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successful - 성공적인 (3)
123.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으슬으슬 춥던 계절을 지나 이제 두꺼운 패딩을 꺼내야 할 정도로 겨울이 깊어졌다.
그 사이,
나는 차기작 집필에 집중했다.
트리트먼트도 나오고 슬슬 가닥이 잡힌 상태. 다행히 스티브 대표의 반응 역시 좋았다.
[기대되는 작품이네요. 하루빨리 완성된 대본을 보고 싶군요.]
스티브 대표는 전폭적으로 내 작품에 대한 지지를 보냈다. 덕분에 작품의 윤곽 역시 빠르게 잡히고 있었다.
‘역시 재미있어.’
아무리 생각해도 창작의 순간만큼 큰 기쁨은 없었다.
오전 작업을 마친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바라본다.
자연스럽게 영하 아래로 떨어진 기온.
그러나 웹툰 「새벽을 건너」의 인기는 좀처럼 식을 줄을 몰랐다.
네버이 금요 웹툰 1위를 넘어 이제는 전체 요일 1위마저 차지했다.
“이, 이게 말이 돼? 우리 웹툰이 1위라니...”
장현웅은 믿기지 않는 얼굴로 매일아침마다 사이트에 들어가 순위를 확인했다.
“그렇게 좋냐?”
“그걸 말이라고 해? 매일 봐도 질리지가 않는다.”
인기가 오른 만큼 작업량도 많아졌지만 녀석의 얼굴에선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참, 서준아 이거 집에 가져가라. 우리 엄마가 너 먹으라고 사골국 보내주셨어.”
“어머니께서?”
“그래. 네 건강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하니까 잘 챙겨야 한다고 하시더라고. 참, 이건 우리 아빠가 보내주신 홍삼.”
“지난번에 너희 아버지께서 한우도 사주셨잖아. 근데 뭐 이런 것까지 받아오고 그래?”
“야, 우리 아버지도 신나서 챙겨주시는 거니까 잔말 말고 그냥 받아. 이렇게라도 고마움을 표현해야 조금이나마 마음 편해질 거 같다고 하시더라.”
웹툰의 성공.
자연스럽게 따라붙는 돈과 명예.
녀석의 말대로 장현웅의 부모님께서는 연신 싱글벙글하셨다.
덕분에 오늘처럼 귀한 음식도 종종 얻어먹는 중이었고.
물론 좋은 소식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대중에 공개된 웹툰 「새벽을 건너」와 일성 전자의 콜라보는 지속적으로 엄청난 성과를 만들어냈다.
일성전자 T-Z.
4/4분기 스마트폰 분야 브랜드 파워 2위 달성.
미국과 일본 경쟁사에 밀리던 분야에서 좋은 성과를 내고 있었다.
대중들에게 친숙한 이미지로 다가간 덕에 최근엔 국내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를 주축으로 엄청난 판매고를 올리고 있었다.
게다가 인종과 상관없는 웹툰 콜라보로 인해 최근엔 유럽 시장까지 좋은 반응을 얻고 있었다.
[고마워. 덕분에 좋은 결과를 얻었네. 잊지 않을게.]
조예슬은 짧은 메시지로 감사의 뜻을 표했다. 내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배려에서 나온 행동.
나 역시 그 마음을 알기에 짧게나마 답장을 보냈다.
[늘 응원한다. 넌 잘할 거야.]
그리고 어느새 해가 바뀌었다.
새해가 되었지만 나의 생활을 크게 바뀌지 않았다. 작업실에서 차기작을 집필하고, 간간히 손주환 작곡가와 연락을 주고받으며 곡에 대한 아이디어를 나눴다.
“서준아, 손 선생님이 곡 보내주셨다.”
장현웅이 손주환 작곡가에게 받은 곡을 틀었다. 잠시 뒤, 고가의 스피커를 통해 웅장한 사운드가 작업실을 채운다.
귀를 찌릿하게 만드는 멜로디.
하나같이 작품에 녹아든 훌륭한 넘버들이었다.
듣고 있던 내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간다.
“대박... 이거 너무 좋은데?”
함께 듣던 장현웅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연신 감탄사를 터트리던 장현웅이 나를 바라보며 묻는다.
“근데, 생각해보니까 왜 유독 뮤지컬 곡만 넘버라고 부르는 거야?”
