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 bedazzled - 현혹된 (3)
143.
***
잠실에 위치한 초고층 건물.
그 중간쯤 위치한 고급스러운 호텔 디럭스 룸.
12시간 전 한국에 도착한 크리스토퍼 올란 감독은 호텔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침대에서 일어났다.
시차 적응을 하기 위해 억지로 잠을 취했는데 몸 상태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올란 감독은 기상과 동시에 제일 먼저 커피를 찾았다.
평소 빈속에 커피 한잔을 마시는 게 모닝 루틴이라 한국에 와서도 그 루틴은 변하지 않았다.
커피와 함께 즐기는 아침의 여유.
맛있는 커피만큼 하루의 시작을 기분 좋게 만드는 것도 드물었다.
‘흠. 좋군.’
커튼을 치자 햇볕과 함께 한강뷰가 눈 앞에 펼쳐진다.
찬란하게 빛나는 한강.
분명 어제까지는 낯설었던 나라.
그러나 아름다운 아침의 풍경은 올란 감독의 마음을 훔치기에 충분했다.
물론 올란 감독의 마음을 훔친 건 아름다운 풍경뿐만이 아니었다.
올란 감독의 기억은 자연스럽게 전날 감상한 뮤지컬을 떠올렸다.
고용수 부장의 도움으로 본 뮤지컬 「거장의 숨결」.
‘정말 엄청났지. 베네딕트 그 친구가 왜 그렇게 연극에 목맸는지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직접 본 무대는 훨씬 더 감동적이었다.
노래와 배우들의 연기.
그리고 깊이 있는 스토리까지.
공연이 끝난 뒤에도 한참이나 객석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대체 당신, 그 머릿속에 뭘 담고 있는 거야...’
같은 창작자이기에 부러워할 수밖에 없는 능력.
그래서 조금이라도 빨리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참을 수 없는 호기심이 인다.
올란 감독의 입장에서 오랜만에 느끼는 기쁨이었다.
다만, 주연 배우 문제만큼은 아직도 안개 속에 머문 것처럼 뿌옇기만 했다.
한국 배우, 한국 배경.
그 모든 것이 이질적인 외국인 감독.
올란 감독은 자신의 머릿속에 떠올린 이미지에 대해 확신을 갖기 어려웠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고 해야 할까?’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스토리 외에 분명 뭔가 더 있는데, 그게 무엇인지 선명하게 떠오르진 않았다.
머리를 간질거리는 그 느낌에 벌써 며칠째 고민하는 중.
‘대체 그게 뭘까...’
커피 향만큼이나 고민이 깊어지는 사이, 어느새 약속 시간이 되었다.
***
오전 10시.
외출준비를 하던 내 머릿속에 전날 신하율의 연기가 떠오른다.
‘대단했지.’
말 그대로 연기 천재.
한층 성장한 신하율의 연기는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엄청난 싱크로율을 보여주는 배역.
따지고 보면 싱크로율은 맞을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신하율을 염두에 두고 집필했으니까.
사실 배우들이 성공하는 방법은 많았다.
연기를 잘해서, 예뻐서, 인맥이 좋아서.
그러나 단순히 인기를 넘어 배우로서 대중들의 뇌리에 각인 되려면 연기만 잘하는 걸로는 부족했다.
‘연기에, 대본, 그리고 찰떡같이 맞아떨어지는 배역까지 만나야 얻을 수 있는 결과지.’
말 그대로 운명 같은 조합이 이뤄져야 얻어낼 수 있는 결과였다.
그리고 지금 신하율에게 그 기회가 찾아왔다.
물론 운명 같은 배우를 만나야 하는 건 작가도 마찬가지였다.
내 작품을 제대로 연기해줄 연기자를 만난다는 건 행운이나 다름없으니까.
‘내가 그 시절 리처드 버비지 그 친구를 만난 것처럼...’
문득 떠오른 전생의 기억.
그 시절 리처드와 함께 창조한 수많은 세계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두 번의 생애.
그리고 그때마다 영혼의 페르소나를 만난다는 건 참으로 큰 축복이었다.
‘이것만큼은 고맙군.’
누군가를 향하는지도 모를 독백.
솔직한 내 마음이었다.
지이잉.
휴대폰 울린다.
하이든 에이전시 한국지부장을 맡고 있는 고용수 부장이었다.
-올란 감독과 함께 이동 중입니다. 잠시 뒤에 뵙죠.
극비에 한국을 방문한 헐리웃 감독.
‘아마 조만간 윤 기자님께 또 좋은 선물을 드릴 수 있겠군.’
나는 기분 좋게 차에 올라 골목을 벗어났다.
어느새 봄기운이 물씬 풍기는 거리.
시작이 아주 좋은 하루였다.
***
타이거 스튜디오 대표실.
강대한 대표는 하재봉 본부장으로부터 올란 감독과의 미팅 내용을 보고 받았다.
“어제 극비에 입국했고, 한 시간 뒤에 권서준 작가와 정 피디를 만나 미팅을 가질 예정입니다.”
유명 헐리웃 감독의 내한.
가능할까 싶었던 일이 어느새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강 대표의 표정이 진지해진다.
