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107화 (107/203)

107. cheap - 싸다, 저렴하다 (4)

107.

***

제목 : Roar.

굳이 해석하자면 짐승의 포효, 함성쯤 될까?

대취타의 리듬을 가미한 신명 나면서 또 웅장한 느낌을 가득 풍기는 곡이었다.

그러면서도 특유의 한이 서린 곡조는 한번 들었음에도 묘하게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안 그래도 2막 클라이맥스에 어울리는 곡을 찾고 있었던 터라 이건 하늘이 내려준 기회나 다름없었다.

‘웅장한 분위기는 크리스토퍼 말로의 시작을 알리기에 충분해.’

그러나 그대로 사용하기엔 문제가 있었다.

직원들의 말대로 촌스러운 부분이 없지 않았으니까.

현대식의 해석에서 큰 아쉬움이 남았다.

그러나 그 부분만 수정한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나는 곡의 가능성을 보다 높게 판단했다.

그리고 내 머릿속엔 어느새 계산이 마무리됐다.

“이 곡이 괜찮네요.”

“네? 그 곡이요?”

직원의 얼굴에 불신이 떠오른다.

“네, 혹시 이 작곡가 연락처 알 수 있을까요?”

“아... 그거야 물론이죠.”

떨떠름한 표정과 달리 직원은 재빨리 연락처를 건네준다.

친절했지만 그들의 행동엔 당연한 듯 의구심이 떠오른다.

그래, 이럴 땐 백번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한 번 제대로 들려주는 게 필요했다.

나는 메모에 적힌 이름을 확인했다.

[손주환 작곡가]

***

이른 아침.

오늘 극단 주차장.

손주환 작곡가는 새벽부터 나와 김재용 대표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뒤,

고급 외제차에서 김 대표가 나오자 손주환은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간다.

“대표님!”

“아니, 이 사람이 또...”

손주환을 보자마자 김 대표의 이맛살이 찌푸려진다.

“한 번만 들어봐 주세요. 약속하셨잖아요, 이번에 제 곡 써 주시기로요. 네?”

“제발 좀 그만해라. 곡도 곡 나름이지, 그렇게 촌스러운 노래를 어디다 내미는 거야, 대체?”

김재용 대표는 혀를 차며 몸을 돌린다.

더없이 모욕적인 언사였지만 절박한 손주환은 또 한 번 김 대표의 앞을 가로막는다.

“한번 만요. 네? 한 번만 들어봐 달라고요.”

손주환은 휴대폰을 든 채 팔을 쭉 내뻗었다.

“아이, 저리 치우라니까!”

그러나 매몰찬 김 대표의 몸짓에 그만 휴대폰을 놓치고 말았다. 툭 떨어져 휴대폰 액정은 그대로 거미줄을 치고 말았다.

“...”

순간 흐르는 정적.

김 대표도 조금 당황한 듯 쳐다보다가 이내 손을 턴다.

“아 이 사람이. 그러니까 됐다고 하니까. 이거 내 탓하지 마. 당신이 떨어트린 거니까.”

김 대표는 행여 오해를 살까 싶어 서둘러 멀어진다.

다시금 고요해진 주차장.

“하아...”

박살 난 휴대폰을 바라보는 작곡가의 표정은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역.

벤치에 앉은 손주환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이번엔 진짜 자신 있었는데...”

몇 주를 밤새우다시피 만든 곡이었다.

김 대표가 진행 중인 작품 「가시리 가시리 잇고」 속 공민왕의 변화에 맞춰 웅장한 대취타의 리듬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곡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도입부를 듣자마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국악 리듬이네? 뮤지컬에 쓰기엔 촌스러운데?’

조금만 더 들어 달라고 부탁해도 모두 손을 내저었다. 그나마 도입부라도 들어본 사람은 양반이었다.

오늘 김 대표처럼 제대로 듣지도 않고 거절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게 바로 무명의 설움이었다.

곡을 팔기는커녕 들어주는 것조차 감사해야 할 처지였다.

‘그나저나 이건 또 어떡하냐...’

손주환은 깨진 휴대폰을 보내 한숨을 내쉬었다.

5년 넘게 쓰고 있던 휴대폰.

툭하면 배터리가 떨어지는 애물단지였지만 바꿀 형편이 아니기에 그대로 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액정까지 박살이 나서 터치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고치려면 또 얼마나 들려나...’

벌써부터 한숨이 나오고 눈앞이 캄캄해진다.

