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 unreal - 비현실적인 (1)
146.
***
이른 아침.
나는 봄볕을 만끽하며 집 주변 공원을 산책했다.
잠시 쉴 겸 벤치에 앉아 며칠 전 받은 티켓을 꺼냈다.
제법 두꺼운 재질의 티켓의 감촉.
손끝에 닿는 티켓의 느낌이 꽤나 근사했다.
사실 요즘 같은 세상에 실물 티켓이 굳이 필요하진 않았다.
‘그러나 이런 것도 다 전통이고 감성이지.’
나는 기분 좋게 걸음을 옮겼다
필터를 입힌 것처럼 몽롱한 하늘.
막 피기 시작한 꽃들의 향기가 새들의 노랫소리와 한데 어우러져 봄의 기운을 뽐낸다.
‘좋군.’
나는 완연해진 봄의 기운을 음미하며 생각에 잠긴다.
수많은 생명이 움트는 시기.
그래서 겨울과의 대비를 통해 환희와 감격, 기쁨의 이미지로 묘사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내게 있어 봄이란 참으로 오묘한 계절이었다.
‘이슬비처럼 젖어 드는 슬픔에 오히려 마음이 가라앉고는 했으니까.’
가을과 달리 봄만이 가지는 애잔함이 있었다. 그리고 그 느낌은 언제나 가슴 속 어느 감성을 몽글거리게 만든다.
그래, 그때도 그랬지.
문득 전생의 기억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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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그대와 헤어져 있었네
화려하게 차려입은 사월이 만개해
만물에 청춘의 기운을 불어넣고
우울한 새턴마저도 신나게 웃고 뛰노네
그러나 새들의 노래에도, 온갖 고운 색을 뽐내는 다양한 꽃들의 달콤한 향기에도
내게선 여름날의 유쾌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고
그 풍성한 꽃밭에 가 꽃을 따고 싶은 마음을 이끌지 못했네
나는 백합의 그 순수한 하얀 빛에도 경탄하지 않았고
장미의 진홍빛도 찬미하지 않았네
그것들의 아름다움은 그저 봄의 원형인 당신을 본뜬 것에 불과하기 때문
당신이 없기에 내 계절은 여전히 겨울.
할 수 없이 나는 당신의 그림자, 꽃들과 어울려 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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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번째 소네트.
젊은 친구(fair youth)에게 바치는 시였다.
그래.
이 시는 그 친구를 위한 내 마음이었다.
봄의 끝자락에 생을 마친 오랜 벗.
친구가 없는 세상은 계절의 여왕인 봄인데도 겨울처럼 삭막하기만 했다.
‘자네, 그곳에선 평안을 누리고 있는가?’
나는 전달할 수 없는 위로를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흘려보냈다.
마치 어린 시절 시냇물에 나뭇잎 배를 흘려보내듯, 그렇게 내 마음을 전해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그저 그것뿐이기에...’
그 순간,
내 주변을 감싼 봄의 기운이 미세한 변화를 일으킨다.
강물에 비친 햇살이 아름답게 반짝이고,
뺨을 스치는 봄바람이 포근하게 부서진다.
오랜 벗의 응답일까?
나는 한결 평온해진 기분으로 강변을 바라본다.
‘이번 봄은 유난히 포근한 느낌이군.’
우울의 상징인 새턴 신마저 웃고 떠드는 계절.
나는 기분 좋게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
“어? 마침 잘 왔네. 아침 먹자.”
집에 돌아오자 엄마가 나를 맞이한다.
아들의 해외 출장 때문에 엄마는 이른 아침부터 한식으로 한 상을 차렸다.
나는 제일 먼저 김치찌개를 한 입 떠 입에 넣었다. 비행기를 타자마자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게 바로 이 요리니까.
“근데, 이번엔 무슨 일 때문에 가는 거야?”
엄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아직도 외국으로 떠나는 아들이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런던에 도서전이 있는데 거기에 초대돼서. 그렇게 오래 있진 않을 거야.”
내 대답을 듣고 있던 누나가 얼른 끼어든다.
“엄마, 그냥 도서전이 아니야. 가을에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리는 도서전과 함께 유럽 양대 도서전으로 유명한 도서전이거든. 규모도 엄청난데 거기에 서준이가 초대된 거야.”