뮤지컬을 잘 모르는 장현웅이기에 생길 수 있는 의문이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 공연 준비 중에도 수시로 곡의 제목이나 순서가 바뀌어서 그런 걸 거야. 흔히 뮤지컬 곡의 제목은 보통 대본과 가사에서 차용하는데, 대본 내용이 바뀔 때마다 제목도 바꾸다 보면 혼동이 올 수 있으니까.”
“아, 맞아. 우리만 해도 지금까지 몇 번 바뀌었었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이어갔다.
“맞아. 곡 자체를 아예 빼거나 다른 곡으로 바꾸는 경우도 많거든. 그런데 그때마다 노래 제목을 정하고, 바꾸면 번거롭잖아. 배우, 스태프 입장에서도 혼란스럽고. 그래서 편의상 곡이 나오는 순서대로 숫자를 붙여 부르는 거야.”
“오호.”
그제야 장현웅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고 보니 이쪽도 알면 알수록 재미있다. 얼마 전만 해도 뮤지컬은 나랑 안 어울리는 고상한 취미라고 생각했는데.”
장현웅 뿐만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비싼 티켓 비용 때문에 뮤지컬에 대해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번 작품을 통해 내가 바꾸고 싶은 인식도 바로 그 부분이었다.
티켓 이상의 가치를 선사하고,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대중의 관심을 무대 공연 쪽으로 이끄는 것. 바로 뮤지컬의 대중화였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중요한 날이지.’
바로 「거장의 숨결」 첫 리허설이 있는 날이었다.
***
연남동에 위치한 작업실.
뮤지컬 넘버 작업을 하던 손주환 작곡가가 기지개를 켠다.
“후우, 드디어 끝났다.”
이번에 손주환 작곡가가 맞은 곡은 총 4곡. 리프라이즈 버전까지 합치면 모두 7곡의 노래를 편곡했다.
손주환은 잠시 의자에 앉아 작업을 마친 곡을 틀었다.
잔잔하게 흐르는 넘버 7번.
‘천재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손주환이 가장 좋아하는 곡이었다.
포근해지는 마음과 함께 익숙한 작업실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영하로 떨어진 날씨에도 따뜻하고,
누구의 눈치도 볼 것 없이 오로지 작업에 몰두할 수 있는 공간.
완벽한 방음 시설과 함께 작은 녹음실까지 딸려 있어 작곡가 입장에선 그야말로 완벽한 환경이었다.
어찌 보면 무명 작곡가 입장에선 과분한 시설. 사실 이 모든 게 가능했던 건 바로 권서준 작가의 도움 덕분이었다.
‘장인은 도구 탓을 안 하지만 장인에게 더 좋은 도구를 줬을 때의 퀄리티는 훨씬 좋을 수밖에 없겠죠?’
자신을 향한 권 작가의 든든한 신뢰.
덕분에 오로지 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권서준 덕분에 계속해서 꿀 수 있었던 꿈.
이제는 어떤 식으로든 보답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권서준은 한결같이 말했다.
‘저보단 다른 사람을 도와주세요. 우리 주변엔 아직도 꿈을 두고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만날수록 배포가 남다른 사람이었다.
아니 그릇 자체가 자신과 비교가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래, 언젠가는 나도 권 작가님처럼 누군가를 도와야지...’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한 계절이 지나가 있었다.
‘날씨가 추워진다 싶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새해구나.’
그만큼 열정을 쏟은 시간들이었다.
가볍게 한 모금 마신 커피만큼이나 밀려드는 뿌듯함이 몸을 따뜻하게 데우는 느낌.
창밖엔 때마침 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리허설에 가야 할 시간이었다.
***
낮부터 내린 함박눈이 서울을 덮었다.
모처럼 하얗게 덮인 도시의 풍경을 감상하며 나는 송파로 향했다.
블루라군씨어터.
일성 그룹에서 운영 중인 대한민국 최초의 뮤지컬 전용 극장.
2층 구조로 1층 700석, 2층 500석 총 1,200석이 넘는 대규모 공연이었다.
특히 라이온퀸, 지킬앤헤이드처럼 해외 유명 IP의 뮤지컬 공연으로 유명한 곳.
바로 이번 우리 작품의 무대이기도 했다.
솔직히 규모만 봤을 땐 창조 극단이 계약하기 어려운 곳. 그러나 그 어려운 걸 해낸 게 서미연 대표였다.
‘쉽지 않았을 텐데, 대단하군.’
한번 대표로서의 역할에 자각한 서 대표는 그야말로 종횡무진 활약하는 중이었다.
“어서 오세요, 작가님.”
