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84화 (84/203)

84. employment - 고용 (5)

84.

***

늦은 밤.

“후.”

방으로 돌아온 현웅이 부친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 들은 아들의 마음이 가슴에 응어리처럼 남은 탓이었다.

“괜찮아요?”

설거지를 마친 아내가 들어오며 묻는다.

“흠. 괜찮고 말고 할 게 뭐 있어?”

“당신은 왜 애한테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고 그래요?”

“그럼 애가 정신 못 차리고 있는 걸 그냥 둬?”

“현웅이가 그림 그리는 거 제일 좋아했던 사람이 당신이잖아요. 아니에요?”

“...”

현웅이 부친은 입을 다물었다.

아내한테만큼은 속일 수 없었으니까.

“우리처럼 안 살길 바랐으니까. 하고 싶은 일 다 하고 살길 바랐으니까...”

그러나 현실은 팍팍했다.

아들의 꿈을 마음껏 지원해주면 좋으련만, 당장 퇴직을 종용당하는 가장의 입장에선 아들의 불안한 미래가 늘 마음에 걸렸다.

마음에 걸리는 일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근데, 대체 졸업식은 왜 말 안 한 거래?”

“눈치 보였겠죠. 안 그래도 취업 생각 없다고 당신한테 호되게 혼났는데, 졸업식이라고 말이나 할 수 있었겠어요? 현웅이도 속앓이 많이 했겠죠.”

“...”

몰랐던 사실이었다.

체한 것처럼 속이 불편하고 마음이 무거워진다.

“하아...”

복잡한 심경에 나오는 건 깊은 한숨뿐이었다.

“내 나이 육십이 다 돼 가는데, 아직도 자식 키우는 게 쉽지 않네...”

“저렇게 다 큰 아들 키우는 건 우리도 처음이잖아요. 이왕 이렇게 된 거 딱 한 번만 믿어주자고요.”

아내의 위로에 현웅이 부친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떠오른다.

사실 이미 허락해준 거나 다름없었다.

자식 이기는 부모가 어디 있다고.

‘이번엔 잘 돼야 할 텐데...’

처음 그림을 그리겠다고 말했을 때도,

문창과로 전과를 하겠다고 했을 때도,

달라지지 않은 건 그 마음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자식에 대한 마음은 기대로 시작해 염려로 끝맺고는 했다. 이번도 마찬가지였다.

“참, 서준이 그놈은 요즘 뭐해? 바빠서 못 본 지 통 오래됐네.”

자연스럽게 권서준의 모습이 떠오른다.

마지막에 봤을 때만 해도 위축된 표정에 자신 없는 말투가 트레이드마크 같은 녀석이었다.

그런데 아내의 대답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서준이야 요새 잘나가죠. 얼마 전 드라마도 찍었다던데요?”

“드라마? 드라마 작가가 됐다고?”

현웅이 부친은 놀란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드라마뿐만 아니라 연극 대본도 쓰고, 소설도 써서 등단도 했대요. 얼마 전에 그 히트 친 사극 있잖아요? 그 이옥이라고. 그것도 서준이가 썼다던데요?”

“뭐? 이옥을?”

드라마 「이옥」이라면 장안의 화제였다.

회사에서도 상무님부터 말단 직원까지 안 본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잠깐 담배 피우는 시간, 화장실에서 용변 보는 짧은 시간에도 들리는 얘기가 온통 그 드라마였으니까.

물론 현웅이 부친은 정작 그 드라마를 한 편도 보지 못했다.

언제 책상이 치워질지 모르는 형편에 한가하게 드라마나 보면서 있을 순 없었으니까.

그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영업 뛰어서 실적을 내야만 하는 게 바로 가장이니까.

그런데,

작가가 아들 친구 녀석이라는 말에 관심이 동한다.

“그 드라마, 지금 좀 볼 수 있나?”

“아마 그럴걸요?”

