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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124화 (124/203)

124. successful - 성공적인 (4)

124.

***

조현성의 완벽에 가까운 공연.

장현웅이 감탄을 쏟아낸다.

“이거 대박인데요? 뮤지컬이 이렇게 재미있는 거였어?”

처음 경험하는 문화 충격.

장현웅의 얼굴에 감동이 가시지 않는다.

덕분에 지켜보던 서미연 대표와 손주환 작곡가의 표정도 밝아진다.

“그래서 제가 처음 시작한 게 뮤지컬이었죠. 물론 그 당시엔 뮤지컬이 대중화되기 전이라 어쩔 수 없이 연극으로 틀었지만... 그래서 그런지 감회가 새롭네요.”

감동에 젖은 서 대표의 말에 손주환 역시 고개를 끄덕인다.

“저도 그래요, 이렇게 제 넘버가 무대 위에 오르다니 정말 믿기지가 않네요.”

만족스러운 리허설 퀄리티에 더없이 훈훈한 분위기.

그때,

궁금함이 생긴 듯 장현웅이 입을 연다.

“근데 처음 나왔던 곡이랑 중간에 나왔던 곡 말이에요. 멜로디가 비슷하던데, 이거 앞에 나왔던 리듬 아닌가요?”

듣고 있던 손주환이 친절하게 설명을 이어간다.

“맞아요. 뮤지컬에선 이전에 등장한 멜로디를 변주하거나 반복해서 사용하거든요. 그렇게 만든 넘버를 리프라이즈(Reprise)라고 부르고요.”

“리프라이즈요?”

되묻는 장현웅을 보며 손주환이 고개를 끄덕인다.

“네, 같은 선율을 반복하지만 서로 다른 버전의 노래에요. 뮤지컬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요소죠. 보통 두 곡의 제목이 같기 때문에 뒤에 나오는 곡의 제목 뒤에 ‘Reprise’를 붙여 구분하곤 하고요.”

“아하, 그렇군요. 근데 굳이 반복해서 쓸 이유가 있나요? 더 좋은 멜로디를 삽입해도 되잖아요?”

나는 장현웅을 위해 설명을 덧붙였다.

“한창 공연에 집중해야 하는 상황에서 매번 다른 노래가 나오면 관객 입장에선 피로를 느낄 수 있거든. 게다가 뮤지컬에서는 연극처럼 막이나 장과 같은 구분이 세분화되지 않아서 각각 다른 버전의 노래를 통해 장면을 구분하기도 하고.”

듣고 있던 손주환이 고개를 끄덕인다.

“작가님의 말씀이 맞아요. 그래서 뮤지컬에서는 곡 하나가 아름다워도 사실 그 자체로 온전한 것이라고 보긴 힘들죠. 모든 곡이 이어졌을 때 비로소 하나의 완전한 스토리를 완성하니까요.”

리프라이즈.

청각적 즐거움을 선사하는 뮤지컬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 중 하나였다. 때론 대사보다 중요한 상징성을 가지며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힘을 가진 요소.

물론 의미 없이 반복 사용하는 건 아니었다. 반복되는 멜로디를 통해 극 중에서 핵심적인 메시지나 사건, 심경의 변화를 표현하는 것.

밥 먹었어?

밥 먹었어?

같은 대사지만 어떤 톤이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가 되듯 멜로디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뮤지컬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음악이라는 말이 있지. 음표로 이뤄진 대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고.”

단순히 듣기 좋은 노래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작품 전체의 주제와 분위기, 그리고 배우의 연기까지 하나가 되어 완성되는 것, 그게 바로 뮤지컬 음악이었다.

“그래서 「가시리 가시리잇고」를 제작 중인 오늘 극단의 김재용 대표가 특히 신경 쓴 부분이기도 하죠.”

서 대표가 슬쩍 끼어들며 말한다.

안 그래도 유명 작곡가 앞에서 물 먹은 경험을 한 서 대표였기에 표정이 밝진 않았다.

“사실 저도 그 부분이 걱정되긴 해요. 최선을 다하긴 했지만 유명 작곡가들에 비해 인지도가 낮은 건 어쩔 수 없으니까요.”

손주환이 조심스럽게 말한다.

그러자 서 대표가 세차게 고개를 젓는다.

“아이고, 그런 의미로 한 말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죠. 그리고 직접 대봐야 알 만큼 손주환 작곡가님의 곡도 훌륭하고요.”

조금 당황한 서 대표의 표정.

나는 자연스럽게 서 대표를 거들었다.

“맞습니다. 결과는 대봐야 아는 거죠. 어제까지 무명이었다고, 내일도 무명이라는 법은 없으니까요.”

내 말에 손주환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고맙습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위로가 되네요.”

어느새 되찾은 미소.

서 대표는 그제야 안도하며 고맙다는 눈빛을 슬쩍 내게 보낸다.

“참, 리허설 한 번 더 남았죠?”

나는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환기했다.

조현성의 공연이 끝났지만 아직 한 번의 리허설이 더 남아있었다.

