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 shooting star - 별똥별 (4)
139.
***
정은미 피디.
내가 생각한 공동 연출자였다.
선택의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내가 창조한 세계를 가장 잘 이해하는 연출자니까.’
나는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며 내 생각을 전달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고용수 부장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정은미 피디라... 저 역시 잘 알고 있습니다. 드라마 쪽에서 연출력만큼은 인정받는 피디니까요. 최근 마무리한 작품도 여러 면에서 호평을 받았고요.”
생각보다 후한 칭찬으로 시작된 대화.
그러나 한국말을 끝까지 들어야 의도를 아는 법이었다.
“다만, 괜찮을까요? 같은 연출자지만 엄연히 피디와 감독은 그 역량과 역할이 다르니까요. 갑자기 영화 연출을 맡기엔 무리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고 부장의 염려는 합리적이었다.
물론 그 부분은 나 역시 알고 있는 부분이었다.
“맞습니다. 영화감독이 예술가 쪽에 가깝다면 드라마 피디는 방송사에 소속된 회사원에 가깝죠.”
영화의 경우 제작, 배급, 투자까지 그 역할이 세분화되어 있지만 방송국의 경우 드라마국에서 방영과 관련된 모든 업무를 진행해야 했다.
예산견적과 통제, 마케팅, 연출까지.
이 모든 일을 담당하는 게 바로 피디의 업무였다.
결국 피디의 경우 영화감독과 달리 드라마를 방영하기까지 예산 통제 및 견적 등 다양한 부분까지 신경 써야 했다.
이게 별거 아닌 거 같지만 큰 차이를 가져오는데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작품에 얼마나 집중할 수 있냐는 점이었다.
‘연출에만 집중할 수 있는 영화감독과 달리 상대적으로 피디는 프로듀싱과 관련된 전반적인 업무를 해야만 하니까. 마치 모래주머니를 달고 달리기를 하는 것과 같지.’
그렇다면 만일 이 모래주머니를 떼 주면 어떨까? 오로지 작품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면?
‘아마 지금보다 훨씬 더 나은 연출이 나올 수 있을 거야.’
물론 이 모든 걸 장황하게 설명할 생각은 없었다.
언제나 그렇듯 백번 설명하는 것보다 한 번 그 결과를 보여주는 게 나으니까.
내 답변은 자연스럽게 듣고 있는 고 부장을 설득하기 위한 방향으로 흐른다.
“고 부장님께서 걱정하시는 부분이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 피디님이 그동안 연출한 작품들을 떠올리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
고 부장이 잠시 생각에 잠긴다.
아마 퀄리티 있는 정 피디의 작품을 떠올리고 있겠지.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나는 자연스럽게 이유를 더 했다.
“게다가 이번 작품의 경우 메인 연출이 올란 감독이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 큰 줄기 위에 정 피디님의 세세한 디테일을 입히는 거죠. 그렇게만 된다면 한국적인 느낌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면서도, 전 세계에 이질감 없이 다가갈 수 있는 좋은 작품이 나오리라 생각합니다.”
애초에 메인 스토리는 내 대본을 따라 진행될 테고, 메인 연출은 올란 감독이 맡기도 된 상황이었다.
작품 본연의 매력을 상승시키는 데 필요한 게 바로 정은미 피디의 세밀한 연출, 한국식 연출이었다.
여러모로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조합.
어차피 올란 감독이 연출의 주축이라는 사실에 고 부장 역시 동의한다.
“말씀을 듣고 보니 이해가 되네요.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고 부장은 내 의견을 정리해 스티브 대표에게 보고했다.
자연스럽게 공은 타이거 스튜디오에 넘어간 상황.
걱정할 이유는 없었다.
결말을 내 예상대로 될 테니까.
***
다음 날 아침.
타이거 스튜디오 회의실.
하 본부장의 호출로 진영민 CP와 정은미 피디가 급히 모였다.
진지한 표정으로 진행 중인 회의 안건은 바로 공동 연출. 무려 드라마도 아닌 영화 공동 연출 제안이었다.
“흠.”
하 본부장이 팔짱을 낀 채 깊은 한숨을 내쉰다.
“흠.”
뒤따라 진영민 CP도 한숨을 내쉰다.
“야, 넌 왜 따라 한숨 쉬냐?”
“따라 한 게 아니라 그만큼 어려운 고민이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하아...”
또다시 흘러나오는 건 한숨뿐이었다.
