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successful - 성공적인 (5)
125.
***
늦은 밤.
하얗게 김 서린 커다란 창.
나는 손을 뻗어 김을 닦아낸다.
비로소 투명해지는 유리창 너머로 조용히 무언가 내리고 있었다.
순간 눈인가 싶어 보니, 겨울비였다.
여름의 세찬 빗줄기와 다른 차분하면서 진중한 느낌의 겨울비.
나는 그 분위기 속에서 잠시 기분을 다잡는다.
빗소리만 들리는 고요한 세상.
문득 비를 맞으며 숲속을 헤매던 그 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그래, 그날도 그랬지...’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자연스럽게 어린 시절 내가 뛰어놀던 숲이 보인다.
그날, 나는 친구들과 함께 숲속에서 늦도록 숨바꼭질을 했다. 친구들에게 절대 들키지 않으려는 마음에 우거진 숲속 깊은 곳에 들어가 작은 몸을 숨겼다.
그런데 한참이 지나도 친구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고요한 숲속.
간간히 부는 바람 소리만 들린다.
그리고 그 순간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한 빗줄기.
놀란 내가 덤불을 빠져나왔지만 그 어디에도 친구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욕심이 과했던 걸까.
너무 깊이 숨어 친구들이 돌아가는 것도 모른 채 홀로 숲에 남았다.
나는 겁에 질린 채 숲을 헤맸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같은 곳을 빙빙 돌 뿐 길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지친 걸음에 커다란 나무 아래 숨어 비를 피했다.
가늘게 떨리는 손.
추위 때문인지, 두려움 때문인지 모를 떨림.
‘제발, 누구라도 와줬으면...’
나는 눈을 감은 채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해 같은 말을 되뇌었다.
그런데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숲을 적시는 빗줄기.
나뭇잎을 따라 흐르는 물방울이 고인 물 위에 떨어지며 내는 소리들.
흙과 나무 냄새가 뒤섞인 텁텁한 향기까지.
눈을 감자 오히려 생생해지는 감각들.
그 안에서 펼쳐지는 놀라운 상상들.
몽글거리는 그 느낌에 집중하자 이전엔 보이지 않던 무언가가 보이는 듯했다.
‘누군가 내 앞에 있어...’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내 눈에 보이는 건 작은 키의 어릿광대였다.
‘너 길을 잃었구나?’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와 장난을 걸어오는 녀석.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그제야 내 발을 붙잡고 있던 두려움이 가시기 시작한다.
‘숨바꼭질이 뭐라고 이렇게 깊은 곳까지 들어온 거야? 너는 필시 머리가 나쁜 아이일 거야. 3+3은 7이라는 것도 모르지? 하하하. 사실은 6이야. 넌 정말 몰랐던 얼굴이네?’
나는 쉼 없이 떠드는 녀석의 수다를 들으며 걸음을 옮겼다. 짓궂은 장난을 주고받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길을 잃었다는 사실도 잊을 수 있었다.
결국 난 녀석의 도움으로 숲을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마침 비가 그치고,
햇빛이 숲 초입을 밝힌다.
드디어 숲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자 녀석이 갑자기 걸음을 멈춘다.
‘절대 잊지 마. 인간은 뭔가에 욕심을 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길을 잃고 마니까. 오늘의 너처럼 말이야.’
녀석은 이내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손을 흔든다. 그렇게 녀석은 원래 존재하지 않은 사람처럼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래.
녀석은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해 내가 만들어낸 상상 속 인물이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그러나 내 마음속엔 살아 숨쉬는.
물론 나는 그 뒤로도 녀석을 종종 만났다.
바로 내 작품 속에서.
[As you like it : 뜻대로 하세요]
유토피아나 다름없는 아든 숲에서 펼쳐지는 신비한 이야기.
다양한 모습으로 사랑을 나누는 네 쌍의 연인들을 통해 회개하고, 변화하고, 또 결혼에 이르는 모습을 담았다.
