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fashionable - 유행하는 (5)
119.
***
-저희 웹툰이 1등입니다!
들뜬 추광현 팀장의 목소리가 휴대폰을 타고 넘어온다.
“뭐라고? 1등?”
장현웅이 서둘러 사이트에 들어간다.
그리고 잠시 뒤,
금요 웹툰 순위가 쭉 이어진다.
몇 년째 변함없던 금요 웹툰 1위 자리.
그 완고한 왕좌에 「새벽을 건너」가 자리 잡고 있었다.
“마, 말도 안 돼. 이거... 실화냐?”
놀란 장현웅의 눈이 배는 커진다.
물론 실화였다.
놀랍게도.
***
늦은 밤.
연남동이 한눈에 보이는 고층 작업실.
“하아...”
인터넷 기사를 읽던 한 남자가 깊은 한숨을 내쉰다.
[웹툰「새벽을 건너」의 작가는 드라마 「이옥」의 권서준 작가로 밝혀져...]
“역시 너였구나...”
기사를 읽으며 자조적인 혼잣말을 내뱉는 남자는 권서준의 문창과 동기인 송진호였다.
그리고 그 작품 속에 등장하는 오성만은 바로 자신이었다. 이름을 바꿨지만 웹툰을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그 인물의 생각과 행동이 자기 자신과 꼭 같았으니까.
‘녀석은 내 열등감을 어떻게 이렇게 잘 아는 걸까?’
개인적인 얘기를 한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녀석은 마치 자신의 속에 들어왔다 나간 사람처럼 그 미세한 열등감과 불안감마저 정확히 캐치했다.
그게 너무나 완벽해서 반박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부끄러웠다.
‘왜 저렇게 살았을까...’
제삼자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은 못난 인생 그 자체였다.
후회로 점철된 지난 과거.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었지만 도망치지도, 그렇다고 넘어서지도 못한 시간들이었다.
‘안타까운 건 지금도 마찬가지라는 거지...’
2년간의 노력 끝에 어렵게 출판한 책은 혹평을 받았다. 그때의 충격으로 반폐인처럼 지낸 세월이 무려 9개월.
그런데도 글이라는 존재는 포기가 되지 않았다.
“하아...”
그렇게 오늘도 쓰고, 또 썼다.
몇 번이나 쓰고 지우고.
오늘 삭제한 내용만 3만 자가 넘었다.
그러나 화면에 남은 건 단 한 글자도 없었다.
“...”
결국 송진호의 손은 습관처럼 또다시 독한 위스키를 찾는다.
술과 담배.
그 두 가지만이 그 고통스러운 자책감과 열등감에서 잠시나마 안락함을 선사했다.
그러나,
깨어나면 더 심하게 몰려드는 자괴감.
2년 동안의 반복.
몸도 마음도 이미 지친 상태였다.
그런데도 또다시 술잔을 기울인다.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이 지옥 같은 슬럼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졸업 후 작업실을 얻어 나왔지만 글은 조금도 늘지 않았다. 오히려 정체되어 벽에 막힌 느낌.
‘네 글엔 네가 없다. 이 의미를 모른다면 넌 작가로 살아남을 수 없고.’
아버지 송영도 교수의 말은 가시처럼 박혀 매일 밤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나도 그걸 알고 싶다고...’
그러나 노력할수록 글은 더욱 망가져 갔다.
수많은 천재 작가들의 작품을 읽을수록 오히려 자신의 무능함만 선명해질 뿐이었다.
특히 권서준의 작품을 보면 그 정도는 더 심해졌다.
‘그 녀석은 어떻게 그렇게 잘 쓰는 거지?’
분명 2년 전만 해도 녀석과 자신의 차이는 하늘과 땅과 다름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감히 쫓아가지 못할 정도로 격차가 벌어지고 말았다.
소설, 연극, 뮤지컬.
드라마에 이어 드라마에 웹툰까지.
이젠 놀랍지도 않았다.
부러우면서 미안한 마음이 공존한다.
본받고 싶지만 그래선 안 된다는 죄책감이 뒤섞인다.
그 복잡한 감정이 마치 불에 덴 것처럼 송진호를 괴롭혔다.
