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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162화 (162/203)

162. vulnerable - 연약한 (2)

162.

***

외출 준비를 마친 황태규는 휴대폰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긴다.

권서준.

예전에 장현웅을 통해 몇 번의 술자리를 가진 적이 있었다.

‘그땐 좀 어둡고, 그런 느낌이었지. 그나저나 왜 나를 보자고 한 걸까...’

물론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괜찮다고 말했지만 마음 약한 장현웅이 권서준에게 어시 자리를 부탁한 게 분명했다.

‘괜한 짓을 해서 형한테 부담을 줬네...’

생각할수록 미안한 마음이 들고 후회가 밀려온다.

‘그래도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만나준다는데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지이잉.

막 집을 나서는데 할머니에게서 전화가 온다.

-태규야, 이 돈은 뭐야?

아까 보낸 돈을 확인한 모양이었다.

“성환이 다음 주부터 방과 후 활동 한다면서? 필요할 거 같아서.”

-인석아, 그거야 할미가 내면 되지.

“할머니가 돈이 어디 있어서?”

-요즘 들판 가면 나물 천지야. 장에 팔면 꽤 쏠쏠한데 뭐 이런 걸 보내?

여든을 앞둔 나이.

굽은 등으로 거친 들판을 헤매며 온종일 품팔이를 해야 간신히 1, 2만 원 벌 수 있었다.

쉬어도 훨씬 전에 쉬워야 할 할머니가 여전히 밭으로, 산으로 돌아다니시는 이유는 바로 두 손자 때문이었다.

“괜찮아. 나 쓸 돈은 있으니까.”

-인석아, 니 성격에 퍽도 그랬겠다.

“진짜야.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마.”

통장이 아닌 텅장 상태였지만 할머니한테 말할 수는 없었다.

-에휴, 미안하다...

할머니는 자식의 죽음마저 본인의 업보로 여겼다.

“또 그 소리 한다. 할머니가 왜 미안해? 우리 생각해주는 건 할머니밖에 없는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좀만 기다려. 내가 곧 호강시켜줄 테니까.”

큰소리쳤지만 그 말을 내뱉는 자신도, 듣고 있는 할머니도 쉽지 않은 일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이 나이에 호강은 무슨. 너희는 너희 인생만 제대로 살아. 그게 할미한텐 제일 행복한 일이니까.

“...”

할머니의 소박한 바람에 명치가 시큰거린다.

황태규는 이를 악문 채 솟구치는 감정을 애써 억누른다.

“...알았어. 나 약속 있어서 나가야 해. 또 연락할게.”

혹시나 떨리는 목소리를 들킬까 봐 서둘러 전화를 끊는다.

“후...”

깊은 한숨이 흘러나온다.

울컥하는 마음에 눈시울까지 붉어진다.

그런데 그 순간,

쏴아아.

갑자기 하늘에서 비가 쏟아진다.

혹시나 해서 준비한 우산을 재빨리 들어 막아본다.

그러나 반쯤 부서진 우산 사이로 비가 들친다.

어느새 한쪽 어깨가 고스란히 젖는다.

‘되는 일이 하나 없네...’

하늘은 흐느낄 여유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정말 야박하다...’

울어야 할 건 자신인데 하늘이 먼저 우는 기분.

“하아...”

황태규는 힘없이 걸음을 움직였다.

***

오전 내내 흐리더니 결국 비가 쏟아진다.

봄비라고 하기엔 늦었고,

장마라고 하기엔 이른 시기.

시원하게 내린 비는 꽃가루와 송진 가루, 각종 먼지까지 싹 씻어내고 나서야 제 일을 마친 듯 그쳤다.

‘상쾌하군.’

날은 아직 어둡지만 창문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바람은 오랜만에 청량했다.

나는 가만히 창가에 앉아 한강을 바라본다.

어제도, 그제도, 그전에도 묵묵히 흐르는 거대한 강줄기.

영겁의 굴레처럼 끊임없이 흐르는 존재를 바라보며 나는 내 머릿속에 흐르는 거대한 이야기 줄기를 떠올린다.

아이를 위한 위로.

그러나 동시에 아직도 어린아이와 같은 어른들을 위한 위로.

아주 간단한 이야기.

그러나 담은 것은 대단한 이야기였다.

겉으로는 담담해 보이지만 그 안에 담긴 거센 물줄기는 몸을 담가봐야만 알 수 있었다.

나는 머릿속으로 이야기에 대한 기틀을 잡았다.

아직 몽글거리는 단계이지만 큰 줄기는 어느 정도 완성된 상태.

‘일단 오늘은 이 정도로 해야겠군.’

나는 잠시 작품 구성을 미뤄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제나 그렇듯 영감이라는 건 한번 바닥을 드러내면 다시 채우기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리니까.

나는 마중물 정도의 영감만 남겨 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참, 강남에서 보기로 했지?’