그러나 내가 공들여 만든 캐릭터는 그들이 아닌 한 명의 광대였다.
바로 터치스톤(Touchstone)
익살스러운 얼굴로 가면이 걸린 막대기를 하늘로 치켜든 어릿광대.
한 발로 서서 번득이는 재치와 거침없는 언행으로 세상의 통념을 뒤집고 가진 자들의 숨겨진 위선을 까발려 우스갯거리로 만드는 장난꾸러기.
영민하면서 익살스러운 녀석은 내 작품 곳곳에 얼굴을 비췄다.
‘어리석은 리어왕의 모습을 비웃는 것도 바로 어릿광대였지.’
나는 모순적인 세상을 비웃는 장치로 녀석을 불러냈다. 우스꽝스러운 외모, 그러나 녀석이 내뱉는 말은 인물들의 상황과 모순을 창으로 찌르듯 꿰뚫으며 독자로 하여금 시원함을 선사했다.
왕도, 귀족도, 그 어떤 대단한 사람도 결국 한낱 인간에 지나지 않음을, 아니 욕망에 충실한 동물임을 가르쳐 주는 극적 장치.
‘어릿광대야말로 우리에게 꼭 필요한 존재니까.’
나는 이번 작품에도 그런 인물을 하나 넣었다.
지이잉.
그 순간 휴대폰이 울린다.
스티브 대표였다.
-시나리오 잘 읽었습니다. 훌륭하네요. 바로 진행해 보겠습니다.
간단명료한 평가.
물론 아주 흡족한 대답이었다.
***
며칠 뒤.
나는 차기작에 대한 진행을 하이든 에이전시에 일임했다.
작가는 집필에 집중하고, 계약과 유통은 에이전시가 담당하고, 내 입장에서는 오로지 작품에 집중할 수 있는 시스템이라 아주 유용했다.
‘괜히 에이전시를 이용하는 게 아니군.’
나는 다시 한번 내 선택에 만족해하며 송파로 향했다.
뮤지컬 「거장의 숨결」 2차 리허설 참관 때문이었다.
“오늘도 엄청나겠지?”
장현웅이 설렘 가득한 표정으로 공연장에 들어섰다.
“아마도. 방수찬 배우님이 춤, 노래, 연기까지 잘하시는 분이거든.”
“그럼 나 화장실 좀 다녀와야겠다. 리허설 보다가 중요한 장면 놓치면 안 되니까.”
장현웅이 서둘러 화장실로 향한다.
어느새 뮤지컬에 매력에 푹 빠진 녀석이었다.
나는 먼저 공연장 안으로 들어왔다.
조금 일찍 와서일까.
무대 위는 아직도 준비가 한창이었다.
슬쩍 둘러보는데 당연히 있어야 할 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왜 방수찬 배우는 보이지 않는 거지?’
열심히 연습하는 배우들 사이로 주연 배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잠시 의아한 마음으로 둘러보다가 이내 객석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하아...”
그런데 그때,
무대 뒤편에서 한숨이 들린다.
화려한 무대와 달리 그늘진 공간.
누군가 싶어 보니 방수찬이었다.
“대체, 대체 뭐가 문제인 거냐고...”
답답한 듯 혼잣말을 내뱉는 방수찬의 목소리. 평소와 달리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무슨 일이지?’
자연스럽게 관심이 흐른다.
“나를 구속하는 세상의 굴레들이여. 내 눈앞에서 당장 사라져라. 내 저주가 너희에게 임하리니... 너희에게 임하리니... 하아, 이게 아닌데...”
노래를 부르던 방수찬의 입에 또다시 깊은 한숨이 흘러나온다.
나는 가만히 방수찬을 향해 다가갔다.
“방수찬 배우님?”
인기척을 느낀 방수찬이 고개를 든다.
“궈, 권 작가님?”
