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employment - 고용 (4)
83.
***
“혹시 작품 「거장의 숨결」을, 뮤지컬로 해보시고 싶으신 건가요?”
역시나 서미연 감독은 이해가 빨랐다.
“맞습니다.”
내 대답에 서 감독의 눈이 커진다.
“하아, 그래서 그렇게 잘 나가던 연극 판권을 가져오신 거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일한 작품을 계속 무대에 올리는 건 오히려 작품에 대한 가치를 떨어트릴 거로 생각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우리나라 연극 관객의 풀이 그리 큰 건 아니니까요.”
이번엔 서 감독이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요. 52주 연속 매진 기록이 뜻깊긴 하지만 연극 관객 자체가 엄청 는 건 아니었죠. 아마 두세 달 정도 더 매진되다가 끝났을지도 모를 일이고요.”
서 감독은 총괄 디렉터답게 작품의 티켓 판매 흐름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사실 실무자라면 그 부분을 모를 수 없기에 김재용 대표도 리메이크를 제안했던 거고.
“그래서 다음 스텝을 준비한 겁니다. 김 대표야 리메이크를 주장했지만 저는 조금 더 파급력이 크고, 다양한 시도가 가능한 새로운 장르로 도전하고 싶었거든요.”
놀란 표정으로 듣고 있던 서 감독이 입을 연다.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큰 그림을 그리신 거죠? 연극이 대박을 터트렸을 때부턴가요?”
답이 아니었다.
나는 대답 대신 가만히 웃었다.
그러자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간다.
“아니면 처음 계약하실 때부터?”
이번에도 아니었다.
그러자 서 감독의 눈이 커진다.
“그럼 설마... 처음 대본을 쓰실 때부터?”
나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서 감독이 혀를 내두른다.
“모든 건 빌드업이니까요.”
난 글을 쓸 때 한 글자도 허투루 쓰는 법이 없었다. 모든 건 다음을 위한 디딤돌이자 복선이었다.
‘작품 그 자체도 마찬가지고.’
사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작품을 처음 기획했을 때부터 뮤지컬을 생각했다.
내가 생각하는 연극은 사실 노래와 춤을 빼놓을 수 없으니까.
지금은 연극과 뮤지컬이 분명하게 구별되어 있지만 그 시절엔 그렇지 않았다.
필요하다면 무엇이든 무대에 올릴 수 있는 자유로움이 있었다.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고, 익살스러운 안무와 함께 춤을 추고, 배우와 작가의 구분조차 의미 없을 정도로 모두가 공연을 위해 하나가 되는 순간.
술 취한 관객의 고성 소리, 흥얼거리는 귀족 부인의 노랫소리마저 연극의 한 부분을 담당했다.
그래, 함께 즐기는 무대.
그것이 바로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무대였다.
그 형식에 가장 가까운 공연이 바로 뮤지컬이었고.
“좋습니다. 한번 해보죠.”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서 감독이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참, 뮤지컬 대본은 제가 쓸 생각입니다.”
“당연히 그래야죠. 이 작품,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이 권 작가님이잖아요.”
“나머지는 감독님께 맡겨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뮤지컬은 손 뗀 지 오래됐지만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심정으로 제대로 준비해보겠습니다.”
현실의 막막함에 빛을 잃었던 서 감독의 눈에 다시 열기가 오른다.
새로운 목표.
그것을 향한 도전.
예나 지금이나 사람을 다시 뜨겁게 만드는데 엔 초심만큼 좋은 것도 없었다.
서 감독의 얼굴에 어느새 미소가 떠오른다.
좋은 징조.
다음에 만날 땐 서 감독이 아닌, 서 대표라고 불러야 할지도 몰랐다.
***
늦은 오후.
나는 집에서 장현웅을 만났다.
“이번엔 뮤지컬이라고?”
장현웅이 놀란 듯 묻는다.
“대박, 이젠 그쪽도 도전하는 거야?”
“작품을 그대로 두긴 아깝잖아. 다 내 새끼들인데 다양하게 빛을 보게 해줘야지.”
“거기까지 생각한다고? 하아, 너 진짜 대단하다. 이 정도면 작가가 아니라 사업가라고 해야 하는 거 아냐?”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내 인생의 절반이 작가였다면 나머지 절반은 작가이자 사업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글로브 극장의 주주이자 극장주.
그뿐만 아니라 고향에 내려와선 여러 가지 사업도 손을 댔던 게 바로 나였다.
자연스럽게 전생의 기억이 떠오른다.
