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111화 (111/203)

111. upstairs - 위층(2)

111.

***

며칠 뒤, 정오 무렵.

“후아...”

서미연 대표가 피곤한 듯 숨을 크게 내쉬며 창조 극단 사무실 계단을 오른다.

뮤지컬 배우 캐스팅으로 정신없이 다니다 보니 체력이 바닥이 난 상태.

일주일 사이 배우 캐스팅을 위한 소규모 오디션만 11번째.

아쉬운 배역을 세팅하기 위해 직접 발로 뛰며 전국을 누비고 다녔다.

자동차 미터기는 이미 수백Km를 넘어가고 있었지만 좋은 배우만 있다면 전국 어디라도 갈 생각이었다.

‘그만큼 이번 작품이 중요하니까.’

서 대표가 지친 걸음으로 사무실로 돌아왔다.

“다녀오셨어요?”

“어, 그동안 별일 없었지?”

조금 지친 목소리.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묻는다.

“네. 근데, 가신 일은 어떻게 됐어요?”

서 대표는 대답 대신 힘차게 계약서를 꺼낸다.

“헐. 김초희도 잡으신 거예요?”

“그럼. 설득했지.”

직접 세종시까지 찾아가 설득했다.

게다가 오고 가는 길에 대전에 들러 몇몇 배우들의 오디션 역시 직접 보고 오는 길이었다.

“이번엔 기성 배우뿐만 아니라 배역에 최적화된 캐스팅을 해야 해. 그래야 이 작품의 가치를 극대화 시킬 수 있으니까.”

서 대표의 표정은 결연해 보이기까지 했다.

“참, 최 감독한테 곡은 받았어?”

“네. 방금 받았어요. 따끈따끈할 때 들어보실래요?”

손주환이 작곡한 메인 테마곡.

음악 감독인 최 감독의 편곡까지 받은 최종 버전이었다.

잠시 뒤,

사무실 안에 웅장한 음악이 흐른다.

“이거, 너무 좋은데요?”

“그러게...”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테마곡.

그리고 비애에 젖게 맞드는 곡까지.

그야말로 완벽했다.

그런데 그때, 한창 곡을 음미하던 한 직원이 허공을 보며 말을 한다.

“이걸 조현성이 불러주면 얼마나 환상적일까요?”

한 직원의 말에 사무실 분위기가 싸해진다.

그만큼 가능성이 적은 얘기니까.

“아직 조현성 측에선 답변 없어?”

서 대표가 물었다.

“...네. 아직...”

대답과 동시에 직원의 표정이 시무룩해진다.

그러나 서 대표는 능숙하게 침울해지는 직원들을 달랜다.

“너무 걱정하지 말자. 좋은 대본, 좋은 곡엔 언제나 좋은 배우가 따르는 법이니까.”

서 대표의 마음을 읽은 걸까.

직원들의 표정도 한층 더 밝아진다.

“네! 알겠습니다.”

“하긴, 생각해보면 여기까지 온 것도 기적이잖아요.”

그래.

기적이었다.

빈손으로 시작해 극단을 설립하고 130억 규모의 투자까지 받아 뮤지컬을 제작 중이었다.

‘그런데, 그 모든 건 결국 권 작가님이 해내신 일이야.’

감독이 아닌 대표로써 보여준 모습은 별로 없었다. 아니,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서 대표는 결연에 찬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부터 진행되는 배우 캐스팅은 전적으로 자신이 해결해야 했다.

“방금 오셨는데, 또 어디 가세요?”

“호랑이를 잡으려면 굴에 들어가야지.”

“설마...”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직원들의 시선.

그러나 서 대표의 행동엔 거침이 없었다.

‘조현성만큼은 반드시 내 손으로 잡아야 해.’

입술을 깨문 서 대표는 그렇게 숨 돌릴 틈도 없이 다시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

점심 무렵.

나는 정영만 회장을 만났다.

그런데 약속장소는 평소와 달리 여의도에 위치한 한 고급 오피스텔이었다.

“이쪽으로 오시죠.”

비서의 안내에 따라 엘리베이터에 내려서 안으로 들어간다.