“엄청난 기회인 거 같으면서도 이게 섣불리 먹어도 되는 건가 싶고...”
선악과를 눈앞에 둔 이브의 마음이 이랬을까 싶을 정도로 흔들리는 마음.
“으아아아. 진짜 미치겠네.”
결국 답답한 하 본부장이 제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린다.
그만큼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제안이었다.
잘만 되면 윗선에 좋은 이미지를 줄 수 있지만 잘 못 했다가는 그야말로 회복 불능에 가까운 데미지를 입을 수 있었다.
‘직장 생활이라는 게 괜히 나섰다가 크게 망하는 경우가 많단 말이지. 고민이네...’
어쩔 수 없는 직장인이기에 하 본부장 역시 자꾸만 몸을 사리게 된다.
“하아, 정 피디 네 생각은 어때?”
결국 하 본부장의 질문은 당사자에게 향한다.
평소와 달리 진지한 얼굴로 고민하고 있던 정 피디가 입을 연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가 영화라니... 얼떨떨하긴 해요. 정말 다른 분야니까요.”
“그럼, 어떡할까? 거절할까?”
하 본부장의 말에 정 피디가 세차게 고개를 젓는다.
“무슨 말씀이세요? 무조건해야죠. 다른 사람도 아닌 권 작가님의 제안이잖아요. 게다가 이번에 잘만 하면 엔플릭스와도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고요.”
엔플릭스와의 기회.
동시에 올란 감독의 연출을 옆에서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빨리 결정하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우리 쪽에서도 스탠스를 분명하게 정해야 권 작가님 쪽에서도 추진할 수 있을 테니까요.”
“...”
정 피디 말에 골똘히 고민하던 하 본부장이 이내 테이블을 내려친다.
“하아, 그래.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지. 한번 해보자고!”
대표 이사, 더 나아가서 조 회장에게까지 좋은 인상을 줄 수 있는 기회였다.
그렇게 정 피디의 공동 연출 참여가 결정되었다.
***
늦은 오후.
나는 작업실에서 모처럼 클래식을 즐겼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제1번 프렐류드.
바이올린이나 첼로의 경우 피아노 반주를 넣는 게 일반적이지만 나는 첼로가 전해주는 울림 깊은 선율을 음미하기 위해 무반주곡을 들었다.
피아노 반주가 없지만 어색하지 않은 연주. 마치 적절한 여백마저 곡의 한 부분처럼 꽉 찬 느낌을 선사한다.
뒤이어 자유롭고 즉흥적인 리듬이 내 주변을 감싼다. 그야말로 귀가 행복해지는 순간.
‘좋군.’
나는 곡을 음미하며 자연스럽게 내 차기작의 심상을 떠올렸다.
가제 : 레이디 햄릿.
욕망에 휩싸인 인간 군상의 모습들.
그들 사이로 흐르는 자유롭고 경쾌한 리듬이 오히려 극적 비장미를 한껏 끌어올리는 기분이었다.
이제 남은 건 오직 연출적인 부분.
가장 중요한 건 바로 연출자들의 역량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올란 감독과 정 피디의 합은 기대가 됐다.
‘두 사람 모두 훌륭한 연출자들이니까.’
물론 역량만 가지고 정 피디를 선택한 건 아니었다. 능력만 따지면 지금 당장 더 나은 연출자들이 줄을 섰으니까.
그런데도 내가 정 피디를 선택한 두 번째 이유는 바로 최근 변화를 보이는 타이거 스튜디오 경영 방향 때문이었다.
최근 영화 쪽 사업도 관심을 보이는 타이거 스튜디오의 경영 전략 역시 내 선택에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콘텐츠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알아차린 조태강 회장의 진두지휘에 다양하게 펼치는 사업.
‘그런 의미에서 조태강 회장님의 안목은 훌륭한 편이지.’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시장을 읽는 눈이 그룹 총수다웠다.
물론 타이거 스튜디오만의 경영 전략은 아니었다.
타 제작사 역시 콘텐츠를 보유하기 위해 장르와 플랫폼을 넘어 무한 증식 중이었으니까.
결국 거대 포식자들이 먹이사슬의 최상위를 차지하는 것처럼 콘텐츠 시장 역시 드라마, 영화, 숏폼까지 모두 섭렵해야 최후 승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타이거 스튜디오의 최근 기류는 오히려 내게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었다.
해외 자본을 통해 양질의 콘텐츠를 개발하고, 그로 인해 내 작품의 퀄리티마저 상승시킬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날 오후.
