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150화 (150/203)

150. unreal - 비현실적인 (5)

150.

***

런던 올림피아 전시장.

찰칵찰칵.

전시장 내부 사진을 찍던 윤석훈 기자가 새삼 감탄을 내뱉는다.

‘말로만 들었지만 규모가 엄청나구나.’

엄청난 규모에 윤 기자의 카메라는 멈출 줄을 몰랐다.

진심이 우러나오는 감탄은 자연스럽게 한 사람을 향한 관심으로 흐른다.

당연히 대상은 오늘의 주인공인 권서준 작가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대단하네. 저 어린 나이에 이런 곳에 초청되다니...’

직접 보고 있지만 믿기지 않는 일.

한국의 젊은 청년 작가가 유럽인들이 모인 축제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사실이 새삼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윤 기자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건 뜻밖에도 깊은 한숨이었다.

“후우.”

유럽에서 활약하는 천재 작가의 활약을 지켜보는 건 분명 즐거운 일이었다.

‘다만 아직은 큰 기삿거리가 없다는 게 아쉬울 뿐이지...’

윤 기자는 이른 아침부터 걸려 온 매일 연예 편집장과의 통화내용을 떠올렸다.

-잘하고 있지? 여기 일은 걱정하지 말고 취재에 집중해. 내가 다 커버해줄 테니까. 대신 특종 하나만 가져와. 알았지? 야, 너만 믿는다! 내 맘 알지?

편집장의 간절함이 지구 반대편까지 전해진다.

‘하긴 그 양반도 엄청난 걸 걸었으니까.’

인터넷 신문사에서 해외 출장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항공권과 숙박비, 기타 출장비를 고려했을 때 그보다 나은 결과물을 만들어내기란 어려웠으니까.

그런데도 그 모든 걸 책임지고 진행한 사람이 바로 편집장이었다.

자신뿐만 아니라 편집장의 밥줄이 달린 상황. 어쭙잖은 기사를 보냈다가는 난리가 날 수 있었다.

권서준 작가가 협조해준 덕에 일거수일투족을 쫓고 있지만 아쉽게도 아직 이렇다 할 기삿거리는 없었다.

천재 작가와의 즐거운 동행 취재.

그러나 기자로서, 직장인으로서의 본분 역시 놓치지 말아야 했다.

‘반드시 하나라도 건져야 해.’

권서준 작가, 그리고 행사장을 바라보는 윤 기자의 눈빛이 매섭게 반짝였다.

***

모처럼 화창한 날씨 속에 내 첫 공식 일정이 시작되었다.

“권 작가님 이쪽입니다.”

올리버 편집장이 자연스럽게 나를 이끈다.

인터뷰가 진행될 무대.

긴 테이블 하나와 맞은편엔 수십 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다.

올리버 편집장은 원활한 행사 진행을 위해 막바지 점검까지 직접 하는 열정을 보였다.

그리고 잠시 뒤, 처음 보는 사람과 함께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작가님, 오늘 행사에서 인터뷰를 진행하실 분입니다.”

올리버 편집장의 소개에 한 남자가 다가와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세요. 부커 재단 소속의 잭이라고 합니다.”

고수머리가 인상적인 남자였다.

부커 재단이라면 부커사가 출판과 독서 증진을 위한 독립기금인 북 트러스트의 후원을 받아 제정한 문학상을 담당하는 재단이었다.

오랜 전통과 공정한 심사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고.

“안녕하세요. 권서준이라고 합니다.”

인사를 나눈 뒤 나는 자연스럽게 올리버 편집장을 바라봤다.

원래 예정되어 있던 진행자와 이름이 다른 탓이었다.

“아, 원래 다른 분이 진행하기로 했는데 개인적인 사정이 생겨서 변경하게 되었습니다.”

뭐 크게 상관은 없는 문제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럼 잠시 뒤에 뵙겠습니다.”

분명 처음 보는 사이였다.

