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priceless - 매우 귀중한, 정말 재미있는 (1)
126.
***
무대 뒤편,
연거푸 깊은 한숨을 내쉬던 방수찬이 이내 힘겹게 고개를 든다.
“망했어... 내가 망쳐버렸다고...”
리허설이 끝난 무대를 바라보던 방수찬은 입술을 깨문다.
리허설은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조현성의 압도적인 연기에 묻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흠잡을 데 없는 조현성의 연기에 비해 한없이 부족한 자신의 연기력. 떠올릴수록 자괴감이 밀려든다.
‘역시, 선배에 비해 너무 비교가 돼...’
조현성이 크리스토퍼 말로의 천재성을 고급스럽게 표현했다면 자신의 연기는 자꾸만 그의 어두운 내면을 파고드는 기분이었다.
‘이게 주연이지만 주연이 아닌 더블 캐스팅 배우의 한계일까?’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정의.
자신도 모르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사실 수준이 맞지 않는 더블 캐스팅의 경우 대중의 날 선 질타를 받을 때가 많았다.
‘역시 더블 캐스팅 배우는 별로다.’
‘내가 말했잖아. 그래서 요일을 잘 선택해야 한다니까?’
‘아니, 그래도 이건 너무 차이 나잖아. 어느 정도 비등한 배우를 세워야 문제가 없지.’
메인 배우와 비교되는 평가를 들을 때마다 어깨가 무거워진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달라지기 위해 노력했는데...’
그러나 간절한 만큼 실패에 대한 두려움도 커져만 갔다.
마음을 다잡지만 그럴수록 손끝이 떨린다.
점점 커지는 자괴감에 애꿎은 머리를 쥐어뜯을 뿐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넘어설 수 없는 건가?’
노력을 넘어선 재능의 영역.
그 격차를 직접 확인하자 좌절감은 더욱 커져만 간다.
머리를 쥐어뜯지만 나아지지 않는 자존감. 울컥울컥 솟구치는 비참함에 애꿎은 입술을 곱씹을 뿐이었다.
‘이대로 극복 못 하면 배역이 교체될 수도 있을 텐데...’
불안감이 엄습한다.
그런데도 좀처럼 벗어날 수 없는 슬럼프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런데 누군가 찾아온다.
“담배 한 대 피우실래요?”
뜻밖의 인물.
손주환 작곡가였다.
***
방수찬은 힘없이 옥상에 올랐다.
처음엔 손주환이 왜 자신에게 말을 거나 싶었다.
‘왜긴, 엉망인 리허설 때문이겠지...’
그만큼 이 공연에 사활이 달린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손주환 작곡가 역시 마찬가지였다.
연습 때 몇 번 봐서 안면은 있는 사이.
이번 공연에 무려 7곡을 작곡한 능력 있는 작곡가였다.
‘그 노래를 들으며 얼마나 감탄을 했었는지...’
방수찬은 한숨과 함께 이내 손주환을 바라본다.
“죄송하지만 저는 목 관리 때문에 끊은 지 오래라서요. 피시고 싶으시면 피셔도 됩니다.”
“아, 그렇군요. 사실 저도 피진 않습니다.”
“...네?”
그럼 왜 담배를 피자고 한 걸까?
의구심이 든다.
“그냥 잠깐 바람 쐬면 좋을 것 같아서요.”
“...”
이 모든 게 자신을 위한 배려였다.
주목 받지 못하는 더블 캐스팅 배우.
그런 자신을 신경 써주는 그 마음이 고마웠다.
“고맙습니다. 작곡가님이 저 같은 무명 배우까지 신경 써주시다니요.”
피식 웃던 손주환이 옆에 선다.
“솔직히 저도 얼마 전까진 별 볼 일 없는 무명 작곡가였어요. 따지고 보면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네? 말도 안 돼요. 그렇게 좋은 곡을 쓰셨는데요?”
방수찬은 진심으로 놀랐다.
뮤지컬 쪽에서 들어본 적은 없지만 분명 다른 분야에서 이름을 날린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다 권 작가님 덕분이죠. 여기저기서 거절당하던 제 곡의 가치를 처음 알아봐 주신 분이 바로 권 작가님이시거든요.”
“...”
방수찬은 눈을 크게 떴다.
‘또 권서준 작가님인가?’
사실 처음 대본을 보고 감탄만 나왔다.
자신의 연기 인생에서 가장 충격을 받은 대본이었다.
게다가 최근 드라마 작가, 웹툰 작가로도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그런데 뮤지컬 곡 선정에도 그가 나섰다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정말, 안목이 대단하신 분이네요.”
“맞아요. 정말 대단하신 분이죠. 근데, 그런 분이 방 배우님의 연기가 인상적이라고 하시던데요.”