누나는 와이즈 출판사 편집자답게 런던 도서전에 대해 아는 게 많았다.
“그래? 어머, 엄청난 기회구나?”
누나의 설명에 엄마의 눈이 커진다.
엄마는 이제야 실감이 나는 듯했다.
누나의 설명대로였다.
매년 4월 열리는 국제 도서 전시회로 독일 프랑크푸르트 도서전과 함께 유럽 양대 도서전으로 유명한 북페어.
전 세계 2만 5천명의 출판 관계자들이 모이는 행사로 단순히 출판 전시회를 목적으로 열리는 행사가 아니었다.
‘작품의 IP 거래를 위한 자리니까.’
에이전시가 있는 나로서는 직접 갈 필요는 없었지만 이번에 참가하게 된 건 바로 올리버 편집장이 마련해준 특별한 기회 때문이었다.
‘아마, 힘을 많이 썼을 거야.’
물론 나 역시 약간의 준비가 필요했다.
비행기 안에서 준비하면 될 터.
이제 슬슬 출발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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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오후.
인터넷은 권서준에 대한 이야기도 또 한 번 떠들썩했다.
바로 엔플릭스와의 영화 계약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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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서준 작가의 차기작, 엔플릭스의 마음까지 사로잡아...]
국내 수많은 독자를 열광시킨 권서준 작가의 차기작이 엔플릭스 마저 홀렸다. 엔플릭스가 제작비 전액 지원한 오리지널 영화로 전 세계 안방 시장을 노리며 K 콘텐츠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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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K 콘텐츠는 세계적인 성공을 이뤘음에도 플랫폼의 수익 독식의 문제로 한계성을 함께 보였다. 그러나 권서준 작가의 작품은 흥행 수익에 따른 성과급 자체를 함께 나누는 계약 조건으로 또 한 번의 국내 IP(Intellectual Property 지적재산권)의 가치를 보존한 계약으로 바람직한 시장 질서를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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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플릭스에서 전액 투자하는 오리지널 작품. 게다가 메가폰을 잡은 사람이 크리스토퍼 올란 감독이라는 소리에 대중의 관심이 쏠린다.
와이즈 출판사의 정영만 회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 회장이 들고 있던 신문을 내려놓으며 감탄을 터트린다.
“이게 말이 돼? 엔플릭스가 어떤 기업이야? 이득을 내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곳이라고. 근데 IP를 지키면서 제작비 전액을 지원받아?”
알면 알수록 놀라운 소식.
“참나. 서준이 이 녀석은 잠시만 조용하다 싶으면 이렇게 사람을 놀라게 한다니까?”
혼잣말 섞인 감탄에 맞은편에 앉은 송영도 교수가 고개를 끄덕인다.
“더 솔직히 말씀드리면 조용할 틈이 없었죠. 요즘 뭐만 하면 다 서준이 얘기니까요.”
웹툰의 성공.
뒤이어 뮤지컬의 성공 신화까지 써 내려가는 천재 작가의 활약상.
장르와 틀의 경계마저 부수는 천재 작가의 활약에 대중의 이목이 집중됐다.
“요즘 그런 말이 있더라고요. 축구에 손 선수가 있다면, 문학계엔 권 작가가 있다고.”
“하하하. 나도 들었네. 너무 맞는 말이지 않은가?”
축구 변방 취급을 받던 나라의 국민들의 바람은 하나였다.
지구 어디선가 어린 시절부터 교육받은 축구 천재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
그런데 실제로 그런 축구 선수가 나타났고, 국민들은 환호했다.
그리고,
지금 권서준 역시 마찬가지였다.
“노벨문학상 한 명 배출 못한 나라에서 서준이 같은 인재가 나타났으니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정 회장의 눈빛이 이내 진지해진다.
“그래. 이대로 잘 성장하면 우리의 꿈이 꿈만은 아닐지도 몰라.”
그런데,
말을 내뱉던 정 회장이 얼른 삼킨다.
“아이고, 이거 내가 괜히 설레발을 친 건가? 괜히 재수 옴 붙을까 두렵군.”
엄살떠는 정 회장의 말.
