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 green-eyed - 질투하는 (2)
157.
***
3일 뒤에 있을 인터뷰.
박성규 교수가 내 작품에 대한 평론과 함께 인터뷰 제안을 받아들인 건 하나뿐이었다.
‘뭔가 꿍꿍이가 있다는 뜻이야.’
속내가 검은 인간이지만 대중들은 그 속을 알 리 없었다.
물론 나는 박 교수가 무슨 생각하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아마 내 작품을 깎아내리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겠지.’
박 교수와의 악연.
시작은 처음 나한테 공동 집필을 제안했을 때부터였다.
대학원생의 작품에 자신의 이름을 끼워 넣던 게 마치 당연한 권리처럼 생각하던 교수가 처음으로 한 방 맞았으니까.
그것도 학부생한테.
그 뒤로 길고 긴 악연이 이어졌다.
물론 난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속이 뻔하게 보이는 사람이라 신경 쓸 필요도 없었고, 오히려 때때로는 내게 이득이 될 경우도 있었다.
‘주인공을 위해 적절한 악역이 필요한 것처럼 말이지.’
뮤지컬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적절한 경쟁 상대인 「가시리 가시리잇고」가 있었기에 「거장의 숨결」이 더욱 빛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박성규 교수를 통해 전달해야 할 메시지가 있었다.
내 꿈과 계획을 위해 꼭 필요한 메시지.
그런데 상대가 알아서 판을 깔아주니 내 입장에선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다른 일정을 떠올렸다.
사실 박 교수의 일정보다 더 중요한 일정이 여럿 남아있는 상태였다.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은 정은미 피디와의 미팅이었다.
“올란 감독은 다음 달에 방한할 예정이에요. 헐리웃 스태프들과 일정 조율은 이미 끝난 상황이고요.”
“출연진 오디션은 어떻게 진행되나요?”
“일차적으로 저희 쪽에서 선정하고 40명 정도 추린 뒤에 올란 감독과 최종적으로 선택하려고 해요. 아마 다음 달 방한 때 함께 진행할 거 같고요.”
정 피디는 그동안의 진행 상황을 깔끔하게 설명했다.
투자와 제작, 게다가 연출진과 주연 배우가 결정된 상황에서 제작에 속도가 붙었다.
“한 가지 고민되는 건 고성재 역할이에요. 중요한 캐릭터라 고민 중인데 한 번 봐주시겠어요?”
정 피디가 캐스팅 보드를 내민다.
강원준.
유석재.
박도진.
.
.
내로라하는 대한민국 톱배우들의 프로필과 출연료, 그리고 선정 이유가 자세히 담겨 있었다.
첫 번째로 강원준 배우.
연기력은 인정하지만 아쉽게도 이번 역할과 이미지가 맞지 않았다.
유석재, 박도진은 이미지는 제법 잘 어울리지만 연기력이 부족한 편이고.
쭉 이어진 배우 리스트 모두 아쉬운 점이 눈에 띈다.
그런데 그때 익숙한 이름이 눈에 들어온다.
“이경민 씨도 있네요?”
연극 「거장의 숨결」에서 주연을 맡았던 배우였다.
“네, 고성재 캐릭터 자체가 야비하면서 피도 눈물도 없는 역할이잖아요. 연극에서 보여준 이미지를 떠올리면 잘 어울릴 거 같았어요. 물론 연기력도 좋은 편이고요.”
설득력 있는 정 피디의 말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윤서원과 적대적인 역할로 이경민 정도면 괜찮은 선택이었다.
“그렇군요. 제 생각에도 이 중에서는 이경민 배우님이 가장 잘 어울릴 것 같네요.”
“아, 그러면 바로 스케줄 확인해보겠습니다.”
메모하는 정 피디의 손이 바빠진다.
일 처리 속도가 예전에 비해 비약적으로 빨라졌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진다.
“왜 그렇게 웃으세요?”
내 표정을 본 정 피디가 묻는다.
“감독님 포스가 제대로 느껴져서요.”
정 피디가 쑥스러운 듯 웃는다.
“이제 3년 차가 다 되어가잖아요. 물론 다 작가님 덕분이고요. 참, 영국에서의 소식은 들었습니다. 아주 뒤집어 놓으셨던데요?”
기사를 통해 내 이야기를 접한 모양이었다.
“운이 좋았죠.”
“하, 운이 좋아서 영국 본토에서 그렇게 주목받으신다고요? 말도 안 돼.”
눈을 게슴츠레 뜬 채 잠시 나를 바라보던 정 피디가 피식 미소를 짓는다.
하긴 단순히 운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결과가 아니긴 했다.
***
1시간 뒤.
정 피디와의 미팅이 끝나고 장현웅은 권서준과 함께 타이거 스튜디오 본사를 나왔다.
“너 정 회장님 댁에 갈 거지?”
장현웅이 묻자 권서준이 고개를 끄덕인다.
“아마도? 너도 약속 있다며?”
