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164화 (164/203)

164. vulnerable - 연약한 (4)

164.

***

동화(童話).

어린이를 위하여 동심(童心)을 바탕으로 지은 이야기를 지칭하는 분류.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초기의 동화는 잔혹할 수밖에 없었다.

‘일종의 경고인 셈이니까.’

아이들에게 겁을 줘서 일련의 행동을 예방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특히 설화를 바탕으로 한 그 시절의 동화는 더욱 잔인하고 잔혹했다.

그나마 동화 작가로 유명한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이 주인공의 시련을 이겨내는 과정을 아름답게 부각시켜 지금의 동화 형식과 가장 가까운 모습을 만들어냈다.

물론 안데르센 역시 과거 설화의 영향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울 순 없었고, 자신의 우울한 인생과 콤플렉스를 투영한 탓에 초기작들의 경우 비판 받는 내용도 상당수 있었다.

어찌 되었든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

분명 그 시절의 동화는 요즘 시대에 맞는 콘셉트는 아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필요한 요소도 있었다.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아이들이 반드시 깨달아야 하는 인생의 참혹한 진실.

결코 벗어나거나 외면할 수 없는 그 아픔을 보여줄 필요성.

도둑고양이 네로는 그런 의도를 지닌 스토리였다.

물론 나 역시 삶의 잔혹한 진실을 그대로 드러낼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황태규의 그림이 필요했던 거고.

‘내 의도를 알아내야 해. 그러면 내가 왜 너를 택했는지 그 의미도 알게 될 테니까.’

일종의 시험이었다.

내가 나서서 알려주기보다는 시간이 필요했다.

‘찾아내든, 찾아내지 못하든 결국 그 모든 사유의 과정은 작가에게 필수적으로 필요한 부분이니까.’

잠시 기다려야 할 타이밍이었다.

그리고 정확히 한 달 뒤.

황태규가 보낸 1차 원고가 도착했다.

***

한 달에 걸친 황태규의 작품은 기대 이상의 결과를 만들어냈다.

검은 털을 가진 새끼 고양이.

선명한 경계선이 아닌 명암으로 구분되는 그림체.

‘마치 저 한강처럼 말이지.’

밤하늘과 동화된 어두운 강물.

반짝이는 가로등 불빛만이 강과 하늘의 경계를 알려주고 있었다.

저 애매한 경계의 구분처럼, 황태규의 그림은 사물과 사물의 경계를 오로지 먹의 농담으로 표현했다.

채색을 최대한 절제한 네로의 세상.

마치 안개 속을 걷는 듯 몽환적이지만 적절한 묘사로 등장 캐릭터의 감정은 섬세하게 드러난다.

아직은 1/4 정도 완성된 그림이지만 이 느낌만 잘 살리면 내 이야기와 잘 어울리는 작품이 나올 수 있었다.

동화책 글과 삽화의 완벽한 하모니.

감초를 넘어 명품 주인공처럼 빛나는 삽화였다.

‘좋아, 아주 좋아.’

흡족한 결과물에 나 역시 기대감이 든다.

이후 펼쳐질 세상을 머릿속에 떠올려 본다.

내가 만든 세상이지만 내가 그린 이미지와 황태규가 그린 이미지는 분명 달랐으니까.

‘혼자만의 창작도 즐겁지만 이래서 합작도 즐거운 거지.’

이제는 독자의 마음으로 기다리면 될 뿐이었다.

[고생했다. 이대로 가보자.]

나는 황태규에게 수고했다는 의미로 메시지를 보냈다.

지이잉.

그때, 휴대폰이 울린다.

황태규인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이번에 윤서원의 사촌 오빠 역할을 맡게 된 연극배우 이경민이었다.

‘경민 배우님이 무슨 일이지?’

그런데 막상 받으려고 하자 이내 전화가 끊어진다.

잘못 걸었다고 하기엔 애매한 시간.

나는 스케줄 표를 확인했다.

[레이디 햄릿 첫 촬영]

그러고 보니 오늘이 첫 촬영 날이었다.

시간을 보니 한창 첫 촬영이 진행될 시간.

‘혹시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

아주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

2시간 전.

춘천에 위치한 아트 갤러리.

백여 명의 스태프가 촬영을 위해 한창 준비 중이었다.

“후우.”

한쪽에서 대본을 확인하던 배우 이경민이 잠시 호흡을 고른다.

안방 무대를 몇 번 두드린 적은 있지만 이렇게 큰 규모의 영화 촬영은 처음이었다.

적당한 긴장감에 온몸의 감각이 예민해진다.

‘내가 잘해야 해. 그래야 후배들에게도 기회가 주어진다고.’

마침 헐리웃 유명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연극계 선배로서 후배들을 위해 좋은 선례가 되어야만 했다.

“걱정할 거 없어. 난 할 수 있어.”

뺨을 두드리며 정신을 집중한다.

다른 건 몰라도 연기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자, 슛 들어갑니다.”

조연출의 외침에 따라 스태프들이 분주해진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어.’

