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negotiate - 협상하다 (1)
85.
***
늦은 오후.
한창 짐을 싸고 있는데 전화가 걸려온다.
와이즈 출판사 정영만 회장이었다.
-선물 잘 받았다.
용건은 간단했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내가 보낸 선물이 꽤나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하긴, 원고 안에 담긴 그 감정선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정 회장이었으니까.
-남은 선물도 기다리고 있으니 얼른 보내주고.
정 회장은 전화를 끊는 와중에도 내 작품에 대한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차기작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진다.
나는 현재 차기작을 두 가지 버전으로 쓰고 있었다.
하나는 영문 버전과 하나는 국문 버전.
굳이 이런 수고를 하는 이유는 내가 이번 작품을 통해 노리는 게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두 마리 토끼를 노리고 있지.’
애초에 작품은 결코 잘 쓴다고 좋은 가치를 인정받는 게 아니었다. 잘 팔릴 수 있게 포장과 적절한 연출이 필요했다.
내가 노리는 시장에 최적화된 언어로, 최적화된 정서로 작품을 써야 했다.
그걸 어떻게 아냐고?
그 당시 런던에 최고가는 상업 작가가 바로 나였으니까.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고.
상업 작가라는 건 결코 나쁜 의미가 아니었다. 팔리지 못하는 글은 결국 자기 위로밖에 되지 않는 작품이니까. 어떤 식으로든 팔리고, 여러 사람에게 읽혀야 의미도 전달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 장현웅이 말했던 에이전시 관계자라는 사람과의 미팅도 바로 오늘이었다.
***
늦은 오후.
와이즈 출판사.
“아니, 고 부장님. 고 부장님?”
전화기를 붙잡은 채 양 대리가 애절하게 부른다. 그러나 전화는 이미 끊긴 상황.
“하아, 미치겠네.”
양 대리는 출근하자 받은 전화 한 통 때문에 표정이 심각해진다. 뒤이어 출근한 주상진 편집장이 그 모습을 보며 묻는다.
“뭐야? 무슨 일이야?”
“하아, 하이든 에이전시인데 코엘료 작가 신작 말이에요. 협의는 어렵다고 하네요. 오후에 최종 조건 보낼 테니까 확인하고 결정하래요.”
“아니, 만나서 좀 얘기하자고 해보지?”
“해봤죠. 아니, 거의 빌다시피 했는데도 안 통해요.”
하긴, 출판사 대표도 잘 안 만나주는 게 하이든 에이전시 관계자였다. 일개 직원이 요청한다고 들어줄 사람들이 아니었다.
“진짜 갑질도 이런 갑질이 없네.”
“그럴만하죠. 하이든 에이전시가 보통 에이전시는 아니잖아요.”
하이든 에이전시.
세계 각국의 저명 출판사 및 에이전시들과 거미줄처럼 맺어놓은 한국어번역권 독점 계약 때문에 국내 출판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에이전시였다.
‘사실상 거의 독점이나 다름없지.’
적어도 영어권의 신간을 한국어로 번역하려면 하이든을 거치지 않고서는 진행할 수 없는 구조였다. 거의 대부분의 저작권중개의 권리가 독점적으로 하이든에 있는 상태.
최근엔 미국뿐만 아니라 영국을 비롯해 유럽 쪽으로도 눈을 돌려 유수 출판사와 에이전시들과 저작권 관련 계약을 체결하고 있었다.
이번 해외 작가의 신간 역시 마찬가지였다. 신간이 유통되자마자 그 가능성을 보고 발 빠르게 접근했으나 이미 하이든에서 작가와 에이전시 계약을 체결하고 말았다.
이 대로면 국내 출판은 포기해야만 하는 상황.
‘미치겠군.’
유명 연예인보다 얼굴 보기 어렵다는 하이든 에이전시 고 부장 때문에 주 편집장의 고민은 깊어만 갔다.
***
하이든 에이전시 한국 지사.
딸깍.
통화를 마친 고용수 부장이 차분히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와이즈 출판사의 다급한 사정은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어설픈 조건에 계약할 수는 없었다.
‘철저하게 이익을 내야 하는 게 에이전시의 목적이자 존재 이유니까.’
하이든 에이전시(Haydn agency)
출판뿐만 아니라 연극, 뮤지컬, 각종 공연과 관련된 저작권에 대한 유통과 관리를 하는 글로벌 에이전시였다.
대부분 거대 출판사들과 파트너십이 체결되어 있어 흔히 독점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지대한 힘을 가진 곳.
하이든 에이전시의 국내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고용수 부장의 업무 역시 마찬가지였다.
해외 출판시장을 읽고 국내 출판시장에 팔릴만한 책을 제안해야 하기에 유창한 외국어 실력과 커뮤니케이션 능력, 좋은 작품을 보는 눈은 필수.
특히 작가 발굴과 같은 건설적인 일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업무 중 하나였다.
그런데,
오늘은 업무의 내용이 좀 이상했다.
본사에서 해외 원서가 아닌 국내 작품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것도 스티브 대표가 직접 지시한 사안이었다.
‘권서준 작가라...’