한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오피스텔.

대충 봐도 우리 집의 배는 되어 보이는 넓은 공간이 눈에 띈다.

안으로 들어가자 기다리고 있던 정 회장이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반긴다.

“오랜만이군. 네 녀석 활약은 익히 들었다. 올리버 편집장을 꼼짝 못 하게 만들었다고?”

“그분이 어떻게 말을 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위기는 아주 좋았습니다.”

“이미 계약 조건을 봤는데도 겸손하긴. 녀석 참.”

흐뭇하게 웃는 걸 보니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참, 제 선물은 잘 받으셨나요?”

나는 자연스럽게 작품에 대한 평가를 물었다. 그러자 정 회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잘 읽었다. 아니, 솔직히 엄청났지.”

간단한 감상.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정 회장의 눈빛을 보니 어떤 위로를 받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한결 자연스러워진 미소를 보니 아마 가슴 속 깊이 담겨 있던 응어리가 꽤 많이 풀어진 모양이었다.

물론 작품 하나로 완벽히 해결될 수 없는 상처였다. 그건 나 역시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고.

그게 바로 자식을 잃은 슬픔이니까.

‘다만 거기서 머물러서는 안 돼.’

내 평생 몸소 깨달은 진리.

나는 그것을 전하고 싶었다.

“근데 대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한 거냐? 이건 잘 썼다는 말로 다 표현이 되지 않아. 그건 서준이 니가 더 잘 알 테고.”

정 회장은 정확히 작품의 깊이를 꿰뚫고 있었다. 단순히 아는 척하는 것과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깊이는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

그렇다고 나 역시 그런 경험이 있다고 말할 순 없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비슷한 경험 하나를 끄집어냈다.

“제가 어릴 적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

몰랐던 일인 듯 정 회장이 눈을 크게 뜬다.

“아버지가 없는 삶을 그리면서, 만일 내가 없는 세상에 아버지가 계셨다면 어떤 심정이셨을까 매일같이 생각했거든요.”

그제야 정 회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흠. 그런 일이 있었구나...”

안타까운 듯 바라보는 정 회장의 시선.

가족을 잃은 아픔은 나이를 초월해 우리 두 사람의 깊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정 회장이 뒷짐을 진 채 창밖을 바라본다.

“아들을 먼저 보내고, 내 인생은 빈껍데기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더 일에 몰두한 것도 있었고.”

이해할 수 있었다.

나 역시 그런 시절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네 작품을 읽으니...”

생각만으로 또다시 격해지는 감정.

언제나 카랑카랑하던 노인의 목소리에 물기가 스며든다.

애써 감정을 추스른 정 회장이 이내 말을 잇는다.

“흠흠. 나 참, 미안하다. 이 나이에 어린 친구 앞에서 주책을 부리는구나.”

나는 그런 정 회장을 위해 조심스럽게 거들었다.

“괜찮습니다. 감동에 나이는 상관없으니까요.”

지켜보던 정 회장이 이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모처럼 아주 귀한 선물이었다.”

한결 편해진 얼굴이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근데 내가 또 받고 가만히 있는 사람은 아니거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던 정 회장이 나를 보며 슬쩍 묻는다.

“이곳 경치가 어떠냐? 나쁘지는 않지?”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강이 보일 정도로 뷰가 좋았다.

“좋은데요? 뭔가 안락한 느낌도 들고요.”

실내 인테리어도 인상적이었다.

어두운 계통의 원목 가구가 자연스럽게 구획을 나누고, 정감 가면서도 따스한 느낌을 주는 포인트가 인상적인 공간이었다.

‘안락한 느낌이 참 따스해.’

들어서는 순간부터 편안한 느낌에 마음이 편해지는 기분이었다.

단순히 넓고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라서 그런 게 아니었다. 작은 액자 하나, 가구 하나까지 어딘가 작가를 위한 공간처럼 느껴진다.

“그렇구나. 그래, 내 선물이 어떠냐?”

“선물이요?”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리 봐도 선물은 보이지 않았다.

“녀석, 세상은 크게 잘도 보면서 선물은 제대로 못 찾는구나.”

