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priceless - 매우 귀중한, 정말 재미있는 (3)
128.
***
며칠의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뮤지컬 「거장의 숨결」은 완성되어가고 있었다.
배우들의 연기도 점점 완숙해지고,
수십 명에 이르는 연기 합도 완벽에 가까웠다.
특히 조현성과 방수찬의 연기가 그야말로 물이 오른 상태.
“어떠세요?”
서미연 대표가 눈인사를 하며 물었다.
“좋네요. 지난번보다도 훨씬 좋아졌어요.”
내 말에 서 대표가 미소를 짓는다.
“맞아요. 특히 현성 씨랑 수찬이 연기가 아주 물이 올랐어요.”
나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대본이지만 누가 연기하냐에 따라 전혀 다른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그 때문에 두 배우는 쉬는 시간마다 서로의 연기를 칭찬하며 서로에게 배울 점을 흡수하고 있었다.
덕분에 크리스토퍼 말로의 모습은 훨씬 더 입체감을 띄고 있었다.
“그야말로 순항 중이에요. 다만 저쪽도 분위기가 아주 좋은 거 같더라고요.”
저쪽이라 하면 오늘 극단의 작품을 뜻했다.
같은 업계라 들을 수밖에 없는 소식들.
서 대표의 말대로 오늘 극단의 분위기도 아주 좋은 상태였다. 최근엔 마케팅에 쏟아 붓는 금액도 장난이 아니었고.
여기저기에서 「가시리 가시리잇고」 광고가 눈에 띈다.
신문사, SNS, 유브튜 할 거 없이 전 방위적으로 마케팅에 열을 쏟고 있었다.
물론 우리 작품도 밀리지는 않았다.
“마케팅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이쪽에서는 밀려 본 적이 없으니까요.”
든든한 서 대표의 표정.
서 대표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홍보팀을 독려해 홍보에 신경을 썼다. 덕분에 공연 전부터 두 작품은 뮤지컬 관람객들에게 기대감을 주며 이슈를 끌고 있었다.
“재미있는 승부가 되겠네요.”
이제 최종 리허설까진 정확히 일주일 남아있었다.
지이잉.
그런데 그때,
서 대표의 휴대폰이 울린다.
“...어?”
발신자를 확인한 서 대표가 놀란 듯 쳐다본다.
“김재용... 대표인데요?”
뜻밖의 전화.
그런데 들려온 내용은 더 뜻밖의 소식이었다.
-우리 작품 최종 리허설에 권 작가랑 서 대표를 초대하고 싶은데, 시간될까?
***
미국 캘리포니아주.
실리콘벨리에서 차로 10분 거리인 로스 가토스(Los gatos).
미국 내에서도 집값이 높기로 유명한 이곳에 바로 엔플릭스의 본사가 위치하고 있었다.
무려 170여 개국에 유료 스트리밍 서비스를 하고 있는 글로벌 OTT 기업. 나스닥 상장뿐만 아니라 한 해 매출액만 수십조에 이르는 거대 기업이었다.
그런데 그런 거대 기업의 대표 입에선 연신 한숨이 흘러나왔다.
“후우.”
엔플릭스의 루카스 대표는 관자놀이를 지압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몇 달 전 갑작스럽게 엎어진 한 작품 때문이었다.
헐리웃 배우 베네딕트가 출연하기로 한 영화 「이스케이프」.
2차 세계대전 중 사이판에서 벌어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었다. 원작 소설이 인기를 끌자 엄청난 비용을 지불해 IP까지 구매하고 야심차게 준비한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베네딕트의 출연 거절로 모든 것이 엉망이 되고 말았다. 적합한 다른 배우 캐스팅도 어려웠고, 결국 지금은 모든 게 올 스톱인 상태.
그 뒤로 글로벌 차트 12주 연속 1위를 한 작품 「악마」 가 있긴 했지만 다음 작품이 문제였다.
‘그 사이 디니즈는 자신들의 오리지널 작품으로 무섭게 성장하고 있으니까.’
보이지 않는 총성이 울리는 전쟁터.
그게 바로 최근 OTT업계의 상황이었다.
점유율을 지켜내기 위해선 작품성과 함께 전 세계에 흥행할 수 있는 IP가 필요했다.
그래서 오늘 미팅 자리도 만들었다.
“어때? 괜찮은 대본은 좀 찾았어?”
루카스 대표가 맞은편에 앉은 남자를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내 남자는 마지못해 굳게 다문 입술을 열었다.
“솔직히 말씀 드리면 마음에 드는 작품이 없네요.”
