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137화 (137/203)

137. shooting star - 별똥별 (2)

137.

***

다음 날, 엔플릭스 본사.

출근과 동시에 루카스 대표의 얼굴이 잔뜩 굳어버린다.

간밤에 한국에서 날아온 소식 때문이었다.

[권 작가는 모든 계약 조건에 동의했습니다. 다만 주인공이 한국인이어야 한다는 건 변함이 없습니다. 이하 세부 계약 내용을 첨부합니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주연 배우의 인종 변경은 있을 수 없다와 올란 감독이 연출을 맡게 될 경우 한국 감독과 공동 연출을 원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아...”

루카스 대표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온다.

처음 대본을 보자마자 성공을 확신했다.

영화화, 그 뒤를 이어 드라마화까지 이어지는 흥행 신화가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펼쳐졌다.

애초에 재미있는 대본.

다만, 흥행을 위해 주인공만큼은 변주를 줘야 했다.

‘백인으로 바꾸면 몇 배는 잘 될 거야.’

백인 주인공에, 올란 감독의 네임드 파워까지. 흥행은 따 놓은 당상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권서준 작가 측에서 이렇게 나올 줄은 미처 예상 못 했다.

“하아. 그래, 주인공 변경은 그렇다 쳐. 근데 공동연출? 이건 선 넘은 거 아니냐고?”

루카스 대표가 답답한 듯 혼잣말을 내뱉는다.

그러자 듣고 있던 크리스토퍼 올란 감독이 고개를 든다.

“그래서, 대표님은 이번 시나리오 포기하실 건가요?”

“...”

그렇게 직접적으로 물으면 또 할 말은 없었다.

왜?

다른 대안이 없으니까.

루카스 대표 입장에선 이만큼 마음에 든 시나리오를 본 적이 없었다.

다시 작품을 고른다고 해도 이 정도 퀄리티의 대본을 만나리라는 보장도 없고.

답답한 마음에 느는 건 한숨뿐이었다.

“근데, 자네는 정말 괜찮은 거야? 공동 연출인데?”

솔직히 올란 감독이 받아들일까 싶은 마음에 걱정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의외로 올란 감독의 대답은 간단했다.

“뭐, 상관없습니다.”

“...그래. 자네도 기분 나쁘니까 그래서 나도... 뭐?”

순간 잘못 들었나 싶은 루카스 대표의 표정.

“자네, 지금 뭐라고 했어?”

“공동 연출, 받아들이겠다고요.”

루카스 대표 입장에선 믿기지 않았다.

크리스토퍼 올란 감독이 어떤 사람인가.

대작을 만들겠다는 자존심 하나도 3년간 작품 활동조차 미룬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지금, 공동 연출조차 괜찮다고 말하고 있었다.

“정말인가?”

거듭된 질문에 올란 감독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네. 베네딕트 그 친구가 인정한 작가예요. 그리그 그의 대본을 보고 저 역시 선택한 거고요. 그 정도는 감수해야죠.”

“하지만... 자네 커리어라면...”

“지금 중요한 건 과거의 커리어가 아니잖아요. 앞으로 만들어나갈 커리어가 중요한 거지.”

짧은 대답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숨길 수 없는 작품에 대한 열정이 담겨 있었다.

그 의지를 알아차린 루카스 대표 역시 빠르게 현실을 받아들인다.

“흠. 그렇다면 알겠네.”

여러모로 아쉬운 상황이지만 이 정도에서 굽히는 게 맞았다.

“대신, 작가님을 꼭 한번 만나고 싶네요. 작품에 대해 할 말도 있고요.”

“뭐, 그거야 어렵지 않지. 내가 한번 추진해 보겠네.”

루카스 대표가 발 빠르게 비서에게 지시를 내린다.

늘 최선의 선택만 할 순 없는 것.

루카스 대표는 차선책을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늦은 저녁.

「거장의 숨결」 이틀째 공연이 마무리되었다.

어제와 변함없이 완벽했던 조현성의 연기가 빛을 발하고, 아직도 객석에선 환호성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틀 연속 공연을 관람한 방수찬은 공연이 끝난 뒤 대기실을 찾았다.

[조현성 배우님 대기실]

커다랗게 이름이 적힌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꽃향기가 물씬 풍긴다.

이게 화원인가 싶을 정도로 가득 찬 꽃다발들. 뮤지컬 스타 조현성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어? 수찬아!”

대기실로 들어온 조현성이 밝은 얼굴로 방수찬을 부른다.

학연도, 지연도 없었다. 그저 예전 작품에서 주연과 행인 1로 만난 사이. 그러나 조현성은 언제나 그렇듯 자신을 챙겼다.

“선배, 정말 고생했어요.”

“고생은 무슨, 이제 시작이지.”

이야기를 잠깐 나누려 할 때 대기실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아, 잠깐만. 어? 수영아!”

최수영.

최근 뜨고 있는 아이돌 멤버였다.

저렇게 대단한 사람이 직접 인사를 하러 오다니 부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와줘서 정말 고맙다. 다음에 내가 술 한 잔 살게.”