아내가 TV를 켠다.

“아, 여기 있네.”

“틀어봐. 한 번 보게.”

“당신이 드라마를요?”

아내가 놀란 듯 되묻는다.

그러나 현웅이 부친의 표정은 진지하기만 했다.

사실 드라마 따윈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다.

더 솔직히 말하면 드라마 자체를 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

그러나 아들과 함께 일할 놈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는 알아야 했다.

다 아들에 대한 염려 때문이었다.

그런데,

드라마가 시작되고 현웅이 부친은 믿을 수가 없었다.

시작과 동시에 몰입감이 생기는 스토리.

‘뭐야? 드라마가... 이렇게 재미있다고?’

흔하디흔한 작품일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자기 생각이 틀렸음을 불과 10분도 되지 않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래서 다들 이옥, 이옥 한 거였구나...”

본능에 가까운 감탄이 입 밖으로 흘러나온다.

물론 1화가 끝날 때까지 TV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건 말할 것도 없었다.

***

늦은 밤.

나는 밤이 주는 차분한 기운을 음미하며 집필을 이어갔다.

이건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였다.

영감의 시작이 잃어버린 아들 햄넷에 대한 마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소설로 쓰지 않을 수 없는 상처들.

그래서일까. 나도 모르게 아들을 잃은 아비의 감정이 격하게 담긴다. 지독하고, 끈적거리는, 한 번 빠지면 늪처럼 빠져나올 수 없는 비극적 감정들이 흐른다.

“하아.”

나는 키보드에서 잠시 손을 떼 숨을 고른다.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쥐어뜯기는 것처럼 고통스럽고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이건 아니었다.

단순히 아픔을 담으려고 했다면 애초에 펜을 들지 않았을 테니까.

죽은 사람은 다시 돌아오지 않고,

남은 자들은 그 죽음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결정해야만 한다.

밤이 깊어지는 만큼 내 고민도 깊어지고 있었다.

지이잉.

그때, 휴대폰이 울린다.

장현웅이었다.

-서준아, 아버지께서 허락하셨어!

신이 난 목소리.

아버지와 이야기가 잘 된 모양이었다.

“그래. 잘 됐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몇 번 뵌 적이 있는데 결코 자식의 꿈을 반대할 분은 아니었다.

겉으로는 차가워 보이지만 누구보다 장현웅을 생각하시는 분이 바로 현웅이네 아버지였다.

다만 아들의 답답한 상황이 마음 아프셨던 거겠지.

문득 아버지의 기억이 떠오른다.

지금의 내 모습을 보면 대견해하실까?

아니면 여전히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걱정하실까?

아버지의 마음을 조심스럽게 헤아려본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내 시야가 확장되는 느낌이 든다.

마치 소설의 시점이 전혀 다른 시야에서 시작되는 기분.

지금껏 아들을 잃어버린 아버지의 시선으로만 작품을 바라봤다고 한다면, 반대인 아들의 시선은 어땠을까 라는 궁금증이 인다.

떠나야 하는 아들의 아픔.

그런 아들을 회상하는 가슴 아프고, 절절한 아버지의 시선.

마치 내가 지금 아버지를 기억하는 것처럼...

아버지와 아들의 시선이 수시로 교차된다.

그리고 그 교차되는 시점에서 격한 슬픔과 함께 따스한 추억이 만나 한 송이 꽃처럼 피어오른다.

“그래, 이거야...”

울컥거리는 감정과 함께 두 사람이 애틋하게 바라보는 장면이 내 머릿속에 펼쳐진다.

그래.

나는 아들이었고, 아버지였다.

그리고 다시 아들이 되어 아버지를 떠올리고 있었다.

타닥타닥타닥.

고통스럽기만 한 감정을 털어내자, 손가락이 리듬을 타기 시작한다.

타닥타닥.

빠른 속도로 여백이 채워진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두 남자.

