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majestic - 위엄있는 (1)
90.
***
“그, 그게 무슨 소리죠?”
당황한 아서의 목소리가 실내에 울려 퍼진다. 나는 태연한 얼굴로 통화 내용을 그대로 설명했다.
“하이든 에이전시에서 작가 계약과 함께 작품의 저작권 계약을 논의하자고 해서요. 마침 대표가 런던으로 온다고 하네요.”
“스티브 대표 말입니까?”
하이든 에이전시 스티브 대표.
아서가 모를 리 없었다.
유명 출판사 중에 하이든 에이전시와 연결되지 않은 곳이 없으니까.
“네, 맞습니다. 저녁 비행기라 곧 도착한다고 비서한테 연락이 왔군요. 그래서 하루 정도만 계약을 미뤘으면 합니다.”
한창 분위기 좋았던 미팅장의 공기가 싸늘하게 식는다. 듣고 있던 아서의 눈빛에서도 냉기가 돈다.
“하지만 권 작가님, 계약 도중에 이러시는 건 엄청난 결례입니다.”
아서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해서는 안 되는 결례가 맞았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도 분명 존재했다.
“그렇게 따지면 이번에 저희에게 제안하신 스몰 라이선스 계약 자체도 결례라고 생각하는데요?”
애초에 스몰 라이선스 방식이라면 대본만 사들여 자신들의 취향에 맞게 수정하고 싶다는 뜻이었다. 엄밀히 따지면 포스 극단 측에 유리한 조건.
나는 아서가 놓치고 있는 부분을 정확히 지적했다.
“...네? 그건...”
순간 아서의 표정이 굳어진다.
역시 본인도 자신의 제안에 문제가 있음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저희는 대본을 포함해 공연 전반적인 부분을 포함한 계약이라고 알고 왔습니다. 굳이 타이거 스튜디오 실무자와 함께 영국을 직접 찾은 것도 그 때문이고요. 그런데 오늘 저희에게 제안하신 조건이 달라졌잖아요? 그럼 상황도 달라지는 게 맞지 않을까요?”
“...”
잠시 아서가 생각에 잠긴다.
표정만 봐도 스티브 대표의 등장이 주는 압박감이 대단한 모양이었다.
‘무시할 수 없겠지. 만일 내가 하이든과 에이전시 계약이라도 맺게 되면 지금의 조건보다 훨씬 더 가격이 올라갈 테니까.’
나는 지금 돈보다 내 작품에 대한 포스 극단의 태도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다.
“원하시는 게 뭐죠?”
아서가 진지한 표정으로 묻는다.
내가 원하는 건 간단했다.
“대본을 포함해 공연 내용 전부를 계약하고 싶습니다. 추가로 제 작품에 대한 포스 극단의 의지도 보고 싶고요.”
“...”
아서가 말없이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실무진과 시선을 주고받는다. 그리고는 다시 나를 바라본다.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어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잠시 정도야 얼마든지 기다려줄 수 있으니까.
***
실무자와 함께 밖으로 나온 아서가 깊은 한숨을 내쉰다.
방금 권서준 작가에게 들은 말 때문이었다.
“하필 스티브 대표라니...”
어떻게 소식을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스티브 대표가 직접 움직였다는 건 간과할 문제가 아니었다.
“만일 권 작가가 하이든 에이전시와 계약이라도 한다면 조건이 많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미 상황을 파악한 아서의 표정이 굳는다. 게다가 권서준 작가는 정확하게 자기 대본의 가치를 알고 있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야. 마치 자신의 대본이 있어야 베네딕트가 출연한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 듯한 자신감이었지...’
그리고 그걸 가장 결정적인 상황에서 꺼냈다.
소설로 따지면 임팩트 있는 연출쯤 되려나?
이쯤 되니 아서는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칼자루는 자신이 아닌 권서준이 들고 있었으니까.
모든 건 결국 권서준의 계획 아래 있었다.
‘보통이 아니야.’
헐리웃 배우의 출연 가능성에도 흔들리지 않는 작가.
계약 조율 쪽에선 전문가인 아서의 입장에서도 한걸음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빠른 결정이 필요했다.
이러다가 대본과 베네딕트의 출연 모두를 놓칠 수도 있었다.
결정은 내린 아서는 곧바로 회의실로 들어갔다.
