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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127화 (127/203)

127. priceless - 매우 귀중한, 정말 재미있는 (2)

127.

***

짝짝짝.

아류가 아닌 방수찬만의 오리지널 연기.

그 첫 시작이 전해주는 감격에 배우들도, 스태프들도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잠시 뒤, 스태프들이 잠시 무대를 정리하는 사이 나는 서미연 대표와 대화를 나눴다.

“작가님 보시기엔 어떠셨나요?”

“훌륭했습니다. 감정선, 연기, 노래, 동선, 모든 게 감탄만 나오네요.”

솔직한 감상이었다.

조현성의 연기와 완벽히 다른 버전.

마치 불과 얼음의 대결처럼 상반되는 매력을 가진 리허설이었다.

마치 리프라이즈 곡처럼 관객들을 향해 각기 다른 매력을 선사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두 가지 버전이라고 해도 되겠는데요?”

내 말에 서 대표가 웃는다.

“그러게요. 아마 한 번 본 관객은 무조건 다른 배우의 버전도 보고 싶을 거 같은데요?”

이대로라면 재관람률 상승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던 서 대표는 남은 일정에 대해 의논하기 시작했다.

“이제 남은 건 오프닝 날짜를 정하는 거네요. 참, 저쪽 오프닝 일자는 어떻게 되지?”

서 대표가 옆에 자리한 직원에게 물었다. 서 대표가 말하는 저쪽은 당연히 김재용 대표의 오늘 극단을 의미했다.

“3월 1일이에요. 공휴일이기도 하고 애국 콘셉트로 짠 작품이라 더할 나위 없이 좋죠.”

“흠. 스케줄을 보니 당기긴 힘들 거 같고, 그럼 우린 한 2주 정도 뒤에 오픈할까?”

서 대표가 고민되는 듯 묻는다.

“하긴, 조금 더 빠르거나 한 주 늦추는 것도 나쁘지 않죠.”

두 사람의 대화는 오프닝 싸움을 피하자는 실질적인 대안이었다.

괜히 초반 티케팅에 밀렸다가 그 여파로 인해 큰 손해를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러지 말고 3월 1일로 하죠.”

내 말에 서 대표가 놀란 듯 쳐다본다.

“...네?”

“오프닝 날짜를 피한다 해도 공연 기간 대부분이 겹치는 상황이에요.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싸움이라면, 시작부터 정면으로 붙어야죠.”

“...”

잠시 고민하던 서 대표.

그러나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흠. 좋습니다. 사실 내심 붙어보고 싶었는데, 작가님이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용기가 생기네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서 대표가 단순히 그 정도 일로 중대사를 결정할 사람은 아니었다.

‘리허설을 보고 자신감이 붙은 거지.’

좋은 징조였다.

당연히 나 역시 근거 없이 맞붙자고 한 건 아니었다.

자금, 대본, 배우.

게다가 완벽히 세팅된 곡까지.

‘아무리 생각해도 질 자신이 없거든.’

이번에야말로 상대방을 시원하게 밟아줄 차례였다.

물론 자신도 있었고.

벌써부터 땅을 치고 후회하는 김 대표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간다.

***

늦은 밤.

나는 방수찬 배우, 그리고 손주환 작곡가와 함께 술잔을 기울였다.

술잔이 돌수록 자연스럽게 깊어지는 대화.

막 술잔을 비운 방수찬이 말을 잇는다.

“일주일 동안 큰 걱정 끼쳐 드려서 정말 죄송했습니다.”

진심 어린 사과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기다리긴 했지만 그 덕에 훨씬 더 좋은 연기로 보답하셨잖아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 말에 비로소 방수찬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다.

“작가님과 이야기하면 뭐가 이상하네요.”

“무슨 뜻이죠?”

“음. 표현이 조금 이상한데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래요 마음이 편해지는 기분이랄까요? 마침 원로 선배님들을 만났을 때 느낌도 나고... 아무튼 그래요.”

본인이 말해놓고도 멋쩍은지 뒷머리를 살짝 긁는다. 그러다가 이내 속 얘기를 털어놓는다.

“조현성 선배와의 더블 캐스팅... 사실 처음부터 좀 부담스러웠어요. 소식을 듣자마자 선배가 출연하는 요일이 언제인지 묻는 사람도 있다 보니 더 긴장할 수밖에 없었죠.”

방수찬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떠오른다. 대한민국 뮤지컬을 대표하는 인기 배우와 더블 캐스팅되었으니 자신감이 떨어질 만도 했다.