금발의 남자 이름은 크리스토퍼 올란.
영화를 좋아한다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헐리웃 감독이었다.
그러나 최근 작품들에선 여러 가지 논란이 있었다.
-영상미는 있지만 스토리는 놓친 감독.
-그는 예술가. 그러나 훌륭한 감독은 아니다. (안톤 세이지 감독)
-히어로 영화와 올란 감독의 공통점은 바로 볼거리 제공에 국한된다는 점이다.
칭찬인 듯 하나 그 내용을 볼 때마다 올란 감독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내 영화엔 알맹이가 없다는 소리처럼 들리니까.’
실제로 영화판의 반응도 그랬다.
몇몇 영화제에서 수상한 기록은 있지만 작품성을 인정받지는 못했다.
마지막 수상도 벌써 3년 전.
아카데미, 칸을 노리고 제작한 영화는 런던 비평가 협회에서 간신히 작품상 하나를 받았을 뿐이었다.
상업 영화감독.
돈을 잘 버는 감독이 나쁜 아니었다.
그러나 창작자로서 타는 듯한 목마름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이젠 영상미가 아닌, 이야기를 전달하고 싶어...’
감독이라면 당연히 그림을 생각한다. 멋진 연출, 자신의 상상력 보다 훨씬 더 멋진 장면을 담기 위해 실제로 세트를 만드는 경우도 많았다.
크리스토퍼 올란 감독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로 인한 한계는 명확했다.
‘결국 작품성은 영상미가 아닌 이야기에서 나오는 법이니까.’
기술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걸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가슴을 울리는 이야기가 없었다.
그래서 3년 째 시나리오를 찾고 있지만 만족스러운 작품은 없었다.
당장 메가폰만 잡아도 수백억을 벌 수 있지만 그는 신중하게 시나리오를 골랐다.
‘단순히 돈을 버는 건 더 이상 내가 원하는 게 아니니까.’
이미 돈은 충분했다.
이젠 더 많은 돈을 버는 것보다는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는 게 더 간절한 바람.
‘내가 죽어서도 기억될만한 작품을 만드는 게 내 꿈이니까...’
그래서 엎어진 작품 「이스케이프」에 대한 갈증은 올란 감독의 표정을 어둡게 만들었다.
“베네딕트는 연락 없나요?”
올란 감독의 물음에 루카스 대표가 고개를 젓는다.
“한번 결정하면 쉽게 바꾸는 친구가 아니잖아...”
헐리웃엔 생각보다 배우 한 명 보고 제작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배우의 매력, 그리고 연기력에 올인하는 케이스.
그런데 그 역할에 최적화된 베네딕트가 출연을 거절하자 결국 무산될 지경에 이르렀다.
“솔직히 나도 최선을 다했다고. 지난 번 작품 출연료보다 무려 60%를 인상했지만 먹히지 않더군. 나참...”
“대체 이유가 뭐랍니까?”
“그게 더 황당해. 연극에 출연하겠대.”
“연극... 이요?”
“그래. 연극. 출연료도 거의 1/40인 연극을 해야 해서 이번 영화는 못 찍겠다고 하더군. 하아.”
루카스 대표가 한숨을 내쉰다.
크리스토퍼 올란 감독 역시 마찬가지였다.
똑똑똑.
그런데 그때,
루카스 대표의 비서가 안으로 들어온다.
“대표님, 스티브 대표가 보낸 대본이 도착했습니다.”
“그래? 마침 잘 됐네. 올란 감독도 볼 수 있게 두 부 가져와.”
“그럴 줄 알고 미리 준비했습니다.”
센스 있는 비서는 두 사람에게 대본을 내밀었다.
“이게, 무슨 시나리오죠?”
시나리오 표지를 본 올란 감독이 물었다.
“아, 얼마 전에 스티브 대표를 만났는데 좋은 시나리오 있으면 보내달라고 내가 부탁했거든.”
“작가가 동양인가 보네요?”
영문 이름을 본 올란 감독이 물었다.
“음. 그런 가 보군.”
살짝 실망감이 드는 루카스 대표의 표정.
올란 감독 역시 마찬가지였다.
‘동양 문학을 무시한다기보다는 정서에 맞지 않는 부분들이 많으니까...’
문화의 차이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차이.
그러나 루카스 대표가 부탁하는 마당에 안 볼 수도 없었다.
“한번 읽어보고 다시 얘기해보자고.”
그렇게 마지못해 집어든 시나리오.
