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 bedazzled - 현혹된 (4)
144.
***
무대를 압도하는 연기.
작은 체구에서 나올 수 없는 존재감.
“...”
신하율의 연기를 떠올리던 크리스토퍼 올란 감독은 속으로 감탄을 삼켰다.
‘이게 말이 되는 건가?’
언어의 한계를 넘어선 연기는 올란 감독의 마음을 뜨겁게 만들고 있었다.
이런 느낌은 올해 한 번 더 있었다.
바로 권서준 작가의 대본을 처음 봤을 때.
‘세이렌의 소리를 들은 선원들의 마음이 이랬을까 싶을 정도로 뭔가에 홀린 기분이었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신하율의 연기가 끝난 지 한참이 지났지만 여전히 진한 여운이 남았다.
안개 속에 머문 것처럼 애매했던 이미지들이 선명해진다.
‘그래, 이거야...’
배경만 존재했던 이야기 속의 인물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그리고 어느새 살아 숨 쉬는 듯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어떻습니까?”
묵직한 저음에 상념이 깨진다.
질문한 사람은 권서준 작가였다.
정확히 말하면 대답할 필요가 없는 질문이었다.
‘이미 내 생각을 알고 있으면서...’
그러나 인정하는 과정은 언제나 필요한 법이었다.
올란 감독은 기분 좋게 입을 열었다.
“완벽한 캐스팅이네요.”
더 할 말이 없었다.
그 한마디로 미팅의 결과 역시 확실해졌다.
***
매사추세츠 하이든 본사.
며칠 전 귀국한 스티브 대표는 작품 「거장의 숨결」 IP 사업화를 위해 바쁜 시간을 보냈다.
퇴근 시간이 훌쩍 지났지만 브로드웨이 관계자와의 미팅까지 직접 챙기는 대표를 보며 비서가 만류한다.
“이런 건 제가 해도 되는데요?”
“아니야. 내가 직접 하고 싶어서 그래.”
뮤지컬을 통해 얻은 감동과 여운.
북미를 비롯해 유럽 전역까지 통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어쩌면 브로드웨이와 웨스트엔드 모두를 섭렵할 수도 있다고.’
오리지널 공연과 함께 IP 판매를 진행해서 작품에 대한 이윤을 극대화할 생각이었다.
물론 단순히 이윤을 넘어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신바람까지 절로 난다.
“참, 올란 감독이 한국에 도착했답니다.”
비서의 말에 스티브 대표가 잠시 고개를 든다.
“그렇군. 이제 남은 건 내가 하지. 그만 들어가 봐.”
잠시 뒤,
비서마저 퇴근하자 스티브 대표는 소파에 등을 기댔다.
벌써 10시.
창밖은 이미 어둠이 내려앉았다.
탈진할 정도로 열정을 불태운 하루.
노곤해지는 기분에 스티브 대표는 자연스럽게 셰리 와인을 찾았다.
쪼르륵.
달콤한 꽃 향이 실내를 채운다.
‘권서준 작가를 만난다고?’
드디어 작가와 감독이 만나는 순간이었다.
어떤 대화를 나눌지 궁금했다.
가능하다면 그 자리에 참석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스티브 대표는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눈으로 잠시 와인 색깔을 음미했다.
그리고는 이내 잔을 굴려 향기를 깊게 들이마신다.
최상급 와인이 주는 설렘.
그러나 가장 설레는 순간은 아직이었다.
천천히 잔을 들어 잔에 입을 댄다.
자연스럽게 기울어지는 잔을 통해 붉은빛을 띄는 와인이 입술에 와 닿는다.
지금 이 순간!
향이 가장 가까워지고,
잔의 차가운 온도가 입술을 달래고,
뱀의 유혹처럼 부드럽게 와인이 입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맛을 보기 직전이 오히려 가장 설레는 순간이지. 마치 지금처럼...’
영화 제작을 앞둔 권서준 작가의 작품도 마찬가지였다.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았지만 그의 작품 세계를 상상하는 것만으로 마음이 설레었다.
‘이번엔 또 어떻게 세상을 놀라게 하려나...’
진한 향기만큼이나 마음을 뒤흔드는 와인.
언제 마셔도 기가 막힌 맛이었다.
그리고 정확히 세 시간 뒤.
올란 감독과의 미팅 결과가 도착했다.
***
타이거 스튜디오 대표실.
강대한 대표는 오후 일정도 미룬 채 올란 감독과의 미팅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생각에 잠긴 강 대표는 연신 마우스 휠을 굴린다.
드르륵 드르륵.
넓은 실내를 채우는 마우스 휠 소리.
갑자기 손동작을 멈춘 강 대표가 이내 어금니를 지그시 문다.
‘무조건 성공해야 해...’
영화 사업으로 확대하려는 경영 기조.
모두 조태강 회장의 의지가 담긴 결과였다.
콘텐츠의 가능성을 본 노(老) 회장의 안목.
타이거 스튜디오의 출발 역시 그런 강 회장의 앞을 내다본 안목 덕분이었다.