조현성은 자주 있는 일인 듯 자연스럽게 인사를 하고는 최수영을 돌려보낸다.

그러나 그 뒤로도 유명 인사들의 방문은 끊이지 않았다.

소속사 대표부터 시작해서 방송국 관계자, 연예인, 스포츠 스타까지.

꽃다발을 받고, 인사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바빠 보였다.

잠시 기다리던 방수찬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선배, 저 이만 들어가 볼게요.”

“어? 그러지 말고 밥 먹고 가지 그래?”

“아니에요. 저도 내일 공연을 위해서 일찍 쉬어야죠.”

“그래? 하아. 미안해.”

미안해하는 조현성을 뒤로하고 방수찬이 대기실을 나왔다.

그러자 순식간에 안으로 밀려드는 사람들.

조현성은 어느새 수많은 팬에게 둘러싸인다.

“현성 오빠, 너무 멋있어요!”

“오늘 공연 최고였어요!”

환호성과 들뜬 목소리가 대기실을 채운다.

“...”

그에 비해 자신의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예전 같았으면 자존감이 바닥을 쳤을 상황.

그러나 오늘은 조금 달랐다.

‘괜찮아. 나는 내 길을 가면 돼.’

인정을 받든, 받지 못하든, 인기를 얻든, 얻지 못하든 당장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다른 사람이 아닌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연기. 오로지 나만이 표현할 수 있는 크리스토퍼 말로의 삶을 보여주는 게 우선이니까.’

굳게 다문 방수찬의 입술.

그의 표정엔 어느새 굳은 결심이 떠오르고 있었다.

***

다음 날 아침.

나는 고용수 부장의 메일을 받았다.

대충 요약하자면 내 의견대로 엔플릭스 측에 전달했다는 내용.

생각보다 빠른 행보에 흡족한 미소가 떠오른다.

‘쉽지 않았을 텐데, 나에 대한 신뢰가 생각보다 깊은 모양이야.’

사실 에이전시 입장에선 곤혹스러울 수 있는 제안이었다.

주인공의 인종 수정 요청은 거절할 수 있다 쳐도, 헐리웃 유명 감독에게 공동 연출을 제안한다는 건 어쩌면 무리수처럼 보일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내 입장에서 굽힐 이유는 없었다.

‘내 시나리오 정도면 하겠다는 사람은 많을 테니까.’

스티브 대표가 엔플릭스에 먼저 제안해서 그렇지, 국내외 다른 OTT 플랫폼에 제안하기만 한다면 서로 제작하겠다고 할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걸 루카스 대표가 모를 리 없었고.

그러나 나 역시 엔플릭스라는 플랫폼이 가져다주는 이점은 고려해볼 만 했다.

결국 무대가 크고 잘 마련될수록 작품에 대한 퀄리티도 올라가는 법이니까.

엔플릭스, 올란 감독의 인지도를 사용하면서 동시에 내 작품의 퀄리티도 높이는 전략.

이제 기다리면 될 뿐이었다.

늦은 오후.

나는 이틀 만에 극장으로 향했다.

오늘 첫 무대에 서는 방수찬 때문이었다.

커다란 꽃다발을 하나 든 채 VIP용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데, 누군가 반갑게 부른다.

“작가님!”

밝은 목소리의 주인공은 신하율이었다.

멀리서 봐도 빛이 나는 외모였다.

“티켓 보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원래는 예매하려고 했는데 거의 시작과 동시에 매진돼서 포기하고 있었거든요.”

서버 다운으로 피해를 본 희생양이 내 눈앞에 있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성 실장이 나선다.

“어찌나 빠르게 매진이 되든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니까요? 덕분에 하율이한테 아주 죽을 뻔했는데, 정말 감사합니다.”

“제, 제가 언제요?”

신하율이 내 눈치를 보며 성 실장에게 핀잔을 준다. 그러나 성 실장 역시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닌 듯 능구렁이처럼 넘긴다.

나는 자연스럽게 두 사람을 환영했다.

“아닙니다. 제가 특별한 두 분이라면 당연히 보내드려야죠.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성 실장이 감동한 듯 쳐다본다.

“하아. 이거 최고의 인기를 달리시는 작가님이 그런 말씀을 해주시니 감동이 두 배네요. 아무튼 잘 보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두 사람은 객석으로 향했다.

물론 신하율은 뭔가 할 말이 남은 듯 몇 번이나 뒤돌아봤지만 이내 성 실장을 뒤따른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입장 시간.

나는 객석 대신 대기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공연 전에 방수찬에게 전달할 선물 때문이었다.

***

대기실.

“후우...”

분장을 마친 방수찬이 숨을 고른다.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공연 시간이 다가올수록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눈을 감은 채 마인드 컨트롤.

그러나 불안감은 여전했다.

똑똑.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벌써 시작인가?’

올 사람은 스태프가 유일했기에 제일 먼저 시간을 확인한다.

그런데,

뜻밖에도 방문자는 권서준 작가였다.

“어? 작가님.”

방수찬은 반가운 마음에 벌떡 일어났다.

권서준은 들고 온 꽃다발 내밀었다.

“이거 저 주시는 건가요?”