그러나 여전히 올란 감독의 머릿속엔 베네딕트를 잡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
오늘 극단의 뮤지컬 「가시리 가시리잇고」 최종 리허설 초대.
말이 초대지 도발이나 다름없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나는 기꺼이 응하기로 했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패라고 어느 정도 퀄리티의 작품인지 굳이 보여주겠다는데 피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게다가 좀 재미있을 거 같기도 하고.’
과연 얼마나 자신 있기에 이런 도발을 하는지 관심이 생기기도 했다.
정확히 3일 뒤.
서 대표, 나, 그리고 장현웅은 뮤지컬 「가시리 가시리잇고」의 최종 리허설에 참석했다.
“와... 규모가 엄청나네요.”
무대 연출에 엄청 공을 들인 게 티가 난다. 준비하고 있는 배우들의 의상만 해도 꽤 많은 돈이 들어갔을 것.
잠시 뒤,
리허설이 시작되고 음악이 흘러나온다.
적당한 훅과 함께 경쾌한 리듬.
어디선가 들어본 듯 익숙한 멜로디였다.
‘이건...’
서 대표가 유명 작곡가에게 까였던 바로 그 곡이었다.
뮤지컬 콘셉트에 맞게 편곡을 했지만 바로 알아들을 수밖에 없었다.
서 대표의 표정이 씁쓸해진다.
이내 이어지는 공연.
배우들의 연기도, 넘버도, 대본도 훌륭했다.
특히 노국공주와 공민왕의 러브 스토리를 재해석한 부분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2시간에 이어진 최종 리허설.
공연이 끝나자 동시에 함성소리가 터져 나온다.
“와! 대박!”
휘파람소리와 우렁찬 박수소리가 어지럽게 뒤섞인다.
뒤편에서 리허설을 지켜보던 박성규 교수와 김재용 대표는 승리를 확신하는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역시 업계 고인물답게 절대 실력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정성을 들인 노력들이 보인다.
“재밌게 보셨나요?”
어느 정도 무대가 정리되자 김 대표가 다가와 묻는다. 얼굴에선 벌써부터 자신감이 넘쳐난다. 물론 옆에서 지켜보는 박 교수의 표정도 비슷했고.
“이거, 애석하게 오픈 날짜가 같아서 재미있는 승부가 되겠네요.”
“지금이라도 피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의도가 보이는 도발.
그러나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네요.”
“하.”
내 말에 김 대표가 기가 막히다는 듯 헛숨을 내뱉는다. 그러나 주변을 의식한 듯 이내 표정을 정리하며 고개를 숙인다.
“권 작가의 자신감은 언제나 보기 좋네요. 그럼 살펴 들어가세요.”
두 사람은 마치 승리한 사람처럼 몸을 돌린다.
잠시 뒤,
나와 서 대표가 공연장을 나섰다.
서 대표의 얼굴엔 어느새 근심이 드리운다.
“이쪽도 엄청나네요.”
솔직히 서 대표 입장에선 주눅이 들 만한 퀄리티였다.
“하지만 우리 작품도 절대 밀리진 않잖아요. 아마 좋은 승부가 될 거 같네요.”
강한 의지를 표현하는 서 대표.
그러나 내가 원하는 건 그 정도가 아니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가 이길 테니까.”
“...네?”
“대신 조금 수정이 필요하겠네요.”
「가시리 가시리잇고」
최근 불거진 애국 감성을 자극한 이야기로 본래 역사와는 다른 엔딩을 만들어냈다.
일종의 대체역사 소설 같은 느낌.
덕분에 역사적 비극이었던 두 사람의 로맨스는 희망으로 이어진다. 엔딩을 향해 쉼 없이 달려 나간다.
덕분에 몰입도가 좋았고,
다 좋았다.
그러나 한 가지 장점.
지나치게 답이 떨어지는 엔딩이 문제였다.
‘결국 관객이 해석할 여지를 주지 않았어.’
해피엔딩으로 인해 기분은 좋지만 감동에 대한 깊이가 얕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대로라면 처음엔 주목 받아도 거기서 그칠 확률이 높아.’
해석할 여지가 없으니 재관람이나 다양한 해석을 통한 2차적인 기쁨이 있을 리 없었다.
‘그렇다면 우린 조금 다른 길을 가야지.’
필요한 건 약간의 수정이었다.
그러나 그 작은 차이가 가져올 결과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가 될 터.
확신하냐고?
물론, 내 오른 손을 걸 수도 있으니까.
이제 남은 건 우리 작품 「거장의 숨결」 최종 리허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