내 차기작에서 가장 중요한 그림 작가를 만날 차례.

나는 장현웅에게서 받은 동화책을 챙긴 채 약속 장소로 출발했다.

***

강남역 근처.

약속 시간 20분 전.

늦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서두르다 보니 너무 일찍 찾게 되었다.

바짝 긴장한 황태규는 마른 목을 연신 축인다.

벌컥벌컥.

벌써 석 잔째.

“죄송한데 물 한 잔만 더 주시겠어요?”

“네, 여기 있습니다.”

30분도 안 돼서 4번째 물 잔이지만 다행히 알바생은 친절했다.

벌컥벌컥.

또다시 냉수가 마법처럼 사라진다.

“하아...”

알 수 없는 긴장감에 연거푸 물을 마시지만 또다시 입안이 바짝 말라간다.

그만큼 오늘 마주하게 될 사람이 엄청난 탓이었다.

권서준 작가.

편의점 앞에서 함께 캔 맥주를 비워내던 형은 어느새 한국을 대표하는 청년 작가 반열에 올라가 있었다.

띠링.

잠시 뒤,

도어종과 함께 훤칠한 키의 남자가 들어온다.

‘어?’

순간 권서준이 맞나 싶었다.

황태규의 기억 속 모습보다 훨씬 더 커 보이는 체격.

‘키가 컸다기보다는 뭔가 더 당당해졌다고 해야 하나?’

여유 있는 얼굴과 표정.

그리고 자연스러운 행동에선 숨길 수 없는 자신감이 드러난다.

일부러 잘난 척을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갈무리한 고수의 내공이 은연중에 풍기는 기분이랄까?

그에 반해 황태규는 조건반사적으로 어깨가 움츠러든다.

“오랜만이네.”

권서준이 먼저 인사를 건넨다.

예전보다 훨씬 더 부드럽고 편안한 미소.

마치 딴사람이 된 것 같았다.

“아, 네....잘 지내셨죠?”

“응. 잘 지냈지.”

하긴, 권서준이 얼마나 잘 지냈는지는 황태규도 알 수 있었다.

일거수일투족이 뉴스와 신문에 도배되고, 웹툰으로도 볼 수 있으니까.

“참, 네 얘긴 현웅이한테 들었어. 어시 자리 구한다면서?”

“...”

역시 장현웅이 부탁한 모양이었다.

“...네. 근데 제가 피해를 주는 것 같아서 괜찮다고 연락드렸어요.”

“그래?”

되묻는 권서준을 보며 황태규가 고개를 끄덕인다.

“네, 적어도 다른 사람한테 부담을 주면 안 되잖아요. 제 문제는 제가 해결해야죠.”

“흠. 그렇구나.”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던 권서준.

“뭐, 그런 마음이라면 어쩔 수 없지. 알았어. 어시 자리는 없던 거로 할게.”

“...”

쿵.

순간 심장이 떨어지는 듯한 기분이 든다.

뭐지, 원래 기회를 주려고 했던 건가?

갑자기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제 발로 찾아온 기회를 놓쳤나 싶은 마음에 후회가 밀려온다.

그래.

당장 말을 바꿔야 했다.

붙잡아야 했다.

“...”

그러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권서준이 특별히 준 기회.

그러나 도움이 되기는커녕 불필요한 입이 될 수 있었다.

‘내 그림이 웹툰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누구보다 내가 잘 아니까...’

그저 인맥으로 인해 부담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런데 그 순간,

권서준이 뭔가 툭 내려놓는다.

“이건...”

뜻밖에도 그림동화였다.

그것도 작년 안데르센 상을 받은 유명 작가의 작품으로 황태규가 존경하는 작가 중 한 명이었다.

“현웅이가 너 전해주라고 하더라. 이번에 런던 도서전 갔을 때 너 생각난다고 샀던 선물이거든.”

“...”

“현웅이는 잊지 않고 있었어. 네 꿈을. 근데... 넌 잊은 거 같네. 기회가 와도 염치 때문에 거절하는 거 보니까.”

쿵.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속에서 욱하고 일어난다.

“...저도 하고 싶다고요. 그만큼 절박하니까요. 하지만 제 그림은 아무도 원하지 않는다고요. 형도 아시잖아요.”

억울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였다.

그러나 권서준의 반응은 더없이 차분했다.

“그래?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황태규가 멍하니 바라보자 권서준은 출력해온 이미지 하나를 내민다.

“난 생각이 좀 다른데?”

‘저건...’

자신이 포트폴리오로 보낸 학 그림이었다.

“이걸 보면서 참 많은 생각이 들었어. 마치 어린 학이 떠나간 부모를 그리워하는 느낌이었거든.”

황태규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걸 어떻게...”

권서준의 말대로였다.

저 안에 담겨 있는 건 외침이었다.

