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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163화 (163/203)

163. vulnerable - 연약한 (3)

163.

***

겨울엔 차도 올라오기 힘든 언덕배기.

게다가 볕도 잘 들지 않는 반지하 월셋집.

황태규가 이곳에 자리 잡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경사지고 외진 곳이라 월세가 가장 저렴한 편이었으니까.’

여름에 가까워질수록 퀴퀴한 냄새가 올라온다. 겨우내 잠잠했던 곰팡이가 스멀스멀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이번 연도엔 꼭 탈출하고 싶었는데...’

악착같이 노력했지만 올해도 어김없이 이곳에서 여름을 보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한 가지 달라진 점은 있었다.

‘...기회가 찾아왔잖아.’

작년엔 희망도 없이 막연했다면 올해는 분명 달랐다.

이 기회를 잡고 못 잡고는 철저히 자신의 몫이었다.

게다가 오늘 아침 계좌엔 무려 500만 원이라는 거금이 입금되었다.

입금자는 당연히 권서준이었다.

아직 작품을 시작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지원해주는 데엔 이유가 있었다.

‘그림에만 집중하라는 뜻인 거야.’

500만 원이면 월세를 내고도 석 달 가까이 작품에만 집중할 수 있는 거금이었다.

고마운 배려였다.

본인 역시 힘든 시기를 겪어봤기에 아는 경제적인 어려움.

월세, 휴대폰비, 먹을 것만 걱정 안 해도 얼마나 행복한 삶인지 아는 사람만이 해줄 수 있는 배려였다.

처음 받아보는 호의에 감동이 밀려온다.

‘반드시 보답해야 해.’

명치부터 뜨끈해진다.

오랜만에 솟구치는 열정이었다.

황태규는 호흡을 고르며 들고 있는 펜 끝을 매만졌다.

그림동화.

간단히 말하면 그림(삽화)이 들어간 동화를 뜻했다.

‘일반 동화에 비해서 삽화가 책의 절반을 넘을 경우 그림 동화라는 표현을 쓰지만 정식 장르라기보다는 동화의 하위 개념이라고 보는 게 보다 정확한 표현이지.’

황태규가 그림에 처음 관심을 두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꿈과 희망을 주고 아이들의 동심을 자극하는 따뜻한 이야기.

어린 시절 엄마 무릎을 베고 듣던 동화 속 이야기는 황태규의 상상을 자극했다.

‘그때 떠오른 이미지와 상상 속 세계. 그게 바로 내 그림의 근간이 되었으니까.’

지이잉.

늦은 오전에 메일 한 통이 도착한다.

발신자를 확인한 황태규의 표정이 진지해진다.

‘서준이 형이 보낸 메일이야.’

한글 파일로 저장된 메일.

얼마나 대단한 이야기가 있을까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딸깍.

황태규는 숨을 죽인 채 마우스를 클릭해 파일을 연다.

잠시 뒤,

권서준이 보낸 이야기가 눈 앞에 펼쳐진다.

제목 : 도둑고양이 네로.

검은 털에 온몸이 검은 아기 고양이. 밤에 보이는 건 달빛에 반짝이는 눈동자뿐인 네로의 이야기였다.

친구도 없고, 누구도 반기지 않는 도둑 고양이.

그런 네로가 죽은 부모를 찾아 지옥과 연옥, 그리고 천국을 떠도는 모험기였다.

“어? 이건...”

원고를 보자마자 황태규가 눈을 빠르게 깜빡인다.

너무 놀라워서?

그래, 놀랍기는 했다.

극히 정제되어 있으면서도 자유로웠다.

죽음과 동화.

이 모순적인 관계에서 이토록 신선한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정작 황태규를 놀라게 만든 건 전혀 다른 부분이었다.

‘...동화치고는 너무 잔인한 거 아닌가?’

아이들이 보기엔 직설적이고 잔혹한 이야기. 부모 고양이의 죽음, 그 이후에 펼쳐지는 아픔을 날 것 그대로 표현했다.

“형이 제대로 보낸 게... 맞나?”

믿기지 않는 내용에 몇 번이나 확인했지만 분명 권서준이 보낸 메일이 맞았다.

“...”

펜을 놓은 황태규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

며칠 뒤.

오전 작업을 마친 장현웅이 슬금슬금 다가온다.

“왜? 할 말 있어?”

“어? 아니... 좀 궁금한 게 있어서.”

“뭔데?”

내가 묻자 장현웅이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이번에 쓴 동화 말이야. 생각보다 조금... 거시기 한 거 같아서.”

“거시지?”

“그러니까 그게...”

장현웅은 조심스럽게 말끝을 흐린다.

그러나 나는 정확히 녀석이 하려는 말을 알고 있었다.