“흠. 하 본부장. 이번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죠?”
“...물론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서 긍정적인 결과는 만들어야 합니다.”
최근 타이거 스튜디오는 영화 사업 쪽으로의 진출을 꾀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엔플릭스와의 제작 협업만큼 큰 기회는 없었다.
‘크리스토퍼 올란 감독과의 공동 연출이라면 무조건 해야지.’
그만큼 올란 감독이 지니고 있는 이름값이 대단했다.
‘게다가 이 사안은 회장님께서 주목하고 있다고.’
사실 강 대표가 이렇게 관심을 보이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미팅 결과 바로 보고해주세요. 그 어느 때보다 회장님께서 이번 미팅의 결과를 기다리고 계시니까요.”
늘 여유 넘치는 강 대표도 이번만큼은 조금 긴장된 표정이었다.
그만큼 이번 미팅에 주목하는 시선이 많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
1시간 뒤.
타이거 스튜디오 본사 회의실.
나는 정은미 피디와 함께 약속 장소에 모였다.
“후우.”
정 피디는 조금 긴장한 듯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정 피디님, 괜찮으세요?”
“네? 아, 네...”
내가 묻자 애써 웃어보지만 이내 긴장한 기색이 엿보인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오늘은 연출자 대 연출자로 만나는 거니까.”
“걱정되기보다는 믿기지가 않아서요. 그렇게 선망하던 감독이랑 함께 같이 작업을 한다는 게... 아직도 꿈인가 싶을 정도예요.”
설렘을 감추지 못한 정 피디가 이내 제 뺨을 두드리더니 나를 쳐다본다.
“그러고 보니 작가님 정말 대단하세요.”
“뭐가요?”
“원래 올란 감독은 자신이 연출하는 모든 영화의 각본을 직접 쓰는 감독으로 유명하잖아요. 그런데 그런 감독이 작가님 대본을 연출하고 싶다고 온 거니까 대단하죠.”
하긴 올란 감독은 3년 전까지만 해도 모든 각본을 본인이 썼다.
그 뒤에 스토리에 대한 한계를 느끼고 대본을 찾았지만 본인의 눈에 차는 대본을 만나기란 힘들었다.
‘어렵게 마음에 드는 대본을 찾았지만 그마저도 어그러졌지.’
베네딕트가 아니면 미완성인 대본.
그 뒤에 접한 게 바로 내 대본이었다.
그런 감독이 내 대본을 원한다는 건 분명 기분 좋은 일이었다.
다시 한번 미팅 자료를 정리하는 사이 회의실 문이 열렸다.
“안녕하십니까, 권 작가님.”
인사를 하며 들어오는 고 부장과 함께 훤칠한 키의 외국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이쪽은 그 유명한 올란 감독님이십니다.”
고 부장의 설명에 올란 감독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연다.
“안녕하세요. 크리스토퍼 올란입니다.”
180이 훌쩍 넘는 키에 금발 머리가 잘 어울리는 백인 남자. 거칠게 기른 턱수염마저 중후한 매력을 돋보이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악수를 하고 본격적으로 대본에 대한 이야기로 대화를 이어갔다.
“작가님의 대본은 정말 놀라웠습니다. 저 역시 각본을 쓰는 사람이지만, 이 작품은 저를 겸손해지게 만들더군요. 이런 작품은 처음 봤습니다.”
헐리웃 감독의 극찬.
나보다 듣고 있는 정 피디와 고 부장의 표정이 밝아진다.
아마도 이번 미팅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겠지
“과찬이십니다. 올란 감독님의 영화 역시 획을 긋는 시도들이 많았죠. 감명 깊게 봤습니다.”
선을 넘지 않는 칭찬을 주고받았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고 했던가, 아부가 아닌 진정한 인정에 서로의 기분이 좋아진다.
“다만, 엔플릭스에서 보낸 배우 리스트는 좀 아쉽더군요.”
내 말에 올란 감독이 쓴 미소를 지었다.
“저도 동감합니다. 그래도 루카스 대표님 입장에선 최선의 선택이었을 겁니다. 영미권 흥행이야 특정 배우 몇몇에게 달려 있는 거나 다름없으니까요.”
솔직하게 인정하는 모습이 오히려 인상적이었다.
“다만, 저 역시 궁금한 부분입니다. 대본의 서사는 훌륭하지만, 아직 주연 배우에 어울릴 만한 배우는 찾지 못했으니까요.”
올란 감독의 눈빛이 차분해진다.
본격적으로 속내를 꺼내겠다는 사인.
“그래서 작가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이미 마음에 둔 배우가 있는 거 같은데요?”
올란 감독은 역시 눈치가 빨랐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감독님께서 원하시면 지금 당장 보실 수도 있고요.”
내 말에 올란 감독의 눈빛이 진지해진다.
“거절할 이유가 없을 거 같은데요?”
***
오디션 장소는 소강당이었다.
빠르게 오디션 준비가 진행되는 사이 올란 감독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주연 배우 캐스팅.
작품성과 작품의 흥행을 위해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였다.