‘이제라도 사과를 할까? 그럼 이 지옥 같은 슬럼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문득 드는 생각.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이었다.
“...”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젓는다.
‘지금에 와서? 염치도 없지...’
그렇게 송진호는 또다시 술잔을 기울였다.
독하디독한 위스키.
그러나 그 독한 술조차 송진호의 고통을 희석시키진 못했다.
***
한 달이 지났지만 웹툰 「새벽을 건너」는 금요일 웹툰 1위를 여전히 고수했다.
남녀노소 좋아할 만한 스토리에 조회 수, 댓글, 선호작이 급격히 늘어 이젠 전체 순위 3위에 오를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학과 졸업생의 희소식을 들은 문창과에선 발 빠르게 학과 강연에 나를 초청했다.
그러나 나는 자연스럽게 그 기회를 장현웅에게 양보했다.
“진짜? 내가 하라고?”
“그래.”
“아니야. 아무리 생각해도 네가 하는 게 맞는 거 같아...”
“난 공적인 자리에 설 생각이 없다니까. 그리고 이 작품은 너랑 내가 같이 만든 거잖아. 그러니까 자격은 충분하지.”
“하아. 그래도... 너무 떨리는데?”
기대하면서 또 긴장하는 장현웅.
그러나 결국 결심을 굳힌 장현웅이 학과를 빛낸 졸업생의 자격으로 신입생 특강을 하게 되었다.
오랜만에 들른 캠퍼스.
막상 소강당에 도착하자 장현웅이 뒷걸음질 친다.
“야, 네가 해라. 난 정말 못하겠다...”
손끝이 떨리는 걸 보니 바짝 긴장한 모양.
나는 녀석의 어깨를 두드리며 안심시킨다.
“밤새 준비했으면서 왜 엄살이야? 그냥 편하게 말하고 와. 여기 있는 신입생들은 다 우리처럼 미래에 대해 고민하던 친구들이야. 네 경험을 솔직하게 말해주면 그것만으로 도움이 된다고.”
“그런가...”
“그래. 솔직함이 얘네들한테는 더 도움이 될 거야.”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는 장현웅.
잠시 뒤, 용기를 얻은 녀석이 강단에 오른다.
학과 교수의 사회로 자연스럽게 강연이 시작된다.
“안녕하세요. 졸업생 장현웅입니다. 음. 어디서부터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그냥 궁금한 걸 질문을 해주시면 자연스럽게 답하는 방식으로 진행할까 하는데 어떨까요?”
“좋아요!”
신입생들의 환호성과 함께 여기저기서 손이 올라온다.
취업이 힘든 학과 특성상, 업계에서 콘텐츠로 성공한 선배의 이야기는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때,
익숙한 한 사람이 내 옆에 다가온다.
“정말 자랑스럽구나. 이렇게 졸업생 신분으로 특강을 하는 너희들을 보니까.”
특강 소식을 듣고 일부로 찾아온 송영도 교수였다.
송 교수의 얼굴에서 흐뭇함이 느껴진다. 하긴 교수로서 제자의 성공만큼 보람된 일도 드물 테니까.
“차기작 준비하고 있다면서 대체 웹툰 쪽은 언제 생각한 거냐? 그쪽까지 노릴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현웅이의 그림 실력 덕 좀 봤죠. 여러모로 운도 좋았고요.”
내 말에 송 교수가 피식 미소를 짓는다.
“녀석, 여전히 들뜨는 기색 하나가 없네.”
나는 자연스럽게 송 교수의 근황으로 대화를 이끌었다.
“선생님께서도 차기작을 집필 중이라는 소식 들었습니다.”
“그래. 네 녀석 말대로 내 글을 기다리는 독자들이 있다고 하니, 한 번 다시 달려봐야지.”
여유로운 미소를 보니 작품이 잘 나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여러모로 좋은 징조였다.
“물론입니다. 말씀하신 독자 1호가 바로 저니까요. 부디 너무 오래 기다리지 않게 해주세요.”
내 말에 송 교수가 미소를 짓는다.
“그래야지.”
대답과 함께 송 교수가 내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린다.
토닥토닥.
내 어깨를 두드리는 작은 울림.