그러나 죽음이라는 경계에 막혀 가장 먼 곳에 선 채 서로의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두 남자의 처연하면서 가슴 따뜻한 이야기였다.

***

며칠 뒤.

영국 출장 준비는 착착 진행되었다.

이제 이틀 뒤 출국하는 일만 남은 상황.

체크리스트를 확인하던 장현웅이 슬쩍 나를 보며 입을 연다.

“서준아, 우리 아버지가 네 드라마 다 보셨대.”

“정말?”

“어, 너무 재미있다고 주말 내내 그것만 보시더라.”

“너희 아버지 드라마 안 보시잖아?”

“내 말이. 한참 보시더니 안심이 된대. 이런 작품 쓰는 친구 옆이라면 뭐든 배울 게 있을 거라나.”

다행히 녀석의 얼굴은 며칠 전과 달리 많이 편안해 보였다.

“아무튼 고맙다. 네 덕분에 모처럼 아버지 웃는 모습도 봤네.”

“고맙긴, 앞으로 마구 굴릴 건데. 나중에 욕이나 하지 마라.”

“아이고, 네. 알겠습니다. 제가 알아서 모셔야죠.”

농담과 함께 녀석이 피식 웃는다.

그러더니 잊고 있던 게 떠오른 듯 급히 말을 잇는다.

“참, 그러고 보니까 어제 하이든 에이전시라는 곳에서 메일이 왔어.”

“하이든?”

내가 되묻자 장현웅이 어제 받은 메일을 보여준다.

“어, 알아보니까 미국에서 유명한 저작권 에이전시래. 처음에는 사기인가 했는데 알아보니까 아니더라고.”

장현웅은 밤새 알아본 내용을 나에게 설명해줬다.

“저작권 에이전시라고도 하고 출판 에이전시라고도 하는데 영미권 국가에서는 작가의 모든 저작권을 대변하고 관리하는 직종이래. 뭐, 우리나라 출판 에이전트는 주로 해외 저작권사와 국내 출판사 사이를 중개하는 역할을 하기도하고.”

장현웅의 설명 덕분에 어느 정도 저작권 에이전시에 대한 개념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근데 거기서 니가 희곡을 쓴 것도 알고 있고, 포스 극단과 논의 중인 것도 알고 있더라고. 소설 차기작은 이미 와이즈 출판사와 계약한 상태라고 하니까 알았다고 다시 연락하겠다고 했어.”

길게 설명했지만 핵심은 하나였다.

“결국 내 작품에 관심이 있다는 거지?”

“그렇지. 우리나라와 달리 외국에선 대부분 에이전시를 껴서 계약을 하나 봐.”

현재 난 와이즈 출판사와 함께 피어슨 출판사의 미팅을 진행하고 있었다. 일종의 한국형 에이전시 관계라고 할 수 있는 상황.

그러나 굳이 내 작품에 대한 관심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어떤 조건을 제시하는지를 통해 대외적인 내 가치를 알아볼 수도 있었고, 소설, 대본, 어느 쪽에 관심이 있는지도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일단 지켜보자. 다른 방안이 있다는 건 언제나 든든한 보험이 되니까.”

“그쪽이랑 만나볼 의향도 있는 거야?”

“물론이지. 아쉽게도 타이거 스튜디오는 국내에서만 힘을 발휘하거든. 좀 더 넓은 큰 시장의 발판을 알아두는 것도 나쁘지 않지.”

“와... 너 설마 미국까지 생각하는 거야?”

“어, 당장은 아니지만.”

물론 너무 먼 미래의 일도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그 시절의 기억이 떠오른다.

내 대본을 사고 싶다고 줄을 서던 극장주와 귀족들.

아무리 콧대 높은 자들도 내 대본 앞에서는 자신들의 욕심을 숨기지 못했다.

‘우리가 사겠네. 얼마면 되겠는가?’

‘아니네, 우리가 사겠네.’

