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110화 (110/203)

110. upstairs - 위층(1)

110.

***

-작가님, 이 인형 뭐예요? 완전 취향 저격인데요? 너무 귀여워요.

신하율의 경쾌한 목소리가 휴대폰을 타고 넘어온다.

런던에서 산 선물을 퀵으로 보냈는데 이제 도착한 모양이었다.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

-너무 마음에 들어요. 이것 좀 보세요.

신하율은 자신의 방에 놓인 곰돌이 인형 사진을 보내줬다. 침대 맡에 올려둔 걸 보니 꽤나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이렇게 좋아해 주니 선물 준 사람 입장에서도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참, 런던에서의 소식도 잘 들었어요. 헐리웃 배우인 베네딕트와도 엄청 친해 보이시던데, 정말 대단하세요.

얘는 어떻게 내 소식을 빼놓지 않고 알고 있는 걸까. 뭐 내 입장에선 고마울 뿐이었다.

“운이 좋았지. 열심히 해 봐. 하율이도 언젠가는 헐리웃 진출해야지.”

-하아, 헐리웃이요? 제가 가능할까요?

“물론이지. 생각해봐 불과 2년 전만 해도 여기까지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잖아.

-하긴, 그땐 편의점에서 알바하느라 바쁠 때였죠. 그러고 보면 제가 지금의 신하율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다 작가님 덕분이네요.

얘는 이렇게 꼭 한 번씩 내 얼굴에 금칠을 한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신하율에게 받는 칭찬은 어딘가 낯간지러운 느낌이었다.

“참, 드라마도 끝났는데 다음 작품은 결정했어?”

나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음. 아직 고민이에요. 소속사에서는 OTT 쪽 드라마나 영화를 생각하는 거 같아요. 근데 그거 아세요? 둘 다 주연급이래요.

설레하는 신하율의 반응과 달리 당연한 결과였다.

신하율은 이미 조연으로는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걸 보여준 상태였으니까. 주연으로 발돋움하기에 딱 좋은 타이밍이었다.

“작품은 골랐고?”

-음. 고민 중인데 딱히 마음에 드는 건 없어요. 근데 너무 급하게 고르지 않으려고요.

좋은 판단이었다.

조연에서 주연으로 가는 길목의 작품은 그 어느 때보다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여기서 한번 삐끗했다가는 조연급으로 평생 낙인찍힐 수도 있으니까.

연기 잘하고 예쁜 배우들이 평생 조연만 하게 되는 경우도 다 중요한 지점에서 엎어졌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잘만하면 내 영화 시나리오와 타이밍이 맞을 수 있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내 입장에서도 편하고, 신하율에게도 좋은 기회가 될 수 있고.

‘적어도 작품성 때문에 삐끗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물론 지금부터 고민할 일은 아니었다.

-근데 작가님. 제가 이런 귀한 선물 받고 가만히 있는 성격이 아닌 건 알고 계시죠?

나는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려 했다.

그런데 그보다 한발 앞서 신하율의 목소리가 휴대폰을 타고 넘어온다.

-이번 주말 저녁에 시간 괜찮으세요?

주말 저녁이라...

마침 시간이 되긴 했다.

그래도 거절할까 싶었는데 또다시 신하율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동안 한 번도 작가님께 보답한 적이 없잖아요.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 네?

귀엽게 부탁하는 신하율.

그래, 너무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지.

그렇게 나는 신하율과의 저녁 약속을 잡았다.

***

다음 날.

“뭐? 신하율과 저녁 약속?”

주말 일정에 대해 듣던 장현웅의 눈이 커진다.

“야, 그거 데이트 신청 아니냐?”

“데이트는 무슨. 우리는 그런 사이 아니야.”

“아니긴... 쳇, 나쁜 놈. 나는 세상에서 니가 제일 부럽다.”

녀석이 부러움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흘겨본다.

지금 장현웅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머릿속에 훤히 보인다.

그러나 나와 신하율은 어디까지나 예술가와 뮤즈, 그리고 동료 사이였다.

미래야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랬다.

“참, 너 이번 주에 정 회장님 약속하고, 주말에 주 편집장 미팅 있는 거 알고 있지?”

“물론.”

안 그래도 정 회장을 위해 며칠째 영문 버전의 차기작 초고를 국문으로 번역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

나는 완벽히 번역한 국문 버전을 정 회장에게 보냈다.

