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 critic - 비평가, 평론가 (3)
153.
***
늦은 저녁.
1차 명단 선정을 완료한 로건 위원장이 집으로 돌아왔다.
“당신 생각보다 일찍 왔네요?”
아내가 로건 위원장의 외투를 받으며 말한다.
“응. 일이 생각보다 일찍 끝났어.”
권서준 작가의 작품을 후보 명단에 올리는 작업은 생각보다 수월했다.
무엇보다 실무자인 잭이 적극적으로 추천한 덕에 막힘없이 진행되었다.
‘작품을 봤다면 이견이 있을 수 없으니까.’
로건 위원장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소파에 앉았다.
“해 떨어지니까 날이 쌀쌀하던데 이것 좀 마셔요.”
로건의 아내는 일을 마치고 돌아온 남편을 위해 따뜻한 밀크티 한 잔을 준비했다.
따끈한 차 한 모금에 로건 위원장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떠오른다.
“음. 역시 당신이 만들어준 밀크티는 언제 마셔도 최고군.”
“그럼요. 당신 입맛은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잘 아니까.”
싱긋 웃던 아내의 눈가에 잔주름이 보기 좋게 떠오른다.
그러다가 이내 작게 손뼉을 치며 눈을 크게 뜬다.
“아, 내 정신 좀 봐. 아마 지금 한창 라디오 출연 중일 텐데...”
아내의 말에 잠시 잊고 있던 일이 떠오른다.
‘맞다. 오늘이 그날이었지?’
베네딕트의 라디오 출연.
열렬한 팬인 로건 위원장 입장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코너였다.
아내가 서둘러 라디오를 틀자 익숙한 DJ의 목소리가 들린다.
한참 진행 중인 베네딕트의 인터뷰가 흘러나온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오늘은 베네딕트 씨와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DJ의 사회로 코너가 진행 중이었다.
-자, 그럼 다음 질문 이어가겠습니다. 최근 연극으로 왕성한 활동을 보이고 계시는데요. 많은 팬들이 궁금해하는 게 바로 베네딕트 씨의 달라진 연기입니다. 그동안 배역에 맞게 수많은 모습을 보여주셨지만, 특히 이번 크리스토퍼 말로의 모습에선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카리스마와 비통함이 느껴지는데요, 달라진 이유가 있을까요?
DJ의 질문에 이어 베네딕트의 목소리가 들린다.
-음 아마도 중요한 작품을 만난 덕이 아닐까 합니다.
언제 들어도 듣기 좋은 중저음의 보이스.
신중한 그의 성격이 드러나는 톤과 속도였다.
-그 작품이 아마 「거장의 숨결」이겠죠?
-맞습니다. 이십 년 가까이 연기를 했지만 이보다 더 연기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하게 만든 작품은 없었으니까요.
-그렇군요. 그럼 그런 의미에서 최근 가장 큰 영감을 얻는 뮤즈는 누가 있을까요?
-그야 두말할 것도 없이 권서준 작가죠.
라디오에서 익숙한 이름이 흘러나온다.
뮤즈(Muse)
제우스의 딸을 뜻하는 단어.
흔히 예술가들에게 영감과 재능을 불어넣는 존재를 지칭할 때 사용하는 단어였다.
그런데,
베네딕트와 같은 대단한 배우 입에서 그 뮤즈가 권서준 작가라고 말하고 있었다.
-얼마 전에 그의 소설을 미리 봤는데 엄청나더군요. 아마 머지않아 헐리웃의 뮤즈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확신에 찬 베네딕트의 대답.
권서준 작가의 작품과 인터뷰를 직접 보지 못했다면 이해하기 어려웠겠지만 지금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 놀라웠으니까.’
오랜 시간 동안 문학 작품 심사를 하느라 매너리즘처럼 빠져있던 자신 역시 각성하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그리고 그 작품이 이제 영국을 넘어 유럽 전역을 놀라게 할 차례지.’
부커 1차 명단은 이미 제출된 상황.
3개월 안에 확정 과정을 거친 뒤에 정식으로 발표될 예정이었다.
‘그땐 또 어떤 결과가 나올까...’
로건 위원장은 밀크티 한 모금을 음미하며 미소를 짓는다.
소설의 엔딩을 상상하는 독자의 마음처럼 그의 마음속엔 어느새 숨길 수 없는 설렘이 일기 시작했다.
***
-그야 두말할 것도 없이 권서준 작가죠.
파티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
우리는 올리버 편집장이 마련해준 차 안에서 베네딕트의 라디오 녹화본 인터뷰를 들었다.
“작가님, 진짜 대단하시네요. 헐리웃 배우가 인정하는 뮤즈라니...”
