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upstairs - 위층(3)
112.
***
늦은 밤.
나는 처음 얻게 된 내 작업실에 서서 서울 야경을 바라봤다.
‘좋군.’
정 회장의 이번 선물은 특별히 내 마음에 들었다. 특별히 작가 친화적인 공간 인테리어와 내 기호를 반영한 실내 디자인이 볼수록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참 고마운 분이야.’
물론 정 회장은 대화 말미에 이 선물의 의미에 대해 전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필요하면 뭐든지 요청해라. 서준이 네가 우리 와이즈 출판사의, 아니 더 넘어 대한민국 문학계의 마지막 희망이니까.’
은근슬쩍 주는 부담감.
아니, 기대감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한 당부.
그렇게 나는 노장의 바람대로 이곳에서 다음 차기작을 쓰면 됐다.
모든 게 순탄하게 진행되는 상황.
이제 단 하나의 문제만 남아있었다.
바로 뮤지컬 주연 캐스팅.
‘조현성 캐스팅이 쉽지 않겠지만, 서 대표는 반드시 해낼 거야.’
감독으로써 유능했지만 대표로서의 가치는 아직 보여주지 못한 상태.
그걸 모를 서 대표가 아니었다.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입증하기 위해 뭐든 할 사람이지.’
그리고 그 순간,
지이잉.
연락이 왔다.
역시나 서 대표였다.
[작가님, 조현성 캐스팅. 성공했습니다.]
짤막한 메시지.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
자정 무렵.
나는 막 서울로 올라온 서 대표와 술자리를 가졌다.
“하아. 작가님 그동안 정말 면목 없었습니다. 명색이 대표가 되어서 투자도, 곡 선정도 제대로 못 했으니까요...”
서 대표는 그간의 맘고생을 말해주는 듯 평소와 달리 빠른 속도로 술을 마셨다.
물론 나는 이미 서 대표의 실수를 예상하고 있었다.
직원이 갖춰야 할 능력과 사장이 갖춰야 할 능력이 다르듯 감독과 대표 역시 필요한 능력치에 큰 차이가 있었으니까.
‘그 옛날 나 역시 경험했던 실수이기도 했고.’
배우를 했을 때와 극장주가 되었을 때의 부담감은 천지 차이였다. 감당해야 할 무게도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경험하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일이기에 나는 일부러 서 대표가 스스로 깨우칠 수 있도록 기다려 준 것.
서 대표의 눈빛을 보니 많이 깨달은 모양이었다. 이쯤에서는 적절한 격려가 필요했다.
“대표로써 모든 걸 챙기다 보니 신경이 분산돼서 그런 거죠. 사실 곡 선정도 아마 감독님이셨을 때 들으셨다면 그 가능성을 분명 알아보셨을 겁니다.”
서 대표가 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맞는 말씀이에요. 그래서 위로 올라갈수록 사람을 잘 쓰는 것도 필요한 거 같아요. 그동안 저 혼자 뛰어다니느라 오히려 놓치는 게 많았는데, 이젠 직원들에게 믿고 맡겨야겠어요.”
귀한 깨달음이었다.
사실 서 대표의 고질적인 문제는 모든 일을 본인이 직접 해결하려는 버릇이었다. 원래 능력 있는 사람 중에 그런 경향을 가진 사람이 특히 많았다.
‘남의 손에 맡기는 게 미덥지 않아서 나오는 실수지. 생각해보면 연극 대본 IP를 구하기 위해 직접 영국까지 날아갔던 사람이기도 하고.’
그 열정이 감독 땐 좋지만 대표 때는 오히려 경영 및 관리 공백을 일으킬 수도 있었다.
게다가 능력 있는 리더가 모든 일을 혼자 해결하게 되면 구성원은 나태해지고, 성장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적재적소에 믿을만한 사람을 두고, 맡기고, 키우는 것 역시 대표가 해야 할 일이었다.
‘결국 인간은 모든 걸 혼자 짊어질 수 없는 법이니까.’
내가 하이든 에이전시와 계약 체결을 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해외 관련 IP 계약에 자신이 없어서가 아니라 보다 작품에 집필할 수 있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부분들을 맡기는 것이지.’
누나를, 장현웅을, 정은미 피디를, 그리고 서 대표를, 경험치를 먹이면서 키우는 것도 그 때문이고.
다행히 모두 잘해주고 있었다.
덕분에 나 역시 이제 차기작에 대해 집중할 수 있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준비는 다 끝났네요?”
“그러게요.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죠. 그런 의미에서 건배할까요?”
서 대표가 잔을 든다.
지친 얼굴에 모처럼 미소가 깃든다.
띠링.
청량한 소리와 함께 우리는 소주를 기울였다.
와인도 좋아하고, 맥주도 좋아하지만,
이런 날 감성은 역시나 소주가 최고였다.
자, 뮤지컬 준비는 모두 끝났고,
이제 남은 건 웹툰뿐이었다.
야물게 무르익어가는 나의 또 다른 씨앗.
술안주만큼이나 아주 맛있게 익어가고 있었다.