최근 문학계에서 핫한 젊은 작가였다.
순문학 쪽에 이름을 알리고 있었고, 벌써 12쇄가 넘어가는 판매도 인상적이었고.
당연히 고 부장이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지극히 한국적인 작품이었어.’
해외로 나갈 수 있는 작품은 아니었다.
사실 최근 국내 출판사들은 어떻게 하면 한국 문학이 해외로 나갈 수 있을까에 대한 수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노력을 기울일수록 해외 시장에선 철저히 외면받고 있었다.
이유는 당연했다.
‘국내 작가의 작품이 해외에서 팔리지 않으니까.’
외국 에이전트들은 결국 전 세계에 판권을 팔 수 있는 돈 되는 책을 원했다. 한국적인 것도 좋지만 팔리는 책을 만들려면 전혀 새로운 방식의 접근이 필요했다.
아직 세계 시장에 널리 알려진 작가도 없고, 자연스럽게 국내 작가의 작품은 교섭력이 약한 상태.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선 더 큰 노력이 필요했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런 작가가 나오기 힘든 게 바로 한국의 문학계지.’
어느덧 희망조차 사라진 상태였다.
그래서 고 부장의 업무 역시 국내 작품을 찾는 것보다는 해외 작품의 한국어 번역 업무에 치중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본사에서 먼저 요구를 해왔다. 그것도 희곡 판권 외에 차기 작품에 대한 부분까지 체크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이런 경우엔 크게 두 가지였다.
작가에 대한 어떤 소스를 알고 있거나, 아니면 돈이 될 만한 작가이거나.
물론 만나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
‘2시라고 했지.’
권서준 작가의 영국 출장 일정 때문에 급히 잡은 약속이었다.
그다지 기대되지 않는 미팅.
그러나 늦지 않으려면 지금부터 서둘러 준비해야 했다.
***
나는 미팅에 앞서 잠시 와이즈 출판사에 들렀다. 차기작에 대한 원고 스케줄을 조율하기 위함이었다.
“작가님! 차기작 원고 정말 잘 봤습니다. 예술이던데요?”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주 편집장이 환한 미소로 환대한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네요.”
“마음에 드는 정도가 아니죠. 이게 따뜻하면서 심장이 아리아리해지는 게 이걸 뭐라고 말해야 하죠? 아무튼 초반 분위기가 너무 좋아요.”
표정을 보니 진심이 가득 담긴 말.
좋은 징조였다.
“참, 이번에 영국 가신다면서요? 그럼 추가 원고는 좀 늦어지겠네요?”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영국 가서도 원고는 계속 쓸 거니까요. 사실 포스 극단과 미팅 후에 런던 근교에 잠깐 머물면서 스토리 좀 뽑아보려고요.”
“아, 그렇군요. 그럼 대충 초고는 언제쯤으로 예상하시나요?”
“연말이요.”
“풉...”
주 편집장이 먹던 커피를 뿜는다.
“...올해 연말이요? 혹시 3달 뒤?”
“네, 왜 그러시죠?”
놀라서 쳐다보던 주 편집장이 고개를 세차게 젓는다.
“아, 아닙니다. 이런 작업 속도를 본 적이 없어서...”
하긴, 주 편집장이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장편 소설, 그것도 순문학 한 편을 쓰는 데 아무리 빨리 쓰는 작가도 최소 반년 이상이 걸리는 작업이었다.
장르 문학 작가들이야 일 년에 한두 편씩 쓰는 작가들도 있지만 순문학의 경우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깊이가 받쳐줘야 하니까.’
한 글자, 한 단어, 한 문장에 심혈을 기울여야 하기 때문에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어느 작가는 순문학 집필을 조각에 비유하기도 했다.
‘정으로 수없이 내려치는 것처럼 소설도 그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지. 다듬을수록 매끄러워지는 돌처럼 글도 그렇거든.’
그러나 나는 그들과 조금 다른 종류의 작가였다. 허세도 아니라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솔직하게 말했을 뿐이었다.
“일단 알겠습니다. 그렇게 준비하도록 하죠. 참, 오늘은 어디 가시나요?”
“네, 미팅이 있어서요.”
“방송국 쪽 가시나요?”
“아니요. 고용수 부장이라는 사람을 만나기로 했거든요.”
그때,
등 뒤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펴, 편집장님. 이것 좀 보셔야 할 거 같은데요?”
“작가님 잠시만요. 왜? 무슨 일이야?”
“그게... 코엘료 작가의 신간 계약과 관련해서 메일을 보냈는데, 이건 단위가 저희가 감당할 수준이 아닌데요?”
양 대리가 내민 금액을 확인한 주 편집장의 표정이 굳어진다.
“이거 미친 거 아냐? 누가 보면 책이 아니라 회사를 파는 줄 알겠네.”
홧김에 큰 소리를 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었다.
“무슨 일 있나요?”
내가 물었다.
“아, 그게 하이든 에이전시에서 이번 코엘료 작가 신간 독점 번역권 금액을 보냈는데 이게 수용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네요. 하아... 그 국내 담당자가 고 부장이라는 사람인데 워낙 얼굴 보기 힘든 사람이거든요. 출판사 대표들도 잘 안 만나주는 사람이라...”
