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cheap - 싸다, 저렴하다 (3)
106.
***
1차 투자금 30억.
첫 번째 플렉스는 바로 곡이었다.
-작가님, 오늘 오후에 메인 테마곡을 받아보기로 했는데 같이 가실래요?
서미연 대표의 말에 나는 당연히 함께 가기로 했다.
뮤지컬에서 대본, 배우만큼이나 중요한 축을 담당하는 게 바로 음악적인 요소니까.
정오 무렵.
나는 장현웅과 함께 집 앞에서 서 대표를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에도 장현웅은 연신 네버이 사이트에 들어가 웹툰 상황을 살핀다.
“음. 생각보다 선호작이 팍팍 늘진 않네?”
추천 만화에 올라 드라마틱한 상승을 기대했지만 결과는 아직 아쉬웠다.
“챌린지리그는 마니아들과 작가 지망생들만 보는 곳이라 반응이 좀 느릴 거야. 그래도 걱정할 거 없어. 조만간 신호가 올 테니까.”
“응. 네 말대로 이번엔 뭔가 불안하진 않네. 글 작가님이 든든해서 그런가?”
장현웅이 피식 웃는다.
“참, 아버지께 웹툰 시작했다고 말씀드렸어?”
내 물음에 장현웅이 고개를 끄덕인다.
“응. 시간이 늦어서 어떤 작품인지 말은 못 했지만 그래도 시작했다고는 말했어.”
표정이 한결 편안해 보인다.
이전과 달리 불안한 기색도 없고, 한층 성장한 녀석의 모습이 보인다.
여러모로 긍정적인 신호였다.
“근데, 서 대표님은 언제 오시는 거야?”
“이제 곧 오실 때 됐어.”
약속한 시각이 거의 다 된 상태.
사실 내 차로 이동해도 되지만 이렇게 기다리는 이유는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극구 모시러 오겠다는 서미연 대표 때문이었다.
“작가님!”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려보니 차창을 연 채 힘차게 손을 흔드는 여자가 보였다. 서 대표였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차에 오르며 인사를 나눴다.
“대표님, 굳이 이렇게 픽업 안 오셔도 되는데 너무 고생하시는 거 아니에요?”
“에이, 런던에서 그렇게 큰 선물을 가지고 오셨는데 제가 뭐라도 해야죠.”
“그래도 너무 고생하시는 거 같아서요.”
“고생이라뇨? 이렇게 작가님을 모실 수 있는 게 영광이지. 자, 얼른 타세요.”
솔직히 시차 때문에 피곤한 건 사실이었다. 센스 있는 서 대표 덕분에 우리는 편하게 차에 올랐다.
잠시 뒤 강변북로에 오르자 운전대를 잡은 서 감독이 다시 입을 열었다.
“오정배 작곡가 아시죠? 국내 뮤지컬 음악 쪽에선 꽤 유명한 분이거든요.”
뮤지컬을 기획했을 때부터 이미 알고 있던 작곡가였다. 해외 유명 뮤지컬의 곡을 편곡하기도 했고, 국내 창작 뮤지컬에서 유명한 곡을 여러 번 작곡하기도 한 네임드 중 한 사람이었다.
“일단 작가님 대본을 기반으로 총 28곡 정도를 생각하고 있어요. 오정배 작곡가한테 맡긴 건 1막 마지막과 2막 클라이맥스에 올릴 메인 테마곡이고요.”
가장 중요한 지점.
크리스토퍼 말로가 천재성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참, 가장 중요한 주연 캐스팅은 조현성을 생각하고 있는데 어떠세요?”
인기 영화배우 조현성.
지난번 연극 「거장의 숨결」을 보러왔던 배우라 안면이 있었다.
대한민국 배우 중 연기력 원톱을 꼽을 때 빼놓지 않고 거론되는 배우 중 한 명.
“솔직히 엄두도 못 내고 있었는데 투자금 보니까 해볼 만하더라고요. 물론 조현성이 돈만 보고 움직이는 배우가 아니라서 곡도 잘 나와야겠지만요.”
서 대표의 말 대로였다. 배우 조현성은 단순히 돈에 움직이는 연예인이 아니었다.
‘연기에 진심인 몇 안 되는 배우 중 하나지.’
데뷔작이었던 영화에서 1300:1의 경쟁률을 뚫고 캐스팅되어 칸 영화제를 밟은 배우. 워낙 완성도 높은 연기를 보여주다 보니 실제 나이보다 훨씬 많다고 착각하는 사람이 많을 정도였다.
특히 식상하지 않으면서 매번 배역에 최적화된 연기력을 선보여 ‘조현성이 곧 장르다’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
게다가 뮤지컬 배우이자 교수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청소년 뮤지컬에 출연할 정도의 재원이었으며 13년간 출연한 작품 수만 무려 스무 작품이 넘었다.
‘뮤지컬 하면 무조건 떠오르는 원톱 배우가 바로 조현성이지.’
영화, 드라마, 그리고 뮤지컬까지 세 분야에서 성공한 말 그대로 그랜드슬램의 신화를 이뤄낸 몇 안 되는 배우.
