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 green-eyed - 질투하는 (3)
158.
***
“...”
손자를 바라보던 정영만 회장이 말없이 술잔을 기울인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정 회장의 눈동자에 맺힌 회한과 슬픔, 그리고 고민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아들 내외를 하루아침에 잃은 슬픔을 수년에 걸쳐 애써 감내했다. 괜찮아서가 아니라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애써 아픔을 묻고 매일 매일 조금씩 나아갔다.
그런데,
뒤이어 찾아온 어린 손자의 방황.
그것만큼은 정 회장도 해결할 수 없었다.
‘본인의 마음도 아니고, 어린아이의 마음까지 어떻게 해줄 수는 없으니까.’
이런 상황에서 섣부르게 말을 내뱉을 순 없었다.
어설픈 공감과 이해는 오히려 정 회장을 모욕하는 행위였다. 나는 그저 내 바람을 담은 대답을 건넨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재민이는 잘 이겨낼 겁니다.”
진심 어린 위로에 정 회장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야지...”
애써 웃지만 주름 사이 켜켜이 쌓인 슬픔만큼은 감추지 못했다.
대한민국 문학계를 책임지는 거목.
산전수전을 다 겪은 백전노장이었지만 어린 손자의 상처만큼은 그조차도 어쩌지 못하는 아픔이었다.
“하아, 이거 내가 너무 개인적인 얘기를 꺼내 술맛을 버렸군.”
무거운 분위기를 느낀 정영만 회장이 술잔을 권하며 웃는다.
“참, 이제 뭐 할 계획이냐? 영화 촬영도 잘 진행되고 있다고 들은 거 같은데.”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린다.
“차기작을 구상 중이에요. 아마 곧 시작할 거 같고요.”
“뭐, 벌써?”
정 회장이 놀라 되묻다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하아. 정말이지 마르지 않는 샘처럼 솟아나는 영감이 부럽군. 어디 나 모르게 혹이라도 달고 있는 건 아니고?”
정 회장이 혹부리 영감 이야기를 빗대 농을 던진다.
“혹은 없지만 하고 싶은 얘기는 아직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마 이번 이야기는 재민이에게도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일 거 같고요.”
내 말에 정 회장의 눈이 커진다.
“서준이 너 설마... 동화를 쓸 생각이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홍대 근처 카페.
태블릿으로 그림을 그리던 황태규는 완성한 작품을 바라본다.
웃통을 벗은 남자가 여자를 안고 있는 그림. 연재 예정인 한 로맨스 웹소설의 표지였다.
“후우.”
이틀에 걸쳐 정성스럽게 마무리한 표지. 황태규는 늦지 않게 이미지를 첨부해 메일을 보낸다.
‘간신히 이번 주 생활비는 벌었네.’
사람 둘, 상반신 포함된 표지 작업.
아마추어 작가들의 요청을 받아 진행하는 작업으로 간신히 입에 풀칠하는 수준이었다.
5년 전,
갑작스럽게 사고로 부모님을 여읜 뒤 이런 고민은 일상이 되어버린 오래였다.
틈틈이 상하차 알바까지 병행하면서 버텨보지만 어려운 형편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경쾌한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이야. 태규야 정말 오랜만이다.”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드니 장현웅이었다.
“축하해요 형, 그렇게 노력하더니 진짜 웹툰 작가가 됐네요.”
“나야 친구 잘 만나서 강남 간 거지. 넌 좀 어때?”
“저야 뭐 그렇죠...”
낡은 태블릿을 뒤로 숨긴다.
아마추어 작가들의 웹소설 표지를 그린다는 게 부끄러운 건 아니었다.
‘다만 그리고 싶지 않은 그림을 그리면서 산다는 게 부끄러운 거지.’
입안에서 쓴맛이 돈다.
“자, 그만 나가자. 점심을 부실하게 먹었더니 배고프네.”
앞장서는 장현웅을 따라 카페를 나선다.
멀지 않은 거리.
뜻밖에도 장현웅이 들어간 곳은 고급 한우 집이었다.
“어? 형 여긴...”