그런데 어딘가 모르게 나를 대하는 태도가 호의적이었다.

내 작품이 마음에 든 걸까?

하긴, 질투심에 눈이 멀지 않은 이상 인터뷰 대상인 나를 싫어할 이유가 없긴 했다.

“참, 행사까진 아직 1시간 정도 남았는데 구경 좀 하시겠어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내 입장에서도 이렇게 큰 도서전은 처음 경험하는 행사였으니까.

올리버 편집장의 말에 우리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다.

***

런던 도서전.

삼십 분을 넘게 돌아다녔지만 아직 1/5도 보지 못했다.

양대 도서전이라는 위명에 맞게 거대한 스케일을 자랑하는 행사였다.

‘마치 내 머릿속 도서관을 보는 기분이군.’

평생에 걸쳐 창조한 상상 속 도서관.

그 커다란 탑의 규모와 맘먹는 행사 규모는 보는 재미를 주기에 충분했다.

빼곡히 자리 잡은 수많은 부스 사이로 다양한 인종들이 열띤 미팅을 진행하고 있었다.

“와, 작년에 안데르센 상을 받으신 작가님의 작품도 있네. 이건 사야지.”

장현웅은 설레는 얼굴로 영문으로 된 동화책 한 권을 집어 든다.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상.

국제아동청소년도서협의회(IBBY)에서 2년마다 아동문학에 기여한 글 작가 1명과 그림 작가 1명을 선정하는 상이었다.

다른 분야는 몰라도 그림 쪽에 있어서는 여전히 관심이 많은 장현웅이었다.

책을 구매한 뒤 장현웅은 곧바로 카메라를 꺼내 주변의 풍경을 렌즈에 담았다.

조금이라도 행사장의 분위기를 제대로 담으려는 노력.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흐뭇한 미소를 짓게 만드는 모습이었다.

“열심히 하는 모습 보니 좋네?”

“어? 아, 당연하지. 퀄리티야말로 웹툰 작가의 생명이니까.”

프로답게 자기 일에 책임감을 갖는 모습.

이전과 달리 주도적으로 스토리를 기획하는 모습도 보기 좋았다.

물론 내 옆엔 그런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찰칵찰칵.

함께 이동 중인 윤석훈 기자도 애지중지 챙겨온 카메라를 꺼내 들더니 주변과 내 사진을 찍는다.

동행 취재답게 일거수일투족을 담으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놀랍네요. 한 해에 이렇게 많은 책이 출판된다는 사실이요.”

잠시 카메라를 내려놓은 윤 기자가 감탄은 터트린다.

“정말 엄청나죠. 저 책 하나마다 새로운 세계가 창조된 거니까요.”

내 말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던 윤 기자가 나를 바라본다.

“그래서 더 궁금해지네요. 작가님한테 창작의 의미가 무엇인지 말입니다.”

윤 기자는 베테랑 기자답게 자연스럽게 질문을 꺼낸다.

“작가님께선 이미 성공이라고 할 수 있는 걸 많이 경험하셨잖아요. 솔직히 드라마, 소설, 연극, 뮤지컬 어느 한 분야만 집중해도 지금보다 훨씬 크게 성공할 수 있고요. 그런데도 이렇게까지 자신을 열심히 채찍질해서 모든 콘텐츠 분야에 이름을 날리는 이유가 뭘까요?”

옆에 있던 장현웅도 나선다.

“하긴 나도 그게 궁금했어. 마치 사람들에게 너의 이름을 각인시키려는 것처럼 보였거든.”

그동안 내가 걸어온 길을 가장 잘 아는 두 사람이기에 내 행동의 숨은 뜻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뭐, 숨길 필요는 없었다.

숨길 이유도 없었고.

“제 목표가 단순한 성공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창조한 세계를 보다 제대로 이 세상에 전하고 싶은 열망이 있거든요. 그런데 그러기 위해선 그만큼 높이 갈 필요가 있더군요.”