“참, 포스 극단 미팅 이후의 일정도 잘 진행되고 있는 거야?”
“어, 네 말대로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번에 숙소랑 교통편 모두 준비했어. 근데 알고 보니까 거기가 셰익스피어의 고향이더라?”
그래서 꼭 들러야 하는 곳이었다.
나의 모든 것이 시작된 곳이니까.
나는 내뱉을 수 없는 말을 안으로 삼켰다. 긴 설명을 해줄 수 없는 게 안타까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 전생이 셰익스피어라 고향에 들러봐야 한다고 말할 수도 없었으니까.
“이야, 대문호의 고향이라니. 꼭 한번 가보고 싶었는데 잘 됐다.”
장현웅의 얼굴에선 벌써부터 여행에 대한 설렘이 엿보인다. 물론 나 역시 기대되는 여행이라는 건 마찬가지였다.
“고맙다. 니가 여러 가지로 체크해주는 덕분에 요즘엔 집필에 집중할 시간이 나네.”
“에이, 그거야 매니저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 그럼 오늘은 푹 쉬고, 오 대리님한테 추가 일정 관련해서 연락 오면 알려줄게.”
장현웅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런데 집에 간다는 녀석의 얼굴에 순간 짙은 그늘이 비친다.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아직, 아버지한테 영국 가는 거 말씀 안 드린 거야?”
장현웅이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응. 아직 취업 준비하는 거로 아셔. 오늘은 말씀드려야지...”
그러나 장현웅 성격에 쉽지 않을 터.
며칠째 말 못 하고 속으로 끙끙 앓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녀석을 위해 말 한마디를 보탠다.
“네 생각을 솔직하게 얘기해봐. 부모님이야말로 가장 큰 너의 지지자니까.”
씁쓸하게 웃던 장현웅이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
“후.”
집에 돌아온 장현웅은 책상 앞에 앉은 채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취업이 아닌 친구와 함께 이야기를 쓰겠다는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마음이 무거웠다.
‘실망하실 텐데...’
벌써부터 충격 받은 아버지의 표정이 떠오르는 듯했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다잡는다.
“밥 먹자.”
그때, 때마침 엄마가 부른다.
장현웅은 숨을 깊게 마신 뒤 거실로 향했다.
“...”
마침 안방에서 나오던 아버지가 장현웅을 한 번 보고는 말없이 자리에 앉는다.
굳은 표정 속엔 아직도 아들에 대한 실망감이 가득했다.
“넌 어디 갔다가 이렇게 늦은 거냐?”
아버지의 말에 엄마가 대신 대답한다.
“도, 도서관 갔겠죠. 요즘 현웅이가 취업 준비하느라 바쁘잖아요.”
엄마의 말에 아버지의 표정이 다소 누그러진다. 그리고는 이내 슬쩍 장현웅을 보며 묻는다.
“그래? 어느 쪽을 생각하는데? 전공이 문창과라 선택과 집중을 해야 시간 허투루 낭비하지 않을 거야.”
“그거야 우리 현웅이가 알아서 잘하겠죠. 그렇지 현웅아?”
엄마가 윙크를 보낸다.
“...”
엄마의 마음은 알지만 장현웅의 기분은 오히려 더 가라앉는다. 그런데도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근데 왜 자꾸 당신이 대답해? 얜 입 없어?”
“아이, 누가 말하는 게 무슨 상관이에요. 다 같은 말인데.”
이대로 또 말 못 하고 지나가는 분위기.
그런데 그때, 권서준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그래, 서준이가 그랬잖아. 부모님이야말로 가장 큰 나의 지지자라고...’
장현웅은 권서준의 위로를 마치 주문처럼 되뇌며 호흡을 골랐다.
그리고 이내 천천히 입을 연다.
“아버지, 어머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혀, 현웅아...”
엄마가 다급히 말리려 했지만 장현웅은 이미 결심한 듯 말을 이었다.
“저, 서준이랑 같이 웹툰 해보기로 했습니다.”
탁.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버지가 소리 나게 수저를 내려놓는다.
엄마는 움찔하지만 장현웅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했다.
아버지는 그런 장현웅을 보며 미간을 찌푸린다.
“취업 안 하고, 또 시간 낭비하겠다는 말이냐?”
“아니요. 제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을 해보고 싶습니다.”
“그동안은 너 싫어하는 일 시켰어? 대학 4년 내내 너 하고 싶은 일 하도록 내버려 뒀다. 이제는 정신 차린 줄 알았더니...”
