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 vulnerable - 연약한 (7)
167.
***
“그래, 이거지!”
뒤편에서 명단을 확인한 존 대표가 외친다. 물개박수까지 치며 기뻐했다.
“역시 권 작가가 해주는군. 좋아, 아주 좋아.”
얼굴이 활짝 핀 존 대표가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후우. 그나저나 이번에 권 작가의 작품을 놓쳤다면 송영도 교수 때처럼 정말 크게 후회할 뻔했어.”
존 대표의 말에 올리버 편집장의 표정이 순간 진지해진다.
사실 이토록 권서준 작가의 작품에 집중했던 이유는 송 교수의 작품을 놓쳤던 경험 때문이었다.
부커 인터내셔널 상까지 받은 작품을 본인 손으로 걸렀다는 사실에 수년째 마음이 무거웠다.
‘회사와 나 모두에게 엄청난 기회를 날려버린 거니까.’
그래서 이번만큼은 그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처음 권서준 작가의 작품을 추천한 것도, 런던 북페어에서 별도 부스를 마련한 것도, 오늘의 작가에 선정되도록 최선을 다한 것도 모두 그런 이유 때문이었으니까.
“같은 실수를 반복하면 안 되죠. 이번엔 그때와 다를 겁니다.”
결연하게 의지를 다지는 올리버 편집장을 보며 존 대표가 흐뭇하게 웃는다.
“그래, 좋아. 한번 큰일 내보자고.”
올리버 편집장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사실 누구보다 권서준 작가의 수상을 바라는 사람이 바로 올리버 편집장 본인이었다.
권서준 작가의 작품이 높이 올라갈수록 본인의 가치를 세상에 증명하는 거였으니까.
‘뭐든 할 거야. 권 작가의 수상을 위해서라면.’
굳게 움켜쥔 주먹.
올리버 편집장의 굳은 결심이 보이는 행동이었다.
***
와이즈 출판사 회장실.
“후우.”
정 회장의 입에선 연신 한숨이 흘러나온다.
최근 상태가 더 안 좋아진 손자 재민이 때문이었다.
“녀석, 좋은 선물을 가져오면 좋으려만...”
마음은 기대하고 있지만 동시에 걱정도 앞선다.
그만큼 마음 문을 닫은 손자의 상태가 심각한 탓이었다.
요즘엔 잘 웃지도 않고, 부르지 않으면 대답도 잘 하지 않았다.
그나마 할아버지한테는 곧잘 대답하는 편이었지만 그마저도 겉도는 대화가 대부분이었다.
‘그 속에 어떤지 알 수 없으니 더 미치겠군.’
간절한 마음에 모든 기대는 권서준에게 향했다.
물론 동화 한편으로 해결될 리는 없지만 그나마 정 회장이 기대볼 수 있는 언덕은 권서준 뿐이었다.
‘녀석은 언제나 예상치 못한 감동을 주니까...’
정 회장이 간절히 주말을 기다리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똑똑똑.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비서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회, 회장님. 급히 보고 드릴 게 있습니다.”
딱 봐도 급해 보이는 얼굴.
평소와 다른 모습에 정 회장이 묻는다.
“왜? 무슨 일인데?”
“그게... 권서준 작가가 부커상 후보에 올랐답니다.”
“...”
순간 정 회장은 눈을 깜빡였다.
물론 권서준의 부커 인터내셔널 후보는 정 회장 역시 예상하고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시기적으로 불가능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부커 인터내셔널 상은 이미 5월에 발표가 났잖아. 내년은 돼야 후보가 나올 텐데?”
“그게... 회장님께서 직접 보시죠.”
비서가 설명 대신 태블릿 PC를 내민다.
커다란 액정엔 기사 하나가 떠 있었다.
[권서준 작가, 부커상 1차 후보에 올라...]
“이건...”
비서의 말대로 분명 후보 명단에 권서준의 이름이 있었다.
그런데도 정 회장은 믿기지 않는 듯 몇 번이나 반복해 읽었다.
정 회장이 놀란 이유는 하나였다.
“....왜 이름이 여기 있는 거지?”
권서준의 이름은 부커 인터내셔널 상이 아닌 부커상 후보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
다음 날 아침.
연이어 기사가 쏟아졌다.
[권서준 작가, 부커상 1차 후보에 올라...]
_________
권서준 작가의 차기작 당신이 머물던 자리에 대한 국제적 관심이 심상찮다. 특히 이번에 후보에 오른 부커상은 송영도 작가가 수상한 부커 인터내셔널이 아닌 영미권 작가를 대상으로 한 부커상 후보로 한국인 최초로 그 의미가 남다르다는 평가가 주를 잇고 있다.
_________
부커상 1차 후보 발표.
최종 후보도 아니었지만 그 여파는 컸다.
모두 부커 인터내셔널 후보가 아닌 부커상 후보였기 때문이었다.
지이잉.
기사가 발표 나고 얼마 되지 않아 송영도 교수에게서 전화가 온다.