그러나 그래서 그의 캐스팅은 더 쉽지 않았다.
대본, 곡, 배우까지 완벽히 갖춰지지 않으면 결코 움직이지 않는 배우였으니까.
결국 조현성을 설득하기 위해선 출연료만큼이나 곡이 중요했다.
‘결국 곡, 캐스팅 둘 다 얻어내야 해.’
대본이 잘 나온 상태에서 두 조건만 확실히 잡으면 성공은 장담할 수 있었다.
일단 서 대표가 섭외했다는 작곡가의 곡을 직접 들어보고 결정하면 될 일.
어느새 약속 장소인 오피스텔이 보이기 시작했다.
***
늦은 오후.
서 대표는 약속대로 오정배 작곡가의 작업실을 찾았다. 오정배는 곧바로 자신의 곡을 들려줬다.
“내가 서 감독 실력 믿으니까 특별히 준비한 곡이야.”
<첫걸음>
에너제틱한 업 템포 장르의 곡이었다.
“신나는 장면에 맞게, 이렇게, 이렇게 흥을 돋우는 거지.”
쉰이 훨씬 넘은 오정배가 신이 난 듯 엉덩이를 실룩거렸다. 안무가도 아닌데 왜 이러는지 참. 그 모습이 보기 힘들었지만 아쉬운 서 대표 입장에선 참을 수밖에 없었다.
“어때? 괜찮지?”
오정배는 반 강요하듯 서 대표에게 물었다.
“네, 좋네요. 괜찮을 거 같아요.”
솔직히 딱 마음에 드는 느낌은 아니었다.
너무 노골적인 업 템포라 반감이 가는 것도 있었고, 무엇보다 흔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작가님은 어떠시려나...’
슬쩍 권서준의 표정을 보니 자신과 마찬가지로 그다지 표정이 좋지 못했다.
경쾌한 뮤지컬 작품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그런 느낌. 그 이상의 느낌을 받지 못했다는 게 아쉬웠다.
‘하지만 익숙하다는 건 찾는 사람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기도 해. 아쉬운 부분은 차차 수정 요청하면 되니까...’
적어도 오정배 작곡가는 대중들의 니즈를 놓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 아쉬운 쪽은 창조 극단 쪽이었다.
“그래, 내가 김재용 대표 생각해서 특별히 힘을 썼다니까. 서 감독이 봐도 잘 어울리지?”
갑자기 뜻밖의 이름이 오정배의 입에서 나오자 서 대표의 표정이 굳어진다.
“김 대표님이요?”
“그래, 내가 또 김 대표 일에는 발 벗고 도와주잖아.”
“제가 지난번에 말씀드렸잖아요. 저 김 대표님 극단 나와서 극단 차렸다고.”
“...뭐?”
오정배가 다급히 조수를 쳐다본다.
“...”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한 조수의 표정.
두 사람의 짧은 시선만으로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있었다.
더 큰 문제는 싸해지는 오정배의 표정이었다.
“그럼, 이 곡은 뭐 하려고?”
“제가 차린 극단에서도 뮤지컬 들어가거든요. 지난번 보내드린 대본이 바로 그 작품이고요.”
“...”
오정배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지더니 이내 서둘러 일어난다.
“자, 잠깐만. 내가 급히 연락할 데가 있어서.”
얘기하던 중에 갑자기?
오정배는 휴대폰을 들고 나가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저기, 서 감독. 이번 곡은 좀 어려울 것 같다. 미안해.”
갑작스럽게 변한 오정배의 반응에 서 대표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선생님,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세요?”
“아이, 미안하다니까 자꾸 그러네.”
“갑자기 왜요? 그 사이에 누가 곡 달라는 사람이라도 있었어요?”
오정배는 몇 번이나 혀를 차더니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그게 아니라... 좀 전에 김재용 대표랑 통화했는데... 서 감독도 알다시피 우리가 좀 막역한 관계잖아. 흠, 흠.”
역시나 이번에도 김재용 대표가 문제였다.
“선생님, 언제는 저를 믿으신다면서요? 그래서 이 곡도 주시기로 한 거 아니었어요?”
“물론 서 감독 능력은 믿지. 근데 나도 이번 곡으로 체면치레는 해야 할 거 아니야? 작곡가 마음도 좀 이해해줘야지.”
“저희 이번 작품 장난 아니라니까요?”
서 대표는 간절히 설득했다.
그러나 오정배는 이미 결정한 듯 듣지도 않았다.
“아무리 그래봤자 오늘 극단은 투자금만 백억이 넘는다고. 솔직히 이 바닥 돈으로 찍어 누르면 질 수가 없는 거 서 감독이 더 잘 알잖아?”
물론 이쪽도 투자금에선 밀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마음이 돌아선 오정배에게 그런 말까지 하면서 설득할 생각은 없었다.
“미안해, 근데 나도 정성 들여 만든 곡을 버릴 순 없잖아. 안 그래?”