부모님을 향한 피맺히는 그리움을 담은 그림이었다.

“여백을 통해 주는 수많은 질문이 내 귓가에 들리는 듯했거든. 자연스럽게 이 그림을 그린 이의 생각도 들리더라고.”

“...”

황태규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처음으로 자기 세계를 제대로 인정받은 기분이었다.

그저 알아주기만 했을 뿐인데도 주체할 수 없는 감동이 솟구치기 시작한다.

“게다가 내가 이번에 부탁할 일은 어시가 아니야. 그보다 조금 더 멋진 일이지.”

멋진 일?

“차기작으로 그림 동화를 쓸 건데, 그림 작가가 필요하거든.”

순간 황태규의 눈이 커진다.

권서준이 어떤 작가인가?

차기작에 엄청난 관심이 쏠리는 천재 작가였다.

그의 작품에 그림 작가로 이름을 올리는 것만으로도 꿈에 가까워질 수 있을 만큼 엄청난 기회였다.

‘이게 지금... 꿈은 아니겠지?’

불행에 익숙해진 탓일까.

성큼 다가온 행운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그러나 귓속으로 들어오는 권서준의 목소리는 분명 실제였다.

“내가 생각한 이야기가 있어. 그걸 보내줄 테니, 이번엔 태블릿이 아닌 실제 캠퍼스에 그려줘. 물론 네가 괜찮다면.”

물론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번만큼은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기회였다.

“혀, 형. 저 해볼게요. 아니, 무조건 해낼게요.”

굳은 결심.

반드시 해내야겠다는 열정이 속에서 솟구친다.

“좋아. 잘 부탁한다.”

권서준이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민다.

든든한 악수.

그리고 동시에 황태규는 휴대폰을 꺼낸다.

몇 번의 신호음이 울리고 상대가 받는다.

수신자는 물류센터 작업반장이었다.

“반장님, 저 오늘부터 일 못 나갈 거 같습니다. 네, 죄송합니다. 다음에 꼭 술 한 잔 살게요.”

당찬 표정으로 전화를 끊는 황태규.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처음으로 보이는 생기 어린 얼굴이었다.

***

‘눈빛이 달라졌군.’

바짝 말라 있던 황태규의 눈동자에 어느새 생기가 감돈다.

그 눈빛을 보자 나 역시 창작에 대한 욕구가 솟구친다.

혼자 하는 작품도 좋지만 함께 만들어가는 창작 행위는 내 기대조차 뛰어넘는 기쁨을 가져오곤 하니까.

나는 황태규와 헤어진 뒤 곧바로 작업실로 돌아와 동화 속 이야기를 구상했다.

자연스럽게 내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따지고 보면 내 생애는 흑사병과 함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태어나자마자 창궐한 흑사병.

마을 인구의 1/5이 사망했고, 당시 갓난아기였던 나는 간신히 살아남았다.

온 마을을 할퀴고 지나간 흑사병은 몇 년 뒤에 또다시 나타났다.

열이 나고, 오한을 느끼고.

설사와 구토, 심한 경우 피를 토하며 죽어갔다.

가축을 도살하고,

신에게 울부짖었고, 애꿎은 사람에게 죄를 전가해 죽음에 이르게 했다.

흑사병이 쥐벼룩에 의해 퍼진다는 것을 몰랐던 무지에서 비롯된 비극 아닌 비극.

그 비참한 삶.

비단 어린 시절의 문제가 아니었다.

어린 시절 생존을 위협했던 흑사병은 나이가 들어선 생계를 위협했다.

고작 7년도 되지 않아 3번이나 창궐한 흑사병 때문에 극장은 거의 운영조차 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 어느 때보다 죽음과 가까웠던 시대.

떼어낼 수 없는 슬픔과 고통.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상처.

그 모진 슬픔 속에서 나를 살아남게 만든 것은 바로 상상이었다.

슬픔조차, 지독한 아픔조차, 아니 절망을 선사하는 역병조차 승화시킬 수 있는 것이 바로 문학이었으니까.

그리고 나는 그런 슬픔을 또 한 번 승화시키려고 하고 있었다.

‘과연 황태규가 어디까지 이해할지 궁금하군.’

그림 작가는 글 작가의 관념적인 부분을 채워주면서 보다 선명하고 보다 구체적인 세계를 그려내야 했다.

낡은 의자라고 표현한다면 얼마나 낡았는지, 왜 낡았는지, 어떤 색감인지, 어떤 모양인지까지 떠올려야 하는 그림 작가.

내가 그린 관념적 심상을 누구보다 섬세하게 그려내야 했다.

일종의 작은 시험.

‘지켜보면 알겠지.’

나는 황태규에게 짧은 스토리를 보냈다.

아직은 미완의 세계.

거기에 덧붙인 황태규의 세계가 궁금해진다.

이젠 잠시 기다려야 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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