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priceless - 매우 귀중한, 정말 재미있는 (4)
129.
***
뉴욕 맨해튼.
월가에 위치한 유명 레스토랑에선 대규모 자선기금 모금 행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자선과 기부의 나라답게 유명 골프 선수와 농구 황제, IT 사업가와 유명 셀럽까지, 분야를 막론하고 수많은 유명 인사들이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때,
주차장에 들어서는 고급 승용차.
바로 크리스토퍼 올란 감독의 차였다.
초대 명단에 이름을 올린 크리스토퍼 올란 감독 역시 자선행사 참석을 이곳을 찾았다.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격식을 차린 옷차림. 룸미러로 다시 한번 옷매무새를 다듬는다.
문득 보조석에 놓인 대본이 눈에 들어온다.
가제 : 레이디 햄릿.
엔플릭스 루카스 대표에게 받은 대본.
그러나 지금은 그 대본을 읽을 정신이 없었다.
‘오늘은 정말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
모든 일정을 뒤로 미룬 채 참석하게 된 자선 파티.
평소 파티를 즐기는 편이 아니었지만 이렇게 참석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기부를 위해서?
아니, 전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베네딕트, 그 친구가 온다고 했으니까.’
단지 그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
그런데,
행사장에 도착과 동시에 올란 감독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고 말았다.
“베네딕트 그 친구는 못 온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유명 셀럽이자 이번 자선기금 파티 주최자의 말.
“...뭐라고?”
“연극 공연이 코앞이라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고 하더군요.”
“...그게 정말인가?”
“...네. 안타깝게도...”
올란 감독은 굳은 표정으로 서둘러 파티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휴대폰을 꺼내 급히 베네딕트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들리고,
다행히 얼마 되지 않아 베네딕트가 전화를 받는다.
-올란 감독님. 어쩐 일이십니까?
다소 딱딱한 영국식 발음이 휴대폰을 타고 넘어온다.
“그래. 날세. 여기 자선기금 파티에 왔는데 자네 모습이 보이지 않아서.
-아, 제가 연극 공연 일정 때문에 참석이 어려워서요. 이거 죄송하게 됐습니다.
“연극? 대체 어떤 연극이기에 내 작품도 거절하고 이렇게 얼굴도 보기 힘든 건가?”
본인도 모르게 은연중에 속마음이 드러난다. 그걸 알아차린 베네딕트도 사뭇 미안한 듯 목소리를 부드럽게 낸다.
-죄송합니다. 다만 이 연극, 정말 놀랍습니다. 곧 오픈될 예정이니까 런던에 오시면 꼭 한 번 들려주십시오. 제가 정식으로 초대하겠습니다.”
자연스럽게 마무리되는 통화.
완곡한 표현이었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건 확고한 거절 의사였다.
대체 어떤 작품이기에 저러는 걸까 궁금증이 생길 정도였다.
그러나 이내 궁금증은 한숨으로 이어진다.
결국 베네딕트를 설득하지 못했다.
행사장에선 연신 신나는 음악이 울려 퍼진다. 더없이 밝고 경쾌한 분위기.
그러나 올란 감독은 굳은 표정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돌린다.
‘하아...’
밀려오는 막막함.
주차장에 도착한 올란 감독은 차에 기댄 채 눈을 감는다.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한숨에 짧은 현기증이 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대로 차기작에 대한 희망을 포기할 순 없었다.
아니, 포기가 되지 않았다.
‘분명 런던에 한 번 오라고 했지?’
올란 감독은 휴대폰을 꺼내 곧장 런던 행 비행기 티켓을 예매했다.
‘이렇게 된 거 내가 직접 가는 수밖에...’
차기작에 대한 확고한 의지.
올란 감독의 열정을 막을 순 없었다.
***
늦은 밤 작업실.
내 수정 계획은 간단했다.
‘뮤지컬의 엔딩을 조금 바꾸는 거야.’
「가시리 가시리잇고」의 최종 리허설을 통해 얻게 된 영감이었다.