-서준아, 너 기사 봤니?
전화를 받자마자 인사도 생략한 채 다급히 묻는다.
게다가 평소와 달리 다소 들뜬 목소리.
“네, 조금 전에 현웅이가 보내줘서 확인했습니다.”
-하아, 정말 축하한다. 니가 이렇게 해주는구나.
누구보다 한국 문학계의 미래를 염려하는 송 교수답게 진심 어린 축하를 건넨다.
“아직 멀었죠. 이제 고작 1차 후보인데요.”
-그래도. 1차 후보에 들어갔다는 게 중요한 거지. 전 세계 작가들이 모두 거기에 들고 싶어서 안달 난건데.
하긴 송 교수의 말도 맞았다.
수많은 작가들의 꿈의 무대가 바로 부커상 후보였으니까.
“아무튼 감사합니다. 기대해주신 만큼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으니까 적당히 해. 니가 너무 열심히 하면 내 입장에선 더 자괴감 들 거 같으니까.
엄살떠는 송 교수의 칭찬에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잠시 뒤,
전화를 끊자마자 또다시 휴대폰이 울린다.
이번엔 주상진 편집장이었다.
-작가님! 후보에 오른 기념으로 인터뷰 요청이 쇄도하고 있습니다. 혹시 괜찮으시면 한국 프레스센터에서 기자간담회를 진행할까 하는데 괜찮을까요?
런던 북페어 이후 연이어 날아온 문학계 희소식에 기자들 역시 주목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아직은 시기상조였다.
‘최종 후보도 아니고, 수상한 것도 아니니까.’
아직 아무것도 아닌 상황에서 필요 이상으로 시선을 끌 필요는 없었다.
“죄송하지만 기자 간담회는 다음에 하고 싶네요.”
나는 자연스럽게 거절하는 쪽을 선택했다.
-아, 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제가 너무 신이 나서 그만 성급하게 생각했나 봅니다.
주 편집장은 연륜답게 내 의도를 빨리 알아차렸다.
-그럼 보도 자료를 위해 질문 몇 가지 보내드릴 테니까 작성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물론 그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했다.
“네, 보내주시면 바로 작성해드릴게요.”
-감사합니다. 그럼 그렇게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는 잠시 두 사람과의 통화 내용을 되뇌었다.
후배의 후보 선정을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는 송 교수도, 내 작품을 위해 자기 일처럼 발 벗고 나서는 주 편집장의 모습도 든든했다.
“이번 삶은 제법 잘살고 있는 모양이야.”
커피 한잔과 즐기는 아름다운 한강의 풍경.
행복감이 밀려드는 아침이었다.
***
런던에 위치한 부커 재단.
후보 선정 위원회는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몇 달에 걸친 작품의 판매와 평가.
여러 예술가들의 의견이 종합적으로 모인 후보 명단이 조금 전 발표된 탓이었다.
대부분, 아니 단 한 명만 빼고 모두 영어권 작가로 선정된 상황.
당연히 그 한 명이 된 권서준 작가는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실제로 「당신이 머물던 자리에」의 반응이 뜨거웠다.
런던에서 발행된 초판 인쇄 분량은 전량 매진됐고, 이미 5쇄에 들어간 상태. 게다가 유럽 전역을 넘어 최근엔 아시아와 아프리카 쪽의 출판도 이뤄내고 있었다.
그야말로 엄청난 성공.
후보로 선정된 작가들 중 단연코 돋보이는 기록이었다.
물론 권서준 작가의 성적은 부커 재단의 이사장인 매튜 저먼에게도 전달되었다.
“예상대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이 대로면 아마도 1차 후보를 넘어서 유력한 수상자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평소 신중하기도 유명한 로건 위원장이 확신에 찬 보고를 올렸다.
“흠.”
듣고 있던 매튜 이사장이 얕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요? 그렇게 대단하군요.”
애매한 매튜 이사장의 뉘앙스에 로건 위원장은 의아한 듯 쳐다봤다.
“혹시, 다른 의견이 있으신가요?”
“아, 그런 건 아닙니다. 다만 작품뿐만 아니라 작가에 대한 부분도 검증해야 할 필요가 있을 거 같아서요.”
“...네?”
로건 위원장의 되묻고 말았다.
평소 기준과 다른 내용이었다.
로건 위원장으로서는 당연히 의아한 부분이었고.
“하지만 작가론적 관점보다는 작품에 집중하는 게 우리의 오랜 방침 아니었나요?”
“물론입니다. 다만 검증이 부족한 작가를 덜컥 수상자로 발표했다가 문제가 생기면 부커상의 명성에 먹칠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건 그렇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다행히 최종 수상전에 작가의 자질을 충분히 검증할 적절한 기회가 있으니까요.”
매튜 이사장의 입가에 의미 모를 미소가 떠올랐다.
***
늦은 오후.
나는 정 회장을 만나기 위해 집을 나섰다.
약속 시간은 6시.
정 회장 댁에 도착하자 정 회장이 나를 맞이한다.