바로 더블 캐스팅된 배우들의 리허설이었다.

“네, 다음 주입니다. 그때쯤 되면 완벽하게 준비가 될 거 같아요.”

자신감 넘치는 서 대표의 목소리가 든든했다.

“다음번 리허설의 주연은 방수찬이라는 친구인데, 아주 재능이 많은 친구예요. 저랑 몇 작품같이 한 친구인데 안정적인 연기가 장점이고요.”

“이거 벌써부터 기대되는데요?”

뮤지컬에 맛 들인 장현웅이 한껏 상기된 표정으로 묻는다.

물론 나 역시 기대되는 순간이었다.

***

그 시각,

「거장의 숨결」 무대 뒤편.

그늘진 곳에 숨은 채 머리를 쥐어뜯는 한 남자가 있었다.

귀공자 느낌의 조현성과 달리, 날카롭고 강인한 인상을 가진 남자의 이미지.

조현성과 함께 이번 크리스토퍼 말로 역할에 더블 캐스팅된 방수찬이었다.

“하아...”

방수찬은 입술을 깨문다.

조금 전에 보여준 조현성의 흠 잡을 데 없는 연기. 그의 연기가 훌륭할수록 자괴감이 밀려든다.

‘역시 선배의 연기는 대단하네. 나와는 너무 차이가 나...’

볼수록 고급스러운 조현성의 연기와 달리 날카로운 자신의 연기는 한없이 초라해 보이기만 했다.

같은 배역.

그러나 다른 배우.

실제로 그간 수십여 작품에 주연으로 출연한 조현성과 달리 방수찬은 10년간 줄곧 조연만 맡았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배우 출신 집안에, 해외 유학까지 다녀온 조현성과 자신은 시작부터 달랐다.

‘집안 형편 때문에 유학은 꿈도 꿀 수 없었지.’

간신히 대학만 졸업한 뒤에 작은 소극단에서 연기를 시작했다. 한 달 생활비도 안 되는 돈을 받으며 버티길 7년. 먹고 살기 위해 새벽엔 상하차 아르바이트까지 겸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버티고 버텨서 얻어낸 기회.

정반대의 길을 걸어온 자신이 어느새 조현성과 같은 배역에 도전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 기회가 간절했다.

그러나 간절한 만큼 실패에 대한 두려움도 커져만 간다.

‘내가... 과연 잘 할 수 있을까?’

마음을 다잡지만 그럴수록 손끝이 떨린다.

다음 리허설까지 딱 일주일 남은 상황.

답답한 방수찬의 마음과 달리 시간은 매정하게 흐르고 있었다.

***

늦은 밤.

작업실로 돌아온 나는 리허설의 감동을 다시 한번 음미했다.

내 대본이 작품화된 게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볼 때마다 새로운 감동이 밀려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살아있는 무대의 열기.

특히 7번 넘버의 리듬은 여전히 귓가에 맴도는 기분이었다. 자연스럽게 창작에 대한 뜨거운 욕구가 고양된다.

‘좋았어. 그것도 아주.’

조현성이 연기한 크리스토퍼 말로의 모습은 그야말로 천재 중의 천재라고 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이제 남은 건 더블 캐스팅된 배우의 역할이었다.

다음 리허설의 주연은 바로 방수찬.

나 역시 연습을 몇 번 지켜봤던 사람이었다.

흙수저로 시작했지만 지난 작품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줘 눈도장을 찍은 인물.

서 대표가 아끼는 배우이며 동시에 공연계의 신성이 될 거라 확신하는 배우였다.

연기력 준수하고, 무명 시절이 길었던 만큼 탄탄한 연기력.

‘그분이 잘해줘야 할 텐데.’

더블 캐스팅은 결국 두 주연 배우의 밸런스가 중요했다.

조현성이야 인지도로 먹고 들어가지만 상대적으로 밀리는 방수찬이 밸런스를 맞추지 못하면 조현성이 공연하는 날만 사람들이 몰릴 수밖에 없었다.

절반의 성공이 될 수도 있는 상황.

어쩌면 조현성의 리허설보다 더 중요한 리허설이었다.

‘일단 지켜보면 알겠지.’

나는 잠시 뮤지컬에 대한 생각을 밀어내고 책상에 앉았다.

차기작인 영화 대본 때문이었다.

내가 없이는 태어날 수 없는 또 하나의 세상. 나를 간절히 기다리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여기 있었다.

나는 씻는 것도 잊은 채 키보드 위에 두 손을 올렸다.

누군가 기한을 준 작업도 아니지만 나는 차기작 집필에 집중했다.

‘이 이야기의 결말을 가장 빨리 보고 싶은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니까.’

이제 80% 완성된 이야기.

오늘 초고를 완성할 예정이었다.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내 앞에 자연스럽게 거대한 도서관이 보인다.

눈을 감으니 보이는 아이러니.

그렇게 나는 오랜만에 나의 시크릿 라이브러리를 열었다.

내 머릿속 상상의 도서관.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나 선명한 이야기로 가득 찬 공간은 내가 평생토록 만들어온 영감의 보고였다.

