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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109화 (109/203)

109. cheap - 싸다, 저렴하다 (6)

109.

***

다음 날 아침.

나는 가벼운 숙취를 느끼며 눈을 떴다.

어젯밤 손주환 작곡가와는 대략 새벽 3시까지 술을 마셨다.

이런저런 진솔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술자리가 자연스럽게 길어졌다.

‘일단 서 대표를 만나서 계약 내용을 바로 정해야겠어.’

술자리가 워낙 늦게 끝난 상태라 자세한 내용은 서미연 대표와 직접 만나 의논을 해야 했다. 나는 오늘 일정을 정리하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그때, 문틈을 비집고 익숙한 향기가 들어온다.

‘어라, 이 냄새는...’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거실로 나왔다.

엄마는 아침부터 정성스럽게 음식을 차리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이끌린 냄새의 정체는 바로 김치찌개였다.

안 그래도 국물이 당겼는데, 얼큰한 김치찌개 냄새가 풍기자 뱃속이 요동친다.

“어? 벌써 일어났어? 시차 적응도 안 됐을 텐데 좀 더 자지.”

뒤늦게 나를 본 엄마가 묻는다.

“귀국한 지 일주일이 넘었는데 시차 적응은 무슨.”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 하도 아들 얼굴을 못 봐서 일주일이 지났는지도 몰랐네.”

아쉬워하는 엄마의 목소리.

하긴, 귀국과 동시에 뮤지컬 곡 문제, 웹툰 문제로 정신없이 돌아다니다 보니 엄마 얼굴을 볼 겨를이 없었다.

또다시 과거의 실수가 떠오른다.

‘바쁠 때일수록 소중한 것들을 돌아봐야지. 다 잃고 나면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을.’

나는 엄마 어깨에 얼굴을 턱을 기대며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미안, 일이 바빠서 정신이 없었어.”

“미안하긴. 너 요즘 바쁜 거 세상이 다 아는데 뭘. 다만 건강 잘 챙기라고. 먹는 거 잘 챙겨 먹고.”

엄마는 언제나 아들 걱정뿐이었다.

“그렇게 있지 말고 좀 더 자. 다 차리면 부를 테니까.”

“이 냄새를 맡고 어떻게 더 자?”

“하긴, 엄마 김치찌개가 맛있긴 하지?”

엄마의 말에 나는 웃음으로 답했다.

“참, 선물은 어때? 마음에 들어?”

“그럼. 아주 마음에 쏙 들지.”

엄마는 내가 선물로 준 그릇 세트에 밥을 담으며 웃는다.

“이모들이 부럽다고 난리야. 아들 잘 둬서 행복하겠다고.”

“이모들한테도 자랑했어?”

“그럼.”

그때, 출근 준비를 마친 누나가 거실로 나온다. 우리 대화를 들었는지 곧바로 대화에 끼어든다.

“이모들한테만 했겠어? 아주 동네방네 자랑하고 난리도 아니었지.”

안 봐도 훤했다.

자식의 성공에 누구보다 기뻐하는 게 바로 엄마라는 존재였으니까.

“그러는 누나는 선물 마음에 들어?”

“물론이지. 근데 너 이런 센스는 어디서 난 거야? 여자들이 좋아하는 브랜드는 어떻게 알았고?”

“그냥, 거기서 제일 좋아 보이는 거로 골랐어.”

“혹시 여자 친구 생긴 건 아니고?”

또 흰소리가 이어진다.

“아침부터 쓸데없는 소리 하고 싶어?”

“아니면 말고. 근데 니 키에, 니 외모에 여친 하나 없는 게 이상하잖아. 안 그래도 사람들이 매번 물어본다니까? 너 누구 만나는 사람 없냐고.”

“이그, 얘가 또 쓸데없는 소리 하네.”

엄마가 팔꿈치로 누나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찌개를 식탁 위에 올린다.

“자, 아침이나 먹자.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든든하게 먹어야지.”

어느새 거하게 차려진 상이 눈에 들어온다.

특히 엄마표 특제 김치찌개는 보자마자 군침이 돈다.

한 수저 뜨자마자 황홀해 미칠 것만 같았다.

“하아, 이제야 한국에 온 기분이네.”

진심이었다.

내 말에 엄마가 묻는다.

“맛있어?”

“어, 맛있다 못해 미치겠어.”

지켜보던 누나가 웃으며 말한다.

“미치면 안 되지. 우리 천재 작가님께서.”

아침부터 시작되는 금칠에 살짝 머쓱해진다.

“참나, 동생한테 그런 말 하면 안 민망해?”

“전혀. 출판사에서도 다들 천재 동생 뒀다고 하는데? 그뿐인 줄 알아? 네 기사가 뜰 때마다 아주 난리도 아니라고. 베네딕트와도 친하게 지낸다며?”

전해 들은 듯한 말투.

누가 범인인지는 당연히 알 수 있었다.

