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108화 (108/203)

108. cheap - 싸다, 저렴하다 (5)

108.

***

이틀 뒤.

손주환 작곡가는 이른 아침부터 공동 작업실을 찾았다.

이틀 밤을 꼬박 새우면서 곡을 수정한 덕에 작업은 거의 막바지였다.

‘마지막으로 여기에 조금 더 애틋한 감성을 담으면...’

편곡을 마친 곡을 재생시킨다.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곡.

‘그래, 이거야...’

권서준 작가의 대본과 어울리는 곡.

‘Roar’의 수정곡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빨리 보내고 싶은 마음에 손주환은 노트북을 열었다.

그때, 입구 쪽이 소란스러워진다.

“뭐야? 손주환 너 왜 이렇게 일찍 왔어?”

“그러게, 요즘 무슨 바람이 불기에 바쁜 척이야?”

같은 작업실을 쓰는 동료 작곡가들이었다.

“너 뭐하냐?”

“그게, 곡 좀 보내려고...”

“곡? 무슨 곡?”

“내 곡에 관심 있다는 분이 있어서.”

“설마, 니 곡을 계약하겠다는 곳이 있다고?”

“너 사기당한 거 아니야?”

동료 작곡가들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러나 손주환은 이미 알고 있었다. 저게 걱정을 빙자한 비웃음이라는 걸.

비참했지만 그래도 참을 수밖에 없었다. 말이 좋아서 공동 작업실이지 저 동기의 부모가 바로 이 건물주였으니까. 저렴한 사용료를 내고 이용하는 터라 언제나 을일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자신의 사무실을 얻어 당당하게 나가고 싶었지만 그것 역시 쉽지 않았다. 부모들의 지원을 받고 쭉쭉 잘나가는 동기들과 달리 흙수저인 자신은 아직도 10년 차 무명 작곡가였으니까.

“야, 조심해. 나이 먹고 사기당하면 안 되지.”

툭툭 어깨를 두드리고 가는 동기들.

손주환은 비참한 기분을 애써 삭이며 메일을 보냈다.

약속한 날짜보다 하루 앞섰지만 빨리 들려주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후우.”

괜한 동기들의 말에 불안함이 솟구친다. 따지고 보면 며칠 동안 겪은 일은 그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이러다가 계약이 안 되면 어떻게 되는 걸까...’

희망을 품은 만큼 희망을 상실했을 때의 두려움이 크게 엄습한다.

갑자기 솟구치는 불안감에 식은땀이 나고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또다시 찾아온 공황장애 증상.

그러나 손주환은 이내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호흡을 고른다.

‘아, 아니야. 권 작가님을 믿자...’

자신보다 나이는 어렸지만 범상치 않은 기운을 풍기는 사람이었다. 말투에도, 행동에도 확신이 느껴지는 게 따르는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매력이 있었다.

딸깍.

손주환이 손가락에 힘을 줘 전송 버튼 누른다.

‘난 최선을 다했어...’

이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권 작가를 믿고 기다리는 일만 남아이었다.

***

늦은 오후.

나는 손주환이 보낸 곡을 가지고 창조 극단을 찾았다.

“손주환 작곡가가 보낸 곡입니다. 다 같이 한 번 확인해 보시죠.”

내 말에 서미연 대표를 포함해 직원들이 둘러앉는다.

“손주환 작곡가면 그때 그 국악?”

“조용히 해. 들려...”

쑥덕거리는 직원들의 귓속말이 들린다.

그러나 그들의 의심은 당연했다.

‘이전 버전으로 가능성을 찾기란 어려우니까.’

애초에 그런 안목을 지닌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백문이 불여일견.

나는 준비해둔 곡을 틀었다.

잠시 뒤,

스피커를 통해 음악을 틀자 신명 나는 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진다.

곡 : Roar.

시작과 함께 대취타의 유일한 가락악기 태평소가 고요히 침묵을 깬다. 크고 쾌활한 소리가 허공을 쩌렁쩌렁 울리며 조금씩 고조된다.

“...어?”

듣고 있던 직원들이 반응을 보인다.

이전과 달라진 걸 느낀 모양.

어깨를 들썩이게 만들며 모두를 일으킨다. 분위기를 충분히 끌어올린 가락이 슬며시 사라지고 그 자리를 쏟아지는 속사포 리듬이 채운다.

“...”

이쯤 되자 서 대표의 표정도 진지해진다. 리듬을 타며 눈을 깜빡이는 모습이 대본 속 이미지를 떠올리는 모양이었다.

힘찬 곡조는 당차게 행진하는 크리스토퍼 말로의 모습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이후 비트 넘치는 드럼과 일렉이 합쳐지면서 더욱 속도를 올린다.

“대, 대박...”