그건 자신을 넘어선 제자를 향한 기대감과 대견함이었다.
잠시 뒤,
송 교수는 다음 수업을 위해 먼저 자리를 떴다.
어느새 강연에 푹 빠진 장현웅.
지켜보던 나도 잠시 소강당을 빠져나와 캠퍼스를 거닐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캠퍼스.
이제 겨울의 초입에 들어선 캠퍼스의 풍경은 조금은 적막한 느낌을 풍겼다.
‘그래도 좋군. 이 계절의 풍미도 근사하고.’
나는 그 적막함을 통해 차기작에 대한 영감을 떠올린다.
지난 한 달 동안 나는 차기작에 집중했다.
가제 : 레이디 햄릿.
대한민국 최고 재벌가에서 벌어지는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그릴 예정이었다.
돈, 권력, 명예.
피라미드의 정점을 향해 내달리는 세 사람.
나는 그들의 욕망을 날 것 그대로 표현했다. 막장이라 오해를 살 정도로 추악하고 더러운 욕망까지 낱낱이 드러냈다. 물론 걱정할 건 없었다.
‘원래 예술과 막장의 차이는 디테일에서 나오는 거니까.’
한 번 보고 느껴지는 바가 없다면 막장.
그러나 곱씹을수록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오고, 고민거리가 주어진다면 그게 바로 예술인 셈.
그런 의미에서 나는 조금 더 세밀하게 작품의 콘셉트를 정리하고 있었다.
때론 수십 페이지를 한 번에 쓸 때도 있지만 어떤 날은 대사 하나를 위해 몇 시간을 할애할 때도 있었다.
아주 순탄한 진행.
이제 초고가 나오는 건 시간문제였다.
***
일성 그룹 계열사인 일성 전자 회의실.
상무를 포함해 조직 수뇌부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이번에 출시될 스마트폰은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을 대상으로 준비 중인 제품입니다. 남녀노소, 모든 대상을 만족시킬 만한 홍보가 아니면 쉽지 않죠.”
“하지만 요즘같이 니즈가 세분화 된 시대에 전 연령층을 대상으로 하는 마케팅이 어디 있습니까?”
내년 상반기에 출시할 신형 스마트폰 마케팅 때문에 갑론을박이 한창이었다.
“하지만 회장님께서 무조건 만족할 만한 마케팅 전략을 짜오라고 하셨습니다. 모두 회장님 성격 아시잖아요?”
“...”
조 회장이 언급되자 회의실에 침묵이 흐른다.
“다른 그룹에선 이런 마케팅을 성공한 사례가 있었나?”
“제가 알기론 없습니다. 애초에 타겟 자체를 협소하게 잡는 게 최근 트렌드니까요.”
실무진의 말에 상무가 한숨을 내쉰다.
“이대로 답을 찾지 못하면 회장님의 불호령이 떨어질 거야. 그건 다들 알고 있지?”
진급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러나 만일 해결만 한다면 그 열매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상벌이 확실한 사람.
그게 바로 일성 그룹의 조 회장이었으니까.
“그래서 대안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누가 속 시원하게 말 좀 해봐.”
눈치를 보던 미래전략실장이 마지못해 입을 연다.
“아직 저희도 해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갑자기 긴급 미팅 소집돼서 가보니까 전 연령층에 어필할 수 있는 마케팅을 만들어오라고 하셔서 지금 다들 멘붕인 상태고요.”
“아니, 회장님 측근이 회장님의 의중을 모르면 대체 누가 알아? 자꾸 이렇게 사람 애간장 태울 거야?”
“죄송하지만 답답하긴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번에 뭔가 보여드리지 못하면 저희 역시 무사하지 못할 테니까요.”
상무와 미래전략실장의 대화에선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아, 미치겠네...”
남은 시간을 고작 일주일.
그야말로 피 말리는 시간이었다.
그때,
상무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한 여성을 향해 이동한다. 조금 전 본부장과의 대화와 달리 사뭇 진지한 표정과 말투.
“음. 조 팀장 생각은 어때요? 획기적인 마케팅이 없을까요?”
상무의 질문이 자연스럽게 한 여성을 향해 이어진다. 현 마케팅팀장을 맡고 있는 조예슬이었다.