‘정 회장님이겠지.’

안 그래도 정 회장이 이번 주에 꼭 봐야 한다고 해서 약속이 잡힌 상황이었다.

***

든든하게 아침을 먹은 나는 곧바로 외출 준비를 마친 뒤 창조 극단으로 향했다.

최종적으로 손주환 작곡가의 곡에 대한 계약금과 비용을 정하기 위해서였다.

“오늘 오후에 손주환 작곡가와 미팅을 하기로 했어요.”

곡에 확신이 든 서 대표는 빠르게 일을 진행시켰다.

현재 「거장의 숨결」 뮤지컬 투자금액은 총 130억 원.

오픈할 때부터 폐막까지의 기간을 모두 합쳐 총 제작 예산으로 산정하는 우리나라와 달리 브로드웨이의 뮤지컬 제작비는 크게 두 가지로 운용된다.

첫째, 프로덕션예산(Production Budget)과 둘째, 운영예산(Operating Budget).

쉽게 말해서 프로덕션예산은 공연 오픈 전까지 들어가는 비용이고, 운영예산은 공연을 지속하기 위한 비용으로 대부분 티켓 매출액으로 충당하는 예산이다.

이 중 프로덕션예산이 창조 극단 측에서 집행해야 할 부분으로 세부적으로 보면 인건비(Labor), 제작/설치비, 광고/홍보비, 사전제작비, 교외 제작비, 행정 및 운영비, 대관비, 기타비용으로 책정되는 예산구조.

‘예산 중 인건비와 제작/설치비가 전체 프로덕션 비용의 60%를 차지할 정도로 높지.’

인건비에는 배우뿐만 아니라 스태프들의 인건비도 포함되기 때문에 대략 집행할 수 있는 금액은 50억 내외였다.

투자금이 많다고 허투루 쓸 수 있는 돈은 없었다. 화려한 외향과 달리 한국 뮤지컬의 매출구조는 취약한 구조를 띠고 있으니까.

‘전형적인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신중해야 해.’

보다 합리적인 금액을 통해 곡과 캐스팅을 이뤄내야 했다.

서 대표는 고심 끝에 정리한 계약금을 내게 보여줬다.

“전 곡 비용으로 이 정도가 적당할 거로 생각하는데, 작가님 생각은 어떠신가요?”

무명 작곡가의 곡치곤 엄청 높은 금액.

그러나 질러야 할 때 확실히 질러야 한다는 내 지론과 궤가 같은 선택이었다.

곡에 대한 확신과 더불어 나의 선택에 대한 신뢰가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고.

금액을 확인한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곡의 퀄리티를 생각하면, 합리적이네요.”

물론 합리적인 정도가 아니었다.

이후 이 곡이 벌어들일 매출에 비하면 아주 싸게 사는 거니까.

***

늦은 오후.

아직 사무실이 구해지지 않은 상태였다.

“생각보다 괜찮은 곳이 없네. 그래도 몇 군데 둘러보고 있으니까 아마 다음 주 안엔 하나 고를 수 있을 거 같아.”

장현웅은 내 성격과 사무실 목적에 맞게 꼼꼼히 고르고 있었다.

하긴, 어설픈 곳을 골랐다가 후회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이게 나았다.

다만 그 때문에 우리는 다시 한번 창조 극단에서 손주환 작곡가와 만나 최종 계약을 마무리 지어야 했다.

“이, 이게 정말인가요?”

손주환은 정식 계약서와 금액을 보고 믿기지 않는 듯 나를 쳐다봤다.

“물론입니다. 마음에 안 드는 조건은 바로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마음에 안 드는 게 아니라... 이렇게 많이 받아도 되는 건지 얼떨떨해서...”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통해 책정된 금액이에요. 그 정도의 가치가 없었다면 애초에 작곡가님께 의뢰 자체를 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추가로 공연 이후 음원 수익에 대한 부분도 함께 쉐어할 겁니다.

“...”

손주환은 감격한 듯 계약서를 바라본다.

자신의 이름, 금액, 조건, 단 한 번도 상상하지 못한 내용에 감격이 흐른다.

“정말, 감사합니다.”

“저희가 감사드리죠. 작가님의 곡은 이 금액보다 훨씬 더 많은 걸 우리에게 가져올 테니까요. 그러니 자신감을 가지셔도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손주환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대신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부탁이요?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손주환 작곡가 어금니를 굳세게 문 채 묻는다.

혹시나 부정적인 이야기가 흘러나올까 긴장하는 손주환의 표정. 그러나 나는 그의 생각과 조금 다른 제안을 했다.

“혹시 다른 곡도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

다행히 손주환은 다른 곡도 쓰고 있었다.

“대본을 보고 악상이 떠오른 곡이 있어서요. 이번엔 국악이 아닌 다양한 음악적 시도를 해보고 싶더라고요.”

특히 골칫거리였던 3막 피날레와 2막의 앙상블을 맡아주기로 했다.