주 편집장이 다시 한번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젓는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일 얘기를 해서. 참, 우리 어디까지 얘기했었죠?”
“저한테 어디 미팅이냐고 물으셨습니다.”
“맞다, 내 정신 좀 봐. 오늘 누구 만나러 가신다고 하셨죠?”
“고 부장이요.”
“...고 부장이요?”
“네, 방금 말씀하신 하이든 에이전시 고 부장이요.”
“풉...”
주 편집장은 또다시 커피를 내뿜고 말았다.
***
저녁 무렵.
나는 자신을 고 부장이라고 소개한 사람과 만났다.
주 편집장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장현웅의 말대로 영미권 출판계에선 알아주는 에이전시가 바로 하이든 에이전시였다.
“본사에서 작가님과 작가님 작품에 관심을 보여서요. 이렇게 미팅을 요청하게 되었습니다.”
말투도, 눈빛도, 몸가짐도 빈틈이 느껴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어떤 작품을 이야기하시는 건가요?”
“정확히는 포스 극단과 논의 중인 대본과 차기작에 대한 얘기입니다.”
역시나 상대는 내 작품의 계약 상황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다.
“포스 극단과 논의 중인 작품은 이미 타이거 스튜디오와 진행하고 있고, 차기작 역시 와이즈 출판사와 계약한 상태라 별도의 에이전시는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차기작의 경우 해외 판권 계약은 별도인 걸로 알고 있는데요. 제가 잘 못 알고 있는 건가요?”
고 부장은 계약의 세세한 내용까지 알고 있었다. 새삼 하이든 에이전시의 정보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커피 한 모금을 마신 고 부장이 다시 입을 연다.
“저희는 단순히 작가님의 작품을 고가에 팔기 위한 장사치들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이번 작품뿐만 아니라 이후의 작가님 집필에 있어서도 도움을 드리려고 하는 거죠. 단순히 국내에만 머물 생각이 아니시라면 믿음직한 에이전시는 필수적인 요소니까요.”
“하지만 그러기엔 집필 중인 작품의 마무리가 아직 많이 남아있는데요?”
“필요하다면 작가님의 작품 역시 저희 쪽에서 사들일 생각입니다.”
“이미 계약한 작품도요?”
“물론입니다. 저희는 그 정도의 힘을 가진 에이전시니까요.”
평온한 말투와 표정에선 그 어떤 과장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작가님의 차기작이 궁금하네요.”
당당한 태도.
당연했다. 상대는 국내 작가들과 출판사들이 어떻게든 인연을 만들고 싶어 하는 하이든 에이전시니까.
그런데 그래서 오히려 이상했다.
아쉬울 것 없는 고 부장이 상당히 적극적으로 나오고 있었으니까.
답은 하나였다.
아마 본사 측에서 어떤 언질을 받은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길게 끌 필요가 없군.’
내 차기작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읊을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
옛말에 그런 말이 있잖아.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궁금하시면, 한번 보시겠어요?”
이게 제일 빠르지.
가장 임팩트 있고.
나는 준비해온 영문 원고를 내밀었다.
***
하이든 에이전시 한국 지사.
사무실로 돌아온 고 부장은 생각에 잠긴다.
‘대체 그 자신감은 뭐지?’
웬만한 작가나 출판사들은 하이든 에이전시라고 하면 허리부터 숙이고 시작했다.
그런데 고작 20대 후반의 청년은 당당하게 자신을 바라보며 원고, 그것도 미완의 원고를 내밀 뿐이었다.
‘허세가 아니었어. 자신감이었지.’
그걸 구분하지 못할 고 부장이 아니었다. 하이든 에이전시 한국지사의 부장 자리를 딱지치기로 딴 건 아니니까.
결국 답은 이 원고에 있었다.
고 부장은 권서준 작가에게 건네받은 원고를 읽기 시작했다.
A4로 50장 정도의 영문 원고.
원고지로 따지면 400장 남짓, 중편 소설에 조금 못 미치는 분량이었다.
그런데...
작품을 읽어 갈수록 눈을 떼지 못했다.
처음엔 낯선 느낌 때문이었다.
‘이게 「덧없는 행운이여」를 쓴 작가가 맞다고?’
한국적인 느낌을 물씬 풍기던 전작과는 전혀 다른 필체가 느껴진다.
영어도, 글의 분위기도, 등장인물들의 의식의 흐름까지 영국인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완벽한 분위기.
게다가 더 놀라운 것은 글에 담기는 진득한 정서와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흡입력이었다.
그 순간,
갑자기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한다.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한 가지 키워드가 떠오른다.
부커상.
영국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문학상.
송영도 교수를 뒤이어 또 한 번의 국내 작가가 해외로 진출할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인다.
‘이 작가라면 세계에 통할지도... 아니, 반드시 통한다...’
갑자기 할 일이 생겼다.
고 부장은 들뜬 마음을 애써 억누른 채 서둘러 전화기를 들었다.
물론 국제전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