흐뭇하게 웃던 정 회장이 이내 천천히 주변을 둘러본다.

그의 시선은 어느 한 가지를 찾는 게 아니었다. 정확히 내가 서 있는 공간 자체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작업실이, 바로 네게 주는 내 선물이거든.”

***

서울 강동구에 위치한 조현성의 소속사.

입구에선 벌써 1시간째 실랑이가 이어지고 있었다.

“제발, 연락만이라도 좀 해주시면 안 될까요?”

“죄송하지만 힘듭니다.”

서 대표의 거듭된 부탁에도 불구하고 소속사 직원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뮤지컬 배우 조현성.

그의 몸값답게 만나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HS 엔터테인먼트.

인기 배우답게 조현성 본인만 캐어하는 1인 소속사였다.

당연하게 이곳에서 조현성의 힘은 그 어느 것보다 강했다.

“만나서 얘기라도 할 수 없을까요?”

“여기 안 계신다고 몇 번을 말씀드려요. 지금 휴식 취하고 계셔서 매니저님을 통한 연락 외엔 안 된다니까요?”

“하지만 그 매니저님이 온종일 전화를 안 받으신다고요.”

“그럼 받을 수 없는 상황이겠죠. 저희도 더 도와드릴 수가 없다고요.”

딱 끊어내는 직원의 말.

그러나 서 대표는 포기할 수가 없었다.

“후.”

밖으로 나오자 서 대표는 다시 한번 조현성의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제발, 제발...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는데 뜻밖에도 전화를 받는다.

-하아, 여보세요?

계속 울리는 전화에 마지못해 받은 기색이었다. 그러나 이조차도 서 대표에겐 기회였다.

“안녕하세요. 며칠 전에 대본을 보내 드린 창조 극단의 서미연 대표입니다.”

-아, 네.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혹시 캐스팅 관련해서 조현성 씨의 답변을 들을 수 있을까 해서요.”

-회사에서 말 안 하던가요? 지금 현성이 비시즌 기간이라고?

“얘기는 들었습니다. 다만 좋은 작품이라 꼭 한번 읽어보셨으면 해서요. 부탁드립니다.”

-죄송하지만 저희가 오늘 오후에 해외 출국이 있어서 힘들 것 같네요.

“그럼 그 전에 잠깐 만날 수 없을까요?”

간절함에 서 대표는 모든 걸 내려놓았다.

-하아. 그럼 6시까지 오실래요?

“네, 네. 주소만 보내주시면 바로 가겠습니다.”

-좋아요. 대신 1분이라도 늦으시면 저흰 여기 없을 겁니다.

늦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잠시 뒤 매니저가 보내준 주소를 본 서 대표의 표정이 굳어진다.

“해, 해남?”

몇 번을 봐도 맞았다.

땅끝 마을.

전라남도에 있는 그 해남.

“하, 이 사람 우리 가지고 노는 거예요. 주말이라 비행기 표도, KTX 표도 없어서 못 올 거 알고 저러는 거라고요.”

메시지를 함께 본 직원이 혀를 찬다.

그러나 서 대표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래도 상관없어. 내게 기회가 주어졌다는 게 중요하지.”

“...네? 설마 직접 가시에요?”

“못 갈 것도 없지.”

“에이... 농담이시죠?”

서 대표의 표정은 진심이었다.

잠시 뒤,

서 대표의 차가 요란한 엔진음을 내며 달리기 시작한다.

***

해가 뉘엿뉘엿해지는 시간.

숙소를 정리하던 조현성 매니저는 차분히 짐을 챙겼다.

“후아, 이게 얼마만의 휴식이냐.”

모처럼 바다낚시도 실컷 즐기고, 내일 이 시간이면 푸켓 해변에서 칵테일을 즐길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행복감이 밀려든다.

“그렇게 좋아? 누가 보면 내가 매니저 혹사시키는 줄 알겠네.”

때마침 옷을 갈아입고 나오던 조현성이 묻는다.

“에이, 혹사라니. 이렇게 직원 복지가 좋은 곳이 어디 있다고. 푸켓도 데려가 주는데.”