보조석에 앉아있던 윤 기자가 뒤를 돌아보며 혀를 내두른다.
옆자리에서 같이 라디오를 듣던 장현웅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하긴 저도 가끔 놀래요. 저한텐 친근한 친구지만 이젠 헐리웃 배우도 인정하는 작가니까요.”
이번엔 윤 기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요. 솔직히 이번 동행 취재에서 기자로서 기삿거리를 얻는 것도 즐거웠지만 베네딕트와 작가님의 대화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거든요. 뭔가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고요. 이런 큰 기회를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거야 한결같은 기자님의 기사 때문이죠. 이번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미 완벽하게 작성해서 보내 놓은 상태니까요. 언제나 그렇듯 팩트에 기반을 두어서.”
자신감 넘치는 윤 기자의 표정에 자연스럽게 신뢰가 간다.
나는 그 대화를 끝으로 잠시 생각에 잠긴다.
‘뮤즈라...’
과거의 뮤즈는 미술, 음악, 문학의 여신으로, 그녀들로부터 영감을 느끼고 그녀들의 도움을 열망한 시인들에게 인기가 많은 존재였다.
흔히 서사시, 역사, 서정시, 노래, 비극, 희극 등 각각의 분야를 담당하는 총 9명의 여신에 대한 전설이 결국 수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을 일으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미술관(museum)이나 음악(music)의 어원도 거기에서 유래한 거고.’
그리고 사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내 작품은 수많은 예술가들의 원천이 되었다.
영미 문학을 찬란하게 꽃피운 존재로 각인되고 숭배받아왔다.
그러나 그것은 미완의 영감이었고, 수백 년을 걸치며 변질되고 말았다.
‘지금이야말로 새로운 자극이 필요한 시점이야.’
그 시절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듯 나는 다시 한번 그 역할을 하고 싶었다.
‘또 한 번의 르네상스... 그게 내가 바라는 거니까.’
그런 의미에서 베네딕트의 안목은 훌륭했다.
언젠가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칠 내 작품 세계를 알아본 거니까.
나는 가만히 차창 밖을 바라본다.
런던의 밤이 아주 맛있게 익어가고 있었다.
***
늦은 밤, 부커 재단.
영국 왕립예술학회 소속이자 날카로운 평론가로 유명한 이사장 매튜 저먼은 방금 도착한 메일을 보고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흠.”
오전에 보고된 후보자 명단 때문이었다.
다른 작가들이야 어느 정도 예상한 사람이었지만 한 사람만은 예외였다.
[권서준]
물론 후보 작품이 선정되자마자 바로 그의 작품을 봤다.
잘 썼다.
그래서 더 의아했다.
“그 나이에 이런 글을 썼다고?”
맞은편에서 듣고 있던 스웨덴 출판사 대표인 에릭이 고개를 끄덕인다.
“네, 무명 작가라 좀 의아했는데, 올리버 편집장도 자신 있게 추천하더군요.”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무명 작가.
그것도 동양인이 영어로 쓴 작품이었다.
“듣기로는 번역가를 쓰지도 않았다던데?”
매튜 이사장의 물음에 에릭 대표가 고개를 끄덕인다.
“맞습니다. 그래서 좀 놀랍기도 하고요.”
단순히 영어를 잘하는 것과 영어로 글을 쓴다는 건 말 그대로 천지 차이였다.
‘단순히 쓰는 행위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그 안에 현학적이면서도 예술성을 담아야 하는 고난도 작업이니까.’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도 힘든 게 바로 영문 소설 집필이었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부커상 수상자는 영미권 국적을 가진 사람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대로라면 영미권도 아닌, 무명의 동양 작가가 후보에 오를 수도 있는 상황.
오랜 전통을 가진 부커상에 있어서 처음 있는 사례였다.
‘물론 문제가 되는 건 아니지만 내키지 않는 건 어쩔 수 없군.’
못마땅하다는 게 적합한 표현이었다.
“뭐, 잘 쓰긴 했어. 동양 작가치고는 말이야. 그러나 아쉬운 부분도 보이는군.”
애써 박한 평가를 내뱉지만 호기심이 이는 건 막을 수 없었다.
‘궁금하군. 대체 어떤 친구인지...’
권서준의 책을 바라보던 매튜 이사장의 눈이 가늘어진다.
***
이른 새벽.
매일 연예 편집실.
“후우.”
이른 시간에 출근한 이유는 다름 아닌 윤 기자의 기사 때문이었다.
런던과의 시차를 생각해서 이른 시간에 출근했지만 아직까지 아무런 기사도 도착하지 않았다.