“한숨 소리가 깊어서 무슨 일인가 싶어서 왔어요.”
벌떡 일어난 방수찬이 어색하게 웃는다.
“아, 죄송합니다. 잠시 연습 좀 하고 있었거든요...”
짧은 대답을 하면서도 세차게 흔들리는 눈동자. 불안해 보이는 표정과 정돈되지 않은 목소리까지.
리허설 직전의 배우에게서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때,
스태프의 외침 소리가 들린다.
“리허설 시작합니다!”
방수찬은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를 한다.
“오, 올라가 봐야겠네요.”
방수찬이 어색한 인사와 함께 서둘러 무대로 향한다.
나는 가만히 방수찬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저런 눈빛으로는 제대로 된 연기를 할 수 없었다. 극도의 부담감으로 자신의 능력을 다 발휘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조금 전 방수찬이 보인 연기 톤이었다.
‘이건 방수찬 배우님의 연기가 아니야. 마치 조현성 배우님의 연기를 카피하려는 듯한 느낌이지.’
잠시 뒤,
무대가 정리되고, 배우들이 오른다.
제시간에 도착한 서 대표가 옆에 앉는다.
“일찍 오셨네요?”
“네, 다행히 차가 막히지 않더라고요.”
짧은 인사를 나누는 도중 장현웅이 돌아왔다.
“어? 벌써 시작인가 보네요?”
서둘러 자리에 앉는 장현웅.
동시에 무대 위에 음악이 흐른다.
둥둥둥.
웅장하게 울려 퍼지는 리듬.
흠잡을 데 없는 멜로디는 벌써부터 귀에 익숙했다.
그렇게 시작된 2차 리허설.
그런데...
리허설을 지켜보던 서 대표의 고개가 한쪽으로 기운다.
“...어?”
의구심이 가득 담긴 한 마디.
사실 그 한 마디로 상황을 표현하기엔 충분했다.
“저 친구가... 왜 저러지?”
서 대표의 얼굴이 점차 굳어지고 있었다.
***
리허설은 정확히 내 예상대로 진행됐다.
완벽했던 조현성의 연기.
그에 비해 방수찬의 연기는 아쉬웠다.
슬픔에 젖은 크리스토퍼 말로의 절규를 보여주는 후반부는 애절함 없이 너무 단조롭게 마무리되었다.
“조현성 씨 연기랑 분위기가 좀 다르네...”
뮤지컬을 잘 모르는 장현웅도 느낄만한 연기 격차.
사실 엄청난 차이는 아니었다.
다만 조현성의 연기가 워낙 인상적이었던 탓에 상대적으로 방수찬의 부족한 점이 드러나게 된 것.
정확히 2% 부족한 연기라고 해야 할까?
그러나 그 차이가 불러오는 감정의 격차는 이루 말하기 힘들 정도였다.
“...”
자연스럽게 서 대표의 얼굴이 심각해진다.
“원래 안정적인 연기가 장점인 친구인데, 오늘 왜 이러는지 모르겠네요...”
사실 방수찬의 가장 큰 문제점은 자연스럽지 못한 연기였다.
마치 어울리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으려는 느낌.
“아마 그 문제 때문인 거 같네요.”
내 말에 서 대표의 시선이 향한다.
“아까 무대 뒤편에서 방수찬 배우님이 연습하던 걸 봤거든요. 그런데 조현성의 연기 톤을 많이 따라 하시더라고요. 아마 그 때문에 슬럼프가 찾아온 거 같고요.”
서 대표가 고개를 끄덕인다.
“하아, 맞아요. 저도 그래서 몇 번 말해줬거든요. 연습할 땐 문제없었는데... 왜 막상 리허설에서 저러는지...”
서 대표는 안타까움에 말을 잇지 못했다.
그때,
가만히 듣고 있던 손주환이 입을 연다.
“...아마 완벽한 조현성 배우의 연기 때문에 그럴 거예요.”
“..네?”