“높이 갈 이유라... 그게 뭔지 여쭤봐도 될까요?”

윤 기자가 진지한 표정으로 되묻는다.

그런데 그 순간,

낯선 두 사람이 우리에게 다가온다.

“안녕하십니까? 혹시 오늘의 작가 행사에 초청되신 권서준 작가님 되십니까?”

출판 관계자로 보이는 백인 두 명이 나를 보며 묻고 있었다.

“맞습니다. 제가 권서준입니다.”

“안 그래도 궁금했는데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네요. 전 빌헬름 신문사의 칼 기자라고 합니다.”

빌헬름 신문사라면 독일 최대 신문사 중 한 곳이었다.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칼은 프레스 신분증을 보여주며 자연스럽게 손을 내민다.

기자라서일까.

눈빛은 빠르게 내 모습을 훑었다.

그리고는 내 허락도 없이 갑자기 질문을 건넨다.

“몇 가지만 여쭤보겠습니다.”

칼은 다소 무례한 표정으로 어느새 노트까지 꺼낸다.

“사실 그동안 영어 문화권에서는 비영어 문화권의 문학에 관심이 많지는 않습니다. 한국 문학 역시 마찬가지였고요. 아시아 문학에 에너지를 쓰는 건 솔직히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거든요.”

분명 초면에 건네기엔 오만한 평가였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틀린 말도 아니었다.

‘영국에서 한 해 발간되는 비영어 출판물은 3%가 채 되지 않으니까. 워낙 영어로 쓰인 다양한 책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굳이 다른 언어로 출판된 책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기 때문이지.’

그나마 영어권 독자들에게 어필하려면 번역 작업이 중요해야 하는데 번역이라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뜻깊으시겠어요. 한국 문학이 이렇게 세계적인 행사에 초대되어서요.”

겉으로는 축하하는 모양새지만 속은 동양 문학에 대한 무시가 담긴 발언이었다.

한쪽 입꼬리를 올린 표정을 보니 일부러 긁는 느낌도 좀 있고.

‘아마 내 반응을 보려는 거겠지.’

그러나 이런 얕은수에 넘어갈 내가 아니었다.

“물론입니다. 이런 기회를 주신 관계자분들께 감사드리고 있고요.”

“설마, 그게... 단가요?”

“네.”

간단한 내 대답에 칼의 입술이 살짝 일그러진다.

아마 자신의 질문에 담긴 묘한 뉘앙스를 내가 감지하지 못했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다만 이제 곧 행사가 시작될 예정이라 제대로 된 인터뷰를 할 수 없어서 죄송합니다.”

정중한 답변에 칼은 이내 심드렁한 표정을 짓는다.

“아, 네 뭐 괜찮습니다. 어차피 이따가 정식으로 질문할 기회가 있으니까요. 그럼 그때 질문드리죠.”

칼은 시니컬한 미소를 지은 채 이내 멀어진다.

타 문화에 대한 무시.

유럽은 다르다는 일종의 선민의식에 찌든 편협함.

솔직히 저 높은 콧대를 단번에 뭉갤 수 있지만 나는 굳이 답하지 않았다.

‘지금은 때가 아니니까.’

내게 마이크가 주어졌을 때, 모든 사람 앞에서 밟아주는 게 훨씬 임팩트 있으니까.

***

권서준 작가와 독일인의 대화를 듣고 있던 윤 기자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정말 무례한 사람들이군요?”

같은 기자이지만 저런 태도를 보이는 사람은 정말이지 피하고 싶은 부류였다.

“뭐 무례하기보단 그게 사실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죠.”

오히려 권서준 작가의 반응은 태연했다.

그제야 윤 기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는 바를 위해선 더 높이 가야 한다... 눈으로 직접 보니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이해가 되네요.”

아시아 문학과 동양인 작가에 대한 유럽인의 무시. 현지에서 느끼는 정도는 더 심했다.

따지고 보면 세계 3대 문학상 역시 모두 유럽에 존재했고.

