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145화 (145/203)

145. bedazzled - 현혹된 (5)

145.

***

매일 연예 편집실.

윤석훈 기자는 이른 아침부터 오전 업무를 급히 서둘러 마무리 짓고 있었다.

어젯밤에 걸려 온 권서준 작가의 연락 때문이었다.

‘윤 기자님, 내일 시간 괜찮으시면 점심 식사 같이하실래요?’

갑작스러운 점심 약속.

그러나 더 물을 필요도 없었다.

권서준 작가와의 점심이라면 거절할 이유가 없으니까. 오히려 이쪽에서 먼저 잡고 싶은 약속이었다.

그러나 뒤이어 들려온 소식은 더 큰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겸사겸사 부탁드릴 인터뷰도 좀 있고요.’

인터뷰?

누구 인터뷰를 말씀하시는 걸까?

뮤지컬 때문이라면 이미 주연 배우의 인터뷰가 진행된 상태라 의구심이 커진다.

그러나 만나보면 알 일이었다.

어차피 권서준 작가가 의미 없이 약속을 잡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시간을 다시 확인한 윤 기자가 원고를 정리하며 바쁘게 움직인다.

“야, 신입. 이거 한번 확인하고 오후까지 교열팀에 넘겨줘.”

“넵!”

“참, 그룹 카오스 복귀 인터뷰 기사도 늦지 않게 넘겨야 해. 자정에 음원 오픈되니까 적어도 4시 전에 올리면 좋을 거야. 절대 잊으면 안 된다. 알았지?”

“넵, 알겠습니다.”

기합이 바짝 든 신입의 대답에 윤 기자는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린다.

짝짝짝.

난데없는 박수 소리가 들린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자 환하게 웃으며 들어오는 편집장의 얼굴이 보인다.

“대단해. 바쁜 와중에도 후배들에게 정확한 업무지시까지 하다니. 역시 베테랑 기자의 면모가 드러나는 모습이군.”

“뭐예요? 그런다고 밥 안 삽니다.”

윤 기자가 퉁명스럽게 묻자 편집장이 털썩 책상 위에 걸터앉는다.

“인마, 편집장 체면이 있지 후배한테 얻어먹겠냐?”

“그럼 갑자기 왜 이러시는데요?”

“이번 조현성 인터뷰 기사 좋았다고. 내용은 말할 것도 없고, 타이밍까지 완벽했어.”

최근 엄청난 인기를 보이는 뮤지컬 「거장의 숨결」의 주연답게 트래픽이 아주 달달했다.

“그거야 당연하죠. 다 계산하고 올린 거니까.”

“하하하. 그래, 역시 우리 신문사의 대들보다워.”

“쓸데없는 말씀 그만하시고요, 저 결재나 좀 해주세요. 오후에 출장 좀 다녀올게요.”

“출장? 어디 가는데?”

“저도 아직 몰라요.”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권 작가님이 부르셨거든요.”

“뭐? 권서준 작가가?”

“네, 점심 식사 같이하자고 하시는데, 그분이 그냥 점심 먹자고 하실 분이 아니잖아요.”

“그거야 그렇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편집장이 벌떡 일어난다.

“그럼 뭐 하고 있어? 당장 출발하지 않고? 어서 가. 아, 어서!”

고작 점심 식사.

그런데 편집장까지 등을 떠밀고 있었다.

이게 지금 매일 연예 신문사에서 가지는 권서준 작가의 위상이었다.

***

점심 무렵.

서울 외곽을 벗어난 윤 기자의 차가 시원하게 도로를 달렸다.

운전대를 잡고 있었지만 윤 기자의 생각은 온통 오늘 만남의 목적에 있었다.

‘무슨 일이실까?’

인터뷰 부탁은 처음이었다.

궁금한 마음을 품은 채 핸들을 틀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서울 외곽에 위치한 한 백숙집.

넉넉하게 출발한 덕에 늦지 않게 약속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 서울 근교에 이런 곳이 있었네?’

성큼 다가온 봄기운이 물씬 풍기는 경치가 인상적인 곳이었다. 곳곳에 수줍게 핀 개나리와 고운 빛깔을 뽐내는 하얀 목련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오셨어요?”

이미 도착해있던 권서준이 반갑게 맞이한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좀 멀죠?”

“아니요. 생각보다 막히지 않아서 금방 왔어요. 뭐 이 기회에 콧바람 좀 쐬는 거죠. 좋네요.”

윤 기자는 눈을 잠깐 감으며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아름다운 풍경에, 기분 좋은 봄내음까지.

모처럼 힐링하는 기분이었다.

두 사람은 오두막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아, 얼마 전 조현성 배우님 인터뷰 기사 잘 봤습니다.”