“좋습니다. 작가님이 원하시는 모든 조건 수용하겠습니다. 추가로 로열티 부분도 2% 늘리죠.”
포스 극단에서 내밀 수 있는 최상의 조건.
이쯤 되면 사실 상 항복이나 다름없었다.
“이 정도면 하이든 에이전시와의 미팅은 미루셔도 될 거 같은데, 어떻습니까?”
그제야 권서준 작가가 다시 자리에 앉는다.
“그 정도면 다시 얘기해 볼만 하군요.”
끝까지 여유로움을 잃지 않는 청년 작가.
그 천재의 의연함에 아서는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
대본 계약을 최우선시 한 아서는 우리 측에서 원하는 모든 조건을 수용했다. 태도 역시 한없이 우호적으로 바뀌어 적극적으로 조건 조율에 나섰다.
내 작품의 해외 판권을 가지고 있는 타이거 스튜디오 역시 꽤나 이득을 얻은 상태.
“어떠신가요?”
내가 묻자 오수정 대리가 고개를 돌린 채 낮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너무 좋은데요?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예요.”
오 대리의 놀라운 계약 조건에 지금도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이 정도면 훌륭했다.
실무자 역시 만족스러운 조건에 우리는 모두 합의했다.
“추가로 요청할 사항이 있으신가요?”
아서가 물었다.
“아니요.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다만 이번 작품, 잘 부탁드린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군요.”
내 동료이자 친구인 크리스토퍼 말로의 이야기였다. 나 역시 각별히 애착이 가는 작품이기에 제 가치를 인정받고, 제대로 만들어지길 소망하는 작품이었다.
“그 부분이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서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뮤지컬의 산실은 역시 미국의 브로드웨이죠. 화려하고 거대한 스케일은 단연코 그곳이 최고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연극은 조금 다릅니다.”
아서의 표정이 진지해진다.
“이곳 웨스트엔드가 고전적인 연극의 성지와 같은 곳이니까요.”
말투에서 자부심이 느껴진다.
물론 아서의 말은 사실이었다. 미국을 떠나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도 공연계에서 나름 두각을 드러내고 있지만 가장 유서가 깊은 곳은 바로 이곳 웨스트엔드였다.
“작가님의 작품, 저희가 최선을 다해 만들어보겠습니다. 믿고 맡겨 주십시오.”
눈빛과 말투에서 숨길 수 없는 자신감이 느껴진다.
우리는 악수를 나눴다.
단순히 손을 잡는 행위가 아닌 서로에 대한 신뢰가 가득 담긴 사나이 대 사나이가 나누는 약속이었다.
***
삼십 분 뒤.
합의점에 도달한 계약은 빠르게 마무리되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후...”
마무리된 계약서를 보고 나서야 오 대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겉으로는 화기애애한 미팅 분위기였지만 권서준 작가와 아서 총괄 디렉터의 합의 과정은 총소리 없는 전쟁과도 같았다.
“권 작가님과 일행 분은 저희 비서가 모실 겁니다. 오 대리는 저랑 같이 이동하시죠. 할 얘기도 있고요.”
계약을 마친 뒤라서 그런지 아서의 얼굴에 한결 평온한 미소가 떠오른다.
숙소에 돌아온 차 안.
운전대를 직접 잡은 아서는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오늘, 고생하셨습니다.”
오 대리가 먼저 인사를 건넨다.
그러자 아서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젓는다.
“고생은 오 대리가 했죠. 조금 더 부드럽게 진행될 수 있었는데, 너무 저희 쪽 의견만 내세웠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오늘 일은 제가 실례를 범했습니다.”
“...”
오 대리는 순간 놀랄 수밖에 없었다.
포스 극단 총괄 디렉터가 이렇게 먼저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까지 할 줄은 몰랐으니까.
“사죄의 의미로 식사 대접이라도 하고 싶지만 아마 오늘은 벤 그 친구가 작가님을 가만두지 않을 것 같더군요.”
“벤이라면 배우 베네딕트 씨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그 베네딕트가 맞습니다. 아마 저녁에 벤 그 친구가 권 작가님에게 연락을 할 겁니다.”
오 대리의 얼굴에 놀람과 긴장이 동시에 내비친다. 아무래도 상대가 헐리웃 배우라 어쩔 수 없었다.
“그럼 저희가 몇 시까지 어디로 가면 될까요?”
