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115화 (115/203)

115. fashionable - 유행하는 (1)

115.

***

송파에 위치한 뮤지컬 전문 연습실.

4면이 거울로 둘러싸인 곳으로 6, 70명이 동시에 연습할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규모였다.

투자 규모가 다른 만큼 연습실 규모 자체도 엄청났다.

“오셨어요?”

첫 연습을 위해 먼저 도착해 있던 서미연 대표가 인사를 한다. 우리는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이제 정말 시작이네요?”

서 대표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게요. 이제 시작이네요.”

서 대표는 그간의 마음고생은 다 잊은 듯 열의에 불타고 있었다.

“대표님, 현성 씨 도착했습니다.”

극단 직원의 말에 우리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입구로 향했다.

잠시 뒤,

매니저와 함께 도착한 조현성이 얼굴을 드러냈다.

큰 키에 하얀 얼굴.

고급스러운 마스크는 그가 왜 톱배우인지를 알려주고 있었다.

‘강원준이 마초적인 매력이 있다면 이 사람은 귀공자 느낌이 강해.’

수많은 여성 팬들이 따라붙는 이유가 있었다.

“권서준 작가님 되시죠?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조현성이 겸손한 얼굴로 다가와 인사를 먼저 건넨다.

“저야말로 조현성 배우님에 대해 익히 들었습니다. 이렇게 실제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하하하. 제 얘기는 대부분 과장된 이야기가 많은데, 이거 작품에 누가 되지 않게 최선을 다해야겠군요.”

주고받는 덕담.

서 대표가 자연스럽게 끼어든다.

“작가님, 그거 아세요? 조현성 씨는 작가님의 대본 서두만 읽고 바로 출연을 결심하셨대요.”

서 대표의 말에 조현성이 피식 웃는다.

“네, 그걸로 출연 결정을 내리기엔 충분한 분량이었으니까요.”

확신에 찬 눈빛이었다.

하긴, 완벽하지 않으면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조현성의 성격. 그가 움직일 정도로 대본과 곡이 완벽하게 세팅된 상태였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요?”

어느새 주연 배우들이 모두 도착해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대본을 읽어보며 작품의 중요 부분의 톤을 조절하고, 서로의 합을 맞춰보는 자리.

조금 전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사라지고 이내 사람들의 표정이 진지해진다.

음악이 흐르며 1막 중간 부분의 노래가 이어진다.

준비하고 있던 조현성이 가사를 보며 천천히 입을 연다.

“이 모든 걸 대체 어떻게 참고 지내라는 건가? 나는 이 재앙이 침식한 세상에서 침묵하며 살 생각은 없다네. 나는 격렬히 경멸하며 세상을 마음껏 조롱할 거니까.”

힘이 실린 노래가 넓은 연습실 안에 쩌렁쩌렁 울려 퍼진다.

마이크 없이 이 정도의 발성이라니.

노래뿐만이 아니었다.

연기력도 훌륭했다.

‘왜 사람들이 조현성, 조현성 하는지 알겠군.’

라이브로 들으니 그 감동은 훨씬 더 놀라웠다.

잠시 뒤,

노래를 마친 조현성이 서 대표를 바라본다. 진지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서 대표가 이내 입을 연다.

“훌륭하네요. 발성, 대사전달력, 뭐 하나 빼놓을 게 없어요. 다만 크리스토퍼 말로우의 심정이 억울함보다는 조금 더 반항적인 느낌으로 표현되었으면 좋을 거 같아요.”

모두 감탄만 하는 동안 서 대표는 차분하게 부족한 부분을 짚었다. 완벽에 가까운 연기 속에서 디테일을 살리는 서 대표의 디렉팅도 놀라울 정도였다.

‘전공 분야에 들어오니까 사람이 달라지는군.’

대표직을 수행하느라 당황했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연극계를 주름잡던 서 감독의 모습이 완벽하게 재현되고 있었다.

‘아니, 그때보다 한층 더 완숙해진 느낌이야.’

확연히 넓어진 시야.

작품 자체에 매몰되어 큰 그림을 놓치던 시절과는 달랐다. 작품 외적인 부분까지 구상하며 작품에 대한 그림을 크게 그리고 있었다.

“네, 다시 해볼게요.”

조현성도 서 대표의 디렉팅을 그대로 수용하고 오히려 더 열정적인 모습으로 연기에 임하고 있었다.

이쯤 되니 이건 더 보지 않아도 결과가 예상된다.

‘걱정할 거 없겠어.’

열정으로 가득 찬 연습실.

이제 내가 할 일은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얼마나 큰 결실로 돌아올까.

벌써부터 마음이 설레기 시작했다.

***

나는 작업실에 돌아와 오전 작업을 마무리하고 외출을 서둘렀다.

미리 잡혀있던 신하율과의 주말 약속 때문이었다.

“이제 가는 거야?”

장현웅이 묻는다.

“어, 같이 갈래?”

