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bedazzled - 현혹된 (2)
142.
***
“후...”
신하율은 한숨과 함께 대본을 내려놓았다.
가제 : 레이디 햄릿.
실패와 좌절로 무너진 IMF 시대.
대부분의 사람이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상실감에 울부짖을 때, 더 많은 것들을 움켜쥐기 위해 혈투를 벌이는 가족 정치극이었다.
그룹 회장이라는 하나뿐인 왕좌에 앉기 위해 벌이는 가족 간의 암투. 천륜까지 저버린 채 욕망에 잠식되는 인간들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품.
치열한 욕망 아래에 감춰진 음모와 배신은 한 번 읽는 순간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스토리였다.
‘이건 마치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혈투를 버는 중세 유럽을 보는 것 같아...’
보면 볼수록 흡입력 있는 스토리에 감동이 밀려온다.
‘권 작가님은 정말 엄청나구나.’
볼 때마다 놀라움을 선사해주는 사람이었다. 한편의 대서사시라고 해도 충분할 정도로 문학성을 가진 작품이었다.
게다가 끊임없이 던져지는 묵직한 질문들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깊은 고뇌에 빠지게 만들었다.
‘후...’
신하율 역시 마찬가지였다.
천천히 숨을 고르며 생각에 잠긴다.
몇 번을 읽었지만 또다시 깊은 생각에 잠기게 만드는 작품.
신하율이 이토록 작품 해석에 집중하는 이유는 자신이 오디션을 보게 될 캐릭터가 바로 이 서사의 핵심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윤서원.
그녀의 캐릭터는 대사 하나로 정의할 수 있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아니, 피보다 진한 건 돈이죠. 그래서 우리가 이 모양 이 꼴인 거고.]
현성 그룹 윤 회장의 손녀.
날 때부터 돋보이는 사람이었다.
윤 회장의 외동딸이라는 타이틀 외에도 외모면 외모, 스펙이면 스펙 부족할 게 없는 인물.
그래서일까.
현성 그룹의 왕좌는 당연히 자신의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당연하게 자신에게 돌아오는 권리와 같은 거였다.
그런데,
자꾸만 날파리들이 꼬인다.
잿밥에 관심 있는 정치권 인사부터, 그룹을 무너뜨리려는 경쟁사까지.
시시각각 그녀의 목줄을 조여 온다.
그런데 적은 밖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한 수저 올려보려는 사촌부터, 무능력한 작은 아버지, 그리고 철없는 엄마까지.
욕심만 가득한 쓰레기들로부터 제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탐욕스러운 욕망을 드러낸다.
살아남기 위해 다른 알을 둥지 밖으로 밀어 떨어트리는 비둘기처럼 거대한 저택 안에선 서로를 제거하기 위한 아비규환이 펼쳐진다.
‘그리고 그 서사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 바로 윤서원이지.’
시크하고 도도한 성격.
차가운 외모와 달리 용광로보다 뜨거운 욕망의 소유자.
그러나 겉모습과 달리 그녀의 가장 근원적인 욕망은 바로 복수였다.
‘아버지를 죽이고, 그 자리를 꿰찬 숙부를 향한 복수...’
죽음과 상실.
거짓된 진실과 충격적인 반전.
그 안에서 삶의 이유와 존재론적 의구심이 윤서원의 삶을 지배한다.
그러나 자칫 잘못 연기하면 그저 돈만 노리는 욕망덩어리로 보일 수 있었다.
‘잘 표현해야 할 텐데...’
웬만큼 섬세한 연기가 아니면 표현하기 어려운 캐릭터.
“후...”
마음을 다잡고 다시 대본을 든다.
그런데 의지와 상관없이 손끝이 가늘게 떨린다.
처음으로 엄습하는 작품에 대한 부담감.
신하율은 애써 힘을 준 채 다시 한번 대본을 읽어 내려간다.
***
늦은 오후.
나는 역삼역 근처에서 정은미 피디를 만났다. 내일 있을 크리스토퍼 올란 감독과의 미팅 때문이었다.
“작가님, 주연 배우는 생각하셨나요?”
“물론입니다.”
“혹시 하율이 인가요?”
“네, 맞습니다.”
내 대답에 정 피디가 손가락을 튕겨 소리를 낸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 읽자마자 하율이 생각이 났거든요.”
역시 내가 창조한 세계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참, 내 정신 좀 봐. 여기요. 일단 작품과 어울릴만한 촬영지를 찾아봤어요.”
정 피디는 꼼꼼하게 정리된 촬영지 리스트를 보여준다.
제일 먼저 확인한 건 바로 가족 정치극의 가장 중요한 무대가 될 저택이었다.