강 대표 입장에선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볼수록 엄청난 분이셔.’
십수 년을 넘게 모셨지만 여전히 감탄이 나오게 만드는 리더였다.
탁월한 안목과 미래를 바라보는 안목.
언제나 강 대표가 본받고자 하는 부분이었다.
‘내 삶의 목표는 단순한 성공이 아니야. 그 정도의 꿈이라면 이미 이뤘으니까.’
돈과 자리를 넘어 보다 의미 있는 목표에 도전하는 중이었다.
바로 1980년대 때 일본이 선점했던 아시아 콘텐츠를 되찾아오려는 계획.
더 나아가 전 세계를 K 콘텐츠로 채우려는 계획이었다.
그리고 그 허브 역할을 하고자 하는 게 바로 타이거 스튜디오의 목표였다.
따지고 보면 조 회장의 오랜 꿈.
그리고 어느새 강 대표의 꿈이 되어버린 목표.
똑똑똑.
노크와 함께 비서가 들어온다.
“대표님, 하 본부장님 오셨습니다.”
비서의 안내로 하 본부장이 안으로 들어온다. 기다리고 있던 강 대표가 평소와 달리 벌떡 일어난다.
“어떻게 됐습니까?”
앞뒤 다 잘린 질문.
그러나 하 본부장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아주 순탄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정 피디와의 호흡도 잘 맞고, 촬영 현장도 둘러보고, 조연 배우들 오디션 일정까지 잡았습니다.”
강 대표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변수는 없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특히 주연 캐스팅에 크게 만족했습니다.”
주연 캐스팅이라면 권서준 작가의 주도하에 진행된 일이었다.
“이번에도 권 작가의 픽이 먹힌 건가요?”
“네, 그 유명한 감독이 감탄하면서 만족해하더군요. 그 뒤엔 일사천리로 진행됐고요.”
하 본부장의 보고를 받은 강 대표가 잠시 생각에 잠긴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권서준 작가의 이름이 거론된다.
드라마 「이옥」 때부터 자꾸만 그의 이름이 들린다.
‘뛰어난 작가인 건 알았지만, 어쩌면 더 큰 사람일 수도...’
직접 만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소설부터 시작해 드라마, 뮤지컬에 이르기까지 그가 작품을 통해 보여주는 인생의 통찰력은 삼십도 안 된 젊은 작가에게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지켜봐야겠어.’
한국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천재 작가의 존재감.
어쩌면 향후 타이거 스튜디오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필수적인 요소가 될 수도 있었다.
***
회의는 막바지에 이르렀다.
“우선 정 피디가 알아본 촬영 장소는 만족스럽습니다. 제가 머릿속에 떠올린 이미지하고도 잘 부합되고요. 조만간 저희 팀과 함께 실사를 가면 좋을 거 같습니다.”
올란 감독은 헐리웃 감독답게 전문적으로 함께 움직이는 팀이 있었다.
그 부분에 있어서는 정 피디도 쿨하게 받아들였다.
“그거야 당연하죠. 이미지와 현장은 다를 수 있으니까 직접 보시는 게 제 생각에도 나을 것 같아요.”
호의적인 정 피디의 반응에 올란 감독도 편한 미소를 짓는다.
“이제 의논할 내용은 더 없는 건가요?”
“네, 급한 건 다 끝냈고 추가적인 내용은 서면으로 조율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럼, 이제 다른 얘기를 좀 해볼까요?”
미팅이 끝난 후 올란 감독은 자신이 머무는 호텔 라운지로 정 피디와 권서준을 초대했다.
주연 배우 확정과 별개로 작품에 대한 얘기를 더 하고 싶다는 올란 요청 때문이었다.
올란 감독은 가볍게 술 한 잔을 즐기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처음 작가님의 대본을 접했을 때 느꼈던 건 극적인데 너무 과하지 않고, 분명 욕망에 대한 이야기인데 뭔가 더 깊은 무언가를 보여주는 느낌 때문이었습니다.”
올란 감독의 감상에 정 피디는 자연스럽게 대본을 떠올린다.
끊임없이 자신의 욕망과 마주하는 주인공 윤서원이 떠오른다.
“거부할 수 없는 욕망. 그와 동시에 근원을 알 수 없는 두려움과 허무감이 밀려들고, 그러나 끝내 복수심에 자신을 불태우죠. 자신을 불사신이라 여겼지만 그녀는 결국 스스로를 태우는 초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요.”
술 한 모금을 더 넘긴 뒤 올란 감독이 말을 잇는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초는 제 몸을 불살라 결국 주변을 밝히는 거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 속의 윤서원은 결국 세상의 어두운 부분을 밝힌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치 하나의 초처럼 말이죠.”
듣고 있던 정 피디는 속으로 감탄을 터트린다.
허세에 찌든 감독들과는 대화의 깊이부터가 달랐다.
‘이렇게까지 해석할 수 있구나...’
대본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지 못한 자신을 반성하게 만드는 해석이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권서준 작가가 입을 연다.