수많은 인물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극이 전개되는 「거장의 숨결」. 전형적인 해피엔딩으로 끝내는 건 아쉬웠다.
‘오히려 열린 결말로 끝내는 게 여러모로 극적인 효과를 가져올 수 있지.’
나는 엔딩 부분에 힘을 준 넘버들을 과감하게 빼기로 했다.
작품을 위해 가장 정성을 쏟아부었던 장면이라 빼기가 쉽지 않았지만 길고 진한 여운을 남기기 위해선 그 방법이 최선이었다.
원래는 비극.
그러나 열린 결말로 감동을 극대화.
마침표를 찍어주는 게 아닌 쉼표를 찍어주는 엔딩.
그로 인해 관객들은 그 머릿수만큼이나 수많은 상상을 통해 크리스토퍼 말로의 마지막을 떠올린다.
그들의 희망.
그들의 염원.
그들의 감성이 담긴 수많은 엔딩.
그로 인해 저마다의 감동을 받은 채 무대가 막을 내린다.
동시에,
우레와 같은 박수가 객석에서부터 쏟아진다.
물론 내 머릿속에서 떠올린 상상이었다.
그러나 내 예상은 틀릴 리가 없었다.
나는 숨을 고르며 천천히 키보드에 두 손을 올린다.
순간 찾아오는 고요함.
침묵과 함께 숭고함과 먹먹함이 밀려온다.
글을 쓴다는 행위가 너무나 소중해서 그걸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작가의 신중함.
글을 쓴다는 건 단순히 대중을 만족시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 거룩한 창조의 과정이었다.
어느 순간 키보드 위에 놓인 손가락이 리듬을 타기 시작한다.
타닥타닥 타다다 타다다닥 타닥.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과 단어들이 빠르게 모니터를 채워나간다.
정체된 이야기를 놓치지 않게 더욱 빠르게 움직이는 손가락.
확고했던 엔딩을 거둬내자 이야기의 흐름이 물꼬 터진 것처럼 시원하게 흘러나간다.
나는 그렇게 반나절 동안 방에 틀어박혀 떠오르는 영감을 따라 마지막 엔딩을 다시 마무리했다.
그리고 이른 아침,
나는 수정된 대본을 보며 조용히 주먹을 움켜쥐었다.
‘역시 성공이야.’
만족을 넘어 창작자의 가슴마저 설레게 만드는 이야기가 완성되었다.
이제 서미연 대표를 만날 차례였다.
***
다음 날.
이른 저녁, 창조 극단 사무실.
서 대표와 사무실 직원들은 며칠 뒤에 있을 최종 리허설 준비로 정신이 없었다.
“윤석훈 기자님한테 연락은 드렸지?”
“네, 권 작가님이 요청하셔서 이미 스케줄 맞췄어요.”
“공연 시스템도 다 확인했고?”
“네, 이상 없습니다.”
“좋아, 아주 좋아.”
이 작품 하나에 모든 게 걸린 상황.
절대로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됐다.
꼼꼼하게 리허설 준비를 체크하던 서 대표는 그제야 한숨을 돌린다.
급한 불을 끄자 오늘 예정된 또 다른 약속이 떠오른다.
‘참, 벌써 권 작가님이 오실 때가 됐네.’
서 대표는 급하게 잡힌 권서준 작가와의 약속에 잠시 생각에 잠긴다.
‘그때 하신 말씀 때문인가?’
오늘 극단의 최종 리허설을 보고 오던 날, 권서준 작가는 추가 수정을 얘기했다.
이미 완벽한 대본.
게다가 최종 리허설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에서의 수정은 어쩌면 독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서 대표는 불안하기보다는 든든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 권 작가님의 선택은 항상 옳았으니까. 연극 공연 때도 그랬고.’
권 작가의 수정은 극의 완성도를 최상의 최상으로 끌어올렸다. 그 덕에 뮤지컬 제작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거고.
사실 수정 하지 않아도 오늘 극단과 대등한 싸움을 할 자신은 있었다.