수천 개의 미발표 작품들과 내가 평생 집필했던 수많은 작품이 가지런히 정리된 세상.

걸음을 옮겨 커다란 홀 가운데 선다.

나를 둘러싼 수십 층 높이의 책장들을 바라보다가 이내 살짝 발돋움해 허공에 솟구친다.

상상 속이기에 모든 게 가능한 공간.

끝없이 펼쳐진 책장을 따라 올라가다가 좌측 중간에 위치한 책장 앞에 선다.

‘여기쯤일 텐데...’

훑고 지나가는 손길 아래로 수많은 작품이 지나간다.

그러다가 한 책이 눈에 들어온다.

[As you like it : 뜻대로 하세요]

희극으로 유명한 내 작품이었다.

희극이란 자고로 인간 사회의 어리석은 부분을 주로 다루게 되는 장르.

이 작품 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All the world's a stage, and all the men and women merely players.

온 세상은 연극무대이고, 모든 여자와 남자는 배우일 뿐이다.

그래.

우리는 그저 인생이라는 연극 무대 위에 선 채 여러 가지 배역을 담당하는 배우일 뿐이었다.

나는 이 작품을 통해 우리의 인생을 7막으로 표현했다.

아기 땐 아기답게 울고, 침을 흘리고,

어린 학생 땐, 마치 달팽이처럼 투덜거리며 마지못해 학교에 가고,

연인일 땐 용광로처럼 한숨을 쉬고,

군인일 땐 물거품 같은 명예를 위해 대포 아가리로 뛰어들고,

법관일 땐 현명한 격언과 진부한 문구를 알게 되며,

나이가 들어선 말라빠진 허벅지가 너무 헐렁하고,

그리고 끝내 두 번째 어린 시절이라고 할 수 있는 순간이 찾아온다.

한 인생의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는 지점. 이빨도, 눈도, 미각도 없고, 아무것도 전혀 없는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

‘오직 망각만 있을 뿐이지.’

그게 바로 인생이었다.

자연스럽게 레이디 햄릿의 주제가 떠오른다.

있음이냐, 없음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To be, or not to be)

언젠가 끝날 무대처럼 헛된 인생.

그 덧없는 인생에서 더없이 허무한 욕망에 매몰되는 인간 군상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 순간, 밀물처럼 차오르는 이야기.

순식간에 세상을 뒤덮는 어둠처럼 검은 글씨들이 하얀 모니터 화면을 채워나가기 시작한다.

휘몰아치는 영감에 나는 쉼 없이 손가락을 놀린다. 기쁨을 넘어 창작의 황홀경이 온몸에 엄습한다.

‘그래, 이게 바로 이야기지.’

나는 늦은 밤까지 작업실에 머물며 영화 시나리오 작업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김 서린 창밖으로 어느새 아름다운 아침 해가 떠오른다.

문득 시계를 보니 이미 6시간이 지난 상황. 그렇게 두 달에 걸친 시나리오 작업은 이내 막바지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나는 완성된 초고를 스티브 대표에게 보냈다.

***

매사추세츠 하이든 에이전시 본사.

출근하는 스티브 대표는 평소와 달리 사뭇 진지했다.

바로 엔플릭스의 루카스 대표 때문이었다.

‘우리가 어떤 사인가? 좋은 작품이 있으면 얼른 추천해주게.’

최근 베네딕트의 출연 거절로 무산된 오리지널 영화 때문에 루카스 대표의 마음은 초조한 상태였다.

‘지금이 타이밍이긴 한데...’

좋은 IP만 있다면 단번에 좋은 거래를 성사할 수 있는 상황. 물론 스티브 대표 역시 기다리는 대본이 하나 있었다.

지이잉.

출근과 함께 한 통의 메일을 받았다.

가제 : 레이디 햄릿.

권서준 작가가 보낸 시나리오였다.

‘드디어 왔군.’

지난번 시놉시스를 보고 기다리는 중이라 스티브 대표의 손이 빨라진다.

그리고 잠시 뒤,

시나리오 대본을 읽어가던 스티브 대표의 눈이 커진다.

“이건...”

자신이 보고 있는 건 분명 대본이었다.

활자로 이어진 단순한 이야기.

그러나 그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그림처럼 펼쳐진다.

게다가 씬 한 개조차 허투루 들어간 게 없고,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살아 숨을 쉰다.

한국 재벌가를 배경으로 한 욕망에 관한 이야기. 그러나 오리지널 미국인인 자신이 보기에도 이해가 가는 맥락이 있었다.

‘하아. 어떻게 이렇게 인간의 욕망을 날 것 그대로 묘사할 수 있을까...’

때론 괴로울 정도로 파고드는 인간성에 대한 고찰. 그러나 보면 볼수록 작품이 주는 의미에 뒤통수가 멍해진다.

‘이거면 충분히 가능해.’

스티브 대표는 곧바로 비서에게 지시해 이 원고를 엔플릭스 대표에게 보냈다.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벌써부터 스티브 대표의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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