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bedazzled - 현혹된 (1)
141.
***
늦은 오후.
인터넷 뉴스에 한 기사가 올라왔다.
_________
[봄과 함께 찾아온 화려한 뮤지컬 대전]
호화 캐스팅으로 화제를 모은 두 작품의 라이벌전이 눈길을 끌고 있다. 국내 창작 뮤지컬 작품으로 스타 파워로 무장한 두 작품이 무대에 올라 정식으로 맞붙었다.
가장 먼저 포문을 연 건 「가시리 가시리잇고」였다. 1차 티켓 오픈 2시간여 만에 전석 매진이라는 사상 초유의 기록을 세워 세간의 시선을 끌었다.
장기 집권이 예상됐던 기록. 그러나 이 기록은 불과 3일 만에 「거장의 숨결」(연출 : 서미연, 창조극단 제작)에게 넘겨주게 된다.
.
.
.
그리고 2주 뒤에 이어진 2차 티켓 오픈 결과는 1차 티켓 결과보다 더 극명한 차이를 보였다. 거장의 숨결은 티켓 오픈 1분 만에 전석 매진이라는 사상 초유의 기록을 세우며 지금까지 예매 순위 1위를 지키고 있다.
서울 블루라군씨어터 로비에서는 프로그램 북, 사인 집, OST CD를 구매하려는 사람으로 긴 줄이 만들어지는 진풍경이 매일 벌어지는 중이다.
_________
이어지는 댓글들.
-이번 작품이 대단한 건 국내 순수 창작 뮤지컬로 이뤄낸 성과라는 점이야.
˪인정. 라이센스 뮤지컬 보다 훨씬 더 의미가 있지.
-솔직히 내 관전 포인트는 조현성과 황준수의 팬덤 싸움이었음. 두 사람 모두 확고한 팬덤을 가진 배우들이라 보는 재미가 꿀잼.
˪시작은 황준수가 창대했으나 그 끝은 미약했지.
˪조현성 압승.
댓글을 읽던 조현성이 주먹을 움켜쥔다.
“후. 작가님 덕분에 후배한테 밀리는 일은 면할 수 있었네요.”
뒤를 바짝 따라오던 후배와의 격차.
그동안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잘 나가던 배우가 후배한테 밀렸다는 소식만큼 자존심을 상하게 만드는 일도 드물었다.
“말씀드렸잖아요. 이번 작품에선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내 말에 조현성이 미소를 짓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작품 하길 잘했네요. 여러모로 정말 감사합니다.”
최근 조현성의 연기는 물이 오른 상태였다. 다른 배우들과의 합도 좋았고, 특히 캐릭터에 대한 해석이 깊이를 더했다.
‘다 방수찬 배우와의 시너지 효과지.’
서로에게 자극이 되는 두 사람의 모습이 시간이 갈수록 극의 완성도를 높이고 있었다.
모두 예상한 대로였다.
***
뮤지컬 「거장의 숨결」.
공연이 이어질 때마다 새로운 기록을 써 내려가고 있었다. 작품에 대한 화제성 역시 더욱 높아져만 간다.
시간을 빠르게 흘렀고 2주 뒤.
기다리던 3차 티켓 오픈 결과가 나왔다.
“작가님, 이번에도 전석 매진입니다!”
매번 들어도 질리지 않는 소식이었다.
그에 비해 오늘 극단의 상황은 참담했다.
“흠. 저쪽은 정말 큰 일 났네요.”
3차 티켓 오픈 결과는 더욱더 충격적이었다.
유료 구매율이 무려 20% 이하로 떨어졌다.
“이 정도면 거의 망했다고 할 수 있죠.”
“요즘엔 무료 표도 엄청나게 뿌린다고 하더라고요.”
연극과 달리 고가의 뮤지컬 티켓.
그 티켓을 무료로 뿌린다는 것만으로 오늘 극단의 사정이 얼마나 좋지 않은지 알 수 있었다.
언 발에 오줌 누는 격.
어떻게든 살아보기 위한 노력이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미 회생 불가능한 상태야.’
경쟁사였던 오늘 극단의 소식이 전해지고 모두가 안도했다.
그러나 유독 한 사람만 표정이 애매했다.
바로 서미연 대표였다.
“대표님?”
“...어?”
“우리가 오늘 극단도 이기고, 다 잘 됐는데 표정이 왜 그러세요?”
서 대표는 답답한 듯 크게 숨을 한 번 들이마시고는 입을 뗐다.
“솔직히 경쟁에서 이기긴 했지만 마냥 좋아하긴 어려워서. 결국 저쪽의 실패가 공연계 전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있으니까.”
“그건 걱정 안 해도 되지 않을까요? 저쪽 작품의 경우 투자금 대부분을 김 대표가 혼자 담당했다고 하던데요?”
직원의 말은 사실이었다.