서 대표가 친히 입구에서부터 나를 기다린다. 자신만만한 얼굴을 보니 연습에서 꽤나 좋은 퀄리티가 나온 모양이었다.
“제가 늦은 건 아니죠?”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어깨 너머로 들려온다.
고개를 돌리니 손주환 작곡가였다.
“아이고, 우리 작곡가님 오셨습니까? 편곡해주신 7번, 너무 좋던데요?”
서 대표의 밝은 인사와 함께 악수를 건넨다. 마주 잡은 손주환의 얼굴에도 자신감 넘치는 미소가 떠오른다.
“감사합니다. 정말 최선을 다했거든요.”
“역시, 그만큼의 퀄리티가 느껴지더군요. 정말 좋았습니다.”
“이게 다 우리 권 작가님이 좋은 환경을 마련해주신 덕분이죠. 이렇게 작업에 몰입한 적은 처음이거든요.”
손주환은 나에 대한 인사도 잊지 않았다.
우리는 새해 덕담을 가볍게 주고받으며 VIP 전용 엘리베이터를 통해 공연장 안으로 들어갔다.
“후. 작가님이 보시니 괜히 더 떨리네요.”
서 대표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진다.
잠시 뒤,
무대 위로 배우들이 올라온다.
의상과 분장만 없을 뿐 모든 동선과 순서는 실제 공연과 똑같이 진행되는 리허설.
낮게 깔리는 웅장한 음악과 함께 공연히 시작된다.
이내 조명이 들어오고, 스무 명이 넘는 배우에 의해 표현되는 런던 거리의 풍경.
그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는 활기찬 거리의 모습이 펼쳐진다.
자유분방한 동선 속에서 퍼즐처럼 딱딱 맞아떨어지는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보는 내내 그야말로 놀라움의 연속.
‘연습량이 엄청났겠군.’
배우들의 하모니 역시 예술이었다.
특히 2막에서 이어지는 7번곡은 유독 인상 깊었다.
제목 : 천재의 노래-Rep.
흐느끼며 부르는 멜로디.
절규가 쏟아지는 격정적 서사.
그 와중에 정제된 딕션은 대사 하나하나가 화살처럼 날아와 귀에 때려 박힌다.
“와... 역시 조현성이네요...”
장현웅이 자신도 모르게 내뱉는 감탄사.
첫 장면이 천재의 희망적인 멜로디를 선사했다면 리프라이즈 버전은 그의 좌절과 절망을 완벽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점차 고조되는 조현성의 목소리가 이내 무대를 장악한다.
나무랄 곳이 없는 완벽한 연기.
과연 조현성이었다.
***
같은 시각.
오늘 극단 역시 리허설이 한창이었다.
뮤지컬 「가시리 가시리잇고」
고려 시대 복장을 한 배우들이 선보이는 격렬한 전쟁장면.
그 속에서 울려 퍼지는 공민왕의 비애에 젖은 노래는 보기 드문 작품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내 이어지는 노국공주의 답가까지.
소리 없이 아우성치는 전쟁터 속에서 처연한 두 연인의 노랫가락이 울려 퍼진다.
잠시 뒤,
성공적으로 끝마친 리허설.
“완벽해. 완벽해!”
박수 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박성규 교수였다.
“김 대표, 이거지. 이게 연출이지! 이거 무조건 되겠는데?”
결과에 만족하는 박 교수는 들뜬 목소리를 숨기지 못했다.
물론 리허설을 내내 지켜보던 김재용 대표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번 작품은 잘 될 수밖에 없죠. 최고의 최고만을 모았으니까요.”
“하긴, 듣자 하니 저쪽은 무명 작곡가를 썼다며?”
손주환 작곡가.
김 대표도 아는 작곡가였다.
바로 마지막까지 자신의 곡을 써달라고 애원했던 작곡가가 바로 그 작곡가였으니까.
‘그 촌스러운 곡을 가져다 쓰다니, 서미연 그 친구도 감을 잃은 게 분명해.’
이미 곡과 연출에서 차이가 나는 상황.
승부는 이미 결정 난 거나 다름없었다.
지금 상황에서 유일한 변수는 오직 권서준 작가의 대본뿐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뮤지컬은 작가의 무대가 아닌 연출가의 영역이라고. 대본이 아무리 훌륭해도 그걸 제대로 표현 못 하면 말짱 꽝이거든.’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승부는 질 수가 없었다.
자신감을 넘어선 확신.
김 대표의 얼굴에 느른한 미소가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