누구보다 내 작품을 기다리고 있는 독자를 위한 작은 선물이었다.

***

늦은 오후.

정 회장은 대청마루에 앉아 따스한 볕을 즐겼다.

“할아버지!”

정원에서 놀던 손자가 신이 나서 뛰어온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한 손자.

이 작고 연약한 존재가 주는 기쁨은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이 녀석 옆에 아무도 없다는 게 마음이 아팠다.

“하아...”

정 회장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온다.

“할아버지, 왜 한숨 쉬어?”

손자가 올려다보며 묻는다.

정 회장은 애써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별일 아니야. 소화가 좀 안 돼서 그런가 봐.”

소화가 안 된다는 말에 손자의 눈빛에 걱정이 드리운다.

“할아버지 아파?”

“아니야. 안 아파. 그냥 소화가 좀 안 되는 거라니까?”

조심스럽게 타일러도 아이의 표정은 여전히 걱정이 가득해 보였다.

“할아버지는 아프면 안 돼. 나랑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거지?”

“...”

순간 정 회장의 말문이 막힌다.

안쓰러운 듯 손자의 머리를 넘겨주던 정 회장은 이내 집무실로 들어온다.

“후우.”

안타까운 마음에 한숨이 흘러나온다.

‘그렇게 밝게 키우려 애를 썼지만 부모의 빈자리는 대체할 수 없는 모양이군.’

하긴, 자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손자가 귀하지만 잃어버린 아들의 빈자리는 별개의 문제였으니까.

자식을 잃은 아픔이란 평생 잊을 수 없는 상처와도 같았다.

그런 의미에서 권서준의 작품은 정 회장으로 하여금 묘한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심정이 마치 자신의 이야기처럼 다가온다.

‘그 녀석이 그런 아픔을 겪어 봤을 리 없을 텐데 대체 어떻게 그런 작품을 쓰는 걸까.’

그래서 뒷얘기가 너무나 궁금했다.

“대체 언제쯤 남은 선물을 주려는 건지...”

영문 버전을 피어슨 출판사에 넘겼다는 소식은 들었다. 그러나 아직 국문 버전의 초고를 정 회장은 보지 못했다.

똑똑.

그런데 그때, 비서가 서류 봉투 하나를 든 채 집무실을 찾았다.

“회장님, 권 작가가 보낸 원고가 도착했습니다.”

권 작가가 보낸 원고라는 말 한마디에 정 회장이 벌떡 일어난다.

평소엔 보기 힘든 모습.

그 정도로 간절히 기다리던 권서준의 작품이었다.

정 회장은 체면도 잊은 채 앉은 자리에서 바로 원고를 펼쳐 들었다.

이미 몇 번이나 읽은 앞부분이지만 또다시 정독하기 시작한다.

제목 : 당신이 머물던 자리에.

아버지의 시점으로 시작하는 이야기.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아버지의 절규가 이어진다.

볼 때마다 정 회장의 가슴을 쥐어뜯게 만드는 장면이었다.

‘마치 그때 나를 떠오르게 만드는군.’

결코 감해지지 않는 그 고통.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심정이 절절하게 다가온다.

이야기는 점차 확대되어 두 사람의 시선으로 교차한다.

아들이 부재한 세상에 사는 아버지의 이야기. 그리고 아버지가 부재한 세상에 사는 아들의 이야기.

어느 쪽이 현실인지, 아니면 둘 다 현실인지 작가는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두 사람의 시선을 따라 소설의 내용은 훨씬 더 다채로운 상상력과 감상을 불러일으키고 있었으니까.

‘만일 내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면, 아들의 심정이 이랬을까...’

서로의 추억을 되뇌며 가슴 아파하는 부자의 사랑. 그리고 기억들.

수채화처럼 펼쳐지는 이야기에 정 회장의 가슴은 어느새 촉촉하게 젖어가고 있었다.

끝내,

서로의 봉분 앞에 앉아 마지막에 남은 사진을 보며 웃는 두 사람의 얼굴.

죽음으로도 감하지 못한 부자간의 사랑, 혈육 간의 정이었다.

그게 가족임을, 그게 아버지와 아들의 의미임을 깨달을 수 있었으니까.

뒤늦게 서로의 깊은 사랑을 깨달은 두 사람은 눈물을 흘린다.

서로의 삶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 서로를 위하는 길임을 깨달은 두 사람은 다시금 걸음을 옮긴다.

