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98화 (98/203)

98. birthplace - 출생지 (5)

98.

***

늦은 밤.

런던 피어슨 출판사 대표실.

존 대표와 해리는 며칠 전 일로 인해 다시금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갑자기 권서준 작가와의 미팅이라뇨? 이미 끝난 얘기 아닌가요?”

존 대표의 이야기를 들은 해리가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나 역시 끝난 줄 알았는데, 그 친구는 아니었나 봐.”

존 대표가 씁쓸한 얼굴로 한숨을 내쉰다.

해리의 미간도 덩달아 찌푸려진다.

“올리버 편집장은 대체 왜 동양인에게 꽂힌 걸까요?”

“그걸 난들 알겠나? 그 작가 작품에서 뭔가 본 거 같긴 한데, 아무리 그래도 초고도 안 나온 작품과 계약한다는 건 말도 안 되지.”

해리 역시 백번 동감하는 내용이었다.

안 그래도 예전 같지 않은 출판 시장에서 그런 모험을 할 이유는 없었다.

“원래 이런 친구가 아닌데, 이번엔 왜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지 모르겠군.”

존 대표가 한숨을 내쉬자 해리가 안타까운 듯 고개를 젓는다.

“하아, 올리버 편집장, 예전 같지 않은 거 같아요. 감도 많이 잃은 거 같고, 어이없는 모험 수를 두는 것도 그렇고...”

존 대표도 고개를 끄덕인다.

오랜 파트너이기에 함부로 말하기는 그렇지만 지금까지 보여준 올리버 편집장의 선택은 해리의 평가대로였다.

‘부인할 수 없지. 아무리 명망 있는 출판사라고 해도 이윤을 추구해야 하는 건 어쩔 수 없으니까.’

회사에 지대한 공로를 한 올리버 편집장이었지만 이런 식의 독단적인 행동은 적절한 제동이 필요했다.

“흠. 이번 일에 따라서 그의 거취를 정해야겠군.”

“어쩔 수 없죠. 회사에 피해를 줄 순 없으니까요.”

해리의 말에 존 대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늦은 밤.

밤의 깊이만큼 존 대표의 생각도 깊어지고 있었다.

***

다음 날 아침.

스트랫퍼드에서의 마지막 날이었다.

우리는 아침부터 일어나 미리 짐을 싸기 시작했다.

먼저 짐을 다 싼 장현웅이 창밖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내뱉는다.

“아, 여기도 오늘이 마지막이네.”

고작 일주일이었지만 어느새 스트랫퍼드에 정이 든 모양이었다.

“어제까진 김치찌개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던 사람 맞아?”

“그러게. 근데 막상 떠나려니까 아쉽네.”

장현웅은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

“뭔가 친근한 느낌이 드는 동네였거든. 자연을 보면 마음도 편안해지고, 콘티도 잘 나오고. 무엇보다 이곳에 있는 네 모습도 달라 보였고.”

“내가?”

“어, 마치 고향 집을 찾은 모습 같다랄까? 표정에도 생기가 돌고, 가끔씩 생각에 잠길 땐 오랜 추억을 되새기는 느낌이었거든. 어제 성당에서도 그랬잖아?”

문득 어제의 기억이 떠오른다.

가슴에 사무치는 아픔에 정신을 잃을 정도로 힘들었던 기억. 물론 그 아픔마저 차기작을 위한 영감으로 활용돼 원고 속에 고이 담긴 상태였다.

“나 역시 이곳이 친근해서 그랬나 봐.”

나는 에둘러 대답하고는 질문 하나를 던진다.

“참, 기차표는 예매했어?”

“응. 네 말대로 저녁 표로 구했어. 근데, 그때까지 뭐할 거야?”

“일단 선물 좀 사러 갈까?”

“선물? 아, 맞네. 선물을 잊고 있었네.”

장현웅이 손뼉을 치며 좋아한다.

우리는 짐을 잠시 프런트에 맡기고 시내로 향했다.

다 둘러보는 데 채 몇 시간이 걸리지 않는 작은 도시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번.

키 큰 나무들과 오래된 집들.

그리고 도시 외곽을 따라 고즈넉하게 흐르는 에이번강. 내가 살던 그 시절의 풍경과 많이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생각이 깊어지고, 그 시절의 추억들이 떠오른다.

번화가에 들어서자 아무 연관성 없는 상점들도 어떻게든 셰익스피어와 관련된 내용을 걸었다. 청소 업체 이름은 햄릿이고, 아이스크림 가게 이름은 안토니오고.

“역시 셰익스피어의 고향답네.”

간판을 바라보며 감탄하던 장현웅이 이내 다시 나를 바라본다.

“그러고 보니까 어제 말이야. 가이드가 셰익스피어의 잃어버린 시간에 대해 말했잖아. 셰익스피어는 대체 그 시간에 뭘 하고 있었던 걸까?”

