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102화 (102/203)

102. investment - 투자 (4)

102.

***

런던에 위치한 5성급 호텔.

나와 장현웅은 약속 시각 10분 전에 도착했다.

“권서준 작가님이신가요?”

하이든 에이전시 유럽지부 관계자라고 밝힌 이들이 친근하게 인사를 하고는 말을 이어간다.

“스티브 대표님이 직접 오신다는 소식 듣고 놀랐는데, 권서준 작가님 작품을 보니 이해가 가더군요. 특히 대본은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베네딕트가 출연을 결심했는지도 알 수 있었고요.”

가벼운 인사로 시작한 내용은 점점 더 깊어진다.

“작가님의 대본은 제가 봤던 동양 작가들 대본 중에 가장 훌륭했습니다. 순간 영국인이 쓴 게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였거든요.”

“그러게 말입니다. 아시아의 문학도 하루빨리 세계적인 기준에서 어깨를 견주면 좋으련만 좋은 작품이 나오지 않아 참 아쉽더라고요.”

두 사람의 대화를 듣자 하니 나도 모르게 이맛살이 찌푸려진다.

겉으로는 나를 칭찬하는 듯 했지만 그 저변에 깔린 생각은 아시아 문학에 대한 은근한 무시였으니까.

“그래도 한국의 경우 급성장한 경제력만큼 최근 문학적인 부분에서도 좋은 성장을 보이고 있잖아요?”

“맞습니다. 언젠가 한국 작가들도 세계 문학상에 이름을 올릴 날도 오겠죠.”

한국 문학을 한 수 아래로 보는 대화들이 이어진다.

그런데 그때,

조금 떨어진 곳에서 우리를 지켜보는 시선이 있었다.

스티브 대표였다.

그는 도착했음에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우리 대화를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마 이 대화를 통해 나의 반응을 지켜보려는 생각인 듯싶었다.

‘재미있는 분이군.’

이쯤 되니 나 역시 가만히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미소를 지은 채 그들을 바라봤다.

“죄송하지만, 말씀하신 세계 문학상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그야, 부커상, 공쿠르상, 노벨상 등이 대표적이겠죠?”

“그럼 혹시 부커상 선정 기준이 어떻게 되는지 아시나요?”

내 질문에 한 실무자가 마치 선심을 쓰듯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연다.

“그해 영어로 출간된 작품 중에 최고의 작품을 고르죠.”

“그럼 공쿠르상은 기준이 어떻게 되나요?”

“부커상과 비슷하게 그해 불어로 된 작품 중에 선정합니다.”

“아, 그렇군요. 제가 듣기론 노벨문학상도 심사 위원들을 위해 스웨덴어로 번역해야 한다고 하던데, 사실인가요?”

이제야 이상한 기색을 느낀 걸까.

대답하던 실무진들이 슬쩍 시선을 주고받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맞습니다.”

“그렇다면 세계 문학상이라는 건 결국 전 세계에 있는 수많은 언어 중 고작 영어, 프랑스어, 스웨덴어, 이렇게 단 세 개 언어로 판단된다는 뜻이군요?”

내 말에 실무진들이 시선을 교환한다.

“뭐, 그런 셈이죠.”

원하던 대답이 나왔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몰아쳤다.

“근데, 그렇게 편협한 기준을 가진 문학상이 어떻게 세계 3대 문학상이 될 수 있을까요? 3대 유럽 문학상이면 몰라도요.”

“...”

여태 대답을 잘하던 실무진들의 눈빛이 흔들린다. 그리고는 어색한 헛기침과 함께 넌지시 시선을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그들의 눈을 똑바로 보며 시선을 붙잡았다.

“말씀하신 상들은 결코 세계적인 상이 아닙니다. 그건 매우 유럽적인 축제일뿐이죠. 톨스토이, 체호프, 마크 트웨인 같은 거장들이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했다고 해서 후대의 평가가 낮은 건 아니니까요.”

쿵.

들리지 않는 파문이 인다.

일순간 실무진들의 입이 조용해진다.

“흠, 흠.”

불편한 듯 내뱉는 헛기침만 나직이 울려 퍼질 뿐이었다.

“하하하, 아주 시원한 답변이네요.”

그런데 그때,

한 사람의 웃음소리가 침묵을 깬다.

한참 전부터 이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스티브 대표였다.

“대, 대표님...”

뒤늦게 스티브 대표를 알아본 실무진들이 놀라서 인사를 한다.

물론 이미 알고 있던 나는 가볍게 묵례로 인사를 대신했다.

스티브 대표 역시 미소를 지은 채 인사를 건넨다.

“자, 그럼 이제 세계 문학상 말고, 작가님의 작품에 대해 얘기 해볼까요?”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미팅의 시작이었다.

***

호텔에 마련된 회의실.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스티브 대표는 가만히 권서준 작가를 바라봤다.

개인적으로 한국 문학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스티브 대표였다.

‘한글은 오묘해. 그래서 그 표현을 다 담기가 어렵지.’

