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165화 (165/203)

165. vulnerable - 연약한 (5)

165.

***

‘대단하군.’

권서준 작가의 작품을 읽은 주상진 편집장은 연신 감탄을 쏟아낸다.

스무 장 남짓한 원고.

스토리를 보면 대략 1/5 정도의 분량.

그런데 벌써부터 뒷부분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물론 뒷부분의 대략적인 흐름은 권서준 작가가 보여준 시놉시스를 통해 확인한 상태였다.

‘스토리는 생각보다 직설적이야. 동화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성인에게도 어울리는 작품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 동시에 아이들이 읽기에도 좋았다. 이유는 바로 그림에 있었다.

‘이 몽환적인 그림체가 직설적인 표현을 오히려 더 맛깔나게 부각시키고 있거든.’

매운맛과 단맛.

두 맛이 함께 공존하며 더 매력적인 맛을 내고 있었다.

“대단하네요. 이렇게 직설적인 이야기가 오히려 동화의 매력을 살릴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감탄을 터트리던 주 편집장이 이내 정신을 차리고 권서준을 바라본다.

“솔직히 의심했습니다. 아무리 작가님이라고 해도 동화는 쉽지 않으니까요. 게다가 그동안 하셨던 분야와도 달랐고요. 그런데 완벽한 기우였네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결과물이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그럼 계약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권서준이 묻는다.

사실 물으나 마나 한 질문이었다.

“당연히 해야죠.”

주 편집장의 얼굴이 화색이 돈다.

처음 봤을 때보다 몇 배나.

***

미팅을 마치고 돌아오자 장현웅이 나를 반긴다.

“와, 이거 엄청나다. 처음엔 걱정했는데...”

장현웅은 삽화가 삽입된 결과물을 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절친인 나와 친한 동생인 황태규가 얽힌 일이라 꽤나 마음고생 한 모양.

“정말 고생했다. 이제 좀 쉬어라. 설마 바로 또 차기작 들어가는 건 아니지?”

장현웅이 걱정하는 얼굴로 묻는다.

그러나 내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준비해야지. 글 쓰는 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이니까.”

순간 장현웅의 눈이 커진다.

그러나 이내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젓는다.

“하아... 진짜 넌 못 말리겠다.”

녀석의 입장에선 이해가 안 가는 강행군이겠지만 내 입장에선 당연한 선택이었다.

‘끊임없이 뭔가를 만들어내는 게 내 숙명이니까.’

사실 태어나는 순간부터 끊임없이 움직여야 하는 건 모든 인간의 숙명이었다.

‘가만히 있다는 건 결국 죽은 것과 다름이 없어.’

동화 역시 마찬가지였다.

주인공이 움직이지 않으면 이야기는 죽어버린다. 아니 존재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동화의 시작은 언제나처럼 집을 나서는 것부터 시작된다.

평생의 보금자리.

그 공간에 위험이 찾아오면서 등 떠밀리듯 미지의 세상 속으로 발을 내딛게 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엄청난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공간으로 향한다.

어떨 땐 그 장소가 어두운 숲이 되고, 동굴이 되고,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가 되기도 한다.

이때, 자연스럽게 들 수 있는 의문.

‘왜 모든 이야기는 굳이 위험 속으로 걸어가는 걸까?’

사실 이건 인간의 무의식이 반영된 결과였다.

미지의 영역.

수많은 존재들에 의해 위험을 도사리며, 긴장과 두려움을 놓을 수 없는 곳.

그 공간의 의미는 결국 죽음과 연결되어 있다.

인간의 두려움의 끝인 죽음.

위험이 도사린 험난한 여정.

우리는 그렇게 동화를 통해 죽음을 느끼고, 살아간다.

죽음을 가까이 둠으로써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는 게 참으로 아이러니하지만 그게 바로 인간의 생래적 사고 체계였다.

‘그래서 인간이 역설적인 존재라는 말도 있는 거겠지.’

죽음은 그림자처럼 인간과 뗄 수 없는 일상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삶의 분위기가 의미가 달라지는 것.

‘결국 인생이란 신이 내준 무수한 수수께끼를 천천히 풀어가는 과정일 뿐이야.’

내가 쓴 동화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모를 잃은 네로는 그 슬픔을 해소하기 위해 부모의 죽음을 부정한 채 온 세상을 떠돌아다닌다.

그 과정에서 네로는 자연스럽게 죽음이라는 현상을 받아들인다.

그래.

이 이야기는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겪은 수많은 아이를 위한 위로였다.

아직도 어른이 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을 위한 위로이기도 하고.

‘마치 누구처럼 말이지.’