“맞습니다. 사람들도 마찬가지예요. 욕망에 이끌려 삶을 살아가지만 원하는 걸 쥐어도 결국 채워지는 건 없죠. 얻고, 원하고 얻고, 원하고... 죽을 때까지 정체도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쥐기 위해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욕망에 이끌려 살아가는 사람은 그래서 무기력할 수밖에 없죠.”
정 피디는 고개를 끄덕였다.
권서준 작가의 말대로 현대 사회의 근원적인 문제를 심도 깊게 다루고 있는 작품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떤 인간들은 여전히 존재에 대한 의구심을 품고 살아갑니다. 윤서원이라는 사람이 그렇죠. 욕망과 허무, 그리고 복수와 존재론적 질문에서 끊임없이 답을 찾기 위해 애쓰죠. 그 의미 없어 보이는 과정에서 끝내 자신만의 답을 찾아내는 윤서원의 모습이 결국 이번 작품의 주제와 닿아있고요.”
권서준의 답변에 올란 감독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정 피디는 속으로 감탄을 삼켰다.
‘하아, 두 분 다 정말 엄청나구나.’
몇 마디 대화만으로 두 사람이 가진 철학적 깊이가 느껴진다.
독창적인 화법으로 사회적 메시지를 통찰력 있게 담아낸 작품.
그만큼 올란 감독과 권서준 작가의 대화는 수준이 높았다.
그리고 그 깊이 있는 대화들은 정확히 정 피디의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그동안 느끼지 못한 지적 성장에 뿌듯함이 차오른다.
그런데 그때,
권서준이 그런 정 피디를 보며 말없이 옅은 미소를 떠올린다.
마치 이 모든 상황을 예상했다는 듯 여유로운 표정.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에 의구심이 든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여기까지 오게 된 모든 과정이 온통 의문점투성이였다.
갑작스러운 공동 연출 제안.
실력만 따지면 자신이 아닌 다른 감독에게 돌아가야 하는 게 맞았다.
그런데도 자신을 선택해준 권서준 작가의 뜻이 궁금해진다.
‘...설마?’
그 순간, 정 피디는 뒤통수 한 대를 맞은 것처럼 눈을 크게 떴다.
‘그, 그래. 이거였어. 권 작가님은 나에게 이 기회를 주기 위해 공동 연출을 맡기신 거야...’
거장의 반열에 들어선 감독과의 연출.
단순히 기술적인 부분을 넘어 감독의 철학과 작품 해석에 대한 깊이마저 배울 수 있는 기회였다.
권서준은 그 엄청난 기회를 정 피디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하아...”
뒤늦게 깨달은 권서준 작가의 의도에 감탄이 흘러나온다.
그에 비해 한결같은 권서준 작가의 표정.
그 모습에 더 큰 감동이 밀려든다.
“...”
정 피디는 이내 입술을 곱씹으며 의지를 다진다.
‘고맙습니다. 이 기회, 절대로 허투루 쓰지 않겠습니다.’
잊을 수 없는 다짐.
정 피디 그렇게 한층 더 성장하고 있었다.
***
2시간에 걸친 대화.
올란 감독과의 대화는 다시 생각해도 알찬 시간이었다.
‘역시 창작가들과의 대화는 언제나 즐겁다니까.’
미팅을 마치고 작업실에 돌아오자 장현웅이 맞이한다.
“고생했다. 미팅 결과 좋았다며?”
“응. 더할 나위 없이.”
말 그대로 완벽한 마무리였다.
1차 미팅을 위해 필요한 모든 조건에 대해 합의를 이뤘다.
엔플릭스의 투자를 받고, 타이거 스튜디오에서 제작하는 방식.
유통은 당연히 엔플릭스 오리지널 플랫폼을 통해서 진행되고, 이후 올란 감독과의 작업은 정 피디가 주도하고, 고 부장이 도와주고, 하 본부장이 뒤에서 힘을 써줄 예정이었다.
알아서 돌아가는 구조를 만든 상태.
모든 건 내 계획대로였다.
‘이제 잠시 떠나도 되겠군.’
작업실로 돌아온 나는 모처럼 캐리어를 꺼냈다.
“그건 왜? 너 어디 가?”
지켜보던 장현웅이 의아한 듯 묻는다.
“응. 너도 준비 해.”
“준비? 왜? 우리 어디 멀리 가?”
나는 대답 대신 오전에 받은 해외 우편 한 통을 내밀었다.
“이게, 뭐야?”
장현웅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봉투를 뜯는다. 이내 내용물을 확인한 녀석의 눈이 커진다.
“허, 헐... 이거 진짜야? 우리도 가는 거야?”
“그래. 당연히 가야지.”
“야호!”
장현웅이 환호성을 내지르며 펄쩍 뛴다.
녀석의 손에 들린 건 ‘런던 북페어 초대 티켓’과 퍼스트 클래스 항공권이었다.
오늘 아침 도착한 피어슨 출판사의 선물.
‘이제 시작이군.’
내 영혼의 조각을 담은 두 번째 소설.
그것도 영어권에서 처음으로 출시되는 작품.
그 출판 일정이 바로 3일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