특히나 관용적인 표현은 외국인 입장에서 낯설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권서준 작가의 작품은 의미가 깊었다. 한국인의 정서를 정확히 외국인의 틀 속에 담아내고 있었으니까.

‘내가 이곳에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고.’

다시금 권서준을 눈에 담는다.

큰 키에 뚜렷한 이목구비.

그러나 가장 눈길을 끄는 건 눈빛이었다.

‘마치 모든 걸 달관한 느낌이야.’

결코 저 나이대에서 볼 수 없는 위압감이 있었다. 게다가 좀 전에 실무진들과 나눈 대화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줬고.

갈수록 권서준 작가에 대한 기대감이 상승하고 있었다.

잠시 뒤,

실무진에 의해 자연스럽게 미팅이 시작되었다.

“만나 뵙기가 참 쉽지 않네요.”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분명 가시가 느껴지는 말이었다. 그러나 권서준 작가의 얼굴엔 그 어떤 표정 변화도 일지 않았다.

“일정이 있어서 본의 아니게 늦어지게 되었네요. 죄송합니다.”

말의 내용은 사과였지만 표정과 눈빛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쉬운 건 너희 쪽이라는 뉘앙스를 강하게 풍기고 있었다.

‘역시 보통이 아니야.’

스티브 대표는 모처럼 호흡을 골랐다. 언제나 그렇듯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이니까.

“피차 일정이 있었으니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제 와서 저희에게 연락을 주신 이유는 뭔지 궁금하군요.”

“한 가지 제안을 하려고 합니다.”

“제가 알기로는 연극 판권뿐만 아니라 차기작에 대한 계약까지 완료하신 거로 알고 있는데, 아닌 가요?”

“맞습니다. 정확히 알고 계시네요.”

정곡을 찔렸을 텐데도 권서준 작가의 얼굴은 태연하기만 했다.

이쯤 되자 또다시 호기심이 인다.

대체 무슨 제안이 남아 있는 걸까?

그 순간,

권서준의 시선이 스티브 대표를 향한다.

“과거 스티브 대표님께선 작품 IP를 활용한 투자 사업에도 관심이 있으셨던 거로 알고 있습니다.”

뜻밖의 화두에 스티브 대표의 눈썹이 올라간다.

“물론입니다. 하이든 에이전시의 시작도 에이전시와 투자를 겸한 사업 모델이었으니까요. 다만 지금은 에이전시에 집중하고 있는 상태고요.”

“하나같이 작품성이 뛰어난 공연이더군요. 결과는 아쉬웠지만.”

“...”

뜬금없는 이야기.

스티브 대표 입장에선 숨기고 싶은 흑역사나 다름없는 실패 사례였다.

“갑자기 그 말씀을 하시는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네, 전 대표님께 투자 유치 제안을 할 생각입니다.”

“투자 유치 제안이요?”

전혀 의외에 제안이었다.

스티브 대표도 조금 당황한 기색으로 비서를 쳐다본다.

실무진 역시 당황하기는 마찬가지.

“작품은 뭐죠?”

“「거장의 숨결」 뮤지컬입니다.”

갑자기 뮤지컬이라니, 스티브 대표의 궁금증은 커져만 갔다.

그런데 그때,

권서준은 대답과 함께 대본을 내민다.

“...”

순간,

기대로 가득 찼던 스티브 대표의 눈빛이 빠르게 식는다. 작가라면 작품으로 승부를 보는 게 맞았지만 이런 식의 미팅은 그로서는 아쉬웠다.

‘내 기대치가 너무 높았던 걸까...’

권서준에게 기대감이 컸던 만큼 실망감으로 몇 배의 크기도 돌아왔다.

“읽어보시고 투자 의사가 있으시면 연락 주시죠.”

더없이 당당한 말투였다.

그러나 스티브 대표는 한껏 식은 얼굴로 고개를 젓는다.

“죄송하지만 저희에겐 이 대본을 다 읽을 시간이 없어서요. 하루에도 수십 개씩 쏟아지는 게 바로 이런 대본이거든요.”

차갑고, 다소 도발적인 대답이었다.

일부러 상대를 긁는 말이기도 했고.

그러나 권서준의 얼굴에선 전혀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모든 걸 알았다는 듯 대화를 이어간다.

“그럼 5분 정도 영상을 볼 시간은 되시겠죠?”

“영상이요?”

“네.”

단답형으로 떨어지는 대답과 함께 내미는 USB. 그 말투에 담긴 건 숨길 수 없는 자신감이었다.

***

잠시 뒤,

객실로 돌아온 스티브 대표.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생각에 잠긴다.

“하, 투자 유치라...”

스티브 대표는 제대로 한 방을 맞은 기분이었다.

‘전혀 생각도 못 했어.’

권서준 작가에 대해서 많은 조사를 했지만 그쪽에서도 자신들을 조사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것도 가장 아픈 곳을 찌르다니...’