“아무래도 윤 회장 일가가 함께 살아가는 정도면 이 정도 스케일이 어울릴 거 같아서요.”
“여긴 어디죠?”
“춘천에 있는 아트 갤러리예요. 일성 그룹 소유라 촬영 협조가 용이한 편이고요.”
일성 그룹 소유란 말에 자연스럽게 갤러리 이미지가 떠오른다.
나 역시 데이트로 두어 번 가봤던 곳이기도 했고.
문득 떠오른 옛 기억을 뒤로하고 다시 미팅에 집중한다.
그 뒤로도 정 피디는 조사한 내용을 설명했다.
장소마다 선정한 이유, 작품 속 분위기, 상징적인 의미까지 포함된 빈틈없는 자료였다.
1시간에 걸친 회의를 통해 어느 정도 미팅에 대한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고생하셨어요. 이 정도면 아마 올란 감독도 흡족해할 거 같네요.”
“드디어 내일이네요.”
“네, 오후 늦게 도착한다고 하더라고요. 도착하면 바로 작업실로 온다고 했으니 그때 미팅하면 될 거 같습니다.”
“그렇군요...”
자신만만하던 정 피디의 표정이 순간 굳어진다. 아마도 올란 감독의 이름값 때문이겠지.
그 마음을 알기에 나는 차분히 다독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정 피디님의 연출력은 제가 보장하니까요.”
“하아, 감사합니다. 그래도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네요. 그래도 이게 제 입장에서도, 저희 회사에도 너무 어마어마한 기회라서 무조건 잘할 생각입니다.”
묘한 긴장감과 함께 다부진 의지가 엿보인다.
다행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오히려 문제는 다른 곳에서 생기겠지.’
회의를 마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신하율을 점검할 차례였다.
***
JW 엔터테인먼트 대표실.
성도윤 실장은 대표에게 신하율 오디션 일정에 대해 보고했다.
“그게 사실이란 말이지?”
“네, 분명히 올란 감독이라고 했습니다.”
“흠.”
성 실장의 보고를 받은 JW 엔터테인먼트 구승재 대표가 턱을 쓸어내린다.
차세대 톱스타로 밀고 있는 신하율에게 찾아온 엄청난 기회. 억만금을 줘서라도 잡아야 할 기회였다.
“이미 엔플릭스, 올란 감독, 권서준 작가와의 계약이 진행된 상황입니다. 그리고 그 주연에 신하율이 오디션 제안을 받은 거고요.”
“흠. 좋아. 잘 진행해 봐. 이 작품만 잘 되면 어떤 결과가 돌아올지 상상도 안 되니까.”
헐리웃 진출과 함께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네, 알겠습니다.”
철컥.
대표실 문을 닫고 나온 성 실장은 깊게 숨을 내쉰다.
“후.”
올란 감독의 오디션.
대표까지 심사숙고할 정도로 막중한 일이었다.
단순히 영화 한 편이 아니라 신하율이 한국을 넘어서 글로벌 스타가 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이 기회를 절대 놓쳐서는 안 돼.’
성 실장은 굳은 표정으로 연습실을 찾았다.
신하율은 어젯밤부터 집에 가는 것도 포기한 채 연습실에 틀어박혀 연습하는 중이었다.
‘하율이 연기야 걱정할 건 없지.’
성 실장은 내심 안도하며 연습실 문을 열었다.
그런데...
연습 중인 신하율의 모습은 어딘가 낯설었다.
불안한 눈빛.
바짝 굳은 몸.
평소의 신하율이 아니었다.
‘얘가, 왜 이러지?’
지켜보는 성 실장의 표정도 굳어지고 있었다.
***
크리스토퍼 올란 감독과의 오디션.
그 큰 기회를 난 하루 전에야 신하율에게 알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오래 본다고 달라질 게 없으니까. 오히려 부담감만 커지겠지.’
첫 주연.
내가 쓴 대본.
그리고 헐리웃 감독의 현장 오디션까지.
배우라면 당연히 부담감을 커질 수밖에 없었다.
‘아마 엄청나게 헤매고 있을 거야.’
물론 나는 그 부분까지 예상하고 있었다.
스스로는 빠져나오기 힘든 늪.
나는 조금 도움을 줄 생각이었다.
점심이 막 지난 시간.
나는 약속 시간에 맞춰 JW 엔터테인먼트에 도착했다.
“아, 작가님.”
미리 연락을 해둔 터라 성 실장이 반갑게 나를 맞이한다.
“하율이는 괜찮나요?”
“...”
만남과 동시에 이어진 질문.
순간 성 실장의 표정이 심각해진다.