‘이 자체로도 절대 밀리지 않으니까.’
훌륭한 대본에, 최선을 다하는 배우들의 연기. 게다가 마음을 울리는 곡까지. 모든 세팅이 완벽했다.
생각할수록 자신감이 충만해진다.
그때, 문이 열리며 권서준 작가가 들어온다.
“아, 오셨어요. 작가님?”
“최종 리허설 준비는 잘 되고 있나요?”
“물론이죠. 완벽합니다.”
서 대표는 미소와 함께 손가락으로 OK 사인을 보인다.
“참, 보자고 하신 건 그때 말씀하신 수정 때문이죠?”
“네, 맞습니다. 한번 보시죠.”
예상대로 권서준은 수정된 대본을 내밀었다.
“최종 리허설까지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아 최소한으로 수정했습니다.”
권서준의 짧은 설명.
그러나 불필요한 설명이었다.
대본을 읽자마자 권서준 작가의 의도가 고스란히 읽히는 수정이었으니까.
‘넘버를 조금 덜어내고, 이야기를 다듬었을 뿐인데... 엔딩이 이렇게 확장된다고?’
서 대표는 놀란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두 눈도 자연스럽게 커진다.
잠시 뒤,
수정 버전을 모두 확인한 서 대표가 권서준을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권 작가님.”
“네?”
“혹시 천재세요?”
***
저녁 무렵.
영국 런던에 위치한 웨스트엔드.
이곳에선 매일 밤 햄릿을 공연하는 햄릿 전용 극장 길구드(Gielgud)가 있었다.
20세기를 빛낸 영국의 3대 배우이자 평생 햄릿 역을 맡은 배우 존 길구드 이름을 딴 극장이었다.
공연이 한창인 무대.
그 객석엔 몇 시간 전 런던에 도착한 올란 감독이 있었다.
런던까지 와서 연극을 보는 이유는 한 가지였다.
‘그 친구가 여기 있다고 했으니까.’
잠시 뒤,
공연이 끝나고 사람들이 빠져나간다.
올란 감독은 약속된 근처 카페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 3분쯤 기다렸을까.
사람들의 눈을 피해 베네딕트가 다가온다.
언제 봐도 곱실거리는 저 머리는 베네딕트의 트레이드마크.
“오랜만이군.”
반가운 마음에 올란 감독이 먼저 인사를 건넨다.
“그러게요. 정말 오랜만이네요. 감독님도 잘 지내셨죠?”
자연스러운 인사.
그러나 올란 감독은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잘 지내지 못했다네.”
올란 감독의 말에 베네딕트가 미안한 기색을 보인다. 누구보다 그 이유를 잘 알기 때문이었다.
베네딕트는 잔잔한 미소와 함께 자연스럽게 공연해 대한 이야기로 대화를 이어간다.
“참, 오늘 공연은 어떠셨습니까?”
“사람들에게 오래 사랑받는 고전엔 이유가 있더군. 괜히 셰익스피어가 유명한 건 아니라니까.”
셰익스피어라는 말에 베네딕트가 미소를 짓는다. 다양한 빛깔을 띠는 눈동자에서 떠오르는 건 자부심이었다.
“사실 셰익스피어가 최초로 쓴 희극엔 등장인물과 배경 묘사 따윈 없었습니다. 무대 공연인 연극에서 그 부분을 설명하는 인물 따윈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다만 그는 그 모든 걸 수려하고 아름다운 대사로 표현했죠. 그래서 그 당시 대사는 길 수밖에 없었고요.”
올란 감독 역시 알고 있는 부분이었다. 감정과 상상력으로 꽉 찬 대사는 배우들에게 영감이 되었다.
“맞아. 그래서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출연하는 게 배우들에게도 영광이겠지만 감독도 마찬가지야. 왜냐하면 셰익스피어 비극이야말로 전 세계가 사랑하는 대표적인 고전이니까. 실력 있는 배우가 그의 작품으로 연기력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처럼 감독도 자신의 연출력을 인정받고 싶어 하거든.”