돈 나올 곳은 없고,

꿈은 갈수록 멀어져가고,

냉혹한 현실은 자꾸만 목줄을 움켜쥐고.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은 마치 자신을 옥죄는 쇠창살 같이 느껴졌다.

‘안 돼, 이러면...’

순간 찾아오는 공황장애 초기 증세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때,

액정이 박살 난 휴대폰이 울린다.

발신자도, 번호도 보이지 않는 상황.

손주환은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여, 여보세요?”

혹시 김 대표가 아닐까 하는 마음에 다급하게 전화를 받는다.

그러자,

[혹시 손주환 작곡가님 되시나요?]

처음 듣는 목소리가 들린다.

묵직하면서 참 듣기 좋은 중저음이었다.

***

손주환 작곡가.

작곡가라는 소개가 민망할 정도 작품이 없었다. 거의 무명이나 다름없는 사람.

그러나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곡 자체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어.’

나는 약속 장소에서 손주환을 기다렸다.

잠시 뒤, 문이 열리고 3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한 남자가 들어온다.

창백한 표정.

불안한 눈빛으로 두리번거리는 모습.

“손주환 작곡가님?”

내가 손을 들자 그제야 남자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본다.

“아, 네. 제가 손주환입니다.”

자리에 앉으면서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안녕하세요. 전 권서준 작가라고 합니다.”

“권서준... 작가요? 설마, 드라마 「이옥」의 작가님이요?”

“네, 맞습니다.”

“헐...”

순간 긴장이 풀어지는 게 느껴진다.

이래서 유명해지는 건 불편한 점도 있지만 편한 부분도 있었다.

“...근데, 무슨 일이시죠?”

“어제, 창조 극단에서 작곡가님의 곡을 들었습니다.”

“제 곡을요?”

좋아하면서도 의심 어린 눈초리였다.

그동안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알 수 있었다.

“네, 제가 뮤지컬을 기획 중이라 곡을 찾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선생님의 곡이 귀에 확 들어와서요.”

“아, 맞아요. 절박한 심정에 창조 극단에 넣은 곡이 있긴 한데... 근데 정말 제 곡이 마음에 드신 건가요? 끝까지 다 들어보셨고요?”

“물론이죠. 전체적으로 웅장한 느낌의 분위기가 좋았고, 대취타의 리듬을 도입부를 넣은 건 특히 좋았고요.”

“진짜 다 들으셨구나. 하, 하아...”

자신의 작품 의도를 이해해주자 그제야 손주환의 표정이 밝아졌다.

“마, 맞습니다. 국악 리듬에 웅장한 느낌을 가미했거든요. 근데, 다들 촌스럽다고 끝까지 듣지도 않더라고요.”

“제가 듣기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찾아왔고요.”

감격한 듯 손주환의 눈이 커진다.

그러나 순간 고민거리가 있는 듯 표정이 굳어진다.

“근데 창조 극단이면 콘셉트만 보고 제출한 곡이라 실제 작품 분위기가 많이 다르지 않나요? 곡이 어울리기 위해선 작품의 분위기와 찰떡같이 맞아야 할 거 같은데요...”

“맞습니다. 그래서 수정을 부탁드리려고 합니다. 가능할까요?”

“...”

손주환은 믿기지 않는 듯 잠시 눈을 깜빡이며 나를 바라본다. 그러다가 이내 정신을 차린 듯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 그거야 물론이죠.”

굳게 다무는 입술.

손주환의 의지를 보여주는 표정이었다.

***

나는 준비해 온 대본을 손주환에게 건넸다.

“시간이 촉박해서요. 3일 정도면 가능할까요?”

3일.

편곡을 진행하기엔 촉박한 시간이었다.

“네, 제가 어떻게 해서든 3일 안에 수정해보겠습니다.”

그러나 야무진 손주환의 표정을 보면 크게 걱정할 일은 없어 보였다.

벌써부터 달라질 곡에 대한 기대로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럼, 제가 어디로 찾아뵐까요?”

대본을 챙기던 손주환이 물었다.

마땅한 장소가 떠오르지 않아 잠시 생각에 잠긴다.

“일단 여기서 다시 뵙는 거로 하죠.”

“알겠습니다.”

손주환은 밝은 인사와 함께 카페를 빠져나갔다. 옆 테이블에서 기다리고 있던 장현웅이 다가온다.

“얘기는 잘 끝났어?”

“어. 잘 끝났어.”

“근데 표정이 왜 그래?”

“매번 이렇게 밖에서 만나는 게 좀 불편해서.”