이경민은 호흡을 고르며 입고 있는 고급 수트를 정돈한다.

자신이 맡은 역할을 주인공 윤서원의 사촌 오빠인 윤정호.

욕심과 욕망으로 가득 찬 비열한 인물.

그러나 미워할 수만은 없는 인물이었다.

“레디, 액션!”

올란 감독의 외침에 카메라가 돈다.

그 순간,

이경민의 연기력이 폭발한다.

“야, 그게 말이 돼? 그건 내 자리라고. 잇츠 마인! 눈깔 돌기 전에 당장 여기에 도장 찍어. 뒤지기 싫으면 얼른 찍으라고!”

눈이 충혈될 정도로 목소리를 높인다.

흥분한 윤정호의 감정이 그의 손짓과 발짓에서 고스란히 표출된다.

“날 죽이고 싶어? 그래서 그렇게 보는 거야? 그런 거라면 헛짓거리하지 마.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넌 천 번도 더 죽었으니까.”

분노조절장애가 있는 사람처럼 열탕과 냉탕을 오가는 윤정호의 캐릭터. 그 완벽한 차이를 당차고, 거침없이 연기했다.

‘됐어. 이 정도면 충분해.’

연기를 마친 이경민의 얼굴에도 후련한 표정이 떠오른다.

그런데...

이쯤에서 들려야 할 컷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뭐지?’

잠시 뒤,

이경민이 올란 감독을 쳐다보자 그제야 카메라가 멈춘다.

“컷. 다시 하자십니다.”

조연출의 말에 이경민이 쳐다본다.

‘뭐지? 뭐가 잘 못 된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만큼 완벽했던 자신의 연기였으니까.

이경민은 마음을 다잡고 다시 한번 연기를 쏟아낸다.

그런데,

이번에도 어김없이 같은 반응이었다.

그 뒤도, 그 뒤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가자고 하십니다.”

이쯤 되자 이경민도 참을 수가 없었다.

“대체 뭐가 부족한지 디렉팅을 해주시죠?”

이경민이 날선 반응을 보이자 옆에 있던 통역이 재빨리 그 내용을 전달한다.

그러자 올란 감독이 한마디를 한다.

“저희가 뽑는 건 연극배우가 아닙니다. 다시, 제대로 연기 해주시죠.”

“...”

어려운 표현이 아니었기에 단번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이경민의 머릿속이 하얘진다.

‘지금, 내 연기 톤이 이상했다는 건가?’

확신을 가졌던 자신의 연기.

아무리 베테랑 배우라고 해도 맨탈이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

지이잉.

늦은 오후, 휴대폰이 울린다.

[죄송해요, 형. 밤을 새우고 늦게 자서 이제 확인했네요. 더 열심히 해볼게요!]

황태규가 보낸 메시지였다.

녀석답지 않게 이모티콘으로 대화를 마무리한다.

지난번과 달리 의욕이 엿보여서 마음이 한결 놓인다.

내 눈은 자연스럽게 통화 목록으로 향한다.

부재중 전화 1통.

발신자 : 이경민 배우.

붉은 글씨로 남은 부재중 알림 메시지.

싸한 느낌을 풍기는 메시지를 보며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혹시 그 문제 때문인가?’

자연스럽게 내 머릿속엔 몇 가지 예상되는 문제들이 떠올랐다.

그중에서 가장 유력한 문제는 바로 연기에 관련된 문제였다.

‘톤 때문에 문제가 생길 수 있지.’

연극 연기에 정통한 이경민.

헐리웃 스타일에 익숙한 올란 감독.

두 사람 사이에 이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내 입장에선 즐거운 분란이었다.

어느 정도 예상한 문제였기도 했고.

‘오히려 일찍 부딪친 게 더 좋아. 솔직히 이번 작품이 성공하려면 둘 모두의 고집이 필요하니까.’

아직 나설 필요는 없었다.

정 피디도, 올란 감독도, 배우 본인도 아무 말 없는 상태에서 내가 나서는 거야말로 월권이니까.

그보다는 동화 문제를 더 진행해야 할 타이밍이었다.

‘오늘 두시라고 했지?’

출판 계약을 위한 미팅.

주상진 편집장을 만날 차례였다.

***

와이즈 출판사.

권서준 작가와의 미팅 준비에 한창인 주 편집장은 기쁘면서도 걱정이 앞섰다.

먼저 기쁜 이유는 권서준 작가의 작품 「당신이 머물던 자리에」 판매고 때문이었다.

‘한 달도 안 돼서 벌써 3쇄라고...’

이렇게 빠른 판매량은 근 십 년 이래 보기 드문 성과였다.

연이은 인쇄 요청과 이례적인 판매고에 출판사 영업부서에서도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유일한 걱정의 이유도 바로 권서준 작가 때문이었다.

‘왜 갑자기 동화를 쓰신다는 걸까?’

순문학, 영화, 드라마까지 승승장구하는 천재 작가의 갑작스러운 외도.