몇몇 직원이 무의식으로 터져 나온 혼잣말을 막기 위해 입을 막는다. 그러나 곡은 점점 더 고조되며 휘몰아친다.

속도감 있게 깔리는 피아노 선율. 그 위로 멜로디가 타고 오른다. 신선한 리듬이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이끌자 본 적도 없는 무대가 머릿속에 펼쳐진다.

그러다가 일순간 침묵.

폭풍 전 고요처럼 모든 악기가 일순간 숨을 죽인다. 잔잔한 피아노 소리만 흐름을 이어가다 스러진다.

그리고 그 순간,

서 대표가 놀란 듯 나를 바라본다.

“작가님 이거...”

표정을 보니 아마 내 생각과 같은 생각을 하는 모양.

묘한 두근거림에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 가슴. 곡 를 처음 들었을 때의 느낌이었다.

“이, 이거예요. 제가 생각했던 음악이...”

서 대표가 감탄하며 나를 바라본다.

“어떻게, 그 곡에서 이런 곡이 나올 수 있죠?”

“내 말이... 아니, 작가님은 이걸 보신 거예요?”

직원들의 반응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본인들이 생각하기에 가망 없던 곡에서 이런 퀄리티가 나온 걸 직접 목도했기에 놀라움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다만 난 이 모든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다. 손주환과 손주환의 곡에선 그만한 가능성을 보이고 있었으니까.

“민망하네요. 저흰 이런 곡이 나올 거라고 상상도 못 했습니다.”

“그러니까요. 작가님, 정말 대단하세요. 곡에도 일가견이 있으신지 미처 몰랐습니다.”

직원들의 반응.

곡에 대한 생각이 어떤지를 알 수 있었다.

“역시, 작가님 놀라운 안목에 감탄만 나오네요.”

서 대표가 감탄하며 결정을 마무리 짓는다.

“작가님 말씀대로 이 곡, 계약하죠.”

바로 내가 원하던 반응.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소식은 직접 만나서 들려주는 게 좋겠지?’

나는 기분 좋게 창조 극단 사무실을 나섰다.

***

늦은 저녁, 공동 작업실.

손주환은 아무도 없는 어두운 작업실에 홀로 남아 권서준의 연락을 기다렸다.

‘언제쯤 오시려나...’

분명 곡과 관련해 할 얘기가 있다는 말에 작업실에서 보기로 한 게 2시간 전이었다.

어떤 내용인지 모르는 손주환은 초조한 마음에 자꾸 손톱을 뜯는다.

결과가 두려운 상황.

손주환은 자꾸만 밀려오는 공포심을 밀어내기 위해 곡이 완성되던 순간의 감격을 떠올렸다.

‘그래... 그 느낌이었어.’

머릿속으로만 떠올린 곡이 세상에 태어난 느낌. 무려 10년이라는 인고의 시간 끝에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손주환은 아직도 배가 고팠다.

‘작가님의 대본을 생각하면 아직도 악상이 막 떠올라.’

크리스토퍼 말로뿐만 아니라 하나같이 살아있는 등장인물들의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수많은 악상을 만들어냈다.

웅장한 테마곡과 전혀 다른 느낌의 곡도 떠오른다. 활기차고, 대한민국 남녀노소의 마음을 뒤흔들 치명적인 음악들.

게다가 마지막 엔딩을 생각하면 사람들의 눈물을 쏙 빼놓을 만한 슬픈 곡조도 떠올랐다.

‘그래, 엔딩곡도 하나 써야겠어.’

상황만 된다면 밤새도록 작업실에서 곡만 쓰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의 마무리 작업이 더 중요했다.

그때, 어두운 작업실 남아 마무리 작업을 하는데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설마...’

고개를 드니 아니나 다를까 동기 작곡가가 술에 취해 들어왔다. 양옆엔 어디 연습생으로 보이는 예쁘장한 여자애를 낀 상태.

“뭐야, 너 아직도 있었어?”

“어? 아, 그게... 작업할 게 좀 있어서.”

“뭘 이 시간까지 붙들고 있어. 그러지 말고 그만 들어가.”

손을 휘적거리던 녀석은 이내 화장실로 향했다. 말이 공동 작업실이었지 소유는 저 녀석의 어머니였기에 눈치가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특히 이렇게 여자 연습생들을 불러 술을 마실 때면 그야말로 찬밥신세. 어차피 버틴다고 작업할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었기에 책상을 정리했다.

“어머, 오빠 저 사람 아직도 있는데?”

화장실을 다녀온 여자애가 말했다.

그 말에 동기 녀석이 눈을 크게 껌뻑이며 쳐다본다.

“야, 뭐해? 아직도 안 갔어?”

“미안, 지금 가.”