작가, 감독, 배우, 관객까지.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모든 예술인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였다.
“솔직히 모든 건 소멸되지만 고전은 시간조차 이겨내며 살아남지. 시대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사랑받고 있고. 아마 그게 진정한 고전의 힘일 거야.”
수십 년 예술계에 몸담은 감독이 할 수 있는 깊이 있는 통찰력이었다.
생각해 보면 자신이 지금 이곳에 있는 이유도 그런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열망 때문이었고.
“근데, 갑자기 왜 셰익스피어 얘기인 건가? 여기서 보자고 한 이유는 또 뭐고?”
문득 든 의문.
올란 감독이 질문에 가만히 바라보던 베네딕트가 미소를 짓는다.
“제가 그런 작품을 만났거든요.”
“...뭐?”
“감독님이 조금 전에 하신 말씀처럼 몇십 년, 몇백 년 뒤에 고전으로 기억될만한 작품을, 제가 지금 함께하고 있습니다.”
“...”
올란 감독은 순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베네딕트가 누군가.
인지도, 연기력, 흥행지수까지 최상위권에 있는 배우였다. 그런 친구의 말이라 더 임팩트가 있었다.
‘게다가 저 얼굴에 떠오르는 건 자부심이라고.’
누군가 자신의 영화에 출연한다고 했을 때 저런 표정을 짓는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
이건 설득할 수가 없다.
포기하는 수밖에.
마음을 접은 올란 감독이 이내 허탈한 얼굴로 입을 연다.
“그래, 자네 마음을 충분히 알겠네...”
“죄송합니다.”
“아닐세. 다음에 기회가 되겠지...”
올란 감독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런던까지 왔지만 결국 빈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후...”
잠시 뒤, 거리로 나온 올란 감독은 건물 계단에 앉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어떤 작품이기에 베네딕트마저 저렇게 매려 시킨 걸까.’
올란 감독은 곧바로 베네딕트가 선택한 연극 작품에 대해 검색했다.
[거장의 숨결. 대본 권서준 작가]
‘응?’
권서준 작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근데 어딘가 낯익은 이름이기도 했다.
‘설마...’
올란 감독은 가방에서 대본 하나를 꺼냈다. 런던으로 급히 오느라 대충 챙긴 대본 하나.
바로 루카스 대표에게서 받은 그 대본이었다.
가제 : 레이디 햄릿.
작가 : 권서준.
작가 이름이 같았다.
‘설마 우연인가...’
그럴 리 없었다.
아니, 대본을 읽어보면 확인할 수 있는 문제.
올란 감독은 서둘러 대본을 넘겼다.
그런데...
몇 장을 보기도 전에 올란 감독의 눈이 커진다.
‘이, 이건...’
IMF 이후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 경제.
그 폭풍 속에서 그룹 총수 자리를 놓고 벌이는 피도 눈물도 없는 가족 정치극이었다.
오로지 욕망에 휩싸인 악역만 가득한 인물 구성. 뇌물, 횡령 등은 귀여운 수준이며 누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전혀 예측이 안 되는 스토리.
‘그런데 오히려 그 부분이 현실감을 극대화 시키면서 몰입도를 끌어올리고 있어.’
그리고 이내,
시나리오를 넘기는 속도가 빨라진다.
착, 착, 착.
종이 넘어가는 소리가 거리에 울려 퍼진다.
그리고 정확히 1시간 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 올란 감독은 잠시 생각에 잠긴다.
“하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만, 베네딕트의 선택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작가, 정말 미쳤군...’
물론 좋은 의미였다.
보는 사람까지 미쳐버릴 정도로 몰입하게 만드는 작가였다.
‘이럴 때가 아니지.’
올란 감독은 서둘러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는 곧장 루카스 대표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대표님. 이 작품, 제가 해보고 싶습니다.]
짧은 메시지.
그러나 전송 버튼을 누르는 올란 감독의 표정은 처음 시나리오를 펼칠 때와는 전혀 다른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