권서준의 물음에 장현웅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응. 오랜만에 태규 좀 만나려고.”
“혹시 황태규?”
“어. 최근엔 바빠서 통 못 봤거든.”
황태규.
문창과로 전과하기 전 미대에서 함께 동고동락했던 후배였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걔한테 신세를 많이 졌잖아. 그래서 오랜만에 몸보신 좀 시켜주려고.”
“그래, 만나서 맛있는 거 좀 사줘라. 은혜는 갚아야지.”
“맞아. 그래서 지난번에 너랑 갔던 그 식당 있잖아. 거기서 소고기 사주려고.”
“소고기? 이야, 역시 통이 커. 금요 웹툰 1위 웹툰 작가님다운 선택이네.”
농담하는 권서준을 보며 장현웅이 피식 웃는다.
“그러게, 이게 아직도 꿈인가 싶다. 내가 후배한테 소고기를 사주는 날이 올 줄이야...”
새삼 성공했다는 게 실감이 나는 상황이었다. 장현웅은 이내 권서준을 바라본다.
“고맙다. 이게 다 네 덕분이잖아.”
“무슨 소리야. 각자 윈윈한 거지. 웹툰이 좀 짭짤해야지.”
권서준이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리며 웃는다.
저 말은 분명 사실이었다.
웹툰의 수익은 생각보다 엄청났으니까.
그러나 따지고 보면 웹툰 수익은 권서준의 수익 중 극히 일부분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굳이 웹툰을 한 건 친구인 자신을 위한 선택이라는 걸 장현웅 역시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늘 고마운 거고.’
물론 모든 건 권서준 본인을 위한 계획이겠지만 그가 그린 그림엔 언제나 친구와 가까운 사람이 함께 있었다.
갑자기 마음이 찡해진다.
장현웅은 괜스레 헛기침하며 애써 감정을 밀어낸다.
“참, 영화 스케줄 말이야. 이제 얼추 끝난 거 같은데 앞으로 뭐할 거야?”
화제를 돌려 묻자 권서준의 얼굴에서 미소가 떠오른다.
“작가가 뭐 하겠어. 차기작 준비해야지.”
“뭐? 벌써?”
권서준은 벌써 차기작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도무지 쉰다는 개념을 모르는 녀석이었다.
“야, 좀 쉬는 게 좋지 않아? 그러다 몸 상할까 걱정된다.”
“무리 안 되게 하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리고 나한텐 글 쓰는 게 가장 재미있고, 즐거운 일이라고.”
장현웅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넌 진짜 천생 작가다...”
피식 웃던 권서준이 이내 시간을 확인한다.
“어서 가 봐. 늦겠다. 이따 보자고.”
손을 흔들며 멀어지는 권서준.
장현웅은 그 자리에 선 채 녀석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본다.
부러울 정도로 뛰어난 재능.
세상 사람들은 저 재능을 부러워했고, 질투했다.
그러나 가까이서 지켜보는 친구의 입장에선 저 재능만큼이나 뛰어난 게 하나 더 있었다.
‘누구보다 자기 일을 사랑하는 저 열정이지.’
재능으로 커버되지 않는, 권서준만의 능력이자 창작의 원동력이었다.
그리고 그 대단한 작가를 옆에서 지켜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엄청난 자극이 되었다.
‘나도 더 노력해야 해.’
장현웅의 표정엔 어느새 다부진 결심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
성북동에 위치한 한옥.
잔디가 깔린 정원은 정 회장의 꼼꼼한 성격답게 아름답게 가꿔져 있었다.
‘여전하시군.’
오랜만에 정 회장 댁을 찾은 나는 그의 정원을 거닐며 잠시 산책을 즐겼다.
어느새 4월의 막바지.
물씬 풍기는 계절의 변화가 기분 좋게 다가온다.
그런데 그때, 한쪽 벤치에 앉아서 무언가 만들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보인다.
‘어? 저 아이는...’
정재민.
정 회장의 하나뿐 손자였다.
교통사고로 죽은 정 회장의 아들 내외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기에 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인기척을 느낀 아이가 나를 보고 벌떡 일어난다.
“어? 안녕하세요.”
영특한 아이는 나를 기억하는지 배꼽 인사를 한다.
“형, 기억하는 거야?”
“그럼요. 집에 찾아오는 할아버지 손님은 두 명밖에 없거든요. 교수 아저씨랑 형이요.”
교수 아저씨라면 송영도 교수를 말하는 모양이었다.
“그렇구나. 잘 지냈어?”
“네, 그럭저럭 지냈어요.”
그럭저럭이라.
애 말투라고 하기엔 어딘가 애매한 뉘앙스가 느껴지는 단어였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과 달리 표정도 조금 어두워 보였다.
‘무슨 고민이 있나?’
나는 자연스럽게 재민이가 만들고 있던 물건으로 눈이 갔다.
작은 손으로 열심히 만들고 있는 건 작은 카네이션이었다.
“이거 재민이가 만든 거야?”
“네...”
“정말 잘 만들었는데?