손주환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갔다. 잠시 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얇은 유리문 너머로 작업실 안에서 나누는 대화 소리가 들린다.

“근데 저분은 누구야? 오빠처럼 작곡가야?”

“야, 히트 친 곡 하나 없는 게 작곡가면 개나 소나 작곡가지. 그냥 작곡가 지망생이라고 생각해.”

“그러기엔 나이가 좀 많던데?”

“그러니까 한심하지. 10년 넘게 남의 따까리만 하다가 이제 와서 제 곡 쓰겠다고 주접이야. 나잇값도 못 하고 주제도 모르고 참나. 물고 나온 수저가 애초에 다른데 왜 저렇게 고집을 부리는지 이해가 안 된다니까.”

동기의 말이 비수처럼 날아와 박혔다. 그러나 더 가슴 아픈 건 부인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나도 학비 대주고, 돈 대주고, 작업실 마련해주는 부모가 있었다면 이렇게 살지는 않았다고.’

셋방살이처럼 남의 작업실에 기생하는 삶은 비참하고 힘겨웠다. 생각할수록 억울한 현실에 마음이 울컥거렸다.

그런데 그때, 문 앞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권서준 작가였다.

“자, 작가님...”

놀란 손주환을 보며 권서준이 쓴 미소를 짓는다.

“지금 막 도착했는데, 본의 아니게 듣게 되었네요.”

조금 전 동기의 말을 다 들은 모양이었다. 이렇게 쫓겨나는 모습까지.

비참함이 배가 됐다.

그런데 그 순간 권서준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손 선생님, 우리 술 한잔할까요?”

***

몇 잔의 술이 돌 때까지 권서준은 아무런 말도 묻지 않았다. 배려하는 그 마음마저 참 고마운 사람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여드리게 돼서 죄송합니다.”

“손 선생님이 사과할 일은 아니죠.”

손주환은 쓴 미소를 지으며 술잔을 들이켰다.

“솔직히 작곡가로 먹고살기 힘들었어요. 특히 능력도 없으면서 돈으로 인맥을 사서 승승장구하는 동기들 보면 현타 올 때도 많았고요.”

손주환의 말은 사실이었다. 돈으로 피쳐링을 사고 유명 작곡가의 리터치를 받고, 그리고 마치 자기 곡처럼 내는 사람들이 많은 게 현실이니까.

“게다가 좋은 시설, 좋은 장비로 편하게 작업하는 금수저 애들 보면 부러웠던 것도 사실이고요. 근데 그래도 포기가 안 되더라고요.”

작곡에 진심인 남자.

그가 바로 손주환이었다.

술이 좀 오른 탓일까.

평소라면 하지 못할 말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근데 웃긴 게 뭔지 아세요? 화가 나기보다는 부럽다는 거예요. 저렇게 태어난 게...”

그 말에 권서준 작가가 고개를 든다.

“정말로 부러우신가요?”

“당연하죠. 금수저 물고 태어나서 시작부터 한참 앞서있으니까요. 듣기로는 작가님도 흙수저 아니세요?”

“누가 그래요? 제가 흙수저라고.”

“네? 아, 그게...”

“뭐, 태어날 때 부모한테 물려받은 게 없어서 흙수저라고 하는 거면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말을 끊은 권서준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눈빛이 조금 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내 수저 색깔은 내가 정할 겁니다. 태어날 때 물고 나온 수저를 평생 쓰라는 법은 없잖아요.”

“...”

담담하게 내뱉는 한 마디가 날아와 가슴에 박혔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말.

그러나 감당하기 벅찬 현실 속 격차 앞에서 언제나 핑곗거리가 되던 수저론이 무참히 깨지는 순간이었다.

‘뭐지? 이 사람은 배포부터가 달라...’

그저 주어진 상황에 만족하고 순응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마주하는 것만으로 뭔가 거대한 흐름이 느껴진다.

“손 선생님의 수저 색깔도 한 번 바꿔 보세요. 우린 아직 젊잖아요.”

권서준의 말은 분명하게 목표를 향해 있었다. 늘 안개 속에 머문 것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던 자신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

권서준과 자신의 차이.

그 커다란 격차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때,

권서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곡, 저희와 계약하시죠.”

순간,

손주환의 눈이 커지기 시작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소식.

그러나 지금 가슴에 벅차오르는 감동은 계약에 대한 안도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신의 곡이 인정받았다는 기쁨 때문만도 아니었고.

그보다는 훨씬 더 큰 의미 때문이었다.

‘이분을 따라가다 보면... 어쩌면 나도 뭔가 바뀔 수 있지 않을까?’

막막하던 현실 속에 명확한 이정표를 발견한 기분.

잠시 뒤,

손주환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계약하겠습니다.”

어느새 손주환의 눈시울은 꽤나 붉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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