혀를 차던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러자 장현웅이 의자 위에 무릎을 꿇는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놀라서 쳐다본다.
“너... 이게 무슨 짓이냐?”
“한 번만 믿어주세요. 마지막입니다.”
평소와 달리 진지함이 묻어나는 목소리.
아버지의 표정이 굳어진다.
“처음엔 그저 돈 많이 벌고 싶다는 생각에 웹툰을 그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어려운 집안에 도움이 되고 싶었으니까요. 그런데 쉽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문창과로 전과까지 한 거 아니냐?”
“맞아요. 사실은 도망친 거죠.”
“...뭐?”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요. 솔직히 그래서 스토리 실력을 올리겠다는 핑계를 대며 문창과로 간 거였어요.”
처음 듣는 얘기에 아버지는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꼭 한 번 맞붙어 보고 싶어요. 나가떨어질지언정 이번에도 도망치면 영영 후회할 것 같거든요. 아버지... 한 번만 믿어주세요. 정말 마지막입니다.”
담담하게 내뱉는 장현웅의 고백.
거실엔 짧은 침묵이 흘렀다.
“...”
가만히 지켜보던 아버지의 표정은 복잡했다. 그러나 이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돌린다.
“...니가 언제 내 말 듣고 사는 놈이었냐?”
아버지는 그 말 한마디를 내뱉고는 안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다.
그러나 장현웅은 알고 있었다.
저것이 아버지만의 허락 방식이라는 것을.
‘아버지, 감사합니다. 그리고,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무릎 위에 놓인 두 주먹엔 이미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
미국 매사추세츠.
저작권 에이전시 하이든 본사.
하이든은 미국과 유럽의 번역권 및 저작권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는 거대 에이전시였다.
그런데, 회의를 진행하던 스티브 대표의 표정이 밝지 않았다.
“흠. 요즘은 괜찮은 작품을 찾기가 어렵군.”
무려 스무 군데가 넘는 출판사와 수백 명이 넘는 작가들과 계약을 맺고 있었지만 최근엔 이렇다 할 눈에 띄는 작가가 없었다.
그때,
한 직원이 입을 연다.
“요즘 피어슨 출판사 쪽이 수상하던데요?”
“왜? 괜찮은 작품이라도 있대?”
“한국 작가 작품인데, 아직 초고도 안 나왔는데 계약 준비하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한국 작가라...”
관심이 빠르게 식는다.
영어권이 아닌 국가의 소설은 아무리 좋다고 한들 대중의 선택을 받기 어려웠다. 번역의 한계로 인해 작품성 자체를 인정받기도 어려웠고.
“근데 이 작가가 좀 특이한 게 소설만 쓰는 게 아니더라고요.”
“왜? 시나리오도 쓰는 거야?”
“연극 대본을 썼어요. 그것도 원문으로.”
“...뭐? 원문으로?”
“네, 대본 같은 경우엔 포스 극단에서 극비로 계약 추진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고요.”
포스 극단까지 나오자 순간 스티브 대표의 표정이 달라진다.
포스 극단과 피어슨 출판사.
영국의 연극계와 출판계를 책임지는 거대 회사였으니까.
자연스럽게 스티브 대표의 관심이 동한다.
“그 작품, 지금 좀 구할 수 있어?”
“물론이죠. 찾으실 줄 알고 이렇게 구해놨죠.”
직원이 내미는 건 대본이었다.
작품 : 「거장의 숨결」
뜻밖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은 작품이었다.
“크리스토퍼 말로의 이야기라고?”
작품을 본 스티브 대표의 눈빛이 달라진다.
“아니... 어떻게 이런...”
첫 문장부터 시작해 놀라움 그 자체였다.
한국 작품을 번역한 게 아니라 영국 작가가 썼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유려한 문장이었다.
‘거기에 색다른 맛까지 더 입혀진 느낌이야.’
은연중에 풍기는 작가만의 필력이 글의 분위기를 압도하고 있었다.
대략 서른 페이지 정도 읽었을 때 느낌이 왔다.
‘이건, 무조건 터진다...’
이 업계 전문가로서 내릴 수 있는 확신이었다.
“이거, 아직 계약 안 한 거지?”
“제가 알기로는 그렇습니다.”
“그럼 지금 당장 연락해.”
“...네?”
“포스 극단과 직접 계약하기 전에 우리 쪽에서 먼저 접촉해야 해. 지금 당장!”
돈 냄새를 맡은 스티브 대표의 표정이 다급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