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130화 (130/203)

130. priceless - 매우 귀중한, 정말 재미있는 (5)

130.

***

나른한 오후.

로스 가토스에 위치한 엔플릭스 본사.

루카스 대표는 모처럼 대본 삼매경에 빠져있었다. 바로 하이든 에이전시의 스티브 대표가 보낸 바로 그 대본이었다.

똑똑.

한창 작품에 대본에 집중하고 있던 그때, 노크와 함께 비서가 들어온다.

“대표님, 미팅 준비되었습니다.”

순간 잊고 있던 실무진과의 미팅이 떠오른다. 그러나 루카스 대표는 이내 고민도 하지 않고 손을 내젓는다.

“미안한데 한 시간만 미뤄줘. 지금 내가 중요한 일이 생겨서...”

급히 내뱉는 대표의 말.

다행히 센스 있는 비서는 루카스 대표의 의중을 단번에 읽었다.

“네,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비서가 나가자 루카스 대표는 다시금 대본으로 시선을 옮긴다.

한국 작가의 작품답게 당연히 작품 콘셉트도 한국이 배경이었다.

등장인물도, 지명도, 모두 스티브 대표에겐 낯선 한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거 너무 재미있잖아?’

회의 전 잠깐 맛만 보려고 펼친 대본. 그러나 이제는 회의 시간마저 미룬 채 대본 삼매경에 빠진 상태였다.

사실 영어권에서는 외국 작품이 흥행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려웠다.

‘상대적으로 문맹률도 높고, 자막을 기피하는 관객들의 기호 때문이지.’

그런데 이 작품은 달랐다.

자막을 보는 수고를 기꺼이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몰입감을 선사하는 작품이었다.

돈, 욕망, 그리고 사랑.

인종과 국적을 떠나 몰입할 수밖에 없는 요소로 가득 차 있었다.

‘아무리 다양한 이야기가 만들어져도 이 세 가지만큼 시청자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요소도 없지.’

권서준 작가는 그 부분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물론 가끔 대작을 꿈꾸는 작가들이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무시한 채 집필을 하기도 했다.

알 듯 모를 듯 애매한 콘셉트.

몽환적이면서 모호한 주제 의식.

작가 자신도 알지 못하는 무언가를 표현하려는 듯한 내용들.

‘그러나 그건 착각이야. 인간의 니즈 자체를 무시한 예술은 외면받을 수밖에 없다고. 그래, 그런 건 일기장에나 어울릴 내용이지.’

그런데 이 작가는 완벽하게 상업성을 파악하고 있었다. 동시에 존재론적인 질문을 통해 작품성마저 갖추고 있었다.

‘이런 걸 두고 명작이라고 하는 거고.’

최근 경쟁 플랫폼이 급성장을 보이고 있었다. 너도 나도 오리지널 작품에 목을 매면서 서로를 밟고 일어서기 위해 혈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 정도 대본의 퀄리티라면 이길 자신 있었다.

‘남은 문제는 이걸 누구한테 맡기냐는 건데...’

이미 수준급의 대본이 나온 상황.

남은 건 연출이었다.

‘누가 좋을까?’

턱을 쓸며 고민을 하는데,

순간 스티브 대표의 휴대폰이 울린다.

지이잉.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다름 아닌 크리스토퍼 올란 감독이었다.

[대표님. 이 작품, 제가 해보겠습니다.]

짧은 메시지.

그러나 올란 감독이 말한 작품이 뭔지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지난번 작품이 엎어지고 내가 준 대본은 단 하나뿐이니까.’

바로 지금 자신이 들고 있는 권서준 작가의 시나리오였다.

사실 실력만 따지면 올란 감독만 한 사람이 없었다. 최근 3년 동안 작품을 찍지 않은 것도 오로지 본인의 기준이 높았기 때문.

‘그런데 그런 감독이 스스로 하겠다고 하면 나야 거절할 이유가 없지.’

순풍에 돛 단 듯 착착 진행되는 상황.

시작부터 느낌이 아주 좋았다.

‘좋아. 일단 빨리 픽스를 하는 게 우선이야.’

이 정도 퀄리티의 작품이라면 다른 곳에서 먼저 손을 뻗을 수 있었다. 그 전에 빨리 붙잡아야 했다.

루카스 대표는 서둘러 전화를 걸었다.

수신자는 당연히 하이든 에이전시의 스티브 대표였다.

***

늦은 저녁.

나는 독일의 작곡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관현악 모음곡을 들으며 따스한 햇볕을 즐겼다.

명 바이올리니스트 빌헬미가 독주 바이올린 연주를 위해 G 선용으로 편곡한 곡으로 대중들에겐 흔히 ‘G 선상의 아리아’로 유명한 곡이었다.

‘아리아는 이탈리아어로 서정적인 선율을 의미하는데 영어로는 Air라고 옮겨 표현하곤 하지.’