“제, 제 연기가요? 그렇게 실수를 했는데도요?”
“네. 권 작가님은 당장의 실수보단 가능성을 보시는 분이거든요.”
말을 잇던 손주환의 얼굴이 이내 진지해진다.
“물론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배우님의 연기는 뭔가 조현성 배우님과 결이 다르거든요. 사실 그게 참 좋았고요.”
순간 방수찬의 표정이 다소 밝아지다가 이내 다시 어두워진다.
“하아... 위로해주시는 말씀이라면 감사합니다. 다만 아무리 제 색깔을 드러내봤자 무명에 가까운 배우의 연기는 기껏 해봐야 아류 소리만 듣거든요. 그렇다고 제가 조현성 선배를 이길 수도 없고요...”
마음은 고마웠지만 어쩔 수 없는 무명 배우의 한계였다.
“과연 그럴까?”
그런데 그때,
두 사람의 어깨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
서미연 대표였다.
“권 작가님은 오히려 네 연기가 리프라이즈 버전 같아서 더 가치 있다고 하시던데?”
“리프라이즈요?”
리프라이즈면 원곡에 편곡을 한 곡을 의미했다.
“나도 같은 생각이야. 내가 수찬이 널 선택한 이유도 너만이 보여줄 수 있는 연기가 있기 때문이었고. 그런데 넌 자꾸 조현성 배우를 흉내 내려고 해. 그러다 보니 막히는 거고.”
“...”
“조금 더 너의 연기를 끌어 올려 봐.”
서 대표의 지적은 정확했다.
고급스러운 조현성의 연기와 달리 어두운 분위기가 가득한 자신의 모습.
사실 너무 상반되는 연기 톤에 초조해서 몇 번이나 조현성의 연습 영상을 보며 따라 했다.
발성.
표정.
눈빛과 행동까지.
그런데 그럴수록 오히려 연기에 대한 자신감은 빛을 잃어갔다.
‘그게 독이 된 건가?’
그 순간 뒤통수에 띵하는 느낌이 찾아온다.
‘나만이 표현할 수 있는 크리스토퍼 말로의 모습이라...’
크리스토퍼 말로의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사람들에게 칭송 받는 천재였지만 더 높은 곳에 서 있는 셰익스피어에게 늘 열등감을 느꼈던 크리스토퍼 말로. 암울했던 천재의 삶 속에 어느새 자신의 모습이 투영된다.
비로소 이해하게 된 크리스토퍼 말로의 삶.
그는 비뚤어지고,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비극.
공연이 끝나고 먹먹하게 젖어 드는 감성이 끈적거리는 이유도 그 슬픔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나는 다른 엔딩을 꿈꾼다고...’
크리스토퍼 말로와 다른 삶을 살고 싶었다.
그때,
손주환 작곡가가 입을 연다.
“배우님의 연기는 결코 아류가 아니에요. 비슷하면서도 다른, 개개인의 개성을 지난 멜로디. 권 작가님의 말씀처럼 리프라이즈 버전이라고 할 수 있죠.”
“...”
“그러니까 굳이 조현성 배우를 따라잡으려고 하지 마세요. 무대에 오르는 모든 넘버에 의미가 있듯, 서 대표님이 배우님을 캐스팅한 이유가 있을 테니까요.”
손주환의 말은 그야말로 충격으로 다가왔다. 누구보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던 사람이었기에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
그래.
조현성은 고급스러운 이미지였다.
그러나 자신은 그렇지 못했다.
왜 이렇게 상반된 이미지를 가진 자신을 뽑았을까 고민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그 의미가 떠오른다.
‘그래, 나만이 보여줄 수 있는 크리스토퍼 말로가 있다는 거야... 때론 원곡보다 리프라이즈 곡이 더 사랑을 받는 경우도 있으니까...’
그 순간,
방수찬의 얼굴에 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
정확히 일주일 뒤.
나는 다시 한번 공연장을 찾았다.
방수찬이 요청한 2차 리허설 때문이었다.
배우 조현성도 이미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객석에 앉아서 리허설을 기다리는 상황.
무대 분장까지 마친 방수찬이 다가온다.
“지난번엔 죄송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엔 다를 겁니다. 저만이 할 수 있는 리프라이즈 버전을 준비했으니까요.”
야무지게 입을 다문 모습.
다행히 전해주고 싶었던 말이 제대로 전달된 모양이었다.
열기로 가득한 눈빛까지 좋은 징조였다.
“기대하겠습니다.”
“네. 지켜봐 주십시오.”
이내 뒤돌아서는 모습에서 자신감이 느껴진다.
뭔가 달라졌다는 느낌이 강하게 풍기는 걸음걸이.
잠시 뒤,
리허설이 시작된다.