올 때와는 전혀 다른 두 사람의 걸음걸이.

그 이야기를 지켜보던 정 회장의 뺨을 타고 한줄기 눈물이 흐른다.

‘그래, 각자의 세계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정답임을...’

정 회장은 시큰거리는 무릎을 짚고 힘차게 일어난다.

후회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저 밝게 빛나는 오늘이 퇴색되지 않게 소중한 이들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남은 자가 할 수 있는, 아니 해야 할 일이었다.

수십 년 만에 위로를 받는 기분.

마치 자신의 묵은 상처까지 속속들이 알고 치유하는 기분이었다.

‘권서준, 그 녀석... 정말 대단하군.’

얼굴을 꼭 한 번 봐야 했다.

이 감동, 이 느낌을 원작자와 나누고 싶은 열혈독자의 심정이었다.

게다가 정 회장은 결코 받기만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큰 선물을 받은 만큼 나 역시 보답을 해야지.’

***

며칠 뒤.

나는 다시 한번 창조 극단을 찾았다.

수정한 손주환의 메인 테마곡 때문이었다.

“후우. 긴장되네요.”

평가를 기다리는 손주환은 긴장한 듯 연신 손을 매만졌다.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이미 실력을 보여주셨잖아요.”

나는 손주환을 차분히 다독였다.

사실 애초에 대중가요와 뮤지컬의 문법은 달랐다.

대중가요가 ‘hook’이라는 꽂히는 구절에 집착한다면 뮤지컬은 대사 전달이 우선이었다.

대본 작가인 내가 대본과 가사를 주고, 손주환이 멜로디를 붙이고, 음악감독이 전체적으로 편곡을 진행하면서 곡을 완성했다.

“크리스토퍼 말로의 모습이 너무 어둡거나 독선적이지 않아 보이게 신경 썼습니다. 제가 느끼기에 그는 시대를 잘못 타고난 불운아 같은 느낌이었거든요. 그래서 오히려 반항적인 이미지를 떠올리는 편곡을 해봤습니다.”

손주환의 분석은 정확했다.

역시 작품의 분위기를 읽어내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창조 극단 사무실에 모여 우리는 다 같이 수정된 곡을 들었다.

도입부부터 훨씬 더 세련되게 바뀌었다.

4분 남짓한 곡이 끝나자 제일 먼저 서미연 대표가 입을 열었다.

“역시, 기대 이상으로 좋네요.”

“후렴구도 장엄한 게 분위기가 너무 좋아요.”

서 대표의 말에 직원들도 맞장구를 친다.

“저, 정말요?”

“네, 그뿐만 아니라 그냥 신나는 게 아니라 결연한 의지도 느껴지는 거 같아요. 이 국악 느낌의 리듬이 훨씬 더 잘 어울리는 수정이네요.”

대취타가 행진곡에 어울리는 리듬이라는 걸 정확히 파악한 서 대표의 평가.

손주환의 표정이 그제야 밝아진다.

“솔직히 머리 쥐어뜯으면서 고민했습니다. 작가님의 대본 보고, 편곡하고, 그러니까 또 욕심은 계속 생기고, 그러니까 또 마음이 급해지고... 적어도 이 훌륭한 대본에 누가 되고 싶진 않았거든요.”

진심이 전해지는 말.

사무실 내에 훈훈한 기운이 풍긴다.

“이제 마음 놓으세요. 여기 있는 사람들 표정 보이죠? 이게 작곡가님이 만든 곡의 가치입니다. 그러니 이제 믿으세요.”

내 말에 사무실 안을 한 번 둘러보던 손주환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네, 역시 작가님 말씀이 맞았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최종 수정 버전이 완성되고, 곡과 관련된 부분들도 마무리되었다.

물론 배우 캐스팅 문제가 남아있긴 했지만 그건 전적으로 서 대표에게 맡길 일이었다.

‘나도 이제 슬슬 다음 작품을 써도 되겠어.’

나의 다음 계획은 영화 시나리오였다.

그리고 그 계획을 위해서 보다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했다.

영감이야 다양한 곳에서 얻을 수 있고, 나 정도 되면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쓸 수 있지만 집중력의 차이는 어쩔 수 없었다.

‘99%와 순도 100%는 천지 차이니까.’

불순물 없는 작품을 위해 공간이 필요했다.

지이잉.

그리고 그때,

휴대폰이 울린다.

정영만 회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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