“저야 뭐 있는 그대로 쓴 거죠. 생각보다 조 배우님이 말씀을 잘하셔서 기사 쓰기도 편했고요.”

“그게 어렵다는 거 아시잖아요? 기자님 덕분에 저희도 덕을 봤고요.”

따지고 보면 덕을 본 건 윤 기자 쪽이었다. 그런데도 권서준 작가는 늘 겸손했고, 상대방을 배려했다.

언제 만나도 친근하고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사람이었다.

윤 기자는 문득 이곳에 온 이유를 되뇌었다.

“참, 근데 이렇게 멀리 온 이유가 있을까요?”

“외국에서 손님이 오셨는데, 제대로 된 한국 요리를 대접하고 싶어서요.”

“아, 오늘 인터뷰하실 분이 외국 분이군요?”

조금 의외라 윤 기자는 살짝 눈썹을 들었다 내렸다.

“근데, 이런 곳은 어떻게 아셨어요? 쉽게 알만한 장소는 아닌 거 같은데.”

“예전에 정 회장님과 왔던 곳이거든요.”

윤 기자의 눈이 커진다.

“정 회장님이요? 서, 설마 와이즈 출판사 정 회장님?”

권서준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네, 정 회장님을 아시나요?”

“하아, 모를 수가 없죠...”

정 회장이라면 측근 외엔 거의 왕래가 없는 문학계 거목이었다.

웬만한 수준의 행사가 아니면 얼굴을 비추는 법도 별로 없고.

그런데 그런 인물과 따로 밥까지 먹는다니 새삼 대단해 보인다.

“정말 권 작가님은 볼 때마다 놀라게 하시네요...”

서른도 안 된 작가의 인맥이라고 하기엔 엄청났다.

그런데 뒤이은 말은 조금 더 놀라웠다.

“오늘은 조금 더 놀라실 겁니다.”

“네?”

“인터뷰를 하실 분도 좀 유명하신 분이거든요.”

그 순간, 남자 한 명이 들어온다.

선이 굵은 얼굴에 단단한 인상을 풍기는 남자.

“처음 뵙겠습니다. 하이든 에이전시 고용수 부장입니다.”

“하, 하이든 에이전시요?”

윤 기자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세계 유명 작가들의 관리를 맡고 있는 글로벌 기업 하이든 에이전시. 그리고 그 대단한 회사의 한국 지부장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윤 기자는 뒤늦게 권서준 작가가 하이든 에이전시 소속 작가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역시 대단한 사람이군.’

놀란 마음을 슬쩍 감추며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눈다.

“아, 안녕하세요. 저는 매일 연예 윤석훈 기자입니다.”

그런데 인사와 함께 새로운 의구심이 든다.

‘설마, 이분을 인터뷰하라는 건가? 근데 고 부장은 내가 알고 있기로 한국 사람인데...’

기자다운 촉.

한 번 든 의구심을 인사가 이어질수록 의구심이 깊어진다.

그런데,

뒤이어 한 사람이 더 들어온다.

지극히 한국적인 장소와 음식.

그런데 생소한 느낌을 가진 키 큰 외국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저 사람인가?’

가만히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던 윤 기자의 눈썹이 순간 하늘로 솟구친다.

“어, 어?”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을 뻗으며 말을 잇지 못한다.

“저, 저분은...”

놀랍게도 아는 얼굴이었다.

아니, 영화 좀 본다는 사람은 모를 수 없는 인물이었다.

바로 크리스토퍼 올란 감독.

그 유명한 헐리웃 감독이 눈앞에 있었다.

“어, 어떻게 이분이 한국에...”

놀라서 말을 잇지 못하는 윤 기자.

그러나 권서준은 태연하게 대답한다.

“제 작품의 연출을 맡아주시기로 했거든요.”

“...”

이번엔 아예 대답도 못 했다.

다만 속으로 질문을 할 뿐이었다.

‘당신, 대체 정체가 뭐야?’

***

맛있는 식사 후 진행된 짧은 인터뷰.

모든 건 이후 마케팅을 위한 준비 작업이었다.

윤 기자는 베테랑 기자답게 올란 감독의 뛰어난 예술성이 드러날 수 있는 질문을 이어갔고, 올란 감독 역시 깊이가 느껴지는 대답을 통해 품격 있는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하아, 이렇게 긴장한 인터뷰는 오랜만이네요. 대본을 선택한 이유부터, 그 해석까지... 깊이가 엄청나서 감탄만 나오더라고요.”

인터뷰를 끝낸 윤 기자는 연이어 감탄을 쏟아낸다.

“올란 감독님도 비슷한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기자 정신이 투철하신 분이었다고, 가십거리보다 작품에 대해 진지하게 묻고, 경청해주는 자세가 인상 깊었다고요.”