슬쩍 메뉴를 훑어보는 것만으로 숨이 턱 막히는 가격이었다.
“야, 야. 오늘은 부담 갖지 말고 먹어. 형이 쏠 테니까.”
“아니, 그래도 여긴 너무 비싼데요...”
좌불안석이 된 황태규와 달리 장현웅은 그사이 이것저것을 시킨다.
“사장님, 여기 한우 모둠 세트 주세요.”
“형, 전 괜찮아요. 삼겹살이면 충분해요.”
“어허, 태규야. 내가 너한테 이 정도 못 사겠냐? 걱정하지 말고 먹어.”
장현웅.
예나 지금이나 참 좋은 사람이었다.
“...”
그래서일까.
그런 장현웅을 바라보던 황태규의 마음은 오히려 무거워지고 있었다.
“그래, 오랜만에 보자고 한 이유가 뭐야?”
순간 황태규의 숨이 막힌다.
그래.
오늘 만남엔 분명 목적이 있었다.
여기 오기 전까지, 아니 전화를 하기 전부터 수십 번도 더 준비했던 말이 있었다.
“...”
그런데 그 말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
마치 가시가 목에 걸린 것처럼 한마디를 내뱉는 게 힘들었다.
“뭔데 그래? 편하게 말해 봐. 무슨 일 있어?”
재차 걱정스럽게 묻는 장현웅.
황태규는 냉수를 한 컵 다 비워내고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게... 부탁드릴 게 있어서요.”
“부탁? 뭔데?”
“혹시... 어시 자리 좀 구할 수 있을까 해서요.”
어시스턴트.
흔히 어시라고 말하며 배경, 채색 등 메인 작가의 작업을 도와주는 일을 담당하는 역할이었다.
따지고 보면 일종의 일자리 청탁이었다.
매일 값싼 표지를 그리는 것으론 시궁창 같은 삶이 달라지지 않으리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형 옆에서 그림도 좀 배우면 좋을 거 같아서요.”
꾹꾹 담아왔던 말을 힘겹게 내뱉는다.
그러자 순간 장현웅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떠오른다.
“아, 그렇구나. 근데 너도 알겠지만 내가 혼자 작업하는 게 아니라서... 괜찮으면 내가 한 번 서준이한테 물어보고 연락 줘도 될까?”
“그야 물론이죠.”
“미안하다. 내가 확답을 주지 못해서...”
장현웅은 오히려 미안해했다.
그 모습을 보니 황태규의 마음이 더 무거워진다.
“아니에요. 제가 더 미안하죠. 오랜만에 만나서 염치없는 부탁이나 하고...”
미안한 마음에 말끝에 힘이 빠진다.
그러자 장현웅이 상체를 바짝 세운다.
“무슨 소리야 인마. 내가 힘들 때 너도 나 많이 도와줬잖아. 그런 소리 말고 그려놓은 그림 있으면 몇 개 보내줘. 서준이한테 한 번 보여주게.”
“네...”
오랜만에 만나는 선배에게 부탁해야 하는 상황.
마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자, 그 얘긴 그만하고 이제 먹자. 소고기라 핏기만 가시면 먹어도 돼.”
장현웅이 손수 고기를 집어 황태규 쪽으로 밀어준다.
치이익.
불판 위의 맛있게 익어가는 고기들.
그러나 그 모습을 봐도 황태규의 입맛은 그리 돌지 않았다.
***
정 회장의 서재.
권서준이 집으로 돌아간 지 꽤 시간이 흘렀지만 정 회장은 여전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참 이상한 녀석이야. 왜 그 녀석만 만나면 나도 모르게 이렇게 무장해제를 당하는 건지...’
좀처럼 꺼내지 않는 개인적인 이야기가 술술 나오는 경험.
인생에서 몇 번 없는 일이었기에 매번 신기할 따름이었다.
똑똑똑.
정 회장이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외출을 마친 비서가 돌아온다.
“그래. 우리 작가님은 무사히 바래다줬고?”
정 회장이 묻자 비서가 대답한다.
“네, 조금 전에 작업실까지 모셔다드렸습니다.”