***
늦은 밤.
뱅뱅사거리에 위치한 건물 옥상.
웹툰/웹소설 전문 출판사 콘디북의 우현아 피디는 잠시 커피를 마시며 쉬는 시간을 가졌다.
괜찮은 작품을 찾기 위해 하도 모니터를 봤더니 눈이 빠질 지경.
그런데도 정작 쉬러 왔음에도 우 피디의 손은 여전히 휴대폰을 통해 챌린지리그에 올라오는 작품을 확인하고 있었다.
“음?”
그런데 그때, 한 작품의 평점이 심상찮았다. 더 놀라운 건 그 아래에 달린 댓글들이었다.
[이거 대작 타는 냄새가 난다.]
챌린지리그에서 일반 유저는 거의 없었다. 작가거나, 작가 지망생이거나, 아니면 자신처럼 괜찮은 원석을 찾기 위해 기웃거리는 출판사 관계자들이 대부분.
그런데,
댓글이 100개씩 달리는 작품에 호기심이 일었다.
제목 : 새벽을 건너.
몇 번 보긴 했지만 제목만 보고 건너 뛰었던 작품이었다.
왜냐고?
순문학도 아닌데 너무 제목 어그로가 없었으니까.
‘웹툰 제목을 저렇게 지을 정도의 센스라면 볼 것도 없지.’
그런데 당당히 추천 만화에 오르더니 갈수록 평점이 오르고, 댓글 반응도 뜨거웠다.
‘대체 뭐가 있는 거지?’
우 피디는 제대로 한 번 살펴보기로 했다.
기대감 없는 손길.
그러나 예상외로 작품은 첫 화부터 놀라움을 선사했다.
‘뭐야, 작화가 장난 아닌데?’
흔히 말하는 작가 지망생의 수준이 아니었다. 캠퍼스를 묘사하는 배경뿐만 아니라 거리에 오가는 인물들의 세부적인 묘사가 거의 작품에 가까웠다.
그러나 1화라서 그럴 수 있었다. 대부분의 지망생들은 1화에 영혼까지 갈아 넣으니까.
‘근본이 없다면 금방 태가 나겠지.’
우 피디는 다시 마우스 스크롤을 내렸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감탄만 나온다.
‘뭐야? 캐릭터도 잘 그린다고?’
배경뿐만 아니라 인물 묘사까지 예술이었다. 특히 주인공으로 나오는 준서의 모습은 그야말로 일러스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멋있다...’
어느새 작품을 고르고 있다는 생각조차 잃을 정도의 퀄리티. 그런데 그뿐만이 아니었다.
‘스토리는 오히려 더 촘촘해...’
미래를 고민하는 주인공 준서의 모습은 방황하는 청춘의 공감대를 이끌어낸다. 전과하기 위해 학사지원팀으로 이동하는 모습에선 애틋함 마저 이끌어낸다.
그런데,
미래에 대한 자각을 한 뒤 이어지는 합평회 시퀀스.
예리하게 주고받는 등장인물들의 대립은 고작 말로 풀어내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이건 웬만한 서스펜스보다 박진감 넘치는데?’
반면에 주인공 준서와 친구 웅이의 모습을 한참 보고 있노라면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이건 또 청춘 만화에서 볼법한 따스한 우정이 느껴지고...’
그렇게 작품 속으로 녹아든다.
어느새 다음 화, 다음 화로 화면이 넘어간다.
톡, 톡, 톡.
다시 다음 화를 눌렀는데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어?”
휴대폰이 먹통인가 싶어 다시 눌러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저 정신 없이 읽다보니 어느새 5화까지 읽어버린 것.
“뭐야, 벌써 다 본 거야?”
순간 피가 빠르게 돌기 시작한다.
사람들 보는 눈은 다 똑같았다.
아마 다른 출판사도 이 작품을 봤다면 자신과 같은 반응을 보였을 터.
그렇다면...
‘이거, 빨리 잡아야 해.’
급히 작품 소개란에 적힌 주소로 메일을 작성하기 시작한다.
우 피디의 손이 그 어느 때보다 다급해졌다.
***
며칠 뒤.
나는 작업실로 장현웅을 초대했다.
“헐, 이게 정말로 네 작업실이라고?”
“어. 정 회장님이 제공해 주셨어.”
말 그대로 엄청난 선물.
금액을 떠나 꿈에 그리던 내 작업실이 완벽하게 세팅되어 있었다.
한강이 보이는 경치에, 안락한 실내.
게다가 5분 거리에 있는 한강 공원도 평소 산책을 즐기는 내게 최적화된 환경이었다.
“진짜 좋겠다. 이런 작업실에서 작업해 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순수하게 부러워하는 장현웅.
나는 그런 녀석을 위해 작은 선물을 준비했다.
“무슨 소리야. 너도 여기서 작업해야지.”
“...어?”
“여긴 우리 작업실이야. 그러니까 당연한 거지.”
나는 녀석을 이끌고 옆방으로 향했다.
한강이 보이는 커다란 창.
그리고 태블릿과 최고 사양의 컴퓨터가 세팅된 공간.