권서준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문학엔 우열이 없습니다. 깊이만 있을 뿐이죠. 다만 보셔서 아시겠지만 제가 원하는 창작에 집중하기 위해선 보다 높이 가야 할 필요가 있더군요. 제가 바꾸고 싶은 건 단순히 문학적인 기조가 아니라 문화 그 자체이니까요.”

“...”

윤 기자의 눈이 순간 커진다.

그의 짧은 답변 속에 담긴 꿈의 크기 때문이었다.

‘이 사람은 단순히 문학으로 성공을 하려는 게 아니었어. 문학 자체, 아니 세상 자체를 바꾸려 하고 있어...’

놀랄만한 꿈의 크기였다.

만일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윤 기자 역시 속으로는 비웃었을 터.

그만큼 비현실적인 이야기였다.

그러나 권서준 작가의 말이기에 기대감이 오른다.

‘그동안 몸소 보여줬으니까.’

한참이나 어린 청년 작가.

그러나 남다른 그의 배포가 연륜 있는 기자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아마 이번 도서전이 끝나면 훨씬 더 높이 날아오르겠지.’

지켜보는 것만으로 마음을 설레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아마 오늘 뭔가 터질 거야.’

확실할 수 있었다.

오랜 기자 생활로 얻은 촉이 발동했다.

윤 기자는 손에 들린 카메라를 천천히 매만졌다.

그 순간 행사장에 안내 방송이 흐른다.

“곧 오늘의 작가 행사가 진행됩니다. 참석을 원하시는 관계자분들은 착석 부탁드립니다.”

이제 슬슬 권서준 작가가 날아오를 타이밍이었다.

***

오늘의 작가.

런던 북페어 행사 중 가장 주목 받는 시간.

그리고 그 행사의 주인공이 바로 나였다.

“후우, 이제 시작하나 보다...”

방송을 들은 장현웅이 굳은 표정으로 말한다.

“인터뷰는 내가 하는데 왜 니가 더 긴장 하냐?”

“야, 내가 긴장 안 하게 생겼냐? 주변을 한번 봐봐.”

목소리를 낮추는 장현웅의 말에 나는 슬쩍 주변을 둘러봤다.

행사 안내 방송을 듣고 어느새 잔뜩 보인 출판 관계자들의 모습이 보인다.

“다들 우리만 보고 있다고...”

장현웅의 말 대로였다.

대부분은 호의적이지 못한 시선.

하나같이 ‘니가 뭔데 여기에 있어?’라는 표정이었다.

그 살벌한 시선에 장현웅도 긴장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난 조금 들뜬 기분이었다.

‘저런 시선을 깨부술 때만큼 짜릿한 것도 없으니까.’

나는 설레는 마음을 속으로 삭이며 삼삼오오 모이기 시작하는 관계자들의 면면을 살폈다.

그런데 그중에서 유독 따가운 시선이 느껴진다.

환갑쯤 됐을까?

노신사가 팔짱을 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게다가 연륜과 함께 깊이가 느껴지는 시선은 주변의 시선과 분명 다른 느낌이었다.

자연스럽게 호기심이 인다.

“편집장님, 혹시 저분을 아시나요?”

“누구 말씀이시죠?”

내 질문에 올리버 편집장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갑자기 눈을 크게 뜬다.

“어? 저분이 여기를 다 오셨네? 한창 후보 선정 때문에 바쁘실 텐데...”

“아시는 분인가요?”

“그럼요. 저분이 로건 위원장님이에요. 부커 재단 소속 심사위원장.”

역시 눈빛이 다르다 했더니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다만 후보 선정으로 바쁜 심사위원장이 이곳에 직접 왔다는 건 여러 가지 시사하다 바가 있었다.

‘이거 재미있게 돌아가는데?’

단순히 내 작품에 대한 이미지를 보여주려 했던 행사.

그런데 본의 아니게 하나를 더 얻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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