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 vulnerable - 연약한 (6)
166.
***
딴다딴다딴따딴다딴다딴다딴다따랑.
휴대폰 너머로 익숙한 피아노 리듬이 영롱하게 들린다.
와이즈 출판사 정영만 회장의 컬러링.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익숙한 멜로디였다.
바다르체프스카가 작곡한 소녀의 기도(The Maiden's Prayer).
‘한국에는 바다르체프스카라고 알려졌지만 사실 원래 발음은 봉다제프스카지.’
폴란드어 특수 문자 발음이 잘못 표기되어 생긴 오류였다.
채 세 마디가 연주되기도 전에 정 회장이 전화를 받는다.
-그래. 서준아.
휴대폰 너머로 정영만 회장의 목소리가 들린다.
전화를 받은 정 회장은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다급해 보였다.
“회장님, 이번 주에 찾아뵙고 싶은데 시간 괜찮으실까요?”
-우리 권 작가님하고의 약속인데 물론이지. 당장 이번 주 주말도 괜찮고.
“그럼 토요일에 찾아뵙겠습니다.”
-그래, 좋지. 그때 보자고.
나는 정 회장과의 약속을 잡고 전화를 끊었다.
문학계의 거장인 정 회장의 주말 스케줄이 한가할 리 없었다.
그런데도 그 모든 스케줄을 미루고 나와의 약속을 우선순위로 잡았다.
‘아마 재민이 때문이겠지.’
자연스럽게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정 회장의 얼굴이 떠오른다.
핏줄을 향한 애틋함.
자연스럽게 좀 전에 들은 정 회장의 컬러링이 떠오른다.
봉다제프스카(badarzewska)의 소녀의 기도.
피아노 학원을 한 번이라도 다녀본 사람이라면 모를 리 없는 유명한 곡.
그러나 곡의 유명세에 비해 작곡자 봉다제프스카에 대해 전해지는 내용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어린 시절, 피아노 연주에 가능성일 보인 봉다제프스카는 일찍부터 선생님을 통해 피아노를 배웠다.
그러나 선생님은 봉다제프스카의 손가락이 너무 굵어서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될 수 없다고 단정 짓는다.
어린 나이에 충분히 좌절할 법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고, 결국 피나는 연습 끝에 세계적인 러시아의 피아니스트 루빈시테인에게 연주 실력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이 맞는 걸까?
얼마 뒤 결혼까지 한 그녀는 딸을 위해 그 유명한 ‘소녀의 기도’를 작곡한다.
그래. 우리가 흔히 접하는 동화 속 이야기라면 이때부터 행복한 삶이 이어져야 했다.
그러나 그녀의 삶은 동화가 아닌 현실이었다.
‘고작 24살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지.’
채 꽃피우지 못하고 져버린 삶.
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신상에 대한 자료마저 사라져 그녀의 흔적은 희미하기만 했다.
‘하지만 자식에 대한 사랑만큼은 여전히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지. 바로 그녀의 곡을 통해서.’
내가 이번 동화에 집중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사람은 사라져도, 사람이 남긴 작품은 영원히 남아 세상을 울리니까.
그게 내가 글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
며칠 뒤.
끊임없이 이어지던 장마도 주춤하고 모처럼 해가 떴다.
어느덧 달력은 앞자리가 7로 바뀌었고,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나는 모처럼 갠 날씨에 엄마와 함께 집 근처 뒷산을 올랐다.
집 뒤편 산책로를 따라 뒷산을 크게 도는 코스는 엄마와 내가 주로 이용하는 코스였다.
도심 속에 위치한 작은 산이었지만 언제나 그렇듯 흙길이 주는 감촉은 마음을 사그락거리게 했다.
“후우, 좋다.”
오랜만에 산을 오른 엄마는 살짝 지친 표정으로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좀 쉬었다 갈까?”
“그럴까?”
나는 엄마를 모시고 벤치에 앉아 챙겨온 생수를 건넸다.
“고마워, 아들.”
물을 받은 엄마가 미소를 짓는다.
어느새 눈 옆에 짙게 자리 잡은 주름이 눈에 띈다.
살아온 세월의 깊이.
동시에 오랜 시간 감당해온 고생의 흔적이기도 했다.
“왜 그렇게 봐?”
“우리 엄마에 언제 이렇게 주름이 늘었나 해서.”
“나이 들면 다 늙는 거지. 새삼스럽게.”
“그냥. 엄마가 그동안 고생 많이 했잖아. 그걸 아니까 마음이 이상한 거지.”
피식 웃던 엄마는 이내 산 아래를 보며 말을 잇는다.