“내가 거길 왜 가냐? 눈치도 없이.”

장현웅이 슬금슬금 웃으며 말한다.

“너 또 쓸데없는 생각을 하냐?”

“뭐 상상은 자유니까.”

그래, 상상은 자유지.

인간의 고유 권한이니까.

그것까지 통제할 생각은 없었다.

뭐, 할 수도 없고.

“대신 재미있는 에피소드 있으면 갔다 와서 말해 줘. 그게 다 웹툰 소재니까.”

녀석의 느른한 웃음을 뒤로 한 채 나는 차에 올라 약속 장소로 향했다.

신하율과 만나기로 한 곳은 논현동 뒤편에 위치한 한 건물.

나는 주차장 한편에 차를 세운 채 신하율을 기다렸다.

그러고 보니 그사이 신하율도 꽤 성공했다. 충무로의 기대주에서 충무로를 책임질 여배우로 타이틀이 바뀔 정도였다.

특히 작품「이옥」으로 인해 드라마까지 섭렵한 신하율의 몸값은 나날이 높아지고 있었다.

고개만 돌려도 신하율 천지였다.

저기 보이는 정류장 간판도 신하율이고, 저기 카페 모델도 신하율이고.

똑똑.

그때,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작가님!”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쳐보는 여자.

신하율이었다.

작은 머리, 밸런스 좋은 몸매.

마스크로 얼굴을 가려도 연예인은 태가 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간단한 인사를 나누며 자연스럽게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참, 근데 여긴 왜 온 거야?”

“의상 맞추려고요.”

“의상? 무슨 의상?”

“벌써 잊으셨어요? 우리 한국 드라마 어워즈 후보 올랐다니까요?”

아, 그러고 보니 그 일정이 한 달 뒤였지.

장현웅이 몇 번이나 말해줬는데도 차기작 집필에 집중하다 보니 잠깐 잊고 있었다.

“생각해두신 건 있어요?”

“글쎄...”

“이럴 줄 알고 제가 준비해뒀죠.”

신하율이 내 팔을 감싸고는 자연스럽게 이끈다.

“여기가 연예인들 시상식 전문 디자인샵이거든요.”

그래서 그런가.

풍기는 분위기가 장난 아니었다.

“어머, 하율이 왔니?”

조금 여성스러워 보이는 디자이너가 다가와 우리를 반긴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이쪽은 제가 말씀드린 권서준 작가님이세요.”

“알지, 알아. 요즘 권 작가님 이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근데 우리 작가님은 무슨 배우들보다 잘생기셨대? 사진보다 실물이 몇 배는 나은데요?”

대놓고 하는 금칠은 아직도 살짝 민망했다. 그렇다고 싫은 건 아니고.

“참, 선생님, 제가 부탁드린 거 있죠?”

“물론이지. 잠깐만 기다려 봐.”

디자이너는 종종걸음으로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자연스럽게 신하율을 보며 눈빛으로 물었다.

“작가님한텐 늘 받기만 해서 죄송했거든요. 이번엔 저도 선물 하나 드리려고요.”

“그런 거라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돌려받으려고 한 것도 아니고.”

“에이, 그걸 제가 모르지 않죠. 하지만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는 것까진 막지 말아 주세요. 저도 은혜 좀 갚자고요.”

귀엽게 볼을 부풀리며 조르는 녀석을 보니 더 말릴 수도 없었다.

내가 웃자 곧바로 밝아지는 녀석의 표정.

이내 이 옷 저 옷을 내게 대본다.

“음. 이것도 어울릴 거 같고, 좀 캐주얼한 것도 어울릴 거 같고...”

뭐가 그리 기분 좋은지 신하율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코디를 신경 써준다.

잠시 뒤,

디자이너가 고급 수트 한 벌을 들고나온다.

“하율아. 자, 이게 네가 말한 그 수트야. 이태리에서 방금 막 도착한 거라고.”

“정말요? 역시 선생님, 최고예요!”

감청색 빛이 도는 고급스러운 재질.

딱 봐도 질감이나 디자인의 디테일이 장난 아니었다.

“어때요? 화보에서 이 디자인 보자마자 작가님 생각나서 선생님께 부탁드렸거든요.”

옷 자체는 꽤나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뭐든 입어봐야 아는 법.

“이게 옷은 예쁜데 사실 어울리는 사람이 별로 없거든. 웬만한 연예인들도 소화하기 힘든 옷이라 살짝 걱정이 되긴 하네.”

디자이너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신하율은 확신에 찬 얼굴로 고개를 젓는다.

“분명 잘 어울리실 거예요. 작가님, 한번 입어보실래요?”

뭐 한 번 입어보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어차피 시상식에 입고 갈 옷이 필요한 상황이었으니까.

“안에 이거 입으시고, 타이는 제가 해드릴게요.”

나는 디자이너의 도움을 받으며 옷을 갈아입었다. 다행히 치수가 딱 맞았다.