“네, 원래 공연 끝나고 드려야 하는데, 이따가는 많이 바쁘실 거 같아서요.”

“...네?”

공연이 끝나면 바쁠 거라고?

그건 무슨 의미일까?

그런데 그 순간 스태프가 들어온다.

“배우님, 공연 5분 전입니다.”

이제 시작이었다.

잠시 진정했던 심장이 다시금 떨리기 시작한다.

그러자 권서준이 한 마디를 건넨다.

“공연, 잘 부탁드립니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니까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이 공연 하나에 여러 사람의 꿈이 달려있다는 뜻이었다.

권서준의 한 마디에 책임감이 고양된다.

덩달아 의지가 굳건해진다.

‘그래. 할 수 있어.’

자신의 가치를 알아봐 준 서미연 대표와 권서준 작가에게 보답하기 위해서도 실수란 있을 수 없었다.

잠시 뒤,

방수찬이 무대에 오른다.

웅장한 음악과 함께 쏟아지는 조명.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방수찬의 눈빛이 서서히 달라진다.

무대 한가운데에 도착하자 확연히 달라지는 눈빛.

그건 방수찬의 눈빛이 아니었다.

그렇게 크리스토퍼 말로-reprise 버전이 시작되었다.

***

2시간이 넘게 진행된 공연.

크리스토퍼 말로의 피날레로 마무리된다.

노래가 끝나고,

막이 내렸지만 고요한 무대.

커튼콜이 없는 프리뷰 공연이었기에 방수찬은 관객들의 반응을 채 보지 못한 채 대기실로 들어왔다.

“후우.”

온 에너지를 쏟아부은 공연.

그야말로 녹초나 다름없었다.

‘공연은 어땠을까?’

엔딩 후 고요했던 무대를 떠올리니 살짝 걱정이 든다.

고요한 곳은 무대뿐만이 아니었다.

자신이 쉬고 있는 이 공간도 마찬가지였다.

어제 조현성의 대기실과 달리 고요한 실내 .

눈에 들어오는 건 텅 빈 대기실 한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큰 꽃다발 하나가 전부였다.

권서준 작가가 준 꽃다발.

덕분에 황량한 대기실 안엔 꽃향기가 그윽했다.

조현성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방수찬의 입장에선 뜻깊은 꽃다발이었다.

‘그래, 양보단 질이지.’

문득 권서준 작가의 말이 떠오른다.

‘원래 공연 끝나고 드려야 하는데, 이따가는 많이 바쁘실 거 같아서요.’

공연 후면 스케줄은커녕 약속조차 없는데...

대체 무슨 의미일까.

고개를 갸웃거리던 방수찬은 이내 꽃다발을 챙긴 채 일어난다.

그런데,

문을 열고 나가자...

“와!!!!”

갑자기 쏟아지는 함성에 방수찬의 걸음이 멈춘다.

순식간에 방수찬 앞을 채우는 사람들.

“...”

순간 방수찬의 눈이 커진다.

“사인 좀 해주세요.”

“오빠, 사인 좀 해주세요.”

“...네?”

얼떨떨한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되묻고 말았다.

여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자신의 사인을 받으려고 기다린 적은 처음이니까.

“정말 멋있어요.”

“노래도 최고였어요. 이번 공연으로 팬 됐습니다!”

팬이라고?

“...”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놀랄 일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잠시 뒤,

미모의 여성이 다가와 꽃다발을 건넨다.

직접 보는 건 처음이지만 모를 수 없는 얼굴이었다.

“시, 신하율 씨...?”

“축하드려요. 오늘 공연 너무 감명 깊었습니다.”

대세 여배우의 칭찬이었다.

꿈인지 현실인지도 헷갈리는 정도의 상황.

“와아!!”

수많은 사람의 환호성이 다시금 귓가에 들리자 그제야 실감이 나기 시작한다.

“하아...”

밀려드는 감격에 손끝이 떨린다.

울컥하는 감정을 애써 밀어내며 호흡을 고른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누구도 부럽지 않았다.

단순히 인기를 얻어서가 아니었다.

‘내 연기를 알아주는 사람들이 생겼어...’

처음 배우를 꿈꾸는 순간부터 가졌던 꿈.

그 꿈이 드디어 이뤄진 것.

그리고 방수찬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뒤편으로 흐른다.

저 멀리서 이 모든 걸 바라보는 권서준 작가가 보인다. 자연스럽게 그가 했던 말도 떠오른다.

‘설마, 이 상황까지 예상하셨던 건가...’

볼 때마다 놀라운 사람이었다.

어쩌면 그가 창조한 세계는 무대 위에서만 펼쳐지는 건 아닐지 몰랐다.

‘어쩌면 내가 겪는 이 상황조차 연출하고 있었을지도...’

마치 권서준 작가가 창조한 세계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아니, 자신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준 사람이 바로 권서준이었다.

방수찬은 고마움을 가득 담아 천천히 인사를 보낸다.

권서준은 이미 그 마음을 다 안다는 듯 미소를 짓는다.

먼발치에서 서로에게 보내는 흐뭇한 미소.

배우와 작가 사이의 대화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리고 그 순간 권서준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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