“고생이야 했지. 그런데 등산이라는 것도 그렇잖아. 올라올 땐 참 힘든데 문득 돌아보면 여기까지 온 내가 대견하고, 뿌듯하고. 힘들었지만 그래서 더 애틋해. 이런 게 산다는 거 아니겠어?”
엄마의 말에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힘들게 올라야 멋진 경관을 볼 수 있는 등산처럼 우리의 삶엔 부정적인 것들이 오히려 빛나는 것을 만들어 낼 때가 있었다.
‘이야기도 마찬가지지. 주인공에게 고난이 있어야 감동도 만들어지는 법이니까.’
상처가, 그리고 역경이 또 다른 기쁨의 근원이 된다는 삶의 아이러니.
그래서일까?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린다.
‘재민이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나는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살랑거리는 바람을 음미한다.
힘겹게 산을 오른 자만이 만끽할 수 있는 기쁨.
행복한 오후였다.
***
다음 날.
나는 모처럼 쉬는 겸 그동안 못 봤던 사람들과 약속을 잡았다.
가장 먼저 찾은 사람은 송영도 교수였다.
약속 장소가 연구실인 탓에 나는 오랜만에 대학을 찾았다.
정문을 지나 익숙한 캠퍼스 교정을 가로질렀다. 졸업한 지 꽤 됐지만 여전한 캠퍼스의 풍경은 친숙하게 다가왔다.
그런데 그때, 몇몇 학생이 나를 알아보고 다가온다.
“와, 권 작가님이시죠? 완전 팬이에요!”
“저도요! 작가님 작품 다 봤어요. 소설, 웹툰, 연극까지 다 봤어요.”
흰 노트를 내미는 후배들에게 사인을 해준다.
몇 번을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건 천성이 조금 내성적인 탓일까. 아무튼.
나는 사인을 해주고 송 교수의 연구실을 찾았다.
“이야, 우리 학교의 최고 스타가 왔군.”
송 교수가 너스레를 떤다.
아마 창문을 통해 사인해주는 내 모습을 본 모양이었다.
“잘 지내셨죠?”
“나야 잘 지냈지. 애들 가르치고, 성공한 제자 소식도 틈틈이 들으면서.”
송 교수가 미소를 짓는다.
“참, 이번 주에 회장님 찾아뵙기로 했다면서?”
우리는 대화는 자연스럽게 정 회장의 얘기로 이어진다.
“네. 토요일 저녁에 뵙기로 했어요.”
송 교수가 다소 걱정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인다.
“정 회장님께서 요즘 재민이 때문에 걱정이 많으신 모양이야.”
부모의 죽음으로 너무 빨리 커버린 아이.
그러나 그 속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나도 그랬으니까.’
갑작스럽게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세상이 무너진 기분이었다.
엄마의 헌신적인 사랑으로 그나마 잘 넘어갔지만 어린 시절의 어두운 모습은 아버지의 부재에 대한 잔재였다.
하물며 부모를 모두 잃은 재민이의 경우 그 상실감이 더 클 터.
“선생님은 어떠세요? 집필 중이시라고 들은 거 같은데요?”
송 교수가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오랜만에 펜을 잡으니 더뎌. 자신감도 많이 떨어졌고.”
엄살과 달리 표정은 밝아 보였다.
원고가 꽤나 잘 나오는 모양이었다.
“기대되네요. 얼른 보여주세요. 독자 입장에서 애가 타네요.”
“그래야지. 보통 독자님도 아니고, 대한민국에서 가장 핫한 작가님의 부탁이니까.”
기대된다는 건 진심이었다.
창작도 즐겁지만 다른 사람의 창작물을 감상하는 것도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였으니까.
잠시 뒤, 나는 또 하나의 창작물을 감상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
두 번째로 찾은 곳은 손주환 작곡가의 작업실이었다.
“아이고, 작가님! 어서 오세요.”
손주환 작곡가 환한 얼굴로 나를 맞이한다.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시죠?”
“그럼요. 몇몇 작품에서 곡 요청을 받아서 작업 중이에요. 다 작가님 덕분이죠.”
뮤지컬 「거장의 숨결」 OST가 대박 난 덕에 얻어진 결과였다.
덕분에 뮤지컬 쪽에선 떠오르는 작곡가로 제법 이름을 알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얼굴도 많이 좋아졌네.
한결 편해진 표정은 보는 사람의 마음도 편하게 만들었다.
“아, 내 정신 좀 봐. 잠시만요. 마실 것 좀 드릴게요. 커피 괜찮으시죠?”
“네, 좋습니다.”
손주환 작곡가가 음료를 준비하는 사이 나는 작업실을 둘러봤다.
몇 달 전에 비해 화초가 늘었다는 것 외엔 이렇다 할 변화는 없었다.
그런데 그때, 조용해진 작업실 어디선가 흥겨운 음악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기본이 된 리듬은 337박수.