“아,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마 벤이 직접 작가님을 모시러 갈 테니까요.”
“...네?
헐리웃 스타가, 여왕의 훈장까지 받은 배우가 직접 에스코트를 해준다고?
다시 들어도 믿기 힘든 얘기였다.
“놀라실 필요 없습니다. 벤은 그만큼 이번 작품에 진심이니까요. 물론 저희 역시 마찬가지고요. 그러니 혹 영국에 계시는 동안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저희가 최선을 다해 도와드리겠습니다.”
오 대리는 이 모든 일이 꿈만 같았다.
몇 차례 유럽 출장을 왔지만 이런 대접은 처음이었다.
잠시 뒤,
아서는 호텔 바로 앞까지 데려다줬다.
멀어지는 차를 보며 오 대리는 혀를 내두른다.
“이게 권서준 작가님의 힘인가...”
여러모로 처음 겪는 일들이 많은 이번 출장이었다.
***
늦은 오후.
우리는 간단한 식사를 마친 채 오후 내내 숙소에서 휴식을 취했다.
9시간이라는 시차는 쉽게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 낮잠을 자고 일어나자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일어나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천천히 오늘 있었던 일을 되뇌었다.
오 대리와 아서에게 말하진 않았지만 사실 나는 스티브 대표와의 미팅을 며칠 뒤로 미룬 상태였다.
하이든 에이전시를 통해 「거장의 숨결」을 계약할 경우 판권 관련 돈은 더 많이 받을 수 있겠지만 그만큼 공연 일자는 늦춰질 수밖에 없었다. 당장 내년에 국내 뮤지컬 공연을 준비하고 있는 상황에서 오히려 손해가 될 수도 있었다.
‘그 때문에 과감히 하이든 에이전시를 제외하고 포스 극단과 판권 계약한 거고.’
재미있는 건 이번 결정으로 인해 「거장의 숨결」 저작권을 놓친 하이든에선 내 차기작 소설에 대해 관심이 더 높아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었다.
결국 모든 건 철저한 계산 하에 진행된 계약인 셈.
물론 포스 극단과 계약을 한 가장 큰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이번 작품 「거장의 숨결」은 이곳에서 시작하는 게 맞았으니까.’
크리스토퍼 말로.
그 친구의 영혼이 깃든 이곳 런던에서 첫 해외 공연을 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연극의 성지와 같은 웨스트엔드.
그중 가장 베스트는 당연하게도 바로 포스 극단이었다.
결국 세 가지를 동시에 노린 이번 계약, 결과 역시 만족스러웠다.
자연스럽게 자신감 넘치는 아서의 눈빛이 떠오른다.
여태 포스 극단에서 쌓아온 명성을 생각하면 공연에 대한 퀄리티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이제 남은 건 주연 배우뿐인가?’
그 순간,
휴대폰이 울린다.
“어? 모르는 번호인데?”
장현웅이 놀란 듯 되묻는다.
“받아 봐.”
나는 태연히 말했다.
왜냐고?
지금 상황에서 연락할 사람은 한 명뿐이었으니까.
모르는 번호로 걸려온 전화 한 통.
-혹시 시간 되시면 저녁 식사를 같이 할 수 있을까요?
내 예상대로 베네딕트. C였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약속시간을 잡았다.
목적은 알 수 있었다.
작품 계약 전에, 혹은 대본에 대한 감상으로 인해 작가인 나와 대화를 나누고 싶은 거겠지.
그 시절에도 그랬다.
세간에 퍼지기 시작한 내 대본을 읽어본 배우라면 어떻게든 나와 작품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내 술잔이 마를 일이 없었지.’
매일같이 찾아오는 배우들과의 대화.
연기에 대한 열정과 작품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는 뜨거운 토론의 시간.
모처럼 기대감이 드는 저녁 약속이었다.
‘그때 참 좋았는데...’
밀물처럼 밀려드는 추억에 나도 모르게 깊은 상상의 세계로 접어든다.
왁자지껄한 술집의 분위기.
흥에 겨운 음악에 술잔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리듬을 맞추던 사내들.
그리고 그 한가운데서 연기와 문학, 그리고 예술에 대해 토론하던 뜨거운 예술가들의 열정.
그 시절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장현웅이 내 어깨를 조심스럽게 흔든다.
“서준아, 약속시간 됐어.”
나는 과거의 기억이 주는 긴 여운을 음미하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