그만큼 잔잔한 선율이 아름다운 곡.

그러나 나는 ‘G 선상의 아리아’ 버전보다는 바흐의 관현악 모음 버전을 훨씬 더 좋아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원곡이 훨씬 더 아름다우니까. 이 우아함과 평온함이야말로 낭만주의적 바로크의 정수니까.’

나는 눈을 감은 채 감상에 젖는다.

더없이 평온한 느낌.

이 음악을 들으면서 집필한 장면이 있었다.

바로 가제 레이디 햄릿의 89번 씬.

욕망에 휩싸인 세 인물.

그러나 그 사이에서 피어나는 사랑.

그래. 예나 지금이나 사랑 이야기는 대중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다. 내가 가장 잘 다루는 소재이기도 했고.

‘아마 로미오와 줄리엣이 대표적이겠지.’

그러나 사실 그 작품의 결론은 비극적인 이야기가 아니었다.

두 젊은 사랑의 희생을 통해 이룩한 두 가문의 화해가 바로 내가 전달하고 싶은 주제였다.

다른 의미로 표현하자면 비극적 해피엔딩.

이번 작품도 마찬가지였다.

진정한 사랑을 통해 감정이 메마른 이 시대에 꼭 필요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다.

인간의 추악한 욕망.

그 아래 피어나는 사랑이라는 숭고한 가치.

그리고 그 주제를 가장 극단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멜로디가 바로 이 곡이었다.

욕망에 휩싸인 인간들이 폭주하는 장면. 그러나 오히려 평온하게 흐르는 선율이 그들의 모습을 더욱 비참하게 만든다.

소리 없는 아우성.

그래, 그 역설적인 상황이 비극적인 감성을 더욱 극적으로 이끌어낸다.

상상만으로도 손끝이 찌릿찌릿하다.

‘벌써 기대되는군. 어떤 영화가 나올지...’

음악 감상을 하다 보니 어느새 훌쩍 시간이 흘렀다. 시계를 확인한 나는 헤드셋을 벗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늦지 않으려면 서둘러야겠군.’

바로 최종 리허설이 있는 날이었다.

***

송파구에 위치한 공연장은 대낮부터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최종 리허설.

언론 홍보를 위해 기자들을 초청하는 리허설이라 프레스 리허설이라고도 불리는 행사 때문이었다.

뮤지컬계의 황태자 조현성의 출연.

그리고 천재 작가로 최고 주가를 달리고 있는 권서준으로 인해 언론의 관심이 집중된 상태.

오후 3시부터 진행된 행사 브리핑과 제작발표회가 진행되었다.

제일 먼저 제작자인 서미연 대표와 음악 감독, 그리고 손주환 작곡가가 짧은 소감과 함께 발표를 시작했다.

뒤이어 이어진 주요 출연진의 기자회견.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는 건 당연히 조현성이었다.

“조현성 배우님, 이번에 출연하게 되신 소감 한 말씀 해주시죠?”

한 기자의 질문에 조현성이 마이크를 들었다.

“개인적으로는 너무나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특히 한 명의 배우로서 훌륭한 동료들과 한 시즌을 보낸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

“이번 작품, 권서준 작가의 작품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어떠셨나요?”

“그건 간단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오늘 공연을 보시면 왜 사람들이 권서준, 권서준 하는지 알 수 있을 테니까요.”

재치 있는 조현성의 인터뷰에 객석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조현성의 인터뷰가 끝나고, 다음 차례는 방수찬이었다.

조현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질문들.

인지도로 인해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

그런데 그때,

한 기자가 질문한다.

“아무래도 조현성 배우님과 더블 캐스팅 되어서 조금 부담스러운 부분도 있을 거 같은데, 어떠셨나요?”

다소 불쾌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방수찬은 차분한 얼굴로 마이크를 들었다.

“물론입니다. 인기스타인 선배와의 비교가 사실 걱정되기도 했죠. 하지만 저는 저만이 보여줄 수 있는 크리스토퍼 말로의 모습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그러니 제 공연도 유심히 지켜봐 주세요.”

담담한 답변에선 오히려 무시할 수 없는 자신감이 느껴진다.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는 자신감.

방수찬은 지난번 경험을 통해 한층 더 성숙해져 있었다.

그때,

옆에서 듣고 있던 조현성이 마이크를 집어 든다.

“맞습니다. 저는 흉내 낼 수 없는 수찬이만의 연기가 있더라고요. 깜짝 놀랐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놀라실걸요?”

장난기 다분한 목소리로 방수찬을 배려하는 조현성의 멘트. 덕분에 객석의 분위기도 한층 더 밝아진다.

훈훈해 보이는 모습.

잠시 뒤,

본격적인 공연이 시작되었다.

제일 먼저 태평소가 공연장에 울려 퍼진다.