역시 비싼 건 다른 걸까.

수트라 불편할 줄 알았는데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잠시 뒤,

옷을 갈아입고 나왔는데,

“어때?”

“...”

쳐다보던 신하율이 한참이나 대답이 없다.

“이상한가?”

다시 묻자 신하율이 당황한 듯 고개를 세차게 젓는다.

“아, 아니요. 너무 잘 어울려요.”

근데 얜 왜 갑자기 볼이 붉어지는 걸까.

하긴, 이 안이 조금 덥긴 했다.

“그래? 다행이네. 하율이 안목이 훌륭하네. 딱 맞아.”

“제 생각엔 그것보다는 작가님 핏 자체가 좋은 거 같은데요?”

“맞아, 맞아. 어머, 이렇게 이 옷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 없었는데. 말 그대로 퍼펙트하네요.”

디자이너의 표정을 보니 진심인 듯싶었다.

“고마워. 덕분에 시상식은 걱정 안 되겠다. 하마터면 청바지 입고 갈 뻔했네.”

“별말씀을요.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에요.”

옷을 고르고,

메이크업 날짜까지 고른 뒤 우리는 의상실을 빠져나왔다.

그 뒤로 우리는 가볍게 저녁도 먹고, 티 타임도 가졌다.

다음 날 스케줄이 있는 신하율을 위해 너무 늦지 않게 집으로 데려다주는 길.

신하율의 집 앞에 도착했는데도 녀석은 자꾸만 내 눈치를 보며 몸을 꼰다.

누가 봐도 할 말이 남아 보이는 표정.

“왜? 할 말 있어?”

“...네?”

화들짝 놀라는 표정이 귀엽다.

“말해 봐. 이렇게 좋은 선물을 받았는데 나도 뭔가 들어줘야지.”

“그러려고 한 선물은 아닌데요. 뭘...”

“그럼 그냥 간다?”

“아, 아니 그건 아니고요...”

역시나 할 말이 있는 모양.

잠시 기다려주자 힘겹게 입을 연다.

“저... 레드카펫 들어갈 때요. 괜찮으시면 저랑 같이 들어가 주시겠어요?”

기껏 고민한 게 그거라니.

내 입장에선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혼자 들어가는 것보다는 그게 더 그림이 좋으니까.

“그래. 그러자.”

“...정말요? 진짜죠?”

몇 번이나 확인하고는 새끼손가락까지 걸고 나서야 나는 풀려날 수 있었다.

차에서 내린 신하율의 뒷모습이 경쾌해 보인다.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손을 흔드는 모습도 기뻐 보이고.

함께 레드카펫을 밟는 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저렇게 좋아할까.

그러나 그런 신하율의 모습을 보던 내 얼굴에도 어느새 미소가 지어지고 있었다.

***

한 달이 지났다.

나는 그동안 차기작 집필에 집중했다.

이제 거의 사할 정도 초고가 나온 상태.

그 사이, 언론에선 각종 기사가 쏟아졌다.

-올해의 드라마에 「이옥」 수상 유력.

-뮤지컬 「거장의 숨결」, 조현성 배우 전격 캐스팅.

-조현성, 내 인생작 만난 기분. 공연으로 보여드리겠다...

자연스럽게 모든 기사는 나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권서준 작가, 차기작은 드라마?

-차기작 구상으로 칩거 중인 권서준 작가. 다음 작품은 순수문학일 가능성 높다?

SNS도 안 하고, 차기작에 대한 정식 발표도 없는 상황이라 사람들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내 근황에 쏟아지고 있었다.

그동안 웹툰은 순항 중이었다.

폭발적인 인기에 금요 웹툰 2위 자리에 안착한 상태.

“이렇게 빨리 순위권에 들고, 2등을 차지하다니 정말 믿기지가 않네요.”

추 팀장의 목소리는 몇 주 사이에 눈에 띄게 밝아졌다. 듣기로는 회사 내에서의 입지도 제법 회복됐다는 소식.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진행한 일이 대박을 터트리자 그 여파로 엄청난 인정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솔직히 인간인지라 이럴 때 1위까지 딱 오르면 좋겠지만... 솔직히 좀 쉽지 않긴 해요.”

나 역시 그 이유는 알고 있었다.

바로 금요 웹툰 1위 작품의 미친 듯이 견고한 콘크리트 독자층 때문이었다.

“4년 넘게 이어온 연재 때문에 독자층이 두껍거든요. 그래도 2위도 대단한 거예요. 금요 웹툰의 순위권 경쟁이 그만큼 치열하니까요.”

추광현 팀장도 1위는 어느 정도 포기한 상태. 그러나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어렵긴 하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일도 아니니까.’

물론 나에겐 이미 준비해둔 계획이 있었다.

‘이제 슬슬 밝힐 차례군.’

나는 자연스럽게 휴대폰을 들었다.

수신자는 매일연예 윤석훈 기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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