“작업실? 하아, 녀석. 정말 지치지도 않는 모양이군.”
아마 떠오른 영감을 위해 곧바로 작업실로 향한 모양이었다.
“하아...”
정 회장은 의자에 몸을 깊게 묻으며 긴 숨을 내쉰다.
벌써부터 권서준의 차기작에 대한 궁금증이 일기 시작한다.
‘아마 재민이와 같은 아이를 위한 동화겠지.’
당연한 추론이었다.
그게 아니면 굳이 자신 앞에서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정 회장 자신도 큰 위로를 받았던 권서준의 작품이었다.
그런 작가가 아이를 위한 동화를 쓰겠다고 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설렌다.
‘우리 재민이에게도 큰 위로가 되는 이야기였으면...’
노장의 눈빛엔 어느새 간절함이 떠오른다.
“내일부터 서준이가 집필하는 데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지 지원해줘.”
“네, 알겠습니다.”
정 회장의 입장에선 그 어떤 의사의 처방보다 간절한 권서준의 차기작이었다.
“참, 이틀 뒤에 서준이 인터뷰 있다고 했지? 그건 누가 평론하기로 한 거지?”
“박성규 교수라고 알고 있습니다.”
“...뭐? 박성규 교수?”
정 회장의 말꼬리가 자신도 모르게 올라간다.
박 교수가 어떤 인물인지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왜 하필 그 친구지?”
“주 편집장의 말로는 평론가 중에선 제일 인지도 있는 인물로 선정했다고 들었습니다.”
“흠. 그렇군.”
물론 주 편집장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다만 박 교수와 권서준의 사이가 어떤지는 모르는 모양이었다.
‘내가 듣기로는 서준이 그 녀석, 박 교수와 사이가 좋지 않다고 들었는데 설마 모르고 있는 건가?’
그러나 그럴 일은 없었다.
주 편집장이 권서준에게 말하지 않고 진행할 리가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서준이 녀석한테도 무슨 꿍꿍이가 있다는 건데...’
갑자기 호기심이 동한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정 회장이 이내 비서를 보며 입을 연다.
“그날 내 자리도 준비해 둬.”
“네?”
“나도 그 인터뷰에 참석해야겠어.”
박 교수와 권서준.
두 능구렁이의 대결만큼은 직접 보고 싶었다.
***
‘후... 괜한 부탁을 했어.’
좁은 월세방에 돌아온 황태규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사람한테 피해는 주지 말자.
1인분은 하면서 살자는 게 평소 자신의 지론이었는데, 누군가한테 부담을 준 거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적당히 오른 술기운에 잠을 청해보지만 뒤척일 뿐이었다.
지이잉.
그때, 휴대폰이 울린다.
올해 10살이 되는 늦둥이 동생이었다.
“어, 성환아.”
-형, 언제 내려와?
시골에서 할머니와 단둘이 지내는 동생은 밤이 되면 언제나 전화를 걸어왔다.
“조금만 기다려. 금방 갈게.”
-치이, 지난주에도 그랬으면서.
가슴이 시큰거린다.
지난주뿐만이 아니었다.
그전에도, 그전에도 같은 말만 반복했으니까.
월세조차 버거운 상황에서 시골에 한 번 내려가는 교통비는 더욱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조만간 내려갈게... 좀만 기다려.”
언제나처럼 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응. 빨리 와. 보고 싶어 형.
황태규는 서둘러 전화를 끊으려 했다.
그 사이,
휴대폰 너머로 동생의 마지막 말이 들려온다.
-형, 힘내. 난 형 그림이 세상에서 제일 좋으니까.
끊기는 전화.
그러나 황태규는 휴대폰을 내려놓지 못했다.
‘최고긴... 이렇게 먹고 사는 것도 힘든데...’
황태규는 그동안 그린 자신의 그림을 바라본다.
순수미술.
정작 본인이 그리고 싶은 그림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
게다가 순수미술은 그야말로 인플루언서가 아닌 이상 주목 받기 어려운 장르였다.
돈 좀 있는 집안의 자제가 아니면 쉽지 않았다.
왜냐고?