그리고는 이내 천천히 고개를 젓는다.
“평소랑 다르게 완전히 얼었어요. 부담감 때문인 걸 알겠는데, 원래 강심장인 애가 왜 이러는지 저도 모르겠어요.”
절대 실패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오히려 몸을 굳게 만든 것. 연기를 즐기지 못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성 실장의 안내로 연습실로 향했다.
“잠시만요.”
나는 문을 열려고 하는 성 실장을 막고는 잠시 유리문을 통해 안을 들여다본다.
고요한 실내.
잠시 뒤 신하율의 목소리가 들린다.
“평화는 끝났어. 이제는 칼을 꺼내 상대를 벨 차례야. 그게 친구든, 친척이든, 가족이든 상관없어. 내가 든 칼엔 눈이 없으니까...”
본격적으로 승계 구도 싸움에 뛰어든 윤서원의 다짐을 담은 대사였다.
동시에 이후 서사의 중요한 복선이 되는 대사이기도 했고.
그러나,
신하율의 연기에선 독기도, 욕망도, 복수심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아...”
본인도 알고 있는지 바닥에 털썩 주저앉는다.
나야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나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 자, 작가님...”
뒤늦게 나를 알아본 신하율이 벌떡 일어난다.
“너답지 않게 왜 그래? 문제라도 있는 거야?”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혹시 배역이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니지?”
분위기를 풀기 위한 농담.
그러나 잔뜩 놀란 신하율이 손사래를 친다.
“아, 아니요. 그럴 리가요. 너무 멋있어서 반할 지경인데요...”
자연스럽게 대본을 바라보는 눈빛은 진심이었다.
“겉으로는 엄청 차갑고, 욕심 많아 보이지만 그 속에 있는 여린 부분은... 어딘가 모르게 저를 닮은 거 같기도 하고요.”
역시 신하율의 캐릭터 이해도는 웬만한 톱 배우보다 훨씬 뛰어났다.
“그냥 저도 모르게 긴장했나 봐요. 죄송해요. 다시 연습해 볼게요.”
입술을 야무지게 물며 다시 의욕을 다진다.
그러나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면 지금까지 그렇게 고생할 리가 없었다.
“결과에 너무 연연하지 마. 어차피 네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그냥 서원이 얘기에 귀를 기울여봐.”
“...얘기요?”
“그래. 서원이가 무슨 얘기를 하고 싶어 하는지 들어보라고. 아마 그 친구도 자기 얘기를 들어줄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
“그렇게 서원이의 아픔에 한 발짝 다가가 봐.”
순간 신하율의 표정이 굳는다.
그리고 이내 천천히 들리는 턱.
“아... 아....”
자연스럽게 입이 벌어지면 허공을 응시하며 큰 눈을 빠르게 깜빡인다.
갑자기 눈빛에서 생기가 돈다.
그리고 이내 얼굴이 편안해진다.
‘역시 단번에 이해했군.’
내가 말한 건 연기 지적이 아닌 캐릭터와의 공감에 대한 부분이었다.
누군가를 흉내 내는 게 아니라 그 캐릭터의 본질을 이해하려는 시선.
‘캐릭터의 마음을 먼저 이해해야 진정한 연기도 나오는 법이니까.’
단순한 시선의 변화.
그러나 그 차이에서 나오는 결과는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시선... 시선....”
입술을 곱씹던 신하율의 눈빛이 단단해진다.
“저, 다시 해볼게요.”
이내 달라진 표정.
역시 신하율의 재능은 천부적이었다.
잠시 뒤,
기다렸다는 듯이 신하율의 연기가 펼쳐진다.
“평화는 끝났어. 이제는 칼을 꺼내 상대를 벨 차례지.”
낮은 톤.
그러나 섬뜩한 독기가 눈빛에 맴돈다.
“그게 친구든, 친척이든, 가족이든 상관없어. 내가 든 칼엔 눈이 없으니까.”
옅은 미소를 띠는 모습에선 광기마저 느껴진다.
“어우...”
지켜보던 성 실장이 순간 팔뚝을 쓰다듬는다. 그만큼 소름 끼치는 연기였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보다 대사 말미에 남는 진한 여운이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묘한 슬픔.
윤서원의 상처와 분노, 그리고 복수심이 저 짧은 대사 안에 함축적으로 담겨있었다.
‘윤서원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었군.
달라진 신하율의 연기에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더 이상의 조언은 필요 없었다.
‘또 한 단계 성장했어. 이 정도면 충분하지.’
크리스토퍼 올란.
세계적으로 유명한 헐리웃 감독.
그런 사람이 이 연기를 직접 보면 뭐라고 말할까?
벌써부터 기대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