“글쎄, 그러고 보면 셰익스피어는 유명한 거에 비해서 미스터리한 부분이 너무 많은 거 같긴 해.”

대충 둘러대는 내 말에 장현웅이 격하게 공감한다.

“그러니까 말이야. 어떤 사람은 그 시절 귀족의 농장에서 노예처럼 일했다는 사람도 있고, 다른 나라로 도망쳤다는 사람도 있으니까.”

“뭐 그건 대부분 셰익스피어가 죽고 난 후에 만들어진 이야기이긴 하지. 당대엔 그의 존재에 대해 의심하는 사료는 없었거든.”

장현웅이 고개를 끄덕인다.

“하긴, 안 그래도 자료가 없는 셰익스피어인데 그 기간에는 유독 자료가 없으니까. 셰익스피어 본인만 알 수 있는 질문이긴 하네.”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일화.

사실 내 얘긴데 내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나는 애써 그 부분을 설명하지 않았다.

‘지금 말해서는 안 되니까.’

그 시간, 그 비밀, 그 모든 건 먼 훗날 내 모든 목표를 이뤄냈을 때, 그때 하나의 작품으로 밝힐 생각이었다.

‘그것 또한 나의 역작이 될 터...’

세상이 모르는 셰익스피어의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이야기.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린다.

물론 지금은 차기작에 대한 마무리가 먼저였다.

시내 구경을 하던 우리는 그 중 「말괄량이 길들이기」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잡화 상점에 들어섰다. 이곳 역시 내 작품의 제목을 따온 상호였다.

안을 둘러보던 장현웅이 식기 세트를 보고 눈을 크게 뜬다.

“우와, 대박. 우리 엄마가 컵 모으는 취미가 있으시거든. 아마 여기 오셨으면 기절하셨을 듯.”

장현웅은 신이 난 듯 가게 안을 둘러보며 선물을 고른다. 벌써부터 기뻐할 엄마를 떠올리며 신이 난 모양이었다.

나 역시 천천히 가게 안을 둘러보며 선물을 골랐다.

그릇을 좋아하는 엄마를 위해 식기 홈 세트를 골랐고, 누나를 위해선 고가의 바디제품과 향수를 골랐다.

그리고 나서 천천히 선물을 줄 사람 명단을 떠올렸다.

송영도 교수, 정영만 회장, 그리고 서미연 감독과 정은미 피디... 다른 사람들은 차 세트로 통일을 했다.

그리고,

마지막 한 명이 남았다.

바로 신하율.

‘하율이한테는 어떤 선물이 어울릴까?’

천천히 상점 안을 둘러보는데 작은 인형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영국 왕실 근위병 옷을 입은 귀여운 곰돌이 인형.

신하율에게 딱 어울리는 선물이었다.

***

선물을 사고, 가볍게 점심을 먹은 뒤 우리는 마지막 방문지로 향했다.

바로 셰익스피어의 생가.

행선지를 들은 장현웅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러고 보니 우린 왜 여기를 가장 마지막에 온 걸까? 셰익스피어의 고향까지 와놓고.”

물론 모든 일정은 철저히 내 계획 아래에 따라 진행됐다. 스트랫퍼드를 떠나는 마지막 날 이곳을 찾은 이유도 있었고.

잠시 뒤,

내 눈앞에 2층짜리 오래된 건물이 보인다.

비대칭의 박공이 눈에 띄는 건물.

아쉽게도 그때의 건물이 아닌 재건된 생가였다. 그러나 그조차도 내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우리는 관광객들을 따라 셰익스피어 생가 뒤뜰로 향했다.

커다란 나무로 둘러싸인 작은 무대 위에서 배우 두 명이 연기를 하고 있었다.

“오 하느님! 내 아이, 내 아서, 어여쁜 내 아들! 나의 생명, 나의 기쁨, 나의 양식, 나의 온 세상! 이 과부의 위로, 내 슬픔의 치료 약!”

작품 「존 왕」에 나오는 대사였다.

아들 햄넷을 잃었을 때, 그때의 아픔을 고스란히 담은 대사이기도 했고.

순간 가슴이 찌릿해진다.

배우들 너머로 보이는 낡은 집.

나는 이곳에서 아들을 잃었으니까.

또다시 밀려오는 고통.

자연스럽게 옛 상처가 떠오른다.

“너, 괜찮아? 얼굴이 창백한데?”

그때, 내 안색을 살핀 장현웅이 걱정스럽게 묻는다. 그러나 나는 애써 고개를 젓는다.

“어, 괜찮아. 어서 가자.”

나는 숨을 고르며 천천히 안으로 향했다.

생가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반기는 건 The Parlour였다. 우리나라로 치면 사랑방 정도 될까.

낡은 원목 테이블 위에 아버지가 만든 장갑과 책, 그리고 세월의 때가 묻은 그릇들이 놓여 있었다. 맞은편엔 아직도 그을음이 선명한 벽난로가 보이고.

