일본의 유명 피아니스트가 참여한 곡이 차례차례 이어진다.
극 중 윤정호의 비열함을 극대화하는 테마곡과 피도 눈물도 없는 혈육 간의 암투를 보여주는 의미심장한 곡까지.
하나같이 작품의 분위기를 잘 녹인 곡들이었다.
“서준아, 이 정도면 엄청 훌륭한 거 아니야?”
옆에서 듣고 있던 장현웅이 속삭인다.
음악을 잘 모르는 녀석이 듣기에도 수준급 실력을 보여주는 곡들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주인공 윤서원의 테마곡이었다.
엄청 웅장하고 무거운데, 이건 윤서원의 캐릭터의 일부분만을 표현한 느낌이었다.
“흠.”
“왜요? 별로인가요?”
“나쁘진 않아요.”
“좋지도 않다는 말씀이시죠?”
나는 고생한 정 피디의 노고를 알기에 표정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하아. 사실 그래서 작가님을 찾아온 거예요. 윤서원의 테마곡이 좀 애매한 느낌이라서요. 그런데 역시 작가님의 생각도 저희랑 같네요.”
잠시 고민하던 정 피디가 이내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음악 감독님이랑 얘기해서 다른 곡을 더 받아볼게요. 가장 중요한 테마곡이니까 더 고민해보는 게 맞는 거 같아요.”
정 피디가 메모를 정리하며 작곡가 명단을 다시 확인한다. 그러나 마땅한 대안은 없는 듯 표정이 좋지 않았다.
나는 그런 정 피디를 위해 슬며시 입을 열었다.
“혹시, 괜찮다면 제가 작곡가 한 명 추천해도 될까요?”
“정말요? 당연히 되죠.”
정 피디가 반색하며 묻는다.
모든 서사를 관통하는 메시지를 담은 부분이기에 특히 중요한 윤서원의 테마곡.
다행히 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작곡가를 이미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