순간 윤 기자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다.

분야가 달라도 전문가는 전문가를 알아보는 법이었다. 기본적으로 어느 분야든 톱클래스는 비슷한 부분을 보일 수밖에 없으니까.

“기사는 염려 마세요. 제가 오늘의 감동을 죄다 담을 수 있게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신이 난 윤 기자를 보내고 우리는 곧바로 공항으로 향했다.

올란 감독의 비행기가 몇 시간 남지 않은 탓이었다.

인천공항 안에 들어서자 올란 감독이 걸음을 멈춘다.

“참, 권 작가님. 우리가 아까 먹은 요리가 뭐였죠?”

“백숙입니다. 닭은 삶은 요리로 보양식 중 하나입니다.”

“아, 그래서 이렇게 속이 든든하군요. 이거 꽤 오랫동안 생각날 거 같은데요?”

올란 감독의 농담에 모두 웃음을 터트린다.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갈수록 좋아지네요. 모두 권 작가님 덕분입니다.”

“저야말로 감독님과 뜻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우리는 악수를 했다.

“조만간 다시 오겠습니다. 그때 한 번 더 먹으러 가죠.”

잠시 뒤,

올란 감독이 출국장 안으로 사라진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올란 감독의 내한 일정이 마무리되는 순간이었다.

“후우. 이제 본격적인 일만 남았네요.”

고 부장이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의 말대로 영화 제작을 위한 모든 준비는 끝난 상황.

그리고 이젠 내가 한국을 떠날 차례였다.

***

런던 북페어가 열리는 영국 런던 올림피아 전시장.

도서전을 이틀 앞둔 전시장엔 막바지 준비로 정신이 없었다.

유럽 양대 도서전으로 유명한 행사로 일반 독자들에게 개방해 단순히 도서를 홍보하고 판매하는 다른 도서전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일반 독자의 선택보다는 실질적인 비즈니스에 초점을 맞춘 일종의 B2B 행사로 출판을 비롯해 저작권, 번역권, 해외 출판권 거래를 주목적으로 하는 행사였다.

그렇기에 준비할 것도 많았고, 행사를 이틀 앞둔 시점까지 고민할 것도 많았다.

특히 이번 도서전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건 ‘오늘의 작가’ 선정 문제였다.

오늘의 작가(Author of the Day)

행사가 진행되는 3일 동안 하루에 한 사람씩 오늘의 작가를 선정해 저자와의 대화와 세미나를 개최하는 행사를 의미했다.

피어슨 출판사의 올리버 편집장.

영국 문학원 문학출판 책임자 이자벨라.

런던 북페어 프로그램 총책임자 소피아.

이번 행사의 책임자인 세 사람은 작가 선정 문제로 열띤 회의를 이어가고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건 소피아였다.

작가 명단을 확인하던 그녀가 안경을 고쳐 쓰며 한숨을 내쉰다.

유명 작가들 사이에서 낯선 동양 작가의 이름 때문이었다.

“올리버 편집장님, 전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출판 전문가들이 참석하는 세미나이기에 작가의 내공이 없다면 금방 밑천이 드러날 수밖에 없어요.”

옆에서 듣고 있던 이자벨라도 거들고 나섰다.

“맞아요. 잘못하면 오히려 작품 판매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어요. 이후에는 선정한 우리에 대한 신뢰도 역시 타격을 입을 수 있고요.”

두 사람의 걱정은 어쩌면 당연했다.

그만큼 이번 도서전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행사였으니까.

그러나 올리버 편집장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문제없습니다. 베네딕트가 출연한 연극의 대본을 쓴 작가이기도 하고요. 그 정도의 세미나 진행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연극 소식은 저도 들었어요. 하지만 대본과 출판은 별개의 분야잖아요. 혹시나 웃음거리가 될 수도 있다고요.”

“그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보장할 테니까요.”

우려하는 두 사람과 달리 올리버 편집장의 의지는 확고했다.

설득에 실패한 소피아가 이내 한숨 섞인 말투로 입을 연다.

“좋아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우리가 양보하죠. 단, 문제가 생기면 모든 책임은 올리버 편집장님이 지시는 거로 하는 건 괜찮겠죠?”

벌써부터 면피할 방법을 생각하는 두 사람이었다. 물론 책임자 입장에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피해를 보는 게 싫은 건 당연했다.

그러나 올리버 편집장의 표정에선 오히려 여유가 흘렀다.

“물론입니다.”

한 치의 주저함도 없는 대답.

불안해하는 두 사람과 달리 올리버 편집장의 속마음은 확고했다.

‘나중에 놀라지나 말라고.’

자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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