그러나 송 교수의 얼굴엔 염려보단 미소가 떠오른다.
언제나 그렇듯 권서준이 가져오는 건 선물과도 같았으니까.
“뭐, 서준이가 서준이 하겠죠.”
어느새 확신에 찬 미소가 떠오른다.
두 사람은 이미 같은 결과가 떠올리고 있었다.
***
매일 연예 편집실.
“하아...”
윤석훈 기자는 해결되지 않는 고민에 연신 한숨을 내쉰다.
고민의 원인은 단 한 가지였다.
런던 도서전에 초대된 권서준 작가의 일거수일투족을 동행 취재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권 작가님을 따라가고 싶은데...’
의지는 충만했지만 아쉽게도 매일 연예 역사상 해외 출장은 전례가 없었다.
그렇다고 휴가 내고 개인 경비로 가자니 해외 출장비가 만만찮은 것도 아니고.
‘그냥 들이받아 볼까? 아니야. 씨알도 안 먹힐 거야.’
머릿속으로 수십 번을 시뮬레이션 굴려 봐도 같은 답만 나올 뿐이었다.
그렇게 한참 고민하는데, 편집장이 돌아온다.
요즘 편집장의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며칠 전 화제가 된 올란 감독에 대한 인터뷰 기사 때문이었다.
“석훈아, 트래픽이 또 두 배나 올랐다. 이거 권 작가님한테 밥이라도 사야 하는 거 아냐?”
편집장의 말에 윤석훈 기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안 그래도 약속 한 번 잡아보려고요.”
“그래. 도움을 받았으면 모른 척하면 안 되지. 겸사겸사 나도 인사 좀 드리고... 흠, 흠.”
편집장이 어색하게 헛기침을 한다.
무슨 속셈인지 뻔히 보인다.
하나뿐인 딸이 권서준 작가의 팬이라고 하던데, 사인을 받으려는 거겠지.
‘어?’
그 순간 좋은 생각이 윤 기자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언제가 괜찮을까? 이번 주 주말 어때?”
편집장이 은근히 묻는다.
그러자 윤 기자가 고개를 젓는다.
“근데 좀 기다려야 해요.”
“왜? 아, 하긴 권 작가님이 요즘 좀 바쁘시지?”
“그게 아니라 해외 가실 예정이거든요.”
“해외?”
편집장이 눈을 크게 뜬다.
“해외는 왜?”
“런던 도서전에 초대되셨거든요. 아마 거기서 신작 발표를 할 예정이고요.”
“아, 그래? 그거 엄청난 특종이겠는데?”
편집장이 미끼를 덥석 물었다.
눈치 빠른 윤 기자는 슬며시 본론을 꺼낸다.
“그래서 말인데, 저 영국 출장 좀 보내주십시오.”
“뭐? 미쳤어? 우리한테 그런 예산이 어디 있어?”
“권 작가님 차기작 취재면 그 정도 예산은 나오지 않을까요?”
“...”
편집장이 순간 머리를 깜빡인다.
아마 숫자를 계산하는 거겠지.
이럴 때 밀어붙여야 했다.
“런던 북페어에서 권 작가의 차기작이 발표돼요. 그것도 영문으로요. 어떤 작품인지, 그곳 반응은 어떤지 누구보다 빠르게 전하면 좋은 기삿거리가 될걸요?”
“설마...”
“네, 권 작가가 본격적으로 세계로 뻗어나가는 거죠.”
“...”
편집장의 표정이 진지해진다.
저 머릿속에서 무슨 계산이 일어나고 있는지 뻔히 알 수 있었다.
잠시 뒤,
편집장이 결의에 찬 표정으로 어금니를 문다.
“너, 잠깐 기다려 봐.”
편집장은 곧장 대표실로 달려간다.
‘됐어...’
윤 기자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미 따 놓은 당상.
그리고 1시간 뒤.
매일 연예 신문사 역사상 첫 해외 출장이 승인 났다.
***
영국 런던에 위치한 미디어 아트 센터.
뿔테를 쓴 백발의 노인이 천천히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남자의 이름은 부커상 심사 위원회의 위원장인 로건.
지독한 연극광으로도 유명한 저명인사였다.