사업가인 스티브 대표로선 거듭된 투자 실패 사례는 약점이나 다름이 없었다.

어떻게든 지워내고 싶은, 아니 세상에 존재하지 않길 바랄 정도로 잊고 싶은 기억.

그런데 권서준은 정확히 그 지점을 노렸다.

‘역시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

자연스럽게 감탄이 흘러나온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지켜보던 실무진이 입을 연다.

“어떻게 할까요?”

“자네 생각은 어떤가?”

“흠.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저희가 투자 전문 회사는 아니니까요.”

실무진의 대답은 틀렸다.

한때는 투자 전문회사가 맞았으니까.

‘브로드웨이의 유명 작품에 투자하기도 했었지.’

그러나 그로 인해 떠안은 투자 손실은 무려 수백억에 달할 정도였다.

그 이후로 투자 쪽에서는 손을 뗀 게 사실이었고.

“답은 여기 있겠지.”

스티브 대표는 권서준 작가가 건네준 USB를 집어 들었다.

잠시 뒤,

커다란 화면 위로 공연 영상 하나가 떠오른다.

캄캄한 무대.

뮤지컬 시연회 영상이었다.

이내 먼 곳에서 지켜보는 시점으로 잔잔한 음악과 함께 노랫말이 흘러나온다.

“죽음으로 내 입을 다물게 할 생각이더냐? 오너라, 나는 굴하지 않는다. 비록 한낱 고깃덩어리가 될지라도 나는 내 뜻대로 걸을 것이니.”

어둠 속에서 흘러나오는 노랫말은 분명 영어였다. 그 덕에 스티브 대표도, 실무진도 가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맹렬하게 쏟아지는 사나이의 포효.

그 속 담겨있는 울분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리고 잠시 뒤,

핀 조명과 함께 무대 위 배우의 모습이 드러난다.

‘이, 이 사람은...’

익숙한 얼굴에 스티브 대표의 눈이 커진다.

무대 위에서 혼신의 연기를 하는 건 바로 베네딕트. C였으니까.

“신이 있다면 세상을 멈춰주시오. 아직 시간이 부족하단 말이오. 조금만 더, 제발 조금만 더 내가 살 수 있게 시간을 멈춰 달란 말이오!”

삶에 대한 간절함이 웅장한 음악과 함께 점점 고조 된다. 그리고 이내 응축됐던 울분이 베네딕트의 노래와 함께 폭발한다.

“이 사악한 존재여! 그도 안 된다면 차라리 나를 먼지처럼 사라지게 해주시오. 바람에 날리는 한낱 가루가 되어 세상이 나의 죽음을 알지 못하게 해달란 말이오!”

어두운 무대 위에서 홀로 빛나는 배우의 연기는 스티브 대표를 또 다른 세상으로 강력하게 끌어당겼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영상이 끝난 뒤였다.

단 5분짜리 영상.

그러나 작품의 맛을 느끼기엔 충분했다.

베네딕트의 연기도 훌륭했지만, 그보다 대사와 극의 흐름, 전체적인 분위기가 매력적이었다.

‘단 5분이었어. 그런데 이렇게 시선을 잡을 수 있다니...’

업계 고인물인 자신과 실무진이 넋을 놓고 보게 된 뮤지컬 공연이었다.

자연스럽게 스티브 대표의 관심은 권서준 작가가 건넸던 대본으로 흐른다. 영상으로 분위기를 맛본 덕에 대본의 느낌이 훨씬 더 살아있었다.

‘하아,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대본을 읽고 있었다.

영상으로 시작해 자연스럽게 대본으로 관심을 유도한 방법. 이 모든 게 권서준 작가의 의도였다. 그러나 그것을 알아차렸음에도 대본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 시간 뒤.

스티브 대표는 작품을 다 읽고 나서야 대본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맞은편에서 읽고 있던 실무진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간의 침묵이 흐르고,

스티브 대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 작품, 한국에서 먼저 공개한다고 했었지?”

“아, 네. 그리고 그 후에 해외로 나갈 거라고 했습니다.”

“그럼 이번 투자를 통해서 우리가 저 판권을 사들일 수 있다는 거고?”

“분명 권 작가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

스티브 대표의 표정이 진지해진다.

“자네, 생각은 어때?”

여태 부정적이던 실무진의 표정도 영상을 본 뒤에 달라져 있었다.

“아마, 대표님 생각과 같지 않을까요?”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스티브 대표 역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음악이 잘 붙고, 캐스팅만 잘 된다면 이건 무조건 된다...’

물론 그 둘을 위해 필요한 게 바로 투자였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스티브 대표가 이내 창가에 선다. 그리고는 어둠이 내리깔린 런던의 경치를 바라본다.

몇 번의 숨을 고른 후,

결심한 스티브 대표가 입을 열었다.

“투자, 해보자고.”

투자.

그동안 금기어처럼 묻어뒀던 단어였다.

그러나 그 단어 때문에 스티브 대표의 가슴이 다시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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