그리고 이제는 이 기쁜 소식을 그 ‘누구’에게 전해줄 차례였다.

***

[잠깐 볼까?]

권서준이 보낸 메시지는 간단했다.

그러나 확인과 동시에 황태규의 온몸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후...”

원고를 보낸 지 정확히 이틀.

아마도 원고 때문에 만나자는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늦은 저녁.

집 근처 호프집에서 권서준 작가를 만났다.

“어땠어? 작업하면서?”

권서준이 물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황태규가 천천히 입을 연다.

“처음엔 너무 직설적인 느낌이라 동화라는 생각이 안 들었어요. 그런데 형이 한 말을 떠올렸죠. 동생에게 어떻게 전해줬는지 물어보셨잖아요.”

황태규는 맥주 한 모금을 마신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전 그때 동생이 잘 견뎌내길 바랐어요. 그래서 솔직하게 부모님의 사고에 대해서 말했고요. 그 마음을 생각하면서 그렸어요.”

권서준이 고개를 끄덕인다.

“정확해. 내가 네 그림에 원했던 것도 그 부분이었고.”

긍정적인 말.

그제야 황태규의 가슴에 희망이 싹 튼다.

“그럼... 괜찮았나요?”

“괜찮은 정도가 아니지. 오늘 출판사 다녀왔거든.”

“...”

꿀꺽.

황태규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이제는 제대로 결과를 알 수 있었다.

“편집장님이 이거 주시더라.”

권서준이 서류 하나를 내밀었다.

천천히 고개를 숙여 바라보니 뜻밖에도 계약서였다.

“이건...”

“그래. 계약하자고 하셨어. 나도, 너도.”

“...”

그토록 기다리던 소식이었다.

그러나 실감이 나지 않았다.

‘정말로... 내가 계약을 한다고?’

평생 꿈만 꾸던 꿈이었다.

황태규는 믿기지 않는 듯 계약서를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매끈한 종이의 촉감이 손끝에 고스란히 전해진다.

꿈이 아니었다.

지켜보던 권서준이 옅은 미소를 짓는다.

“잘 부탁해. 황 작가님.”

작가라는 호칭이 귓가에 맴돈다.

“혀, 형...”

당황한 나머지 말을 더듬는다.

도무지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얼떨떨하기만 했다.

“뭐해? 계약하기 싫은 거야?”

“그, 그럴 리가요.”

황태규는 얼른 계약서에 서명했다.

권서준이 차분히 알려준 덕에 간인까지 무사히 끝마쳤다.

“...”

서명이 끝났지만 아직도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형... 정말 감사해요.”

뒤늦게 고마운 마음을 표현했다.

그러자 권서준은 미소를 짓는다.

“나도 고맙다. 내 이야기를 빛내줄 그림을 그려줘서.”

말을 저렇게 하지만 이 모든 게 권서준이 만들어준 기회라는 걸 모를 수 없었다.

그런데도 따스하게 말해주는 권서준의 말에 마음이 울컥거린다.

“...”

“고생해. 마무리까지 힘내자고.”

“네... 최선을 다할게요.”

황태규는 애써 마음을 다잡는다.

‘이제 시작이니까.’

계약은 첫걸음에 불과했다.

원고가 완성될 때까지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있었다.

***

계약을 마치고 맥주 몇 잔을 걸친 황태규는 천천히 집으로 향했다.

“후우...”

기쁜 마음에 들이킨 술기운이 기분 좋게 올라온다.

언덕길을 오르던 황태규는 휴대폰을 꺼내 동생 성환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으음. 여보세요?

자다 깬 듯한 동생의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로 들린다.

“잤어?”

-응.

“오늘은 왜 이렇게 일찍 자?”

-할머니가 오늘 늦는다고 해서 TV 보다가 잠들었어. 하암.

식당 보조로 일하는 할머니가 평소보다 늦는 모양이었다.

자연스럽게 시골집 풍경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아마 온 집안의 불을 다 켜놓고 TV 볼륨도 엄청나게 키워놨겠지.

혼자 있는 걸 무서워하는 동생이 무서울 때마다 하는 행동이었다.

그래서 동생의 소원은 세 식구가 다 같이 사는 거였다.

가족이라면 당연한 일이 어린 동생에겐 소원이라는 게 매번 가슴이 아팠다.

“좀만 기다려. 형이 곧 데리러 갈게. 이번에 작품도 계약했거든.”

-정말? 대박! 완전 잘 됐다!

“부모 잃은 도둑고양이 얘긴데, 나중에 보여줄게.”

-응. 근데 분명 잘 될 거야.