동화라는 장르가 생소한 것도 있지만 포텐 역시 기대치가 낮은 장르라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가끔 메가 히트 치는 작품이 있지만 그게 쉬운 건 아니니까.’

권서준 작가의 필력이야 믿지만 언제나 그렇듯 생소한 장르의 도전은 작가에게 기회보다는 위험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괜히 망하기라도 하면 그 여파는 가늠할 수조차 없을 텐데...’

고작 한 번의 실패.

그러나 천재 작가로 승승장구하는 권서준의 이미지에는 치명적일 수 있었다.

‘기대감이 높을수록 돌아올 실망감도 큰 법이니까.’

그러나 정 회장의 지시로 인해 전폭적인 지원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어쩔 수 없지...’

주 편집장은 고민하며 권서준을 기다렸다.

잠시 뒤,

문이 열리며 권서준이 들어온다.

“어서 오세요, 작가님.”

주 편집장은 얼른 얼굴에서 고민의 흔적을 지워내며 권서준을 반긴다.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죠?”

“아, 저야 작가님 덕에 잘 지냈죠. 작가님 소식은 기사를 통해 듣고 있습니다. 영화도 첫 촬영을 시작했다면서요?”

“네, 저야 대본을 다 넘긴 상태라 딱히 바쁠 건 없었습니다. 동화를 쓰느라 바빴죠.”

“...”

동화 얘기에 순간 주 편집장의 얼굴에 근심이 떠오른다.

“제가 동화 쓰는 게 걱정되시나 봐요?”

주 편집장은 순간 아차 싶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권서준 작가는 정확히 주 편집장의 속내를 읽었다.

“...”

잠시 고민하던 주 편집장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이럴 땐 속이는 것보다 오히려 솔직하게 말하는 게 더 나았다.

“...맞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걱정되긴 하죠. 아무래도 생소한 장르고, 행여 실패를 하게 되면 여러모로 아쉬운 결과가 생길 수 있으니까요.”

“그래도 제가 해보고 싶다면요?”

“...”

주 편집장은 잠시 말없이 권서준을 쳐다본다. 무슨 생각인지 알고 싶었지만 좀처럼 그의 생각을 읽을 수가 없었다.

“...저야 할 수 있는 모든 걸 동원해서 도와드려야겠죠. 그게 편집장의 역할이기도 하고요.”

자연스럽게 씁쓸한 미소가 떠오른다.

가만히 듣고 있던 권서준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군요. 조금이라도 편집장님의 마음이 편해지려면 직접 보시는 게 낫겠죠?”

권서준의 말에 주 편집장의 눈이 커진다.

“혹시, 벌써 그림 작가까지 구하신 건가요?”

“네. 다행히 아는 작가가 한 명 있어서요.”

대답과 동시에 권서준이 원고를 내민다.

자신 있는 행동에 주 편집장이 조심스럽게 원고를 받는다.

낱장으로 되어 있는 인쇄물.

아직 스무 장이 채 안 되는 원고였다.

펼쳐보자 수묵화 느낌의 특이한 그림체가 눈에 들어온다.

‘동양화 콘셉트인가?’

동화 콘셉트라고 보기엔 생소한 그림체.

그 그림 아래 짧은 글과 함께 이미지가 펼쳐진다.

‘도둑고양이 네로의 여행기?’

의아했던 주 편집장의 표정이 이내 진지해진다.

작품은 단순했다.

덕분에 단숨에 읽혔다.

그러나 동시에 가늠할 수 없는 깊이가 느껴진다.

‘이건... 쉽게 썼기 때문에 가능한 거야.’

사실 사람들이 많이 착각하는데 원래 쉽게 쓰는 게 더 어려운 법이었다.

‘왜냐고? 너무 쉽게 쓰면 볼품없어 보이고, 뻔해 보이니까.’

인상적인 그림체와 함께 이야기가 술술 읽힌다.

그런데 이상하게 자꾸만 멈칫거린다.

분명 다 읽었음에도 계속해서 읽게 만들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열 살 아이도 읽을 만큼의 쉬운 표현이었지만 계속해서 반복하게 읽게 만드는 이야기였다.

특히 몽환적인 이미지가 자꾸만 뇌리에 남아 생각에 잠기게 만들었다.

‘정말이지 묘한 느낌이군...’

겉으로 보기엔 직설적이고 간단한 이야기. 그러나 곱씹을수록 심오한 고민에 빠지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하아...”

순간 주 편집장의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온다.

미완의 스무 장짜리 동화.

그러나 평소 생각해온 동화와 결이 다른 작품이었다.

아니, 동화에 갖고 있던 편견을 박살 내는 놀라운 작품이었다.

‘동화를 쓰겠다고 하더니... 작품을 썼구나...’

감탄과 함께 밀려드는 확신.

주 편집장은 주저 없이 고개를 들어 권서준 작가를 바라본다.

“작가님, 이번 작품도 대박이네요.”

조금 전과 달리 단단해진 눈빛.

편집장으로서의 촉이 발동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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