욕심을 부린 대가.
그러나 서 대표의 표정은 여전했다.
“그건 맞지만 거액이 투자된 작품이 실패한 것만으로도 투자를 위축시킬 수 있거든.”
서 대표는 업계 담당자답게 큰 시야를 가진 사람이었다. 작품 하나가 아닌 전체 시장에 끼칠 영향을 고민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서 대표의 말대로 무려 100억이 넘게 투자된 뮤지컬의 실패는 적잖은 파동이 될 수도 있었다.
2000년대 초반 거액이 투자된 영화가 한 번에 망하자 전체적인 투자가 위축된 사례도 있었고.
물론 이번엔 달랐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투자는 아마 더 활발해질 테니까요.”
내 말에 서 대표가 쳐다본다.
“그러면 좋겠지만 창조 극단의 실패는 꽤 오랫동안 이슈가 되지 않을까요?”
“이슈가 되겠죠. 그만큼 큰 실패도 드무니까요. 하지만 투자자들은 언제나 실패보다 성공 사례에 더 관심을 보이는 법이죠.”
순간 서 대표의 눈이 커진다.
“혹시 그 말씀은 우리가 성공한 만큼 뮤지컬에 대한 투자가 늘 거라는 말씀이신가요?”
내 생각을 정확히 읽은 서 대표의 질문.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투자란 애초에 수익을 내기 위한 행위잖아요. 투자사 입장에선 실패보단 성공 사례에 집중할 수밖에 없죠.”
몇 번의 실패를 극복하는 것도 결국 한 번의 성공이었다. 그만큼의 수익을 한 번에 안겨주는 게 또 뮤지컬의 매력이기도 했고. 그 가능성을 보여주는 게 바로 우리 작품의 숨은 역할이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서 대표가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말씀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네요. 저희가 잘 되면 그만큼 시장에 대한 투자도 활발해 질 거고요.”
한결 편해지는 서 대표의 얼굴.
물론 기쁜 소식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서준아! 이것 좀 봐봐.”
장현웅이 다급히 다가와 태블릿 PC를 내민다.
런던 타임즈 기사를 번역한 기사.
영국에서도 활발하게 활동 중인 베네딕트의 소식이었다.
[헐리웃 스타 베네딕트는 왜 연극을 선택했나?]
세계적인 신드롬을 일으킨 베네딕트가 주인공 크리스토퍼 말로의 역할을 맡았다는 것만으로 영국 역사상 가장 빠른 매진을 기록했다는 소식이었다.
‘영국 역사상 가장 빠른 매진이라, 역시 벤의 인지도는 엄청나군.’
베네딕트는 제 역할을 잘해주고 있었다.
같은 IP, 다른 장르.
작품 「거장의 숨결」은 영국과 한국에서 쌍끌이를 하는 중이었다.
베네딕트에 대한 기억이 자연스럽게 한 사람을 떠오르게 만든다.
‘참, 그러고 보니 내일이었지?’
자연스럽게 2주 전 잡아놓은 약속이 떠오른다.
크리스토퍼 올란 감독의 내한.
향후 영화 제작과 관련된 중요한 논의가 이뤄질 미팅이었다.
그리고 그 미팅에서 내가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선 약간의 준비가 필요했다.
이미 오래전에 계획해둔 그림.
그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나는 휴대폰을 들었다.
***
미국 뉴욕시에 위치한 JFK 국제공항.
인천 공항발 비행기가 이륙을 준비 중이었다.
듬성듬성 자리가 빈 퍼스트 클래스.
대본을 보고 있던 크리스토퍼 올란 감독이 잠시 생각에 잠긴다.
‘몇 번을 봐도 대단하군...’
보고, 또 보고, 세밀하게 들여다볼수록 감탄이 나오는 대본이었다.
볼 때마다 새로운 메시지와 영감을 마주하게 되느라 수십 번도 넘게 보다 보니 이미 종이 대본은 엉망이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물론 대본만 읽은 건 아니었다.
한국의 이미지를 살리기 위해 IMF 직후의 한국 이미지를 충분히 파악한 상태였다.
한국에 이미 전문가를 파견해 촬영 현장도 알아볼 정도로 열정적으로 작업을 준비 중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한 가지만큼은 해결되지 않았다.
‘다만, 아직 주인공을 찾지 못했어.’
욕망에 찌든 주인공.
레이디 햄릿이라는 가제에 걸맞게 권력을 쥔 자, 돈을 쥔 자, 그 사이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강인한 여자였다.
루카스 대표는 이 역할을 보고 바로 헐리웃 배우들을 떠올렸다. 강인한 역할을 주로 했던 배우들, 카리스마 넘치는 배우들이 주를 이었다.
유명하다는 한국 여배우들의 리스트는 봤지만 아직 확신할 수 있는 배우는 찾지 못했다.