“또 일을 냈더구나. 어떻게 잠잠하다 싶으면 이렇게 뻥뻥 터트리는지.”
무엇에 관한지가 생략되었지만 말하는 정 회장도, 듣는 나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이제 시작이죠. 좋은 성과가 있으면 좋겠네요.”
“부담 가질 거 없다. 결과까지 좋으면 금상첨화겠지만 후보에 오른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니까. 암, 그렇고말고.”
정 회장은 선배 문학인으로서 후배에게 따뜻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차를 마시며 대화를 이어간다.
그러나 이내 정 회장이 입은 연다.
“그래, 그때 말했던 작품을 잘 되고 있고?”
정 회장이 넌지시 동화에 대해 묻는다.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듯 조심스러운 목소리.
분명 주 편집장에게 중간보고를 받았을 텐데도 직접 묻는 걸 보면 그만큼 내 작품에 지대한 관심을 두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이렇게 애타게 기다리는 이유를 알고 있기에 나 역시 주저 없이 대답했다.
“네, 사실 오늘 찾아뵌 이유도 그 작품 때문입니다. 초고가 나왔는데, 가장 먼저 보여드리고 싶어서요.”
내 대답에 정 회장의 눈이 커진다.
“벌써? 그림 작가도 구한 거냐?”
“네, 이미 구했습니다.”
“누구지?”
“황태규라고 제가 예전에 알던 동생입니다.”
“...”
유명한 작가가 아니라서일까.
정 회장의 얼굴에 살짝 근심이 드리운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 작품에 딱 어울리는 그림체니까요.”
“그래. 네가 어련히 했으려고.”
말은 그렇게 해도 노파심을 쉽게 가라앉지 않는 듯 보인다.
그래.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이럴 땐 직접 보여주는 게 훨씬 나은 방법이었다.
“한 번 보시겠어요?”
정 회장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가져온 원고 한 부를 정 회장에게 내밀었다. 아직은 초고에 불과해 낱장으로 된 원고.
“...”
내 원고를 바라보는 정 회장의 표정은 비장하기까지 했다.
그만큼 작품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의미였다.
이내 주름진 정 회장의 손이 책장을 넘긴다.
‘충분히 감상할 시간을 줘야겠지.’
나는 정 회장이 편히 작품을 읽을 수 있게 잠시 밖으로 나왔다.
천천히 정원을 걷는데 자연스럽게 재민이가 떠오른다.
‘오늘은 안 보이네?’
나는 산책도 할 겸 집 주변을 돌며 재민이를 찾았다.
그런데 그때, 저 앞 대청마루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재민이의 모습이 보인다.
요새 애들답지 않게 책을 읽는 모습이 대견해 보였지만 얼굴을 보니 마음은 딴 데 간 듯 보였다.
‘그저 우울한 기분을 회피하기 위한 노력인 건가?’
생기가 넘쳐야 할 아이의 모습이 아니었다. 책을 읽고 있는 눈빛도 텅 비어 있었고, 표정은 더없이 어둡기만 했다.
마치 내 어린 시절을 연상시키는 재민의 모습이 내 마음을 아리게 만들었다.
나는 천천히 다가가 재민이 옆에 앉았다.
“재민아, 안녕?”
“어? 안녕하세요.”
책장을 넘기던 재민이가 인사를 한다.
지난번보다 훨씬 더 가라앉은 표정이 마음에 걸린다.
“이야, 우리 재민이는 책을 좋아하나 보네?”
내 질문에 재민이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다.
“네, 뭐 볼만 해요.”
대답과 달리 책장을 넘기는 재민이의 표정은 무료해 보였다.
말투도 표정도, 한 달 전보다 훨씬 더 안 좋아 보이고, 마음 역시 단단히 닫힌 것처럼 보였다.
이럴 때 무턱대고 대화를 이어가는 건 그다지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나는 조금 다른 방법으로 재민이와의 대화를 이끌어가기로 했다.
“재민아, 그럼 이책도 한 번 읽어볼래?”
나는 재민이를 위해 가져온 원고를 내밀었다.
가만히 보던 재민이가 책이란 말에 약간의 흥미를 보인다.
“이거 그림책이에요?”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
책과 나를 번갈아보던 재민이가 이내 첫 장을 넘긴다.
제일 먼저 묵의 농도로 표현된 고양이 네로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낯선 그림체 때문일까.
재민이는 첫 장에서 꽤나 오랜 시간 동안 주인공 네로를 바라본다.
“고양이가 특이하게 생겼네요?”
혼잣말처럼 내뱉고는 이내 다시 책장을 넘긴다.
한 장, 두 장, 세 장...
처음엔 심드렁했던 재민이의 표정이 점점 진지해지기 시작한다.
“...”
휘릭휘릭휘릭.
잠시 뒤,
재민이는 말하는 것도 잊은 채 책에 푹 빠져버렸다.
생기 잃은 녀석의 눈빛을 사로잡은 건 바로 내가 만든 세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