지난번 문제가 있던 파트의 노래가 무대에 깔린다.
천천히 무대에 오르는 방수찬.
눈빛에서 벌써부터 범상치 않은 기운이 흐른다.
그리고 잠시 뒤,
사람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
서 대표의 입에서 지난번과 같은 한 마디가 튀어나온다.
그러나 이번엔 전혀 다른 의미.
뭐, 물론 모든 건 내 예상대로였다.
***
5분 전.
“후.”
무대 뒤편.
리허설을 준비하던 방수찬은 천천히 숨을 골랐다.
서 대표, 손주환 작곡가, 게다가 권서준 작가와 조현성 선배까지 지켜보는 리허설.
지난 일주일.
자는 시간도 아낀 채 대본을 읽었다.
단순히 대사를 외우고 노래를 연습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모든 순간,
그는 크리스토퍼 말로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아니 크리스토퍼 말로가 된 것처럼 행동하고, 생각했다.
‘현성 선배의 연기는 말로의 열정과 천재성을 부각시키기에 좋아. 그러나 그의 상처와 아픔, 좌절같이 어두운 면을 표현하기엔 오히려 약할 때가 있어.’
바로 그 부분이 방수찬에겐 기회였다.
어두운 연기만큼은 자신 있었으니까.
그리고,
이어진 방수찬의 무대.
“나를 칭송하던 자들의 환호는 어디 갔는가? 당신들의 시선은 어찌하여 이리도 차갑게 바뀌었는가?”
방수찬은 모든 걸 쏟아냈다.
피맺힌 절규를 있는 그대로 무대 위에 토해냈다.
“한스럽구나. 그토록 칭송하던 나의 글이 결국 끔찍한 저주였던 것을 이제야 알았구나. 그래, 너희의 오만을 참을 수 없는 천재는 오늘 기어코 당신들의 손에 의해 죽을 것이다!”
연기에 몰입한 게 아니었다.
그야말로 크리스토퍼 말로의 삶에 몰입한 것.
어느 순간 대사가 아닌 자기 생각, 자신의 마음을 꺼내고 있었다.
격렬한 몸짓에선 자유를 향한 갈망이, 고음으로 향하는 목소리에선 창작에 대한 열정이 고스란히 담긴다.
마치 번데기를 찢고 나온 한 마리의 나비가 처음 날갯짓을 하는 듯한 느낌.
그리고 이내 그 날갯짓이 아름답게 무대 위를 수놓는다.
잠시 뒤,
두 시간에 이은 공연이 끝나고,
마지막 한 소절이 나지막이 흐른다.
“하아, 하아, 하아...”
숨이 턱까지 차고,
온몸은 이미 땀으로 흠뻑 젖은 상태.
다 타버린 초처럼 모든 걸 쏟아부은 무대였다.
“...”
그런데,
무대는 고요했다.
자신을 지켜보는 동료들도, 앞에서 리허설을 보던 권서준, 서 대표, 조현성도 모두 침묵했다.
‘...설마 또 실패한 건가?’
순간 두려움이 엄습한다.
가까스로 버티던 두 다리가 휘청거린다.
그런데 그 순간,
짝짝짝.
작은 박수 소리가 객석에서 들린다.
권서준 작가였다.
뒤이어 박수소리가 더욱 거세진다.
서 대표, 손주환 작곡가.
그리고 수많은 동료의 박수 소리가 더해진다.
“대박, 수찬아. 너 완전 미친 놈 같았어!”
“이렇게 잘하는 놈이 그동안 왜 그런 거냐?”
그제야 상황이 이해된다.
그리고 그때,
조현성이 다가온다.
방수찬의 별.
그리고 평생 쫓고자 했던 목표.
“수찬아, 이거 봐봐. 나 닭살 돋았다.”
평생 우러러만 봤던 우상이 자신의 연기를 칭찬하고 있었다.
“정말, 최고였어.”
한 마디.
그것으로 충분했다.
천천히 어깨를 두드리는 울림이 선명히 느껴진다.
얼떨떨한 표정에 그제야 생기가 돈다.
‘내 노력이... 통했어...’
갑자기 울컥거리는 마음.
방수찬은 그 자리에 털썩 엎드린다.
“야, 야... 수찬아?”
“왜 그래? 너 괜찮아?”
놀란 동료들이 다급히 부르는데,
지켜보던 서 대표가 고개를 저으며 말린다.
그리고 잠시 뒤,
방수찬의 뺨을 타고 굵은 눈물이 흐른다.
뚝뚝뚝.
흘러내린 머리에 가려졌지만 무대 위에 떨어지는 땀과 눈물이 무대를 적신다.
그건 그동안 방수찬이 감당한 노력과 열정의 결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