“서, 서준아...”
장현웅이 눈을 크게 뜨며 나를 쳐다본다.
나는 어깨동무를 하며 녀석을 창가로 이끌었다.
“선물이야. 내가 우리 그림 작가님을 위해 특별히 투자 좀 했지.”
성능과 건강까지 고려한 풀세트 장비였다.
“이거... 정말 내가 써도 된다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장현웅이 조심스럽게 책상 쪽으로 다가간다.
녀석은 감격한 듯 태블릿 화면을 손으로 천천히 훑는다. 워낙 고가라 늘 꿈만 꾸던 장비가 자신의 것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필요한 거 있으면 더 말해. 뭐든 다 준비해줄 테니까.”
“아니야... 이걸로 충분해.”
“어때? 마음에 들어?”
“어. 엄청. 나 이제부터 집에도 안 가고 여기서 작업만 할래.”
“아이고, 또 오버한다. 원래 일 못 하는 사람이 시간으로 뻐긴다고.”
내 농담에 녀석이 웃는다.
그렇게 우리의 첫 번째 작업실이 생겼다.
“참, 그렇다고 매니저 역할 소홀히 하는 건 아니지?”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그게 제일 중요한 밥벌이인데. 솔직히 너 매니저 안 하면 에피소드는 어디서 구하냐?”
“어이구, 그래요? 그럼 이번 주 내 스케줄은 어떤데?”
“신하율과 주말 약속 있잖아. 내가 모를 줄 알고?”
“오호.”
“잠깐만. 말 나온 김에 그사이 뭐 온 게 있나 메일 좀 확인해 봐야겠다.”
작업실 때문일까.
녀석의 표정과 말투에서 생기가 느껴진다.
그런데,
꼼꼼하게 이메일을 살피던 장현웅의 눈썹이 순간 올라간다.
“...어?”
순간 커지는 장현웅의 눈.
“왜 그래?”
“이, 이것 좀 봐.”
장현웅은 수신된 이메일을 보여줬다.
-김희진(웹툰사업팀) : 계약 관련 메일
-Kaoka : 작품 「새벽을 건너」 작가님께
-우현아(콘디북) : 작가님의 작품에 관심이 있어 이렇게 연락을 드렸습니다.
.
.
웹툰 계약을 위해 출판사에서 보낸 메일들이었다. 그것도 무려 여섯 군데에서 연락이 왔다.
“출판사에서 먼저 연락이 오다니... 이거, 당장 연락해볼까?”
장현웅은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투고 한 적은 있어도 출판 제의 메일을 받는 건 처음이니까 그럴 수 있었다.
반면에 나는 생각이 조금 달랐다.
“너무 좋아할 건 없어. 조금 될 만한 작품들 한 번씩 찔러보는 걸 수도 있으니까.”
좋은 작품을 선정하기 위한 중소 출판사들의 치열한 경쟁. 게다가 대부분은 계약만 해놓고 방치할 때가 많았다.
그래서 시작부터 괜찮은 곳과 계약했다.
물론 신인이라면 뭐든 잡는 게 맞겠지만 나는 우리 작품에 대한 확인이 있었다.
‘이 정도 반응이면 아마 조만간 연락이 올 거야.’
지금까지 연락 온 곳보다 조금 더 나은 시작.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
네버이 웹툰 사업부.
사무실로 향하는 추광현 팀장을 보며 몇몇 후배직원이 인사를 한다.
“추 팀장님, 괜찮으세요?”
“별일은 없으시죠?”
걱정스러운 마음에 묻는 안부.
그러나 추 팀장의 표정은 평소와 달랐다.
“어, 나야 아주 잘 지내지. 걱정하지 마.”
밝게 인사하며 지나치자 사람들이 뒤에서 수군거린다.
좌천되어 놓고 이렇게 웃고 있는 게 이상하겠지.
미친 게 아닐까 생각할 수 있지만 추 팀장의 미소엔 이유가 있었다.
바로 한 작품 때문이었다.
「새벽을 건너」.
‘이게 내 동아줄이 될 거니까.’
자신의 어린 자녀들에게도 보여줄 수 있는 내용. 그러나 곱씹을수록 사람과의 관계, 그리고 따스함이 묻어나는 스토리가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보기 드물게 남녀노소 즐길 수 있는 힐링 작품이라는 점도 눈여겨볼 포인트였다.
‘이 대로면 드라마, 영화까지 가능하다고.’
원소스 멀티 유즈의 가능성을 보이는 작품.
대신 엎어지지 않게, 중간에 포기하지 않게 관리가 필요했다. 그게 챌린지리그를 담당하는 자신의 업무이기도 했고.
그래서 빠르게 올려야 했다.
챌린지 리그를 넘어 그다음 단계, 그리고 정식 연재까지.
그리고 거기서 의미 있는 성적을 보여주는 순간, 추 팀장의 계획은 시작된다.
‘바로 금요 웹툰 1위지.’
퇴근 시간을 훌쩍 넘긴 시간.
그러나 기안을 쓰는 추 팀장의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 밝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