작업만 할 땐 불편함이 없었지만 약속이 많아지기 시작하면서 공적인 공간이 없다는 점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타이거 스튜디오에서 많은 것들을 도와줬지만 이제 드라마도 끝난 상태에서 사용할 순 없었다.

‘그렇다고 창조 극단 사무실을 쓰기도 그렇지.’

대표실도 없이 스태프들에게 양도한 그 공간에서 나까지 들어갈 순 없었다.

그렇다고 집에서 만나기도 힘든 상황.

게다가 차기작 수정, 뮤지컬 대본 검토.

그리고 뒤이어 시작될 작품들을 집필하기 위해선 정식 사무실이 하나 필요했다.

“현웅아. 사무실 좀 알아봐.”

“작업실?”

“그래, 우리 둘이 쓸 만한 곳이면 좋을 거 같아. 집필뿐만 아니라 간단한 회의, 사람들과의 미팅을 할 수 있는 공간이면 좋을 거 같아.”

“하긴, 집에서 모든 걸 하기엔 무리가 있지. 어머니랑 누나도 불편하실 테고. 알았어, 내가 한 번 알아볼게.”

물론 장현웅의 웹툰 작업을 위해서도 적절한 작업실이 하나 있는 게 좋았다.

“참, 현웅아. 요즘 작업은 할 만해?”

“그야 물론이지. 이미 10화 가까이 비축분 쌓았다고.”

웹툰은 총 5화까지 풀린 상황.

비축분도 넉넉하고 상황도 나쁘지 않았다.

떡상이라고 할 순 없지만 순위도 점점 올라가는 중이었고.

당사자인 장현웅은 조금 초조한 모양이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기다리기만 하면 내가 원하는 결과는 자연스럽게 굴러올 게 분명했다.

어떻게 확신하냐고?

나는 내 안목에 대한 믿음이 있으니까.

장현웅의 재능뿐만 아니라, 신하율과 누나의 가능성을 가장 먼저 알아본 사람이 바로 나였다.

‘물론 이번 손주환 작곡가의 곡 역시 마찬가지고.’

지금은 잠시 기다릴 때.

나는 여유롭게 얼그레이 한 잔을 즐겼다.

***

“후우.”

오르막을 힘겹게 올라온 손주환이 숨을 고른다. 그리고 그의 두 손에 들린 건 다름 아닌 권서준 작가의 뮤지컬 대본이었다.

“이 대본... 대체 뭐지?”

숱하게 읽어온 대본들과 차원이 달랐다. 시작부터 끝까지 크리스토퍼 말로의 삶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특별한 지문이 없이도 주인공의 표정과 행동, 그리고 속마음이 들리는 듯했다.

그로 인해 작품의 분위기, 자신이 써야 할 곡의 분위기가 제대로 떠오른다.

‘권 작가님은, 진짜 천재인 건가?’

언론에 알려진 이미지보다 훨씬 더 대단한 실력을 갖춘 사람이었다.

그리고 천재 작가의 작품을 통해 얻은 감동은 자연스럽게 편곡에 대한 열망으로 이어진다.

‘나도, 빨리 편곡하고 싶다...’

창작의 불길이 명치에서부터 뜨겁게 타오른다.

그러나 공동 작업실을 찾기엔 너무 늦은 시간. 손주환은 서둘러 계단을 올라 자신의 거처인 고시원에 들어섰다.

발도 채 뻗지 못하는 방. 가장 크게 자리 잡은 건 가로로 놓인 건반이었다. 좁은 방 폭에 딱 맞는 사이즈. 유일한 밥벌이 수단이자 꿈의 도구였다.

건반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긴다.

‘왜 갑자기 국악이 좋아진 걸까.’

정확히 이유도 정확한 시기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어느 순간부터 신명 나는 우리 가락의 느낌이 너무 좋았다.

‘언젠간 이 느낌을 제대로 표현하고 싶었지.’

마치 운명처럼 다가온 국악의 매력에 원대한 포부를 안고 열심히 작곡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건 냉대와 멸시였다.

그런데 오늘.

처음으로 자신의 곡을 인정해주는 사람을 만났다.

지금도 그 감동이 가시지 않는다.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말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 이 은혜에 꼭 보답하자.’

손주환은 몇 번이고 속으로 다짐했다. 그러나 지금 당장 필요한 건 편곡이었다.

손주환은 외투도 벗지 않은 채 건반 앞에 앉았다.

헤드셋을 끼자 기다렸다는 듯이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모두가 잠든 늦은 밤.

곡 는 훨씬 더 웅장하고, 매혹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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