유명해지고 돈벌이가 될 때까지 버틸 수가 없으니까.
그림에 들어가는 비용.
삶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 비용.
모든 게 다 돈이었다.
그리고 그 금액은 20대 중반의 청년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그래서 취업이라도 하려고 했지만 순수 미술 전공자인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막연하다 못해 막막한 미래.
입술을 곱씹으며 거친 숨을 삼킨다.
염치가 있다면 괜찮다고 말해야 했다.
아까 부탁은 잊어달라고 해야 했다.
“...”
그러나 지금도 고생하는 할머니와 늦둥이 동생을 생각하면... 자신이 뭐라도 해야 했다.
‘미안해. 현웅이 형...’
황태규는 끝내 메일에 그림을 첨부한다.
고작 마우스 클릭 몇 번이면 끝날 일.
그러나 황태규에겐 그 어떤 일보다 힘이 드는 일이었다.
***
쏴아아.
작업실에 도착하자 시원하게 소나기가 쏟아진다.
나는 커다란 통유리 창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아이를 위한 동화.
그러나 내가 그리고 싶은 동화는 어머니의 품처럼 따스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훨씬 더 근원적인 위로를 줄 수 있는 이야기지.’
그리고 그 감성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선 그림이 필요했다.
일종의 그림동화.
내 이야기를 녹일 수 있는 화풍이 필요했다.
몽환적인 느낌.
그리고 그 안에 안개처럼 슬픔과 위로를 담아야 했다.
장현웅은 대안이 아니었다.
그림을 잘 그리지만 지금 내 머릿속에 떠오른 감성을 표현하기엔 화풍이 달랐다.
삐삐삐삐.
그때,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와 함께 작업실 문이 열린다.
장현웅이었다.
“일찍 왔네?”
“응. 일찍 헤어졌어.”
“태규는 잘 지내지?”
별 뜻 없이 자연스럽게 이어진 내 질문에 장현웅은 긴 한숨을 내쉰다.
“하아, 자식. 많이 야위었더라고. 그동안 마음고생을 많이 했나 봐.”
장현웅은 그 말을 시작으로 오늘 황태규와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나 역시 황태규의 어려운 사정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부모님을 여의고 늦둥이 동생의 생계까지 책임지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네 생각은 어때? 지금 어시가 필요한 거야?”
“음. 솔직히 그렇게 필요하진 않아. 배경이나 채색도 직접 하는 게 편한 성격이라 생각해 본 적도 없고. 하지만 모른 척하기엔 마음이 좀 그러네.”
마음이 여린 장현웅은 심각하게 고민했다. 어시 자리를 주는 건 어렵지 않지만 자칫 마음이 안 맞았다가는 더 큰 갈등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무턱대고 도와줬다가는 오히려 서로 상처받을 수도 있고.’
지이잉.
그때, 장현웅의 휴대폰이 울린다.
“흠...”
휴대폰 화면을 보던 장현웅이 얕은 한숨을 내쉰다.
“왜? 뭔데 그래?”
“아, 이거 태규가 보낸 포트폴리오인데... 너도 한번 볼래?”
장현웅은 황태규가 보내온 그림 몇 개를 보여준다.
보자마자 장현웅이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었다.
웹툰 배경을 채색한 이미지인데 웹툰에 그다지 어울리는 기법은 아니었다.
‘뭔가 생각이나 표현법이 묘하군...’
솔직히 이 정도 실력이면 굳이 어시로 채용할 필요성도 느낄 수 없었다.
그런데 그때,
오히려 그 특이한 채색법이 내 시선을 이끌었다.
‘가만, 이건...’
황태규의 채색법은 기존의 웹툰 그림체와 완벽히 다른 느낌이었다.
그 덕에 나는 잊고 있던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현웅아, 태규 전공이 뭐였지?”
“전공? 동양화. 왜?”
그래.
그거였어.
순간,
내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현웅아, 태규한테 연락해서 한번 보자고 해.”
“어? 왜?”
“어시 말고 다른 자리는 가능할 거 같거든.”
물론 어시보다 훨씬 더 좋은 자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