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97화 (97/203)

97. birthplace - 출생지 (4)

97.

***

다음 날.

나는 푹신한 이불 속에서 눈을 떴다.

마치 구름에 뜬 것처럼 포근한 느낌을 만끽하며 한참을 뒤척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 배고프다.”

일어나자마자 밥을 찾는 장현웅과 함께 1층으로 향했다.

짠맛이 도는 소시지와 향긋한 빵.

뜨끈한 수프와 상큼한 오렌지 주스를 곁들인 간단한 조식.

식사를 마친 우리는 자연스럽게 호텔 근처를 산책했다.

“현웅아, 숙소 잘 잡았다. 조식도 맛있고, 잠자리도 편하네.”

“그럼 내가 여기 찾으려고 몇 번이나 서칭했는데. 별점도 높고, 후기가 가장 좋은 곳으로 골랐지.”

칭찬에 기분 좋아진 장현웅의 발걸음이 경쾌하다.

강변을 따라 걷다 보니 넓은 공원과 선착장이 나왔다. 모처럼 에이번강을 제대로 보고 싶은 마음에 유람선에 올라타 강물을 따라 올라가 본다.

고요하게 흐르는 강물.

좌우로 길게 늘어선 나무와 숲.

한없이 평온한 분위기에 나른해지는 아침.

우리는 난간에 기댄 채 주변 경치를 감상한다.

나는 눈으로, 귀로, 그리고 마음으로 자연의 기운을 내 안에 담았다.

한없이 부드러운 햇살.

물새들이 강물에 뛰어드는 소리.

저 멀리 모래톱에서 어린 주인과 함께 뛰어노는 강아지의 신난 울음소리까지.

마치 잘 구워진 빵에 버터를 바르듯 내 상상력에 감칠맛을 더해간다.

그래,

언제나 그렇듯 자연만큼 예술가들을 자극하는 요소도 없으니까.

내 온몸을 둘러싼 날 것의 심상이 그렇게 내 차기작을 위한 재료로 하나둘씩 쌓여가고 있었다.

***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우리는 스트랫퍼드 시내에 머물며 집필을 이어갔다. 틈틈이 유명 관광지와 시내를 둘러보며 차곡차곡 영감을 쌓아갔다.

‘흐름이 아주 좋아.’

내가 태어난 곳이라 그런지 영감이 마구 솟구친다. 나는 아버지를 떠올리며 아들의 관점에서 글을 썼고, 아들을 떠올리며 아버지의 입장에서 글을 썼다.

낮엔 틈틈이 집필하고,

밤엔 술과 함께 이국적인 이곳의 분위기를 만끽했다.

술과 노래.

그리고 음악이 한데 어우러져 밤이 깊어 가는지도 모른 채 즐기던 시간.

물론 작품 집필에 있어서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미 원고는 꽤 많이 쌓인 상태였다.

그리고 그건 장현웅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느덧 녀석의 웹툰 원고도 1화가 거의 마무리 되어가고 있었다.

‘내용이 아주 잘 빠졌어.’

완성도 높은 장현웅의 웹툰.

어떤 반응이 올지 벌써부터 기대가 됐다.

우리는 맛있는 저녁을 먹은 뒤 숙소로 걸음을 옮겼다.

어둠이 내려앉은 도시의 풍경.

간간히 불이 들어온 가로등이 아름답게 거리를 비추고 있었다.

“너무 좋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어.”

장현웅은 모처럼 만끽하는 자유와 평온함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러다가 나를 보며 묻는다.

“참, 내일은 뭐 할 거야?”

스트랫퍼드는 그리 큰 규모의 동네가 아니라 이미 대부분의 관광지를 둘러본 상태였다.

그런데도 난 두 군데를 의도적으로 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중 한 곳을 내일 갈 생각이었다.

“꼭 들러야 할 곳이 아직 남아 있어.”

나 역시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그곳.

드디어 내일이었다.

***

늦은 저녁.

야근을 마치고 퇴근한 권지연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다.

“다녀왔습니다.”

큰소리로 인사를 했지만 거실에 앉아있는 엄마는 듣지 못한 듯 휴대폰을 볼뿐이었다.

“엄마, 나 왔다고.”

“어? 왔어?”

두 번 부르고 나서야 엄마가 고개를 돌린다.

굳이 묻지 않아도 권지연은 엄마가 어디에 정신이 팔려있는지 알고 있었다. 벌써 며칠째 같은 행동을 보이고 있었으니까.

“또 서준이 기사 읽고 있었어?”

권지연의 말에 엄마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다.

“응. 아무리 봐도 질리지가 않네.”

“아주 닳겠다, 닳겠어.”

엄마는 요즘 아들 기사 보는 재미에 푹 빠져있었다. 웹드라마 성공 이후에 드라마 「이옥」으로 이어진 흥행 가도.

게다가 출판계와 연극계에서까지 연이어 좋은 성적을 거두자 작가 권서준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아진 탓이었다.