“그래서 더 두 분께 감사할 수밖에 없네요. 자, 한 잔 받으시죠.”

리허설 결과 때문인지 한결 편안해진 얼굴.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모든 걸 쏟아낸 리허설이었고, 그 결과 역시 만족스러웠으니까.

지금 방수찬이 느끼는 감정은 뭐랄까... 그래, 보람. 그 단어가 가장 적절한 표현이었다.

“연기가 이렇게 재밌었던 적이 언제인가 싶어요. 공연이 끝나고 힘이 하나도 없는데, 박수 소리를 듣자마자 충전이 되는 기분이었어요.”

듣고 있던 손주환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요. 저도 그런 적 있었어요. 계약하고 처음으로 곡을 가져갔는데 며칠 밤을 새워서 거의 죽을 지경이었거든요. 근데 사람들이 제 곡을 듣고 좋아하니까 피로가 싹 가시는 기분이 들더라고요. 그때 기분은 진짜...”

손주환은 잠시 허공을 보며 그 순간의 감동을 되새겼다.

처지가 비슷해서일까.

역시나 두 사람은 공감대가 확실했다.

뭐, 그래서 손주환을 보내 방수찬을 위로하게 만든 거였고.

“빨리 답을 찾았다면 이렇게 헤매진 않았을 텐데, 정말 죄송합니다.”

미안한 듯 사과를 건네는 방수찬.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솔직히 애초에 답은 없었습니다.”

“...네?”

방수찬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두 눈을 끔뻑인다.

나는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으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

“사실 크리스토퍼 말로라는 캐릭터는 한 마디로 정형화 내릴 수 없는 캐릭터였어요. 우리처럼 모순적이면서 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는 캐릭터니까요. 그래서 무엇보다 배우들의 해석이 중요한 배역이었어요.”

듣고 있던 손주환이 순간 눈을 크게 뜬다.

“아... 맞아요. 어떨 땐 후광이 비칠 정도로 찬란하게 빛나는 캐릭터지만, 또 어떨 땐 시궁창에서 뒹구는 실패자처럼 처연한 캐릭터였거든요.”

손주환의 작품 분석 역시 수준급이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런 캐릭터를 두고 조현성 배우님은 천재성에 집중한 거고, 방수찬 배우님은 그의 상처에 집중한 거고요. 그리고 그건 어쩔 수 없었겠죠.”

내가 쳐다보자 방수찬이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역시 정확하시네요. 솔직히 크리스토퍼 말로의 상처에 집중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대본을 읽다 보면 저도 모르게 그의 상처에 눈이 가게 되더라고요...”

어쩔 수 없는 반응이었다.

살아온 배경, 즉 배우의 인생이 결국 대본을 해석하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조현성이 크리스토퍼 말로의 천재성에 주목한 것도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언제나 천재로서 이름을 날린 그였기에 무엇보다 그 측면이 더 마음에 와닿는 것.

이걸 다른 말로 설명하면 간단했다.

“결국 오늘 보여주신 연기는 오직 방수찬 배우님만 보여줄 수 있는 크리스토퍼 말로의 모습이었어요. 그래서 더 기대가 되는 거고요.”

“...”

방수찬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진다.

그리고 이내 입가에 미소가 드리운다.

“저만이 보여줄 수 있는 연기라... 말씀을 들으니 자신감이 생기네요.”

어느새 단단해진 눈빛.

그리고 그에게서 풍기는 기운 역시 안정적으로 변한다.

그 변화가 의미하는 건 하나였다.

바로 성장.

‘한 단계 올라섰군.’

자신의 해석에 대한 확신.

그리고 보다 깊은 사색.

배우가 두 가지를 동시에 깨닫게 됐을 때 얻어지는 건 바로 연기에 대한 즐거움이었다.

‘그 즐거움이야 말로 일류가 될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거고.’

사실 재능이 있다고 해서 모두 성공하는 세상이 아니었다.

재능과 노력, 그리고 거기에 운과 기회까지 더해져야 사람들의 머릿속에 기억이 남는 배우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누군가는 그런 말을 하기도 했다.

‘연기는 배우가 하지만 인기는 하늘이 점지해주는 것이라고...’

대표적인 예가 바로 조현성이었다.

태생부터 뮤지컬 분야의 금수저.

게다가 고급스러운 외모에, 연기마저 천재적인 재능을 보여줘 처음부터 인기 스타였단 배우.

그에 비해 방수찬은 개천에서 태어난 격이었다.

그나마 작년에 출연한 모 뮤지컬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펼친 덕에 서미연 대표의 눈에 들 수 있었고 여기까지 온 것.