계약이 마무리되자 서 대표의 표정이 한결 가벼워진다.

“작가님,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큰 산 하나를 넘고 나자 서 대표가 한숨을 내쉰다.

“서 대표님이 고생하셨죠.”

“아니요. 이번 일은 작가님이 다 해결하셨죠. 곡 선정에, 작품에 대한 전반적인 그림을 그리시는 안목까지. 정말 배우고 싶을 정도네요. 진짜 작가님의 안목은 볼 때마다 놀란다니까요.”

서 대표뿐만이 아니었다.

직원들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영국이 배경인 작품의 메인 테마곡을 국악 리듬에서 발견하시다니, 정말 대단하세요.”

“전 정말 상상도 못 했다니까요. 이건 권 작가님 아니면 결코 알아보지 못했을 거예요.”

사람들은 나의 음악적 안목을 칭찬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나에게 음악이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당시 런던에서 미술과 음악, 문학은 따로 구분 지을 수 있는 장르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하나가 되는 종합 예술이 바로, 연극 그리고 공연 예술이었으니까.

“듣기엔 신하율을 발굴하신 것도 작가님이라면서요?”

“그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지켜보던 서 대표가 미소를 짓는다.

“언제나 그 말씀이시네요.”

“세상사 내 맘대로 되는 게 그리 많지 않잖아요. 다만 포기하지 않고 답을 찾다 보면 언젠가 원하는 곳에 도달하는 게 다를 뿐이죠.”

내 말에 서 대표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 의미에서 또 한 번 운을 기대해 봐야겠네요.”

“네?”

“이 곡, 바로 조현성 배우에게 보내죠.”

이제 가장 중요한 주연 배우를 캐스팅할 차례였다.

***

다음 날 오전.

서미연 대표는 정식으로 곡과 대본을 뮤지컬 배우 조현성에게 보냈다.

이제 당분간 그쪽의 연락을 기다려야 했다.

나는 그사이 잠시 미뤄뒀던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제일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은 바로 사무실을 얻는 일.

갈수록 사람들과의 미팅이 잦아지고, 나도, 장현웅도 작품 활동에 집중하기 위한 공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바로 차기작 집필 때문이지.’

최근 나의 활동은 다양한 곳에서 애를 쓰고 있었다.

서 대표를 도와 뮤지컬 공연을 준비하고, 장현웅을 도와 웹툰을 연재하고.

그러나 이 모든 건 바로 추후 나의 원활한 작품 활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연극이나 뮤지컬 같은 공연 쪽은 서 대표를 통해,

방송과 드라마 쪽은 정은미 피디를 통해,

그리고 웹툰과 그림 쪽의 창작활동은 장현웅을 통해,

그리고 출판과 관련된 일은 누나를 통해.

아직 모두에게 경험치가 더 필요하지만 차근차근 내 미래를 위한 발판들을 두는 중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내가 가장 중점을 두는 건 성공과 돈이 아닌 창작 활동이니까.

돌처럼 굳어진 사람들의 마음을 해금하는 새로운 세상의 창조.

사람들의 오감을 쥐락펴락하고, 때론 환희에 차게, 때론 비애에 젖어 세상을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것.

그 놀랍고 고귀한 창작 활동이 나를 가장 기쁘게 만드는 삶의 요소였다.

‘아직 갈 길이 멀군.’

내 머릿속 도서관에 갇혀있는 수많은 작품들이 나를 향해 아우성을 터트린다.

자신을 꺼내 달라고.

자신의 이야기를 가장 먼저 세상에 들려달라고.

나는 그들의 아우성을 들으며 잠시 생각에 잠긴다.

어느새 날씨는 서서히 쌀쌀해지고 있었다.

‘벌써 또 하나의 계절이 가고 있군.’

슬슬 다음 작품을 써야 할 타이밍.

물론 장르는 이미 정해둔 상태였다.

‘영화가 좋겠어.’

무대라는 틀에 얽매이는 연극과 뮤지컬과 달리 내 상상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공간. 엄청난 제작비와 함께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는 장르.

마침 풀어 놓고 싶었던 이야기도 있었다.

손주환 작곡가같이 빛을 보지 못한 천재들을 만나면 항상 풀어내고 싶었던 이야기였다.

바로 ‘레이디 햄릿.’

자연스럽게 차기작에 대한 영감이 떠오른다.

물론 나는 그 배역에 가장 잘 어울리는 배우 역시 알고 있었다.

충무로의 샛별이라 인정받는 또 다른 연기 천재.

이 배역을 소화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한 사람.

바로 신하율이었다.

지이잉.

그 순간 휴대폰이 울린다.

발신자는 다름 아닌 신하율이었다.

‘얘도 양반은 못 되는 얘군.’

나는 미소를 지으며 휴대폰을 들었다.

-작가님!

전화를 받자마자 휴대폰을 통해 반가운 목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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