“자, 이곳에서 셰익스피어 가족들은 하루에 두 번 식사했습니다. 튜더 왕조 시기엔 사치금지령(The Sumptuary Law)에 의해 중산층은 하루에 두 번 식사하는 법이 존재했거든요. 이때, 주로 파이, 죽, 생선, 고기를 먹곤 했습니다.”

당시 복장을 한 직원이 질문에 친절하게 설명을 해준다.

분명 그 시절과 많은 것들이 달라진 복원 형태의 건물.

그러나 인간의 상상력은 언제나 그렇듯 실제보다 훨씬 뛰어난 법이었다. 나는 이미 그 시절의 시선으로 집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2층으로 올라가자 오랜 세월을 견뎌낸 마룻바닥이 작은 울음을 토해낸다. 군데군데 볼록한 옹이가 자연 친화적인 느낌을 자아내며 그 시절의 기억을 떠오르게 만든다.

나무 들보 아래 보이는 창문을 통해 햇볕이 따스하게 실내를 밝힌다.

그리고 그 빛은 침실 유리창으로 스며들어 작은 침대를 비추고 있었다.

그래,

나는 이 햇살 속에서 아들을 처음 만났다.

처음 아들을 두 손으로 받았을 때의 감격이 떠오른다. 부서질까 봐 두려워 안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던 손길. 그렇게 작은 생명이 내 품에 안겨 새근새근 숨을 쉬었다.

그렇게 햄넷은 내 아들이 되었다.

그날의 감동은 여전히 생생하기만 했다.

부드러운 기운을 풍기는 침대는 마치 아직도 아기 냄새를 풍기는 것만 같았다.

그 순간,

아련한 슬픔을 밀어내고,

그 순간의 기쁨에 온몸이 충만해진다.

‘그래, 네게 주어진 가장 값진 무게이자 생명이었지...’

신이 선사한 가장 큰 기쁨.

그 벅찬 감격에 눈물이 앞을 가린다.

“나, 잠시만...”

나는 서둘러 생가를 나와 뒤뜰로 내달린다. 그리고는 무릎을 꿇은 채 그때의 감격을 안으로 삼킨다.

아이를 처음 두 손에 든 순간부터, 옹알이를 하고, 걸음을 떼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행복한 순간.

세상의 모든 걸 다 가진 듯 기뻤던 시간.

나는 서둘러 펜을 꺼내 든다.

단 하나의 추억도, 감정도 놓칠 수 없었다.

사각사각사각.

격한 감동 속에서 만년필이 쉼 없이 움직인다.

성당에서 비극을 담았다면,

이곳에선 희극을 담아낸다.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큰 슬픔과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큰 기쁨이 한데 어우러져 감당 못 할 벅찬 감동을 일으킨다.

그리고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소용돌이에 빠진 것처럼 여러 감정이 뒤섞이며 이내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한다.

‘다 됐다...’

나는 마지막으로 굵은 마침표를 찍었다.

드디어 초고가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

늦은 밤.

피어슨 출판사 편집실.

퇴근 시간이 한참이나 지났지만 올리버 편집장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한없이 초조한 얼굴, 그는 계속해서 휴대폰만 바라볼 뿐이었다.

‘왜 연락이 없는 거지?’

내일이 권서준 작가와 약속한 날이었다.

그런데 아직도 권서준에게선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밤이 되도록 소식이 없자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역시 일주일 안에 초고가 나오는 건 무리였나?’

올리버 편집장은 턱이 아플 정도로 어금니를 문다.

최근 회사 내의 분위기를 올리버 편집장이 모를 리 없었다. 특히 존 대표와 해리의 생각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내 능력을 의심하고 있지...’

철저한 실력으로 인정받아야 하는 파트너 위치. 고집스럽게 미팅을 주선한 만큼 결과를 내지 못하면 그 후폭풍은 고스란히 자신의 몫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최악의 결과가 나올 수도 있고...’

편집장의 자리를 잃을 수도 있었다.

움켜쥔 손에선 어느새 땀이 차오른다.

지이잉.

그런데 그때,

휴대폰이 울린다.

발신자를 본 올리버 편집장의 눈이 커진다.

권서준이었다.

[약속 지켰습니다.]

지극히 짧은 내용.

그리고 첨부된 원고 파일 하나.

그걸로 충분했다.

올리버 편집장은 서둘러 원고를 출력한다.

지이잉, 지이잉.

프린터가 빠르게 원고를 토해낸다.

빨리, 더 빨리...

그러나 그 시간조차 초조하기만 했다.

이윽고 출력이 마무리되자 재빨리 두 손으로 원고를 집어 든다.

따끈한 종이의 온도.

그 온기를 느끼며 원고를 넘긴다.

“이, 이건...”

처음엔 놀란 표정이었다.

그러나 원고를 읽어 내려갈수록 올리버 편집장의 표정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어느새 그의 얼굴에 자리 잡은 표정.

더없이 평온하고,

더없이 자신감에 넘치는 미소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