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91화 (91/203)

91. majestic - 위엄있는 (2)

91.

***

“후.”

베네딕트는 한숨과 함께 다소 긴장한 표정으로 외투를 걸쳐 입는다.

“벤, 꼭 가야겠어? 아니, 이 작품을 출연하는 게 정말 맞는 거야?”

아직도 에이전트 입장에서는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 출연은 만나서 정할 거니까.”

“그럼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해가면서 작가를 만나려고 하는 건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거든.”

대본을 처음 보자마자 든 궁금증이었다.

‘왜, 그 작가의 대본 속에서 셰익스피어의 위상이 느껴지는 걸까...’

솔직히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유명하지만 영어권이 아닌 나라에서 그의 작품이 대단하다고 느끼기는 어려웠다.

‘같은 언어, 같은 문화권에서만 느낄 수 있는 문학적 위대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야.’

예를 들어 셰익스피어가 남긴 소네트는 각운과 흐름을 중요시하는 시적 기교가 많이 들어간 작품이었다. 당연하게도 이걸 다른 언어로 번역하면 그 놀라운 재치와 기교는 사라지게 된다.

마찬가지로 셰익스피어의 유머와 시적 표현이 담긴 수많은 문구 역시 원문이 아니라면 그 가치가 희석되고 만다.

‘당대 시대를 엿볼 수 있는 성적인 유머, 정치와 경제, 사회를 아우르는 블랙 코미디, 그 유명한 명대사도 결국 원문을 알아야 느낄 수 있는 거니까.’

그런데 어떻게 동양인이, 그것도 나이 어린 작가가 이렇게 깊이 있는 영문학 작품을 쓸 수 있었는지 호기심이 들었다.

‘정확히는 호기심 반, 의심 반이지만.’

작가의 역량인지, 누구의 도움인지, 아니면 단순히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단순히 흉내 낸 건지, 직접 만나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야만 출연에 대한 결정도 내릴 수 있고.’

어쩌면 그 과정에서 자신이 고민하고 있는 연기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도 있었다.

째깍째깍.

시간은 계속 흐르고, 약속 시각을 기다리는 베네딕트의 표정엔 기대와 우려가 혼재되어 있었다.

***

호텔 객실.

베네딕트와 권서준 작가의 저녁 소식을 들은 오수정 대리는 고개를 저었다.

“베네딕트가 직접 초대하다니...”

처음 공항에서부터 오늘 계약에 이르기까지, 모든 상황이 믿기 힘들었지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왜냐고?

그 모든 순간을 자신이 직접 지켜봤으니까.

오 대리는 잠시 의자에 앉은 채 생각에 잠긴다.

정확히는 오늘 계약 미팅 중에 갑작스럽게 요청한 권서준 작가의 제안 때문이었다.

‘미팅 말미에 잠시만 시간을 주실 수 있을까요?’

그땐 무슨 일인가 했는데 알고 보니 하이든 에이전시와의 미팅 전화였다. 사실 오 대리도 몰랐던 일.

‘하지만 그 전화 한 통에 많은 것들이 달라졌지.’

아서 총괄 디렉터의 표정이 바뀐 것도 그 순간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놀라웠다.

마치 잘 짜인 각본처럼 진행된 미팅의 분위기.

그리고 그 모든 걸 주도한 건 포스 극단도, 타이거 스튜디오의 실무자도 아닌 바로 권서준 작가였다.

‘알수록 놀라운 사람이야...’

작가라고 하기엔 사업가의 재능이 뛰어났고, 사업가라고 하기엔 작가적 재능이 뛰어났다.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아, 내 정신 좀 봐.”

오 대리는 서둘러 휴대폰을 꺼냈다.

직장인의 제1덕목인 보고를 하기 위함이었다.

전화가 채 두 번 울리기도 전에 차동혁 팀장이 전화를 받는다.

“네, 차 팀장님 오 대리입니다. 계약은 잘 끝냈습니다.”

-그래, 안 그래도 보내준 계약서 사본 봤어. 근데, 이 조건을 포스 극단이 받아들였다는 게 사실이야?

차 팀장은 믿기지 않는 듯 되물었다.

“네, 특히 로열티 부분은 그쪽에서 먼저 제안한 거예요.”

-뭐? 그게 말이 돼? 이 조건이면 업계 최고 대우 아니, 그 이상이라고.

그래, 말이 안 되지.

어쩌면 차 팀장의 반응은 당연했다.

그런데 그 모든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직접 본 오 대리로서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에요. 오늘 권 작가님이 누굴 만나러 갔는지 아세요?”

-누군데?

“놀라지 말고 잘 들으세요.”

오 대리가 차분히 이름을 내뱉었다.

“베네딕트. C요. 아마 이번 연극의 주연을 맡을지도 모른다고 하더라고요.”

-뭐, 뭐? 베네딕트?

오 대리의 말과 동시에 놀란 차 팀장의 비명 같은 소리가 전화기를 뚫고 들린다.

당부의 말이 의미 없어지는 순간이었다.