뒤이어 심장 박동처럼 울리는 북소리.

“뭐야, 이거 국악 아니야?”

순간 수군거리는 기자들.

배경이 영국인 연극에서 국악 버전의 넘버가 나온 게 의아한 듯.

그러나 소동은 잠시였다.

이내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음악에 기자들의 시선은 다시금 무대로 몰리기 시작했다.

***

「가시리 가시리잇고」의 공연장.

공연 준비로 한창 바쁜 배우들의 모습이 부산하게 무대를 오간다.

짝짝짝.

그때, 시원한 박수 소리와 함께 김재용 대표가 공연장에 들어선다.

“자, 오늘은 연습 그만하고 다들 들어가서 쉬자고. 오픈 전에 무리하다가 당일에 실수하면 큰일 나니까.”

“오, 진짜요?”

“그럼 내가 언제 거짓말한 적 있어?”

“네! 알겠습니다!”

김 대표의 말에 배우들이 신이 나서 짐을 챙긴다.

그때,

소란스러운 틈을 타 한 명이 김 대표에게 다가온다.

“뭐야? 우리 김 대표가 언제부터 이렇게 순했어?”

뒤를 돌아보니 박성규 교수였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서운하게 말씀하십니까. 제가 얼마나 배려심이 깊은 사람인데요. 근데, 교수님이야말로 이렇게 공연장에 자주 오신 적 없지 않나요?”

박 교수가 뒷짐을 진 채 고개를 끄덕인다.

“그야 당연하지. 여기에 내 모든 게 걸려있는데.”

“에이, 투자는 제가 했는데요?”

“이 사람아, 교수에게 자존심은 전부나 다름없어. 생각을 해봐. 제자에게 밀린 교수? 강단에 설 때마다 얼마나 얼굴이 화끈거리겠나.”

박 교수의 머릿속엔 오로지 권서준을 이겨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하긴, 그것도 그러네요. 근데, 그런 걱정 하실 필요 없잖아요?”

김 대표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되묻는다. 그러자 박 교수도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 이미 결론은 나온 거나 다름없으니까.”

박 교수는 자신했다.

그만큼 최종 리허설의 결과는 엄청났으니까. 그날 참석한 기자들의 반응도 뜨거웠고.

“참, 오늘이 그쪽 최종 리허설이지?”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김 대표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 분위기였다. 박 교수 역시 고개를 끄덕인다.

“하긴, 상대방을 신경 쓰는 건 우리가 부족할 때 나오는 행동이지. 지금처럼 완벽할 땐 굳이 신경 쓸 이유가 없어. 그보다는 홍보에 집중하자고. 유일한 변수는 홍보뿐이니까.”

박 교수의 말에 김 대표가 고개를 끄덕인다.

며칠 앞으로 다가온 오픈 날짜.

그러나 승리는 이미 자신의 것이었다.

***

같은 시각.

작품 「거장의 숨결」은 엔딩을 선보였다.

충격적인 엔딩.

기자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생각에 잠긴다.

마지막 넘버가 흐르고...

그렇게 크리스토퍼 말로의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

고요한 공연장.

공연을 지켜본 모든 사람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잠시 뒤,

숨을 깊게 들이마신 윤석훈 기자가 입을 연다.

“작가님... 엄청난데요?”

나는 윤 기자를 보며 물었다.

“괜찮았나요?”

“괜찮은 정도가 아니죠. 하아. 모든 뮤지컬이 이 정도 퀄리티라면... 전 아마 이미 뮤지컬 덕후가 됐을 겁니다.”

윤 기자의 반응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그럼 기사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언제나 그렇듯 팩트에 기반을 두어서 솔직하게 쓸 거니까요.”

아직도 여운이 가시지 않은 표정.

벌써부터 윤 기자가 쓴 기사가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그리고 그때,

다시 조명이 커지며 배우들이 무대 위로 올라온다.

공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커튼콜.

배우들은 하나같이 분홍색 카네이션을 들고나와 인사를 한다.

“어? 저건 무슨 의미인가요?”

윤 기자가 물었다.

나는 무대를 보며 설명을 해줬다.

“카네이션의 꽃말에 감사와 어버이 사랑이라는 뜻이 있거든요.”

“아, 관객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는 거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윤 기자에게 말하지 않은 꽃말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분홍색 카네이션만이 가지는 꽃말.

‘잊지 않을게.’

라이벌이자 좋은 벗이었던 말로.

그의 허망한 마지막을 기리고자 하는 마음이 담긴 커튼콜이었다.

잠시 뒤,

배우들이 한 줄로 서서 인사를 건넨다.

“와아아아!”

동시에 무대를 향해 함성이 쏟아진다.

좀처럼 보기 힘든 기자들의 환호성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어.’

오늘 극단의 최종 리허설과 비교조차 되지 않는 반응.

이미 결과는 나온 거나 다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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