상급자이지만 존칭을 써주는 이유.
직책은 마케팅팀장이지만 조 회장의 유일한 손녀이기도 하니까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일단 좀 더 고민할 필요가 있을 거 같네요. 쉬운 문제였다면 이렇게 저희가 모일 일도 없었을 테니까요.”
조예슬 역시 지금 당장은 해답이 없었다.
“흠. 그럼 일단 이틀 뒤에 다시 모입시다. 그때까지 각자 생각 좀 해오고.”
결국 방향을 잡지 못한 채 회의가 끝이 난다.
***
“후우.”
마케팅팀으로 돌아온 조예슬이 생각에 잠긴다.
‘쉽지 않아. 전 연령층을 대상으로 한 마케팅이라니...’
그러나 조 회장의 의지는 확고했다.
안 되면 될 때까지 하라는 게 바로 조 회장의 신념이기에 무조건 해답을 찾아야 했다.
아니, 해답이 없으면 만들어내야만 하는 상황.
일성 전자 사업부에서 심혈을 기울인 게 바로 최신 스마트폰 출시였다. 이 제품의 흥행에 따라 그룹 계열사의 미래가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여기서 뭔가 보여주지 않으면 경영 승계는 영영 어려워질 수도 있어.’
반드시 남녀노소, 그리고 모두가 공감할 만한 마케팅 전략을 만들어야 했다.
그러나 말이 쉽지 해결책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팀장님, 어떻게 할까요?”
직원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는다.
그야말로 팀 전체가 비상인 상태.
“후. 일단 제가 말해둔 콜라보 할 만한 아티스트들 섭외목록은 준비됐나요?”
“아, 네. 여기 있습니다.”
직원은 미리 준비해둔 목록을 조예슬 앞에 내밀었다.
대략 서른 개 정도 되는 작품 목록.
그림, 음악, 행위 예술 등등.
문화 콘텐츠 전반에서 활약 중인 아티스트들의 작품과 포트폴리오가 이어진다.
‘음. 콘셉트만 보면 그리 새롭진 않네.’
쭉 훑어보던 조예슬이 솔직한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때,
신선한 콘셉트로 눈길을 끄는 작품이 있었다.
보자마자 눈에 확 띄는 작화.
그림부터가 뛰어나고 색감이 훌륭했다.
“이 그림, 느낌이 좋은데?”
“그 작품 괜찮죠?”
직원은 예상이라도 한 듯 대답한다.
“요즘 최고 인기 있는 웹툰 작품이거든요. 호불호가 거의 없는 스토리에 눈에 확 띄는 작화 때문에 제품 콜라보 하기도 좋을 거 같고요.”
이미 팬인 듯 열정적으로 설명하는 직원의 설명. 조예슬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작가 이름으로 향했다.
‘...어?’
그런데 순간, 조예슬의 눈이 커진다.
너무 낯익은 이름 석 자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권... 서준? 설마, 서준 오빠?
뜻밖에도 웹툰 스토리 작가는 권서준이었다.
전 남친이자 같은 학과 선배인 남자.
물론 권서준이 분야를 막론하고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일성 그룹 계열사인 타이거 스튜디오에서의 활약도 이미 보고 받고 있었고.
‘그런데 이번엔 웹툰이라고...?’
조예슬은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작품을 읽어 내려간다.
그런데,
한번 보기 시작한 조예슬은 눈을 떼지 못했다.
잔잔하면서도 힐링이 되는 스토리.
그러면서 인간의 내면을 치밀하게 다뤄 극적 재미도 놓치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예상치 못한 반전 요소까지 잘 담겨서 앞으로도 지속적인 인기몰이가 가능해 보였다.
‘이거... 대박인데?’
직원이 왜 저런 반응을 보였는지 알 수 있었다.
꿈과 미래.
남녀노소 즐길 수 있는 스토리.
그리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힐링 콘셉트.
순간,
조예슬이 주먹을 움켜쥔다.
‘그래, 이거야...’
어느새 머릿속에 아이디어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바로 전 연령층을 대상으로 먹힐 만한 가장 완벽한 마케팅 전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