그러나 이제는 조금 달라졌다.

‘그 개천에서 용이 날 차례니까.’

흐뭇한 생각에 술맛이 절로 좋아지는 기분.

내가 기분 좋게 잔을 비우자 방수찬이 기다렸다는 듯이 잔을 채워준다.

“기분도 좋은데 우리 같이 건배할까요?”

방수찬이 잔을 든다.

자신감 넘치는 표정과 행동.

아주 좋은 징조였다.

***

한 시간쯤 뒤,

내일 연습을 위해 방수찬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처럼 가진 술자리에 아쉬움이 남은 나와 손주환은 조금 더 마시기로 했다.

“방수찬 배우님, 완전 다른 사람이 됐네요. 손 선생님의 위로가 아주 좋은 약이 됐나 봅니다.”

내 말에 손주환이 손사래를 친다.

“아이고, 그런 말씀 마세요. 제가 뭐 한 게 있나요. 그냥... 제 생각을 있는 그대로 전했을 뿐이죠.”

“그게 어려운 일이잖아요. 덕분에 방수찬 배우도 한층 더 성장한 거 같고요.”

내 말에 손주환이 술을 한 잔 들이켠다.

얕은 한숨과 함께 천천히 입을 연다.

“솔직히 작가님 말씀 듣고 나니까 남 일 같지 않더라고요. 저 역시 그런 고민에서 벗어난 지 얼마 안 됐잖아요.”

그의 입가에 떠오른 건 쓰디쓴 미소.

순간 손주환을 처음 만난 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그게 고작 몇 달 전이네요?”

“그때도 여기였었죠?”

내 말에 손주환은 고개를 끄덕인다.

잠시 옛 기억을 떠올리다가 손주환이 이내 다시 입을 연다.

“생각해보면 그때 절 붙잡아 준 게 작가님의 위로였잖아요. 전 그저 그 위로의 일부분을 흘려보냈을 뿐이네요.”

손주환의 말대로였다.

내가 손주환을 건넨 위로와 도움은 방수찬을 일으킬 수 있는 가장 큰 위로가 되어 돌아왔다.

결국 인생사 돌고 도는 거니까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이치.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공연 날짜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참, 권 작가님은 다음 작품 계획이 어떻게 되시나요?”

시원하게 잔을 비운 손주환이 물었다.

“저는 지금 영화 시나리오 하나를 쓰고 있습니다.”

“영화요? 아, 기사 본 거 같아요. 대단하시네요. 이번엔 영화라니...”

“손 선생님이야말로 이제 뭐 하실 예정인가요? 공연 곡 관련해서는 이미 마무리가 됐잖아요.”

“네, 작가님이 대본을 수정하지 않는 이상 끝이 났죠. 사실 바빴을 때가 좋았어요. 작업이 끝나니까 살짝 공허하네요...”

안타까운 현실이었다.

「거장의 숨결」 공연이 시작되면 달라지겠지만 그전까지 아직은 무명작가였으니까.

“다음 일이 있을 때까지 곡 작업 좀 하고 있으려고요.”

손주환이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는다.

그러나 내 입장에선 오히려 다행이었다.

‘아마 조만간 부탁할 일이 생길 거 같으니까.’

당연히 내 차기작과 관련된 부탁이었다.

***

늦은 오후.

오늘 극단 대표실.

최근 김재용 대표의 얼굴에선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리허설을 거듭할수록 성공에 대한 확신이 더욱 강해졌기 때문이었다.

“하하하. 그래, 이게 뮤지컬이지.”

박성규 교수의 입꼬리 역시 내려올 줄을 몰랐다.

시원하게 웃던 박 교수가 이내 김 대표를 바라본다.

“이제 최종 리허설만 남았군. 참, 김 대표 그때, 기자 부를 거지?”

잠시 턱을 쓸어내리던 김 대표가 이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다.

“당연하죠. 근데, 권 작가랑 서 대표도 한번 초대해볼까요?”

“...뭐?”

“기자만 있는 건 재미없잖아요. 저쪽 반응도 볼 겸, 어때요?”

그제야 박 교수의 얼굴이 밝아진다.

“뭐야? 설마 기죽여 놓으려고 부르자는 거였어?”

“뭐 그 정도에 기죽을 정도면 결과는 볼 것도 없지만요.”

“하, 이 친구. 정말 독하다니까?”

김 대표는 이내 휴대폰을 들었다.

아주 재미있을 것 같은 대결이 벌써부터 머릿속에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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