‘아마 작가님에게도 생각이 있겠지.’
처음으로 방문하는 낯선 땅.
그러나 한 예술가와의 만남만으로 설레는 여행이었다.
***
JW 엔터테인먼트 사무실.
고요한 실내에 신하율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아싸!”
스케줄을 확인하던 성도윤 실장이 그 목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든다.
“뭐, 뭐야? 무슨 일이야?”
“예매 성공했거든요.”
「거장의 숨결」 3차 티켓 예매에 성공한 신하율이 손가락으로 V를 그린다.
얼마나 신이 나는지 같은 자리에서 방방 뛴다.
“하율아, 그게 그렇게 좋냐?”
지켜보던 성 실장이 피식 웃으며 묻는다.
“그럼요. 2차 티켓 오픈 때 놓쳐서 얼마나 아쉬웠다고요.”
대세 배우인 신하율도 티켓 구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거장의 숨결」의 흥행 열기는 대단했다.
“하긴, 안 그래도 뮤지컬 쪽에선 벌써부터 난리더라. 지금까지 세웠던 모든 기록을 아마 깨지 않을까 하는 사람들도 있고.”
“아마 그렇게 될 거예요. 저만 봐도 그렇잖아요. 티켓만 구할 수 있다면 몇 번이나 재관람하고 싶은 정도니까.”
성 실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하긴, 크리스토퍼 말로 역을 맡은 두 주연 배우들이 다 엄청나다며? 소문에 의하면 두 버전 다 봐야 한다고 하던데?”
“그래서 제가 이렇게 구한 거잖아요. 이번엔 조현성 배우님 버전으로 보고 싶어서요.”
공연 볼 생각에 신하율은 벌써 콧노래를 부른다.
“그러고 보면 권서준 작가님이 대단하긴 해. 어떻게 연이어서 이렇게 퀄리티 있는 작품을 쓰시지? 솔직히 소설과 공연 예술은 전혀 다른 분야인데 말이야.”
“권 작가님이니까 가능한 일이죠. 우리 권 작가님이 보통 분이 아니잖아요.”
“하긴.”
성 실장이 미소를 지으며 동의한다.
지이잉.
그런데 그때, 신하율의 휴대폰이 울린다.
“어? 권 작가님이신데요?”
신하율은 마치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들뜬 표정으로 전화를 받는다.
“와, 안 그래도 작가님 얘기하고 있었어요.”
환하게 웃던 신하율이 잠시 인사를 나눈다.
그런데,
갑자기 표정이 굳는다.
안 그래도 큰 눈을 더욱 크게 뜬다.
“네, 네.... 네에?”
조금 전과 전혀 다른 목소리 톤.
드라마틱하게 올라가는 목소리에 자연스럽게 성 실장의 시선이 향한다.
“아... 네. 네. 물론이죠. 네, 네. 알겠습니다...”
잠시 뒤,
신하율이 넋을 잃은 채 휴대폰을 내려놓는다.
“왜 그래? 표정은 왜 그렇고?”
영문을 알 수 없는 성 실장이 물었다.
그러자 신하율이 마지못해 입을 연다.
“권 작가님이... 대본 보내주신다고 해서요.”
“대본? 아, 권 작가님 차기작? 그때 말씀하신 영화 대본 말하는 거지?”
신하율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안 그래도 신하율이 간절히 기다리던 소식이었다.
그래서 성 실장은 신하율의 반응이 더 이해되지 않았다.
“근데, 좋아해야지 표정이 왜 그래?”
“그게... 오디션 준비하라고 하셔서요.”
“오디션? 갑자기?”
“네...”
조금은 빠르게 진행되는 전개였다.
그러나 상대는 권서준 작가였다.
허튼소리를 할 리가 없었기에 성 실장은 보다 자세히 물을 수밖에 없었다.
“감독은 누구라는데?”
“...올란 감독이요.”
“...누구? 오란?”
당연히 한국 감독이라고 생각한 성 실장이 되묻는다.
그러나 신하율이 고개를 젓는다.
“아니요. 크리스토퍼 올란 감독이요...”
“...”
순간 성 실장의 눈이 가늘어진다.
지금 자신이 들은 소리가 맞나 싶은 생각 때문이었다.
“설마... 헐리웃 감독인 크리스토퍼 올란을 말하는 거야?”
사실 성 실장의 질문은 바보 같았다.
크리스토퍼 올란 감독이 세상에 둘 일리가 없었다.
그만큼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감독이니까.
“네.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신하율이 고개를 끄덕인다.
“...”
성 실장은 놀란 나머지 말을 잃고 말았다.
헐리웃 감독 앞에서의 오디션이라니...
다시 들어도 믿을 수 없는 소식이었다.
그러나 실무자답게 어느새 손에 쥔 건 휴대폰이었다.
핵폭탄급 희소식.
가장 빨리해야 할 건 보고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