벌써부터 행복해하는 매니저가 갑자기 조현성을 바라본다.

“근데, 현성아. 그 사람 진짜 오면 어떡해?”

“누구? 아, 서 감독?”

“어. 부재중 전화 보니까 보통 끈질긴 사람이 아닌 거 같더라고.”

“그럼 뭐, 성의를 봐서 잠깐 만나주면 되지.”

“근데 여기까지 오라고 한 건 너무 짓궂은 거 아냐? 표도 없는 거 알면서 오라고 한 거잖아.”

“뭐 그 정도 열정도 없으면 어떻게 믿고 작품을 같이 하겠어?”

“하긴, 그 말도 맞지.”

“자, 슬슬 출발하자.”

아직 6시가 되지 않았지만 조현성과 매니저는 마치 남의 일이라는 듯 짐을 챙겨서 차에 올라탔다.

그런데 그때,

주차장에 차 한 대가 들어서더니 급히 멈춘다.

“조현성 씨!”

다급히 외치는 목소리.

차에서 내려 다가오는 사람은 바로 서 대표였다.

“헐...”

매니저가 놀란 듯 조현성을 쳐다본다.

조현성 역시 꽤나 놀란 눈치.

시각은 정확히 5시 59분이었다.

“6시 전 도착 맞죠?”

“...”

“바쁘신 분이니 용건만 간단히 말씀드릴게요.”

서 대표의 말에 조현성이 살짝 창문을 연다.

“대단하시네요.”

“대단한 건 이번 작품이죠. 여기 대본과 조현성 씨가 부르게 될 메인 테마곡이에요. 한 번 들어봐 주세요.”

가만히 보던 조현성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다.

“좋습니다. 약속을 지키셨으니까 보기는 할 테지만 연락 갈 거라는 보장은 못 드립니다.”

“물론입니다. 작품이 별로라면 그러셔야죠. 근데 들어보시면 아마 곧 뵙게 될 겁니다.”

자신감 넘치는 말과 함께 창문 틈으로 USB와 대본이 넘어온다.

평소라면 거절했겠지만 여기까지 찾아온 성의에 조현성은 마지못해 받았다.

“그럼, 조심히 올라가세요.”

인사가 끝나자마자 매니저는 기다렸다는 듯이 차를 출발시킨다.

“헐, 대박. 진짜 왔어. 저 사람 고집도 진짜 보통이 아니다.”

매니저가 놀란 듯 호들갑을 떤다.

그러나 조현성은 손에 들린 USB와 대본을 바라볼 뿐이었다.

서미연 대표.

그에겐 서미연 감독으로 더 익숙한 사람이었다.

‘뮤지컬 쪽은 아니지만 연극 쪽에선 나름 이름 있는 감독이었으니까.’

근데 그런 감독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렇게 자신 있는 건가?’

서 대표의 반응 때문에 작품에 대해 더 큰 궁금증이 일기 시작한다.

입안 살을 지그시 물던 조현성은 마침내 USB를 꽂았다.

잠시 뒤,

수천만 원을 들인 우퍼를 통해 태평소 소리가 차 안에 울려 퍼진다.

“뭐냐... 이거?”

매니저가 놀란 눈으로 쳐다본다.

조현성 역시 마찬가지였다.

웅장하면서 가슴을 설레게 하는 곡조.

익숙하면서 낯선 그 리듬에 조현성의 미간이 절로 모인다.

‘색다른 느낌이야...’

기존의 뮤지컬 곡과 완벽히 다른 느낌.

게다가 가사 전달 역시 확실했다.

자연스럽게 그의 관심이 대본으로 흐른다.

한 장, 두 장, 세 장.

대본을 읽어가는 눈이 빨라진다.

그리고 10분 뒤.

‘자신 있는 이유가 있었군.’

조현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깊은 감탄사를 터트린다.

“민우야, 어쩌냐?”

“왜?”

“우리 푸켓은 다음에 가야겠다.”

창밖을 바라보는 조현성의 얼굴엔 어느새 미소가 떠올라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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