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168화 (168/203)

168. addiction - 탐닉, 중독 (1)

168.

***

“허, 허...”

동화를 읽어가던 정 회장의 눈빛에 놀라움이 비친다.

부모를 잃은 어린 고양이의 이야기.

처음엔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흔한 콘셉트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건 결코 가볍지 않았다.

상처와 독기만 남은 도둑고양이 네로의 모험. 그 과정에서 죽음과 삶, 그리고 존재와 상실에 대한 이야기를 보여주는 내용이었다.

다소 어렵고 무거울 수 있는 주제.

그러나 권서준은 솔직하고, 명료한 표현을 통해 메시지를 보다 쉽게 전달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야기와 주제가 더 선명하게 남는군.’

삶과 죽음.

시작과 끝만 보면 인간의 삶은 낭떠러지로 내달리는 자동차와 다를 바가 없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으로 달려가는 인간의 삶은 새드 엔딩 그 자체니까.’

그래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선 시작과 결과보다는 과정에 중점을 두어야했다.

그리고 그 과정을 너무나 완벽하게 그려내는 게 바로 권서준의 작품이었다.

‘마치 죽음마저 경험해본 사람처럼 작품을 쓰고 있어.’

아들보다 훨씬 어린 청년 작가.

그러나 감히 가늠할 수 없는 사고의 깊이가 노장조차 겸허하게 만들었다.

다만 한 가지 걱정이 든다.

‘이게... 어린아이들한테도 괜찮을까?’

사실 아이를 대상으로 했다고 보기엔 다소 어려울 수 있는 주제들이었다.

물론 정 회장이 고민하는 이유는 손자인 재민이 때문이었다.

어린아이가 과연 이 이야기 안에 담긴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까? 아니면 오히려 더 큰 상처를 주진 않을까 하는 걱정과 고민이 이어진다.

‘메시지를 쉽게 전달하고는 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어른들의 기준인 거니까...’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정 회장이 이내 자리에서 일어난다.

어차피 답은 자신이 아닌 권서준에게 있었다.

‘대체 어떤 생각으로 이런 글을 쓴 걸까?’

기대감과 우려가 뒤섞인 감정.

정 회장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권서준이 있는 곳으로 향한다.

그런데,

손자 재민이와 재민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권서준의 모습이 보인다.

“여기 있었구나.”

정 회장의 목소리에 권서준이 고개를 든다.

“네, 재민이랑 같이 동화를 읽었습니다.”

“그래, 잘했다.”

정 회장의 눈이 재민이를 향한다.

말라버린 눈빛.

아이답지 않은 눈빛이 더욱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어때? 재미있니?”

할아버지의 말에 재민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그 순간, 무표정하던 재민이가 천천히 입을 연다.

“재미있는데... 근데 좀 슬퍼요.”

“그래?”

정 회장이 되묻자 재민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네로는 괜찮은 척하는데 하나도 안 괜찮거든요. 겉으로는 강한 척하지만 속마음은 누구보다 엄마 아빠가 보고 싶고... 그런데 또 그러면 안 되니까 괜찮은 척하고...”

재민이는 네로의 마음 깊숙이 감춰진 엄마 아빠를 향한 숨길 수 없는 그리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

결국 권서준이 그린 네로의 여정은 결국 부모의 온기를 찾기 위한 과정.

지옥과 연옥, 그리고 천국에 숨겨져 있는 부모와의 기억과 의미를 되짚으며 현실에 대해 자각하게 되는 과정이었다.

부모님은 내 곁에 없다.

그러나 내 곁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다.

물리적인 상실과 정서적인 상실의 구분.

그것을 가능케 만드는 게 바로 네로의 이야기였다.

“그래서 너무 슬퍼요. 네로가 너무 불쌍해서...”

그 순간,

재민이의 눈에서 툭하고 눈물이 흐른다.

“...”

정 회장이 놀라서 쳐다본다.

늘 괜찮은 척하던 아이가 눈물을 터트렸다.

그래.

아이는 네로의 여정을 통해 자신의 아픔을 바라봤다.

괜찮아서 아니라 괜찮아야 했기 때문에 슬픈 감정마저 억눌렀던 재민이었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울어도 되는지, 슬퍼해도 되는지조차 모른 채 그저 꾹꾹 눌러 담아온 슬픔이었던 게지...’