“표현이 직설적인 거 같다고?”

“...”

잠시 고민하던 장현웅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걱정하지 마. 다 필요한 부분이니까.”

“아, 물론 그렇겠지? 내가 괜한 걱정을 했네. 하하하.”

장현웅이 어색하게 웃으며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그러나 얼굴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의구심이 엿보인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흔히 생각하는 동화와 많이 다른 작품이었으니까.

‘태규 녀석도 마찬가지일 거야.’

메일을 보낸 지 정확히 3일이 지났다.

그러나 아직까지 황태규에게선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엄청 당황하고 있을 녀석의 모습이 보인다. 그러나 글자 하나마저 의도가 담긴 작품이었다.

‘아마 이쯤이면 연락이 올 텐데...’

지이잉.

기가 막힌 타이밍에 휴대폰이 울린다.

역시나 황태규였다.

[서준이 형, 늦게라도 잠깐 뵐 수 있을까요?]

기다리고 있던 연락.

핫 치킨 한 마리를 시킬 타이밍이었다.

***

늦은 저녁.

황태규는 권서준 작가의 작업실을 찾았다.

‘우와...’

엄청난 작업실 규모에 속으로 감탄을 터트렸다.

성공했다는 건 알았지만 작업실 수준만 봐도 얼마나 크게 성공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어서 와. 내 작업실은 처음이지?”

반갑게 맞이해주는 권서준의 모습.

인사를 하는 중에도 마음이 무거웠다.

선입금을 받고, 거의 밥 먹고 그림만 그렸지만 아직도 만족할 만한 수준의 결과물이 나오지 않은 탓이었다.

‘분명 동화라고 했는데 왜 이토록 잔인한 걸까?’

3일 동안 그림만 생각했지만 결과물은 거의 없었다.

가장 큰 문제는 아직도 권서준 작가의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권서준이 마실 것을 내온다.

“너 얼굴이 왜 이렇게 초췌해? 잠을 못 잔 얼굴인데?”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사실 권서준의 말 대로였다.

며칠 동안 맘 편히 자 본 적이 없었다.

그만큼 작품에 대한 고민이 깊었고, 복잡했다.

훌륭한 작가에게 괜히 딴죽을 거는 건 아닐까, 혹은 기분 나빠하는 건 아닐까 고민이 되는 상황.

그러나 홀로 고민한다고 답이 나오지는 않기에 이렇게 찾아올 수밖에 없었다.

‘미안하지만 솔직하게 묻는 게 오히려 나은 방법이니까.’

황태규는 힘겹게 입을 뗀다.

“저...”

꼬르륵.

그런데 그 순간 배에서 소리가 울린다.

‘이런...’

민망함에 눈치를 보는데 권서준은 입을 연다.

“밥은?”

“...네?”

“밥은 먹었냐고.”

“아, 아니요. 아직...”

“다행이네. 치킨 한 마리 시켰는데, 같이 먹자.”

권서준이 식탁 위에 치킨 한 마리를 펼친다.

매콤한 냄새와 함께 코끝을 자극하는 양념치킨이었다.

“...감사합니다.”

“많이 먹어. 우리 삽화가님인데 잘 대접해야지.”

“...”

자기가 뭐라고 이렇게 잘 대해주는 권서준의 모습에 마음이 더욱 무거워진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먹자.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그제야 황태규가 마지못해 치킨 한 조각을 집어 든다.

가장 퍽퍽한 가슴살.

다리를 좋아하는 사람도 많고, 날개도 좋아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가슴살은 그나마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부위.

치킨을 먹을 때조차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황태규의 성격이었다.

“그래, 할 말이 있다고?”

“...”

황태규는 먹던 치킨을 천천히 내려놓는다.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정말 많은 생각을 했지만... 이 작품의 콘셉트를 이해할 수가 없어요. 아무리 고민해도 동화치고는 너무 직설적인 거 같아서요...”

조심스럽게 속마음을 꺼낸다.

권서준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최대한 조심스럽게 표현했다.

그러자 권서준은 담담한 얼굴로 입을 연다.

“동화가 뭐라고 생각해?”

“네? 그거야...”

동화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가 더 궁금했다.

“아이들의 동심을 위한 작품 아닌가요?”

권서준이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 하지만 그게 다라고 생각해?”

“...”

“동화의 순기능에 동심을 지키는 것도 있지. 다만 더 중요한 역할도 있어. 그게 바로 교훈이고.”

권서준은 먹고 있던 양념치킨을 집어 든다.

“달기만 하고, 맵기만 한 건 맛이 덜하잖아. 적당히 매콤해야 더 맛있는 이 치킨처럼 동화도 그런 자극이 필요하거든.”