확신에 찬 동생의 말.

자연스럽게 궁금증이 인다.

“왜? 넌 이 그림 보지도 못했잖아.”

-에이, 이야기는 몰라도 형 그림은 알잖아. 형 그림은 되게 따뜻하거든. 보고 있으면 기분도 좋아지고.

“...”

내 그림이 그랬다고?

10살 동생의 한마디가 위로로 다가온다.

가족이란 이런 건가?

어린 줄 알았던 동생을 통해 아픈 줄도 모른 채 살아왔던 생채기가 치료받는 기분이었다.

“...너무 늦었네. 어서 자. 또 전화할게.”

황태규는 울컥거리는 마음을 숨기기 위해 서둘러 전화를 끊는다.

‘후우.’

밤하늘을 향해 숨을 내쉬며 감상에 젖는다. 몇 주째 집중했던 그림 작업이 떠오른다.

동생이 말한 따스한 그림.

그러나 그 그림을 더욱 따스하게 만든 건 바로 권서준 작가가 만들어낸 이야기였다.

‘그래. 결국 이 이야기는 나를 위한 동화이기도 했지.’

왜 작품을 준비하면서 마음이 편했는지 알 수 있었다.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아이와 어른 모두를 위한 동화.

상상 속 이야기지만 냉혹한 삶의 진실마저 가슴에 품게 만드는 힘이 담긴 작품이었다.

그리고 그 대단한 작품이 더욱 빛날 수 있게 힘을 실어줄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

‘할 수 있어. 아니, 꼭 해내야 해.’

황태규는 의지를 다지며 주먹을 움켜쥔다.

자신을 믿어준 사람에 대한 감사.

게다가 이번 작품만 잘 해내면 동생의 오랜 소원도 이뤄질 수 있었다.

그야말로 일석이조의 기회.

‘성환아, 좀만 기다려. 형이 데리러 갈게.’

오랜만에 품어보는 희망.

그 감격에 삭막한 언덕길마저 아름답게 보이는 밤이었다.

그리고 정확히 두 달 뒤.

도둑고양이 네로의 초고가 완성되었다.

***

늦은 오후.

정영만 회장의 자택.

“재민아!”

정영만 회장의 부름에 어린 손자가 쳐다본다.

“...”

예전과 달리 재민이는 잠깐 손을 흔들다가 이내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린다.

몇 달 사이 부쩍 말수가 적어진 아이.

정 회장이 시름 깊은 한숨을 내쉰다.

“그래, 재민이한테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정 회장의 질문에 옆에 있던 비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담임선생님 말로는 아이들과 선생님 앞에서 부모님의 죽음을 자주 거론한다고 하네요. 역할 놀이를 하면 누군가 죽는 장면을 꼭 반복하고요.”

“...”

정 회장 역시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얼마 전엔 새로 온 가정부에게 하는 말을 직접 들었으니까.

‘아줌마, 우리 엄마 아빠는 죽었어요.’

담담해 보이는 얼굴.

그 얼굴이 더 마음이 아팠다.

물론 전문 상담도 받았고, 진단도 받았다.

‘아이들의 경우 부모를 잃은 후에 철없고 감정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니에요. 그 감정의 크기가 너무 커서 그 감정을 오래 견디지 못하고 회피하는 거죠.’

재민이는 회피하고 있었다.

그것도 몇 년간.

‘저 어린 게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부모가 죽었을 때도 울지 않은 녀석이었다. 오히려 괜찮다며 할애비를 위로하던 철든 녀석이었다.

그런데...

속은 까맣게 타고 있었다.

‘그걸 내가 몰랐던 거지...’

전문 상담에도 도무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무표정해지는 얼굴을 보며 점점 더 마음의 문을 닫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 뿐.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그나마 희망을 품고 있는 건 권서준의 작품이었다.

이야기는 말로 다 하지 못하는 위로를 건네는 힘이 있었다.

정 회장 역시 권서준의 첫 작품으로 위로를 받았고.

‘계약을 한 지가 두 달이 지났는데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는 건가?’

창작 과정을 봤을 때 두 달은 분명 짧은 기간이었다.

그러나 하루가 다르게 어두워지는 손자의 얼굴을 바라보는 정 회장의 마음은 타들어 갈 뿐이었다.

“후우...”

해결하지 못한 고민에 시름이 깊어진다.

지이잉.

그런데 그때, 휴대폰이 울린다.

발신자를 확인한 정 회장의 얼굴에 일말의 희망이 떠오른다.

액정에 뜬 세 글자.

발신자는 다름 아닌 기다리고 기다리던 권서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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