지금도 비슷했다.

너도, 나도 손을 벌리고 지갑을 열려고 한다. 그러나 내 작품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기 위해선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그들이 서로 경쟁하게 만드는 거지.’

탐내는 자들이 많을수록 작품의 가치는 올라간다. 단순히 금전적인 문제가 아니라 작가 권서준에 대한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었다.

나는 차오르는 고양감을 음미하며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참, 이것 좀 송 교수님께 보내줘라.”

나는 준비해둔 서류 봉투 하나를 장현웅에게 건넸다.

“이게 뭔데?”

“정 회장님께 드리는 선물이라고 하면 아실 거야.”

“선물?”

장현웅이 서류 봉투와 나를 번갈아 쳐다본다.

녀석의 의심은 당연했다.

고작 서류봉투가 어떻게 선물이 될까 싶은 거지.

그러나 정 회장에게 이보다 더 기쁜 선물은 없을 게 분명했다.

내 명예를 걸어도 좋았다.

***

느지막한 오후.

와이즈 출판사 회장실.

모처럼 찾아온 송영도 교수와 정영만 회장이 차를 즐기고 있었다.

“서준이 그놈이 영국을 간다고?”

“네, 포스 극단에서 초대했답니다.”

“하, 그놈 참 대단하군. 이런 대접을 받은 국내 작가가 있었던가?”

“제 기억엔 없습니다.”

“하, 내 기억에도 없네.”

진심 어린 감탄이 흘러나온다.

잠시 뒤, 차 한 모금을 마신 정 회장이 넌지시 송 교수의 근황을 묻는다.

“그래, 서준이는 그렇다 치고, 자넨 요즘 뭐 하고 지내는 거야?”

“소설 하나 기획하고 있습니다.”

“소설을?”

정 회장이 눈을 크게 뜬다.

몇 년째 슬럼프에 빠져 절필을 고민하던 송 교수의 고민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서준이가 제 다음 글이 궁금하다고 해서요. 제 글을 기다리는 사람이 많다고 하더군요.”

송 교수의 대답에 정 회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하, 이번에도 그 녀석인가? 하여튼 사람 마음 훔치는데 엔 도사라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기특한 놈.”

웃으며 대화를 나누던 정 회장이 슬쩍 송 교수를 바라본다.

“참 근데, 무슨 일 때문에 찾아온 건가?”

송 교수는 용건 없이 올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송 교수가 들고 온 서류 봉투를 내민다.

“서준이가 회장님께 선물 하나를 전해달라고 부탁하더군요.”

“선물?”

송 교수가 내민 건 서른 장 남짓한 원고였다. 정 회장은 보자마자 권서준의 원고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정 회장은 얼른 손을 뻗어 원고를 넘기기 시작한다.

“이건...”

첫 문장부터 심금을 울린다.

담담하게 내뱉는 아버지의 독백이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그러나 그 뒤에 이어진 아들의 독백은 아버지의 독백 못지않았다.

원고를 읽어 내려가던 정 회장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추가된 서른 페이지.

아버지이자 아들이었던 두 남자의 이야기였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여행 갔던 곳을 다시 가면서 각자의 입장을 이야기하는 것.

일종의 평행 세계 시점이라고 해야 할까.

서로의 죽음을 바라보는 시점이 두 사람의 마음을 선명하게 그려냈다.

덕분에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가 마치 정 회장 자신의 이야기처럼 다가온다. 자연스럽게 자신의 아픔과 이야기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제목 : 당신이 머물던 자리에

“후...”

먹먹하게 올라오는 감정에 정 회장이 간신히 숨을 고른다.

명치부터 울컥하고 올라오는 감정을 애써 누른다.

벌써부터 다음 이야기가 궁금했다.

그러나 녀석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 녀석... 선물이 아니라 벌을 주고 가는군.”

정 회장의 얼굴엔 어느새 촉촉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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