가슴 아픈 손자의 눈물.

정 회장은 그런 손자를 따스하게 안아준다.

“할아버지...”

“그래. 울어도 된다. 이젠 울어도 돼...”

할아버지의 목소리에 이내 재민이의 입에서 울음이 터져 나온다.

아이다운 울음.

몇 해를 꾹꾹 눌러 담았던 슬픔이 밖으로 분출된다.

정 회장은 그런 손자를 말없이 토닥인다.

세상에 남은 유일한 혈육.

핏줄이 주는 애틋함에 두 사람의 눈시울이 또다시 붉어진다.

***

재민이는 정 회장의 품에 안겨 삼십 분 가까이 눈물을 쏟아냈다.

시원하게 슬픔을 토해낸 재민이는 이내 울다 지쳐 잠이 든다.

토닥토닥.

아이의 등을 가만히 두드리던 정 회장이 입을 열었다.

“다 컸다고 생각했는데 애는 애인가 보네. 이렇게 우는 건 처음 봤는데...”

잠든 손자의 머리를 넘겨주는 정 회장의 입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아마 많이 힘들었을 겁니다.”

정 회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나도 그렇게 힘들었는데, 이 아이가 오죽했을까...”

목이 잠긴다.

잠시 눈을 감은 채 생각을 정리하던 정 회장이 이내 입을 연다.

“고맙다. 솔직하게 말해서 처음엔 아이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동화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단단히 착각한 모양이야.”

나는 잠든 재민이를 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는 참 여린 존재죠. 하지만 동시에 누구보다 강한 존재입니다. 자기 삶을 살기에 이미 충분히 커버린 하나의 소우주니까요.”

이번엔 정 회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약하면서 강하고, 어리지만 성숙한 것이 인간이지. 한없이 역설적인 존재... 그런 존재가 바로 인간인 것을...”

깊은 깨달음에 정 회장은 숨을 크게 고른다. 그리고 이내 자연스럽게 나를 바라본다.

“서준이 너한테 이렇게 또 마음의 빚을 지게 되는구나.”

정 회장의 얼굴엔 어느새 평온함이 깃들어 있었다.

“참, 작품은 언제쯤 완성이 될 거 같으냐? 이런 작품은 빨리 세상에 보여 줘야 해. 그래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가 될 테니까”

“두세 달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두세 달이라... 그럼 아마 12월쯤이겠군.”

날짜를 계산하던 정 회장이 잠시 생각에 잠긴다.

“아주 멋진 크리스마스 선물이 되겠어.”

정 회장의 얼굴엔 벌써부터 기대하는 마음이 가득했다.

***

오늘 예정된 술자리는 다음으로 미뤄졌다.

오랜만에 곤히 잠든 재민이 때문이었다.

나는 집으로 향하며 정 회장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멋진 크리스마스 선물이라...’

선물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들뜬 정 회장의 표정이 떠오른다.

어린 손자에 대한 고민을 덜어낸 정 회장의 얼굴은 평온 그 자체였다.

내가 만든 세상이 다른 누구에게 위안이 됐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게도 내 마음도 평온함에 이르게 만들었다.

여기서 재미있는 건 어린 재민이의 마음을 보듬어준 위로의 시작은 바로 내가 겪은 상처라는 점이었다.

결국 어떤 책이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건 작가가 대상 독자를 향한 정확한 인식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나를 제대로 이해 못하는 사람이 나를 위로할 순 없으니까.’

다시 말하면 위로는 결국 이해받는 행위에서 얻어질 수 있는 상호작용.

나는 나의 상처를 통해 재민이의 상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재민이는 묵은 감정을 쏟아낼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그 시절도 마찬가지였다.

유럽 전역을 휩쓸었던 역병 페스트.

그 어두운 그림자로 인해 내 삶은 말 그대로 엉망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내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든 역병조차도 희극적 요소로 사용했다.

작품 「십이야」(Twelfth Night)에서는 사랑에 빠진 사람을 역병에 비유한 적도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어떻게 그렇게 빨리 역병에 걸리고 만 거지!]

순간 푹 빠져버린 사랑을 빠르게 전염되는 역병에 빗대어 표현했다.

나의 삶을 뒤흔들었던 역병조차 그 시대를 관통하는 유머가 되는 아이러니.