“후...”
로건은 지난밤에 관람한 연극의 감동을 되뇌었다. 아직도 생생한 연극의 여운이 온몸을 자극하고 있었다.
‘역시 베네딕트 그 친구의 연기는 완벽에 가까웠어.’
그러나 정작 더 놀란 건 시종일관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이야기의 힘이었다.
시작과 동시에 몰입감을 선사하는 스토리. 마치 시를 방불케 하는 아름다운 대사들. 눈을 감고 있어도 떠올리게 만드는 내레이션까지.
‘흠잡을 데가 없었지.’
새삼 감탄하며 사무실에 들어선다.
“오셨습니까, 위원장님.”
심사위원들이 로건을 보고 인사를 한다. 로건은 굵은 뿔테를 고쳐 쓰며 위원장 자리에 앉았다.
자연스럽게 진지해지는 로건의 눈빛.
연극광에서 위원장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자, 지난번 회의 결과부터 확인하지. 시상자들과의 일정 조율은 완벽하게 체크한 거지?”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이유는 비영어권 작가들의 영어 번역 작품을 선정하는 부커 인터내셔널 부문 시상 때문이었다.
이미 1차, 2차 후보들에 대한 심사를 진행해 최종작이 결정된 상태.
“네, 시상식은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에서 만찬과 함께 진행될 겁니다.”
부커상 심사위원장인 로건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착오 없이 준비하게. 다음은...”
바로 이어지는 안건들.
세계 3대 문학상에 걸맞게 준비할 게 많았다.
그러나 정작 ‘부커 인터내셔널’ 시상보다 중요한 업무가 남아있었다.
바로 7월까지 선정해야 할 ‘부커상’ 1차 후보작 선정이었다.
부커 인터내셔널 상이 외국 문학을 대상으로 한다면 부커상은 영국에서 출간된 영어소설을 대상인 문학상으로 세계 3대 문학상으로 손꼽히는 상이었다.
그만큼 중요한 시상식으로 꼼꼼한 준비가 필요했다.
특히 이번 7월에 발표할 1차 후보작 13편을 선정하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이번엔 또 어떤 작품들이 세상을 놀라게 할까.’
설렘 가득한 노장의 눈빛은 이번 런던 도서전에 출판하는 책 제목에 향해 있었다.
1차 후보 선정전 가장 유력한 후보들의 작품을 먼저 만날 수 있는 게 바로 런던 도서전이었으니까.
이미 유명 작가들의 작품은 확인이 끝난 상태. 혹시 모를 신인 작가들의 작품까지 살피는 중이었다.
특히 신경을 쓰는 부분은 바로 오늘의 작가(Author of the Day)때 선정되는 작가였다.
단 3명.
작품성과 철학 모두를 지녀야 선정될 수 있는 자리였다.
꼼꼼히 명단을 살펴보는데 로건 위원장의 눈에 낯선 이름 한 명이 눈에 들어온다.
“권...서준?”
어색한 발음으로 이름을 읊조리자 한 위원이 입을 연다.
“이번에 피어슨 출판사에서 내세운 작가입니다. 작품은 꽤 괜찮다던데, 아직 모르겠네요.”
“피어슨 출판사라면 올리버 그 친구가 추천했다는 건가?”
“네, 맞습니다.”
로건의 고개가 또다시 한쪽으로 기운다.
“솔직히 의아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듣기로는 막판까지 이견을 좁히기 어려웠다는 말도 들리고요.”
“맞습니다. 처음 영문으로 출판하는 작가를 오늘의 작가로 선정한 건 좀 무리수였죠.”
위원들의 의견은 대체로 적합하지 않다는 쪽이었다. 그만큼 생소한 이름의 동양 작가.
그런데 가만히 보고를 듣던 로건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진다.
“자, 잠깐. 작가 이름이, 뭐라고 했지?”
“권서준 작가입니다.”
이름을 다시 듣자마자 로건의 눈이 커진다.
전날 밤,
자신을 400여 년 전 과거로 초대했던 작품「거장의 숨결」.
그 작품의 작가 이름이 떠오른 탓이었다.
‘설마, 이 작가가 그 작가...?’
언제나 ‘설마’는 사람을 잡는 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