“그 매운맛이 교훈적 의미라는 건가요? 그래서 직설적으로 표현하신 거고요?”

권서준이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 현실에서 벗어나 뜬구름 잡는 이야기만 하니까 아이들도 동화를 외면하는 거거든.”

“...”

황태규가 생각에 잠긴다.

아직은 완벽히 설득되지 않는 설명.

그 마음을 읽었는지 권서준이 말을 더한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말이야. 성환이한테 뭐라고 해줬어? 그때 마음을 한번 기억해봐.”

순간 훅 들어온 질문이었다.

황태규는 말없이 기억을 더듬는다.

***

집으로 돌아오는 길.

입 안에 남은 매콤함이 자연스럽게 치킨 귀신인 동생 생각을 떠오르게 만든다.

“응. 성환아, 형이야. 밥은 먹었어?”

집 근처에 도착한 황태규는 늦둥이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나야 먹었지. 형은?

어린 동생은 기특하게 형을 챙긴다.

“형은 당연히 먹었지. 참, 오늘 공부 열심히 했다며? 형이 특별히 치킨 한 마리 시켜줄게.”

-진짜? 아싸! 형 최고!

방방 뛰는 동생의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요즘 세상에 치킨 한 마리에 이렇게 행복해하는 아이가 있을까.

그만큼 황태규의 마음이 미안해진다.

“그래, 공부 열심히 하면 또 사줄게. 맛있게 먹고, 또 전화할게.”

전화를 끊은 황태규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온다.

‘그래도 오늘은 서준이 형 덕분에 형 노릇 한번 제대로 할 수 있었네.’

씁쓸하게 웃던 황태규가 이내 계단을 내려간다. 저 아래에 황태규의 보금자리가 있었다.

“하아...”

집에 도착하자마자 한숨이 흘러나온다.

정작 권서준 작가를 만났지만 제대로 된 해답을 들을 수 없었다.

고작 치킨 한 마리를 먹고 돌아왔을 뿐이었다.

‘미치겠네...’

머리를 쥐어뜯으며 권서준의 말을 되뇌었다.

‘동화는 동심만 지키는 게 목적은 아니야. 그보다 더 중요한 역할이 있지.’

대체 그 역할이 뭐냐고.

선문답 같은 대화에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 순간,

권서준의 질문이 떠올렸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말이야. 성환이한테 뭐라고 해줬어? 그때 마음을 한번 기억해봐.’

권서준의 설명은 그게 끝이었다.

황태규는 애써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 난.... 사실대로 말해줬지.’

어린 동생을 위해 최대한 돌려 말했지만 핵심은 정확히 짚어줬다.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더 이상 우리 곁에 없다고.

나중에 더 큰 상처로 돌아오지 않게 분명히 짚어준 것이었다.

‘어? 가만...’

그런데 그 순간 뒤통수가 찌릿 거린다.

‘...내가 왜 이 이야기가 잔인하다고 느낀 거지?’

처음부터 다시 작품을 읽기 시작했다.

분명 죽음에 대한 이야기였다.

부모의 죽음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보여준다.

왜 죽었고, 어떻게 된 건지, 게다가 그 순간에 느낀 감정과 아픔, 상실감에 대해 고스란히 드러냈다.

그래서 자극적인 내용이 없음에도 잔인하다 느껴진 것.

‘잔인하다는 기준은 아이들이 읽기에 너무 솔직한 표현 때문이었어. 나는 아이들을 너무 어리고, 연약한 존재로만 생각했던 거야...’

그들 역시 알아야 하는 세상의 진리가 있었다.

숨긴다고, 가린다고 피해 갈 수 없는 삶의 냉혹한 진실.

그 사실을 권서준은 잠잠히 보여주고 있었다.

‘물론 글 그대로 보여주기엔 적합하지 않아. 직설적인 표현을 아이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부드럽게 묘사해야 하니까.’

탁!

그 순간 황태규는 소리 나게 자기 무릎을 쳤다.

‘아... 그래, 그래서 내 그림이 필요한 거야! 글이 아닌 이미지와 분위기로 아이들에게 그 진실을 전달하고자 하는 거고...’

일종의 완충장치.

직접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아이들의 뛰어난 상상력을 토대로 더듬어 알아가게 만드는 방법이었다.

아이들을 위한 권서준의 세심한 배려가 느껴진다.

“하아...”

감탄이 나온다.

아이들이 앞으로 겪게 될 수많은 역경을 위한 교훈과 가르침에 관한 이야기.

네로의 이야기가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다.

“이건... 그려야 해.”

황태규는 서둘러 펜을 쥐었다.

그리고 잠시 뒤,

권서준이 창조한 이야기가 아름답게 색을 입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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