“이 자식, 동행 취재 가서 대체 뭐 하는 거야? 설마 펑펑 노는 건 아니겠지?”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러나 이내 가만히 상상해보던 편집장이 이내 고개를 젓는다.
“아니야. 그 인간이 그럴 인간이 아니지.”
윤 기자는 몇 기수 아래 후배였지만 수습기자 때부터 싹수가 남달랐던 놈이었다.
워낙 독종인 탓에 그 어떤 외부의 힘에도 굴한 적 없이 기사를 쓰는 놈이었다. 물론 농땡이 한번 부린 적도 없었고.
하긴, 생각해보면 그래서 대표한테 반기를 들면서까지 이번 해외 출장을 보낸 거였다.
‘그러니까 인마, 이제 뭐라도 좀 보내라고...’
출근하자마자 잔소리를 늘어놓을 대표 때문에 벌써부터 마음이 조급해진다.
새카맣게 타들어 가는 마음.
지이잉.
그런데 그때, 메일 하나가 도착한다.
편집장은 얼른 메일함을 열어 내용을 확인한다.
발신자는 윤석훈 기자.
그리고 제목은 다음과 같았다.
[문학 한류의 시작, 그 서막이 오르다.]
그리고 첨부된 이미지 몇 개.
권서준 작가 부스에 길게 줄을 선 광경이었다.
‘헐, 이렇게 주목을 받았다고?’
편집장의 눈이 커진다.
그러나 뒤이은 사진은 편집장을 더욱 놀라게 했다.
바로 올리버 편집장과 베네딕트, 그리고 권서준 작가가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헐리웃 배우와 함께 찍은 사진.
그러나 그 내용은 더욱 놀라웠다.
“뭐, 뭐? 친구? 게다가 베네딕트가 직접 뮤즈라고 했다고?”
직접 보고도 믿을 수 없는 내용.
편집장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래. 이런 걸 기다렸다고!”
역시 믿는 도끼는 나무를 잘 베었다.
***
다음 날.
매일 연예의 기사는 또 한 번 대한민국의 예술계를 뒤흔들었다.
[문학 한류의 시작, 그 서막이 오르다.]
[런던 북페어 첫날, ‘오늘의 작가’ 권서준.]
책을 사기 위해 길게 늘어선 줄과 연이어 성공한 계약 관련 내용이 실렸다.
먼 이국에서 주인공이 된 천재 작가의 이야기는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가장 큰 이슈는 바로 베네딕트와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베네딕트, ‘나의 뮤즈는 권서준 작가’]
긴 텍스트보다 이미지 한 장이 선사하는 충격이 컸다.
기사를 읽던 정영만 회장이 너털웃음을 터트린다.
“녀석, 아주 가는 곳마다 난리를 치는구나.”
맞은편에 앉은 송영도 교수가 고개를 끄덕인다.
“정말 대단해요. 듣자 하니 행사에 부커상 심사위원장도 다녀갔다고 하던데요?”
“그게 정말인가?”
“네, 오기 전에 현웅이랑 통화했는데 확실하답니다.”
“하아.”
얕은 한숨과 함께 정 회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이거... 혹시 그 징조는 아닐까?”
송 교수가 슬쩍 미소를 짓는다.
“충분히 예상할만하지만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요?”
송 교수의 뜻을 알아차린 정 회장이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
“하긴, 이 바닥에서 설레발은 금물이지. 수상 발표가 날 때까지 아무도 모르는 게 바로 문학상 결과니까.”
고개를 끄덕이던 정 회장이 주상진 편집장을 보며 다시 한번 권서준 작가의 국내 출판 스케줄을 확인한다.
“자, 런던에서 스타트를 끊었으니 우리도 시작해야지. 준비는 다 된 거지?”
옆에 있던 주 편집장이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한다.
“네. 오늘 오후에 출판 예정입니다.”
“아주 다들 사고 싶어서 난리가 나겠구먼?”
“네, 벌써부터 한국버전 출판은 언제 하냐고 문의가 빗발치고 있습니다.”
“하긴, 그게 녀석의 계획이었으니까. 완전 백 년 묵은 능구렁이라니까?”
영국에서 충분히 이슈를 끌고 난 뒤에 출간하는 마케팅 전략.
모두 권서준의 머릿속에서 나온 계획이었다.
‘그래야 더 안날 난 상태에서 폭발적으로 살 테니까요.’
권서준이기에 할 수 있는 마케팅이었다.
정 회장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 그럼 시작해볼까?”
정 회장의 지시와 함께 시작된 출판 일정.
그날 오후.
국내 최대 문고를 시작으로 전국 서점에 권서준 작가의 책이 깔리기 시작됐다.
그리고 그 효과는 놀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