“...”
칭찬에 순간 웃던 아이의 표정이 이내 그늘이 진다.
고민이 있는 게 분명했다.
“재민아, 카네이션을 이렇게 잘 만들어놓고 얼굴이 왜 그런 거야?”
다정한 목소리로 묻자 재민이가 이내 입을 연다.
“그게... 어버이날이라서 학교에서 카네이션 만들기 하는데, 저는 줄 사람이 할아버지밖에 없어서요...”
시무룩한 아이의 표정과 말투.
나는 단번에 아이의 고민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작은 아이가 감당하는 슬픔의 크기가 가늠되지 않는다.
그때,
비서가 다가온다.
“작가님, 회장님께서 들어오시랍니다.”
“아, 네.”
나는 대답을 하고 다시 재민이를 바라봤다.
재민이는 어느새 밝은 표정으로 바뀌어있었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서둘러 인사를 건네고 쪼르르 멀어지는 작은 체구.
그늘진 아이의 뒷모습이 오랫동안 내 시선을 붙잡았다.
마치 그 시절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
나는 비서의 안내로 안채로 향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정 회장이 술잔을 채운다.
“오랜만이네. 이제 얼굴 보기 어려울 정도로 유명 인사가 됐어.”
너스레를 떠는 정 회장.
언제 봐도 반갑고 친근함이 드는 사람이었다.
“다 회장님 덕이죠.”
“네 덕은 무슨. 요즘은 내가 네 덕을 보고 있는데.”
탁주를 시원하게 들이켠 정 회장이 이내 입을 연다.
“주 편집장한테 들었겠지만 한국에서 네 작품이 아주 난리가 났다. 내 평생 책이 없어서 못 판다는 말을 들을 줄은 몰랐는데, 네 녀석이 이렇게 듣게 해주는구나.”
내 잔을 채워주는 정 회장의 얼굴에서 흐뭇한 미소가 떠오른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술잔을 주고받으며 그간의 이야기를 나눴다.
베네딕트의 연극을 보고 감동받았던 일.
‘오늘의 작가 행사’와 런던 북페어에서 주목받았던 일들을 나누며 즐겁게 담소를 나눴다.
“로건 위원장이 거길 왔다고? 이거 내 가슴이 갑자기 설레는데?”
정 회장의 얼굴에 기대감이 떠오른다.
그 기대감이 무엇인지 알기에 나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하고는 슬쩍 정원으로 시선을 옮겼다.
날이 지기 시작한 저녁.
아직도 정원에서 혼자 놀고 있는 아이가 보인다.
“재민이가 많이 컸네요.”
내 말에 정 회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많이 컸지.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크니까. 후우...”
흐뭇하게 지켜보던 정 회장의 입에서 갑자기 한숨이 흘러나온다.
무거운 고민에 짓눌려 나오는 한숨이었다.
정 회장의 안색을 살피던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신가요?”
내 물음에 잠시 침묵하던 정 회장이 이내 천천히 입을 연다.
“솔직히 이 나이에 무슨 고민이 있겠어? 이만큼 일궈냈으니 나름 만족스러운 삶이지. 게다가 서준이 너 덕에 요즘엔 일할 맛도 나고. 다만...”
잠시 말을 멈춘 정 회장이 힘겹게 입을 연다.
“가족 일은 어쩔 수가 없네.”
“혹시, 재민이 부모님 때문인가요?”
나는 아까 재민이와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물었다.
“...”
잠시 고민하던 정 회장이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아마 부모의 부재를 이제야 느끼는 게지. 부쩍 외로움을 타기에 요즘엔 그림 치료까지 받고 있거든.”
10살 남짓한 나이.
한창 예민한 시기였다.
‘게다가 그 차이가 부모의 부재라면 더욱 힘들 시기고.’
그 어떤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게 바로 가족, 특히 부모와 자식의 그림자였다.
나 역시 그랬다.
아들 햄넷의 죽음은 내 인생에서 많은 것을 달라지게 만들었다.
아버지의 죽음 역시 마찬가지였다.
홀로 우리 남매를 키워낸 엄마 덕에 상대적으로 덜 외로웠던 거지 그 공백은 다른 것으로 채울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글로써 그 여백을 채우려고 했던 거고...’
처음 백일장을 수상한 ‘외계인’이라는 시도, 첫 소설이었던 ‘덧없는 행운이여’도, ‘당신이 머물던 자리에’ 역시 그런 상실감에서 비롯된 이야기였다.
나와 같은 상처를 느낀 사람을 위로하기 위한 창작이 그 첫 시작이었다.
“...”
나는 적절히 올라오는 취기를 느끼며 말없이 재민이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 순간,
오랜 시간 동안 내 마음속에 묻어놨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래, 그 이야기가 있었지...’
그리 길지 않은 짧은 동화였다.
어린 아들에게 들려주고 싶었지만 끝내 들려주지 못한 이야기.
내 기억 속 가장 깊숙한 곳에 담아둬야 했던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