피아노가 기반인 일종의 행진곡이었다.
가만히 듣고 있는데 절로 어깨가 들썩여진다.
“응? 이건 뭔가요? 마치 행진곡 같은 느낌인데.”
“아...”
음료를 가져오던 손주환이 쑥스러운 듯 입을 뗀다.
“얼마 전에 갑자기 영감이 떠올라서요. 어릴 때 기억도 나고 그래서 작업 중인데, 지금 의뢰받은 곡과는 분위기가 안 어울려서 그냥 재미 삼아 만들어보고 있어요.”
“한번 들어볼 수 있을까요?”
“아, 물론이죠.”
손주환은 스피커 볼륨을 키웠다.
흥겹고 경쾌한 리듬.
손주환의 말대로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만드는 멜로디였다.
그런데 어딘가 아쉬웠다.
단순한 리듬은 좋았지만 지나치게 밝고 경쾌했다.
‘이거 오히려 역설적으로 어두운 테마를 잡으면 어떨까?’
순간 내 머릿속에서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손 선생님.”
“네?”
“이 곡 말이에요. 피아노 멜로디에 리코더, 캐스터네츠 같은 악기를 넣어보는 건 어떨까요?”
“캐스터네츠요?”
“네, 오히려 아름다운 어린 시절보다는 역설적으로 상처로 가득 찼던 그 시절을 상징하는 쪽으로 콘셉트를 잡는 게 어떨까 해서요.”
“음... 수수한 악기들로 동심을 상징하면서 동시에 전체 톤은 오히려 무겁게 가자는 말씀이신가요?”
“바로 그겁니다.”
“...”
내 말에 손주환이 생각에 잠긴다.
짝.
잠시 뒤, 허공을 바라보던 손주환이 자신도 모르게 손뼉을 친다.
“헐. 그게 좋겠네요. 이거 완전 좋은 생각인데요?”
반짝이는 눈빛을 보니 내 말을 정확히 이해한 모양이었다.
“혹시 이거 완성되면 들어볼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당연히 그래야죠.”
손주환의 얼굴에서 흥분한 기색이 느껴진다.
물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완성본이 궁금하군.’
리듬을 듣자마자 이 곡과 어울리는 작품이 떠오른 탓이었다.
잘만 나온다면 내 작품에 아주 좋은 데커레이션이 될 수도 있었고.
1시간 뒤.
나는 기대감을 품을 채 작업실을 나섰다.
송 교수와의 만남.
손주환 작곡가와의 작업.
‘뿌듯하군.’
발걸음마저 경쾌해지는 만남들.
여러모로 기분 좋은 하루였다.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지.’
내 기분을 더 좋게 만들 사건.
나는 지구 반대편에서 들려올 또 하나의 좋은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
늦은 오후.
런던 피어슨 출판사 본사.
“후우...”
책상 위에 놓인 달력을 보던 올리버 편집장이 깊은 한숨을 내쉰다.
오늘이 바로 부커상 1차 후보 발표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됐으려나...’
발표 시간이 다가올수록 입안의 침이 마른다.
작품성만 따지면 1차 후보 선정은 프리패스라고 생각하지만 문학상이라는 게 명쾌하지 못한 여러 변수가 있었다.
‘생각보다 보수적인 심사위원과 시기, 그리고 작가의 성향까지 따질 때가 있으니까.’
런던 북페어에서 큰 성과를 보였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선정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감에 올리버 편집장은 세차게 고개를 젓는다.
‘아니야. 될 거야. 이게 안 되면 말이 안 되지.’
똑똑.
그때, 노크와 함께 존 대표가 들어온다.
“어떻게 됐나? 아직 발표 안 난 거야?”
“네, 아직입니다.”
올리버 편집장의 말에 존 대표가 머리를 턴다.
“후우. 자신 있었는데 막상 당일이 되니까 초조해지는군.”
존 대표 역시 권서준 작가의 후보 선정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권서준이 부커상 수상을 할 경우 출판사의 입장에서 엄청난 매출 증대를 이룰 수 있으니까.
‘그 첫걸음이 후보 선정인 거고.’
올리버 편집장도, 존 대표도 초조한 얼굴로 시계만 볼 뿐이었다.
그런데 그때,
“펴, 편집장님, 드디어 발표 됐습니다.”
“그래?”
비서의 말에 올리버 편집장이 선 채로 서둘러 노트북 화면을 바라본다.
길게 이어진 후보들.
하나같이 유명한 작품과 작가명.
그 사이, 익숙한 이름과 작품명이 보인다.
[권서준 작가, 당신이 머물던 자리에.]
‘그래, 이거지...’
후보 명단을 확인한 올리버 편집장의 얼굴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