타이거 스튜디오에서 답변이 돌아왔다.
물론 내 예상대로였다.
[공동 연출 진행하고 싶습니다.]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나의 차기작은 아주 순탄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
며칠 뒤.
정확히 2주 차를 맞이하는 「가시리 가시리잇고」 공연 현장.
“와!!”
커튼콜을 위해 배우들이 무대에 서자 객석에서 박수 소리가 터진다.
지켜보던 김재용 대표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다.
“좋아. 아주 좋았어.”
김 대표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고, 관객들의 반응도 좋았다.
“훌륭하네요. 멋진 공연 잘 봤습니다.”
박성규 교수의 초대로 온 뮤지컬계의 인사들의 반응도 역시 좋았다.
그뿐만 아니라 커뮤니티의 반응 역시 최고였다. 자신의 역대 작품 중 가장 큰 흥행을 예상 할 정도.
물론 간간히 안 좋은 댓글이 보이기도 했다.
-역사와 다른 결말이 좀 그렇긴 하지만 나쁘진 않았어요.
-재미있었어요. 2시간 공연 순삭.
-여운은 없는 게 좀 아쉽지만 돈이 아깝진 않았어요.
애매한 댓글들이 은근히 신경을 긁는다.
“이것들 서 대표가 고용한 알바들 아냐? 재밌게 봤으면 됐지, 뭐가 여운이 없다는 거야? 예술에 대해 알지도 못하는 것들이.”
발끈하는 김 대표를 보며 박 교수가 다독인다.
“김 대표, 신경 쓰지 마. 원래 잘 되면 배 아파하는 것들이 생기는 법이니까.”
박 교수의 말대로 워낙 시기 질투가 판치는 바닥이었다. 대충 넘기려 했지만 찜찜한 기분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자, 그러지 말고 한잔하러 가자고? 내일이 2차 티켓팅 오픈이지?”
박 교수의 말에 김 대표가 화를 가라앉힌다.
‘그래, 별거 아닌 일에 신경 쓰지 말자고. 진짜 승부는 내일이니까.’
1차 티켓 오픈 승부는 무승부.
냉정하게 매진 시간까지 따지면 판정패에 가까웠지만 이번엔 달랐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밟아주지.’
김 대표가 다시 한번 주먹을 움켜쥔다.
***
3월 셋째 주 수요일.
드디어 2차 티켓 오픈 날이었다.
나는 시간에 맞춰 창조 극단 사무실을 찾았다.
“어서 오세요, 작가님.”
오랜만에 만난 서 대표가 나를 반긴다.
그러나 사무실에 모인 극단 직원들의 표정은 1차 티켓 오픈 때보다 오히려 더 진지했다.
단발적인 성공인지, 장기적인 흥행으로 이어질 수 있는 흥행인지 오늘 결과에 따라 달라지니까.
“곧 시작입니다.”
마치 카운트다운처럼 시계 초침이 실내에 울려 퍼진다.
작은 숨소리, 침 넘기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고요한 몇 초가 흐르고, 이내 직원이 새로 고침을 누른다.
딸깍.
F5키를 누르는 소리와 함께 홈페이지가 갱신된다.
서버 보강을 한 예매 사이트들은 다행히 다운되지 않았다.
그로 인해 오픈과 동시에 실시간으로 티켓 판매 현황을 알 수 있었다.
“...”
그런데 바로 누른 탓일까 크게 달라지지 않은 상황.
30초쯤 뒤.
직원은 다시 한번 조심스럽게 F5 버튼을 누른다.
그리고 잠시 뒤,
모니터를 확인한 직원이 다급히 서 대표를 찾는다.
“대, 대표님!”
“왜? 무슨 일이야?”
놀란 서 대표가 눈을 뜨며 묻는다.
“매, 매진입니다.”
“...뭐? 벌써?”
“네, 전석 매진입니다.”
고작 1분 남짓한 시간 만에 얻은 결과.
1차 티켓 오픈 때보다 빨라졌다.
“와!!”
고요하던 사무실에 환호성이 터지기 시작한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
“오늘 극단 쪽은 어때?”
서 대표의 관심이 자연스럽게 경쟁작으로 향한다.
“자, 잠시만요.”
빠르게 검색어를 입력하는 직원.
잠시 뒤,
커다란 모니터엔 「가시리 가시리잇고」의 예매현황이 떠오른다.
“...어라?”
전혀 의외의 결과.
사무실에 모인 모든 직원들의 눈이 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