그로 인해 나는 슬픔에 빠진 사람들에게 재미와 웃음, 그리고 행복과 짧은 위로를 선사했다.

그래.

인생에서 역병처럼 찾아오는 아픔이 있다.

역병처럼 피할 수 없는, 그러나 받아들이고 견뎌내야만 하는 아픔의 요소들.

그러나 그것조차 예술로 승화시키고, 또 다른 의미로 전달해야 하는 게 바로 작가의 사명이었다.

세상의 거룩한 소명을 위해서?

아니, 그게 바로 작가가 살아가는 법이었다.

‘그로 인해 내 영혼 역시 구원을 받게 되니까.’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재민이의 모습을 보자마자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바라보며 한없이 어둠 속으로 빠져들던 그때의 기억.

‘그래서 이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었지...’

나는 여전히 먹먹한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독인다.

‘뿌듯하군.’

이제 남은 건 작품을 잘 마무리하는 일뿐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약간의 준비가 필요하긴 했다.

***

다음 날.

나는 주 편집장의 요청으로 미팅을 가졌다.

“출판 일정을 12월로 계획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일정에 차질 없게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말라고도 말씀하셨고요.”

아마 간밤에 정 회장의 지시가 떨어진 모양이었다.

“네, 다만 작품이 빨리 나오려면 제 일정도 중요하지만 그림 작가의 환경이 더 중요할 거 같습니다.”

“아, 물론입니다. 안 그래도 회장님 지시로 황 작가님이 작업하시기 편한 곳을 준비했습니다.”

역시 일 처리가 만족스러웠다.

정 회장이 원고를 확인한 뒤로 모든 일정이 빠르게 추진되고 있었다.

나는 이 기쁜 소식을 황태규에게 직접 전달했다.

“네? 정말요? 제 작업실을요?”

“어. 숙식도 되니까 지금 있는 월셋집에서 나와도 될 거야.”

“...”

황태규는 믿기지 않는 듯 말을 잇지 못한 채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너무 감동하지 마. 그만큼 부려 먹을 거니까.”

황태규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거야 당연하죠. 진짜 손목이 부서져라 그릴 게요...”

“부서지면 안 되지. 오래 두고 써먹어야 하는데.”

내 농담에 황태규가 애써 미소를 짓는다.

“참, 그리고 이거 받아.”

나는 미리 준비해온 돈 봉투를 내밀었다.

“...이건 뭐예요? 원고료라면 지난번에 주셨잖아요?”

“동생 본지 오래됐다며? 이제 제대로 일 시작하면 석 달 정도는 꼼짝도 못 할 텐데 그전에 한 번 다녀와야지.

“혀, 형...”

“잊지 마. 성공한 뒤에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다짐도 좋지만 그 과정을 함께 하지 못하면 그것 역시 큰 불행의 원인이 되니까. 너도 알다시피 잃고 나면 되돌릴 수 없는 게 가족이잖아.”

내가 깨달은 단 하나의 진실이었다.

물론 부모를 일찍 여읜 황태규 역시 내 말을 한 번에 이해했다.

“...네.”

내 말에 황태규가 진지한 얼굴로 대답한다. 마음에 새기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

시간을 빠르게 흘렀다.

부커상 1차 후보가 발표된 지도 3주가 지났다.

고작 1차 후보.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나는 많은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작가님, 판매가 엄청 늘었고, 해외 판권 구매 요청도 늘고 있습니다.”

하이든 에이전시의 고용수 부장은 나를 위해 전담 직원을 배치할 정도였다.

물론 언론사에서 연이은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지만 그건 미뤘다.

‘아직은 때가 아니니까.’

그림 작업도 원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시골을 갔다 온 황태규는 이전보다 훨씬 더 의욕적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조바심이 사라진 덕이야.’

해도 안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사라지고, 노력하면 노력한 만큼 결과를 낼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그 덕분에 온전히 작품에만 집중할 수 있는 거지.’

그래.

모든 것이 순탄했다.

물론 한 가지 내 마음에 남은 문제도 있었다.

바로 한창 촬영 중인 영화 문제였다.

자연스럽게 몇 주 전 받은 이경민의 부재중 전화 한 통이 떠오른다.

지이잉.

그때, 휴대폰이 울린다.

발신자는 다름 아닌 정은미 피디였다.

-작가님, 이번 주에 시간 괜찮으시면 한번 뵐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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