안 그래도 엔플릭스 루카스 대표에게 언질을 받은 상태였고.
‘배우만큼은 자네가 정해야 해. 이 주도권까지 넘겨주면 제작 때 여러모로 힘들 테니까.’
올란 감독 역시 알고 있었다.
이미 작가의 입김이 생각보다 강하게 적용하고 있었으니까.
따지고 보면 엄청난 헐리웃 배우들도 올란 감독의 영화에 출연을 원하면 오디션을 볼 때가 많았다.
물론 감독이 각본을 쓰면서 생각해 둔 배우가 있다면 생략되기도 하지만 올란 감독의 경우 대부분 오디션을 보는 편이었다.
‘아무리 완벽한 대본도, 배우가 어떻게 연기하느냐에 따라 그림이 달라지니까.’
때로 감독의 상상력보다 더 멋진 그림을 만들어 오는 배우들이 있기에 오디션은 필수적인 요소였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오디션은 기대가 됐다.
‘권 작가가 상상한 주연 배우의 이미지를 알 수 있으니까.’
생각이 깊어지는 사이 조명이 꺼진다.
잠시 뒤, 무대 중앙을 비추는 핀 조명이 주변을 밝힌다.
동시에 돌기 시작하는 카메라.
어둠을 뚫고 조명 아래 한 여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자연스럽게 푸른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인다.
그런데,
이내 실망하는 기색이 떠오른다.
‘너무... 아담한데?’
늘씬하지만 서양인에 비해 왜소한 체구였다. 얼굴은 신비한 느낌을 풍기지만 차갑고, 냉철한 이미지는 아니었다.
주인공 윤서원의 역할을 하기에 지나치게 약해 보이는 이미지.
‘미스 캐스팅 같아...’
올란 감독은 카메라를 통해 보이는 이미지와 실제 이미지를 번갈아 가며 확인했다.
그러나 한번 든 실망감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하아...’
속으로 삼킨 한숨과 함께 시작되는 연기.
그런데,
여자의 눈빛이 순식간에 달라진다.
“아버지가 걸어가신 길은 그냥 만들어진 길이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목숨, 그리고 돈으로 만들어진 길이죠.”
고개를 살짝 든 채 내려다보는 눈동자엔 세상을 조롱하는 냉랭한 기운이 느껴진다.
“그런데, 그 피비린내 물씬 나는 길을, 당신들이 감당할 수 있다고요?”
슬쩍 다리를 고쳐 앉는 모습에선 묘한 섹시함까지 풍기기 시작한다.
‘...어?’
순간 올란 감독의 몸이 자연스럽게 모니터로 향한다.
배우의 연기를 조금 더 자세히 보려는 무의식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난 죽는 건 두렵지 않아요. 지는 게 두렵지.”
분명 한국어였다.
어느 부분인지는 씬 넘버를 봐서 알고 있었지만 정확히 배우가 내뱉는 말의 의미는 알 수 없는 외국어.
그런데...
캐릭터의 말이 들리는 듯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고스란히 전해진다.
입체적인 모습.
언어의 한계를 넘어선 연기.
‘이거, 믿을 수가 없군...’
순간적으로 주변을 압도하는 에너지는 엄청났다.
저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에너지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
그런데 올란 감독은 갑자기 신하율의 연기를 멈췄다.
“조금 전 연기, 다시 해줄 수 있을까요?”
의도가 담긴 올란 감독의 요구였다.
연기를 하다 보면 우연히 호흡과 감정이 맞아떨어져 특별해 보이는 연기를 할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우연히 찾아오는 순간.
그러나 두 번은 어려웠다.
사실 같은 연기를 두 번 연달아 하는 건 난도가 훨씬 높았다.
‘조금 전 연기와 비교가 될 수도 있고, 한 번 놓은 감정선을 다시 잡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니까.’
그런데,
신하율은 주저 없이 연기를 시작한다.
“아버님이 가시는 길, 그냥 만들어지는 길이 아닙니다. 돈으로 만들어진 길이죠.”
“...”
올란 감독은 감탄을 안으로 삼키며 신하율을 바라봤다.
신하율의 입에선 조금 전과 똑같은 연기가 흘러나왔다.
아니, 한 번의 경험을 통해 더욱 깊어진 연기가 나온다.
잠시 뒤,
모든 연기를 지켜본 올란 감독이 신하율을 보며 입을 연다.
“연기하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나올 거 같은가요?”
스스로의 연기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한 질문이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조금 뜻밖이었다.
“그거야, 당신이 알겠죠?”
도발적인 대답과 함께 신하율은 도도한 눈빛으로 올란 감독을 내려다본다.
그래.
신하율은 지금도 연기를 하고 있었다.
마치 눈앞에 그녀가 있는 것 같은 느낌.
신하율은 윤서원 그 자체였다.
“하...”
올란 감독이 자연스럽게 권서준을 바라봤다.
권서준은 팔짱을 낀 채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올란 감독의 마음을 아는 듯한 표정을 지은 채.
‘이 사람, 이미 내 생각을 알고 있구나...’
감탄과 다름없는 탄식.
이쯤 되면 이미 결론이 난 거나 다름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