답답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인맥과 돈에 의해 짓밟히고 버림받고 이용당하는 게 당연한 세계였으니까.
***
밖으로 나오자마자 서 대표가 고개를 숙인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괜찮습니다. 사실 곡이 그렇게 마음에 들었던 것도 아니고요.”
“그건 저도 마찬가지지만... 워낙 중요한 곡이라 마음이 무겁네요.”
“애초에 곡 자체도 대본을 제대로 안 본 느낌이었어요. 작품의 분위기와 어딘가 어울리지 않았거든요.”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이던 서 대표는 또다시 고개를 숙인다.
“...여러모로 면목이 없네요.”
서 대표는 입술을 질끈 문 채 한숨을 내쉬었다. 꽤나 충격을 받은 듯 표정이 좋지 않았다.
서 대표가 이렇게 곡 선정에 에너지를 쏟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조현성 배우를 설득하려면 곡이 좋아야 하니까.
캐스팅 단계부터 어그러지면 작품의 성공을 장담할 수 없었다.
“일단 더 찾아보죠.”
내 말에 서 대표가 마지못해 웃는다.
그러나 그 모습이 더욱 애처롭게 보일 뿐이었다.
***
며칠 뒤.
서 대표는 수많은 작곡가를 통해 곡을 받았다.
이번 작품을 위해 최소 24곡에서 최대 30곡 정도가 필요한 상태.
다른 곡은 몰라도 메인 테마곡만큼은 내가 원하는 곡을 찾고 싶었다.
“곡은 많이 받았는데 아무리 들어봐도 마음에 드는 게 없네요.”
며칠째 원형 탈모가 생길 정도로 고생하는 서 대표를 위해 나는 창조 극단 사무실을 찾았다.
서 대표뿐만 아니라 곡 선정을 돕던 직원들도 하나같이 괴로운 듯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작가님...”
힘이 하나도 없는 사람들의 모습은 마치 좀비와 같았다. 며칠 동안 잠을 거의 못 자고 곡을 찾고, 작곡가를 찾아다닌 모양이었다.
다행히 그사이 몇 개 곡을 선정하긴 했지만 제일 중요한 테마곡은 찾지 못했다.
이 대로면 캐스팅과 함께 전체 스케줄에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곡이 없는 상황에서 마냥 기다린다고 해결책이 나오는 건 아닌 상황.
“제가 한 번 들어볼까요?”
내 말에 직원들이 표정에 의구심이 든다.
들어봐야 별 의미 없다는 표정.
“이 폴더부터 확인하면 되나요?”
“아, 그쪽은 일차적으로 걸러진 곳이에요. 괜찮은 곡이 없을 거예요.”
그러나 내 경험상 예상외로 이런 곳에서 숨겨진 보석을 발견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 명작이라 일컬어지는 수많은 작품들이 당시엔 무시를 당하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내가 발굴한 천재들의 작품 역시 초반엔 철저한 외면을 받았다.
나는 의자에 앉아 하나둘씩 곡을 듣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지켜보던 사람들의 관심이 모인다.
그러나 한 곡, 두 곡, 세 곡, 연이어 넘어가자 직원들이 표정에 한결같이 떠오르는 생각.
‘그래, 거긴 괜찮은 게 없다니까.’
나 역시 별수 없을 거라는 기대 아닌 기대가 흐르는 표정이었다.
‘과연 그럴까?’
나는 완벽한 곡이 아닌 가능성이 있는 곡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이 정도 숫자의 곡이 모였는데 가능성 있는 곡이 하나도 없을 리가 만무했다.
그런데 그때,
스피커를 통해 흐르는 한 음악이 내 귀에 꽂힌다.
어딘가 낯이 익고 친숙한 느낌의 선율.
일반적인 곡과는 확연히 다른 리듬과 느낌을 풍겼다.
‘마치 국악 리듬 같은데?’
듣고 있던 직원들도 들어본 듯 미간을 찌푸린다.
“아, 그거 들어봤는데 별로예요.”
“하긴, 영국이 무대인 작품에 국악 리듬이 어울릴 리가 없잖아요.”
“맞아요. 좀 촌스러운 느낌이라 듣다 껐거든요.”
직원 한 명이 음악을 끌려고 했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일단 좀 더 들어보죠.”
“네? 아, 네...”
마지못해 직원의 손길이 멈춘다.
점점 고조되는 태평소의 리드.
뒤이어 친숙한 리듬이 점차 템포를 높여간다. 그러다가 이내 묵직하게 울리며 폭발하는 곡조.
‘이건 대취타?’
그 순간, 갑자기 눈앞에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2막 클라이맥스.
<소제목 : 천재의 행진>
천재성을 발휘하는 크리스토퍼 말로가 거침없이 나아가는 모습이었다.
귀에 들리는 음악은 꼭 그 장면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오정배 작곡가의 싸구려 행진곡과는 차원이 다른 퀄리티. 천재의 웅장한 서사시를 돋보이게 해주는 리듬이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엔 한 가지 확신이 들었다.
‘찾았다, 메인 테마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