서 대표가 손주환을 바라본다.
다른 사람들의 반응 역시 마찬가지였다.
“선배인 조현성에 비해 밀리는 실력이 마음을 조급하게 만든 거죠. 네임 벨류도 그렇고, 비교할수록 본인의 모습이 초라해 보이니까요. 저 심정은... 누구보다 제가 잘 알거든요.”
손주환의 얼굴에 쓴 미소가 떠오른다.
그의 무명 시절 이야기를 잘 아는 나는 그 말뜻을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잘나가는 동기들, 부모 도움받고 쭉쭉 치고 가는 그들을 바라보며 지금껏 가져온 열등감이었을 테니까.’
나는 손주환의 말에 힘을 실어 줬다.
“제 생각에도 그래요. 더블 캐스팅된 배우에게 느끼는 압박감이 그만큼 엄청나니까요. 그게 대한민국 최고의 배우, 조현성이라면 더 할 거고요. 본인도 모르게 쫓아가게 되는 거죠.”
그제야 서 대표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중요한 건 원인이 아닌 해결책이었다. 물론 난 공연을 보며 생각해둔 해결책이 있었다.
다만 직접 나설 생각은 없었다.
‘그 역할을 해야 할 사람은 따로 있으니까.’
나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다만 이런 기회가 왔을 때 제대로 잡지 못하다면 그것 역시 실력이겠죠.”
나는 은연중에 더블 캐스팅 배우의 교체 의사를 내비쳤다.
그러자 서 대표의 표정이 굳어진다.
“...제가 한 번 얘기해보겠습니다.”
급히 일어서는 서 대표.
나는 고개를 저으며 서 대표를 말렸다.
“서 대표님이 지금 가셔봤자 들리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자신감만 바닥을 치게 되겠죠.”
서 대표가 멈칫거리더니 이내 답답한 듯 입을 연다.
“하아,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행히 도움 될 만한 분이 여기 계시니까요.”
나는 가만히 손주환을 쳐다봤다.
“제, 제가요?”
화들짝 놀라는 손주환의 모습.
나는 차분한 어조로 설명을 이어갔다.
“제 생각엔 손 선생님께서 해주실 얘기가 있을 거 같은데요? 아닌가요?”
지금 누구보다 방수찬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손주환이었다.
방수찬의 이야기에 가장 격하게 공감했던 손주환이야말로 방수찬의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을 테니까.
“...”
잠시 고민하던 손주환의 눈빛이 천천히 달라진다. 입술을 몇 번 곱씹던 손주환이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한 번 만나보겠습니다.”
손주환이 진지한 얼굴로 회의실을 빠져나간다.
곧 서 대표가 한숨을 내쉰다.
“정말 죄송합니다. 실력이 있는 친구라 안심했는데, 이런 일이 생기고 말았네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대표님 말씀대로 방 배우님이 가진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조현성 배우님에 비해 부족했던 거지 좀 전의 연기도 나쁘지 않았으니까요. 다만, 지금 방수찬 씨는 조현성 배우의 연기 그늘에 가려져 있습니다.”
말 그대로였다.
가능성이 있지만 짓눌려 있는 연기.
“거기서 벗어나 자신만의 연기를 개척해야죠. 곡뿐만 아니라 배역에 있어서도 리프라이즈 버전은 필요한 법이니까요. 아니, 장기적인 흥행을 위해 반드시 갖춰져야 할 요소이기도 하고요.”
“아...”
뒤늦게 내 의도를 이제야 이해한 서 대표의 눈이 커진다.
“그리고 그걸 가장 와 닿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손주환 작곡가님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기까지 한 사람의 노력으로 되는 건 아니었다.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 나갈 때 비로소 작품이 온전해지는 것.
‘노하우뿐만 아니라 때론 자신의 아픔까지 서로를 위해 나누는 게 진짜 동료니까.’
물론 지금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었다.
이제 기다리면 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