***

우리는 베네딕트가 보낸 차량을 통해 이동했다.

잠시 뒤, 우리는 런던 시내에 위치한 근사한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우와, 여기야?”

장현웅은 눈을 크게 뜬 채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고딕한 느낌의 건물 외형, 근사한 조명은 입구부터 화려함을 뽐내고 있었다.

“이쪽으로 오시겠습니까?”

우리는 웨이터의 안내를 받고 안쪽으로 향했다. 은은한 클래식 음악과 함께 오픈된 공간의 분위기. 덕분에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의 느낌을 물씬 느낄 수 있었다.

“여깁니다.”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베네딕트가 미소로 우리를 맞이한다.

“어제는 갑작스럽게 찾아뵀습니다. 무례했다면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베네딕트 씨의 환영 인사라면 누구라도 기뻐했을 테니까요.”

내 말에 베네딕트가 미소를 짓는다.

우리는 자연스러운 대화와 함께 식사를 이어갔다.

간단하게 인사가 끝나고 이내 베네딕트의 눈빛이 가라앉으며 분위기가 바뀐다.

이제부터가 오늘 만남의 목적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물론 나는 베네딕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내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아보려는 거겠지.’

저런 눈빛 익숙했다.

그 시절 나를 향해 질문하던 수많은 배우들의 눈빛이 저러했으니까.

나는 태연하게 그와의 대화를 이어갔다.

***

화기애애한 식사 분위기.

베네딕트는 간간히 센스 있는 유머를 던지며 대화를 리드했다. 그러면서도 권서준 작가에 대한 관찰을 멈추지 않았다.

‘권서준 작가, 생각보다 그릇이 큰 사람이군.’

다소 어려울 수 있는 자리였음에도 권서준 작가는 여유가 넘쳤다.

이제는 본격적인 질문을 할 차례였다.

코스 요리가 끝나고 디저트까지 나오자 베네딕트는 장현웅에게 조심스럽게 양해를 구한다.

“잠시만 작가님과 얘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아, 네. 물론이죠.”

눈치 빠른 장현웅이 얼른 일어나 조금 떨어진 자리로 이동한다.

조금 전과 달리 베네딕트의 눈빛은 한층 진지하게 변해있었다.

“작가님, 셰익스피어를 좋아하시나요?”

“작가인 이상 그를 싫어하는 사람은 별로 없겠죠?”

“그렇군요.”

와인 한 잔을 비워낸 베네딕트는 이내 말을 잇는다.

“솔직히 작가님 작품에서 셰익스피어의 느낌을 받았습니다. 크리스토퍼 말로의 삶을 통해서요. 정말 훌륭한 대본이었거든요.”

“과한 칭찬이지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자연스러운 대화.

그러나 베네딕트는 이내 차분히 진심을 꺼내놓는다.

“그래서 궁금했습니다. 어떻게 작가님의 작품이 그런 느낌을 풍길 수 있는지 말입니다. 영미권 국가 출신도 아니고, 게다가 이렇게 젊은 나이에 그런 작품의 깊이를 표현해낼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거든요.”

베네딕트는 예의를 지킨 선에서 최대한 솔직하고 진솔하게 자신의 궁금증을 꺼냈다.

반면에 권서준은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말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뭐지?’

의아함이 증폭될 쯤 권서준이 입을 열었다.

“눈동자 색깔이 다르시군요?”

대화의 흐름을 벗어난 생뚱맞은 질문이었다. 베네딕트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을 했다.

“홍채이색증이라고 합니다. 빛에 따라 눈동자 색깔이 달라지죠.”

빛에 따라 눈동자의 생각이 달라지는 증상. 어떨 때는 푸른색, 또 어떨 때는 초록색 혹은 금색으로 보였다.

“왜 매번 다른 얼굴, 다른 연기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까 했는데 그런 이유가 있었군요?”

“네, 뭐 연기자의 입장에서 나쁜 건 아닌 거 같아요. 제 자신의 흠까지 연기에 활용하는 셈이니까요.”

권서준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이해합니다. 작가 역시 자신의 상처를 무기로 해서 작품을 집필하니까요”

권서준의 말에 베네딕트가 웃는다.

작가와 배우.

비슷하면서도 다른 길을 걷고 있지만 자연스러운 공감대가 이뤄진다.

“인정받지 못한 무명 시절, 그리고 홍채이색증까지. 베네딕트 씨의 삶은 비극으로 시작했지만 결국 그 장르가 바뀌었군요.”

대화의 무게가 자연스럽게 더해진다.

베네딕트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래서 전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좋아합니다. 그의 작품 속엔 우리의 인생처럼 희극과 비극이 언제나 공존하거든요.”

그 순간,

권서준 작가의 눈빛이 가라앉는다.

“제 작품도 그렇습니다.”

“...네?”

“흔히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4대 희극이니 4대 비극이니 하지만 사실 그건 그의 작품을 제대로 모르는 거죠. 그 유명한 작품 「베니스의 상인」만 봐도 사람들은 희극이라 말하지만 단순히 희극이라고 보기엔 어렵죠. 애초에 그런 의도로 쓰인 작품이 아니었고요.”