“오늘 올라온 기사 보니까 대부분 작품성이 좋으면 흥행에 실패한다고 하던데, 우리 서준이는 흥행도 잘됐다네?”

엄마의 목소리엔 벌써부터 흥이 담겨 있었다. 피식 웃던 권지연이 맞은편에 앉으며 입을 연다.

“그래, 그래서 내가 대단한 거라고 했잖아. 원래 평론가들이 높은 점수를 주면 대중들이 낮은 점수를 주고, 대중들이 높은 점수를 주면 평론가들이 낮은 점수를 주는데, 서준이 작품은 두 쪽 모두 높은 점수를 받고 있거든.”

“그렇구나...”

엄마는 감동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잠시 뒤, 엄마의 눈이 다시 향한 곳은 인터뷰를 위해 찍은 아들 사진이었다.

“우리 아들, 언제 이렇게 컸을까...”

사진을 보던 엄마의 눈빛이 애틋해진다. 그걸 알아차린 권지연이 재빨리 끼어든다.

“뭐야? 좋은 기사 보고 갑자기 왜 그래?”

엄마는 크게 한숨을 한번 내뱉으며 입을 연다.

“엄마는 너랑 서준이가 너무 일찍 철든 게 늘 가슴 아팠거든... 애들이 애들다워야 하는데, 너희 둘은 너무 일찍 커버려서 그게 늘 마음에 걸려...”

“그게 왜 엄마 잘못이야? 살다 보니 어쩔 수 없었던 거지.”

“그래도 부모 마음은 어쩔 수 없는 거니까...”

어느새 엄마의 눈빛이 촉촉해진다.

그러자 권지연은 엄마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싼다.

“이제 그런 생각하지 말고 행복하기만 하자고. 나도, 서준이도 이제 자리 잘 잡아가고 있잖아. 안 그래?”

“그래, 그래...”

어느새 다 커버린 자식들이었다.

이젠 오히려 엄마를 걱정하며 효도하는 아들딸이었다.

엄마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아들의 이름을 검색한다.

그사이 또 올라온 기사.

엄마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다시 아들의 기사를 읽는다.

대견하고, 훌륭한 아들의 성취.

그 어떤 주말 드라마보다 훨씬 더 재미있고, 감동적인 소식이었다.

***

다음 날.

나는 여러 곳을 관광하면서도 미뤄뒀던 한 곳을 찾았다.

바로 홀리 트리니티 성당.

내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하나였다.

‘이곳에 나와 내 가족이 있으니까...’

1564년 4월 26일.

나는 이곳에서 태어났다.

이름 윌리엄 셰익스피어.

문학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모를 수 없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극작가.

성경 외에 가장 많이 팔린 책의 저자.

4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천재 작가로 칭송받는 대문호.

수많은 사람에게 작가라는 꿈을 심어준 예술가.

그런 내가 태어난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게다가 세례를 받고, 결혼식을 올린 곳이 바로 이곳 홀리 트리니티 성당이었다.

그리고 1616년 4월 23일.

나는 이곳에서 눈을 감았다.

‘결국 이곳이 나의 시작과 끝인 셈이지.’

내 육신이 묻힌 곳이자 묘비가 세워진 곳.

내가 이곳을 찾은 이유도 그 때문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뜻깊은 날이었다.

내 죽음과 함께 사랑하는 가족의 마지막을 직접 바라봐야 하는 날이니까.

늦은 오후.

나와 장현웅은 관객을 따라 성당으로 향했다.

가을이 내려앉은 성당 안뜰을 지나쳐 걷는다. 검은 돌길 좌우로 군데군데 마치 망령처럼 서 있는 묘비가 보인다.

색 바랜 묘비는 이끼와 뒤섞여 시대를 알 수 없는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나는 평소와 달리 조금 무거운 마음으로 성당 안으로 향했다.

작은 성당 안엔 어느새 관광객이 붐볐다.

우리는 몇몇 한국인 관광객과 함께 현지 가이드를 따라 성당 안으로 이동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시작은 놀랍게도 배우였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극작가로 변신을 꾀했고, 결국 그 선택은 신의 한 수가 되었죠.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가 되었으니까요.”

능숙하게 한국어를 쓰는 가이드의 얼굴에선 자국 출신의 위대한 작가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우리는 조금 더 안쪽으로 이동했다.

정확히는 대리석이 깔린 커다란 공동이었다.

“다들 아시겠지만 셰익스피어가 활동한 시기는 대략 24년 정도입니다. 그 안에 인류 문학을 뒤흔드는 수많은 작품을 만들어냈다는 게 신기하죠? 그런데 더 신비로운 건, 그가 극작가로 활동하기 전 무려 7년 정도 전혀 기록이 없다는 점이에요. 그래서 학계에선 이 시간을 두고 ‘잃어버린 시간’이라고 부른답니다.”