권서준은 정확히 셰익스피어 작품의 핵심을 짚고 있었다. 「베니스의 상인」은 희극이라고 말하기엔 뼈아픈 상실감과 쓰디쓴 웃음과 같은 비극적 정조가 짙게 배어 있으니까.

“교묘한 변론으로 샤일로에게 파멸을 안겨준 포샤네 일행은 자신들의 승리를 자축하지만,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절망에 빠진 샤일록의 모습은 그 어떤 비극의 주인공 못지않게 아프게 다가오죠. 결국 누구를 주인공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비극도, 희극도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권서준의 말에 베네딕트의 표정이 진지해진다. 다시 생각해보면 권서준의 작품도 마찬가지였다.

‘단순히 희극, 비극으로 나눌 수 없는 인생의 묘미, 그리고 개별적인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통해서 작품 속 모두가 주인공처럼 보이게 만들었어. 특히 크리스토퍼 말로의 삶은 그걸 더욱 더 극적으로 만들었고...’

그제야 왜 자신이 권서준의 작품 속에서 셰익스피어의 느낌을 받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권서준의 인생에 어떤 희와 비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정확히 자신의 아픔마저 작품에 담아낼 수 있는 작가였다.

마치 그 옛날의 셰익스피어처럼.

‘이 사람... 진짜였어.’

셰익스피어를 흉내 낸 게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흉내 낸다고 만들어낼 수 있는 작품성이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베니스의 상인이 아닌, 샤일록의 비극이라는 제목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죠.”

농담 섞인 권서준의 대답.

베네딕트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맞아요. 그게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네요.”

그리고 잠시 뒤, 베네딕트는 들고 있던 와인을 비워내고는 다시 권서준을 바라본다.

권서준 작가의 작품 세계가 이해되고, 그의 작품성을 인정하자 한결 눈빛이 평온해진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작가님의 대본을 보고 많은 자극을 받았습니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게 도통 잠을 잘 수가 없었거든요.”

베네딕트의 눈동자엔 어느새 열기가 담겨 있었다. 헐리웃 영화를 찍을 땐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 오로지 연극에서만 볼 수 있는 그의 열정이었다.

“감사합니다. 다만 제 작품이 훌륭하기보다는 우리는 때때로 나무에서 말을 듣고, 흐르는 시냇물에서 책을 보고, 돌멩이에서 교훈을 얻고, 온갖 것에서 선을 발견하곤 하잖아요. 그걸 찾아내신 베네딕트 씨가 대단한 거고요.”

권서준의 대답에 베네딕트가 눈을 크게 뜬다.

“그건 「뜻대로 하세요」 제2막 1장이군요?”

베네딕트 바로 알아들었고,

권서준은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렇게 전 제 작품이 누군가의 인생에 작은 힌트가 되길 원합니다. 자신만의 답을 찾기 위해 끝없이 힌트를 찾아가는 것, 그게 바로 우리 인생이니까요.”

“...”

셰익스피어로 연결된 동양인 작가와의 연결고리.

베네딕트는 어린아이처럼 들뜬 얼굴로 권서준을 바라본다.

‘이 사람, 앞으로도 대단한 작품을 만들어낼 거야...’

직접 대화를 한 뒤에 내릴 수 있는 확신이었다. 그리고 어느새 그의 눈빛에는 숨길 수 없는 신뢰가 쌓여있었다.

베네딕트는 확신에 찬 얼굴로 먼저 손을 내민다.

“우리, 앞으로 좋은 인연이 될 거 같군요.”

베네딕트의 손을 바라보던 권서준이 미소를 지으며 마주 잡는다.

“저 역시 베네딕트 씨와 좋은 인연이 생긴 거 같아서 기쁘군요.”

“그럼 앞으로 벤이라고 불러주세요.”

베네딕트가 보이는 친근감의 표현.

권서준 역시 미소를 지으며 반응을 보인다.

“네, 앞으로 잘 부탁해요. 벤.”

천천히 힘을 줘 쥐는 두 손.

국경과 인종을 뛰어넘은 두 사나이의 신뢰가 담긴 악수였다.

***

장현웅은 한쪽에 앉아 카메라를 든 채 두 사람을 지켜봤다.

헐리웃 스타와 여유롭게 대화를 나누는 친구의 모습이 자랑스러웠다.

‘이게 말이 되는 거야? 근데 분위기까지 아주 좋다니...’

영어를 잘 모르지만 순조롭다는 건 분위기와 두 사람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잠시 뒤,

베네딕트가 일어나 손을 내민다.

자연스럽게 허공에서 맞닿는 손.

‘어? 이, 이건 찍어야 해.’

장현웅은 본능적으로 카메라를 들어 셔터를 눌렀다.

찰칵.

경쾌한 셔터음과 함께 악수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카메라에 담긴다.

이후 사람들의 입에 길이길이 오르내리는 베니주니 콤비가 만들어지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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