나는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면서 잠잠히 성당을 둘러봤다. 우리는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간다.

“자, 이곳이 1616년 4월 23일 세상을 떠난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묻힌 곳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가이드가 가리키는 곳으로 향한다.

성당 안에, 그것도 대리석 바닥 아래에 놓인 특이한 형태의 무덤.

나 역시 처음 보는 내 무덤의 모습이었다.

위대한 문호 셰익스피어의 무덤.

바닥에 놓인 묘비엔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적혀져 있다.

“Good friend for jesus sake forbeare to digg the dust encloased heare. Bleste be the man that spares thies stones, and curst be he that moves my bones.”

가이드가 굵직한 목소리로 읽자 장현웅이 넌지시 묻는다.

“무슨 뜻인가요?”

잠시 문구를 바라보던 가이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벗들이여. 제발 부탁건대, 여기 묻혀 있는 유해를 파헤치지 마시오. 이것을 그대로 두는 자는 축복받고, 내 유골을 옮기는 자는 저주받을진저.”

마치 대사를 내뱉듯 웅장한 톤.

내겐 익숙한 내용이었다.

내가 죽기 전 유언장을 받아 적던 왓슨에게 직접 부탁한 내용이었으니까.

가이드의 설명을 듣던 장현웅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근데 거장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문구치고는 지나치게 평범하네요? 왜 이런 멋없는 문구를 묘비명으로 했을까요?”

장현웅의 질문에 현지 가이드는 친절하게 설명을 더 한다.

“옛날엔 무덤 지기가 새로운 시신을 매장할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이전에 묻혀있던 시신을 파내서 화장하는 일이 흔했습니다. 아마도 윌리엄은 그게 무척이나 신경 쓰였던 모양입니다. 뭐 당시 도굴도 횡횡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그걸 막기 위해서라는 말도 있고요.”

묘비명에 대한 가이드의 설명.

그럴싸했지만 정확한 이유는 아니었다.

‘고작 그런 이유로 이런 무미건조한 내용을 묘비명으로 한 건 아니니까.’

장현웅과 관광객들이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바깥쪽으로 이동한다.

나는 그사이 자연스럽게 무리에서 벗어났다.

고요하게 가라앉는 공기.

홀로 남은 나는 잠잠히 성당 안을 둘러본다.

크고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비집고 햇볕이 들어온다.

그리고 그 빛은 정확히 나와 우리 가족의 무덤을 비추고 있었다.

예배를 드리는 주제단 바로 앞에 있는 나의 무덤. 그리고 그 옆으로 아내 앤의 무덤과 아이들의 무덤이 이어진다.

묘비에 새겨진 아이들의 이름을 바라본다.

딸 수잔과 주디스, 그리고 아들 햄넷.

나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가만히 대리석을 쓰다듬는다.

차가운 묘비가 손바닥에 와 닿는다.

손에 닿은 냉기만큼이나 가슴이 아파온다.

특히 생전에 아들을 잃은 슬픔은 여전히 내 가슴을 파고드는 기분이었다.

‘내 심장 살 1파운드를 내어주고도 살릴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을 정도였지...’

악마가 있다면 영혼조차 팔아버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리고 그 아픔은 내가 죽는 그 순간까지 결코 잊히지 않았다.

그래서 묘비명을 그렇게 지을 수밖에 없었다.

‘살아생전에 돌보지 못한 내 아들, 죽어서라도 그 곁을 영원히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었으니까...’

허망하게 잃어버린 아들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은 못난 아비의 마음이었다.

4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기만 한 고통. 자식을 잃은 고통은 무엇으로도 희석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 고통을 토해내지 않고 끝까지 내 안으로 갈무리했다.

그래, 고작 이 비통한 심정을 토해내기 위해 찾은 발걸음이 아니었으니까...

어금니를 악다문 채 그 슬픔과 고통마저 억지로 삼켜낸다.

어깨가 들썩거리며 호흡이 거칠어진다.

격하게 치솟는 감정에 가슴이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한다.

숨이 막힐 정도로 덜컥거리는 응어리.

그러나 끝끝내 나는 그 응어리조차 다시 끌어안는다.

그렇게... 고통, 슬픔, 절망이라는 감정이 나라는 그릇 안에서 뒤섞여 또 다른 무언가를 만들어낸다.

‘그래, 이거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픔.

그 인고(忍苦)의 시간을 통해 만들어진 건 진주같이 빛나는 사랑이었다.

나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그 감각을 내 마음 판에 고이 새긴다.

그렇게 경험해보지 않은 자는 결코 담아낼 수 없는 비애가 내 안에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한다.

“하아...”

참았던 숨이 입술을 비집고 터져 나온다.

모든 것이 완벽해지기 바로 직전의 순간이었다.

이제 내가 찾을 곳은 단 한 곳뿐.

‘그곳에서 이번 작품의 마지막 퍼즐이 맞춰지리라...’

나는 거친 숨을 고르며 그곳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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