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employment - 고용 (2)
81.
***
송영도 교수의 연구실.
송 교수의 손에 들린 건 그간 썼던 권서준의 작품이었다.
다시 읽어도 여전히 심장을 두드리는 작품들.
특히 소설이 주는 여운은 깊고, 길었다.
처음 그의 작품을 봤을 때부터 크게 될 친구라 기대했었다.
그러나 송영도 교수는 자기 생각이 틀렸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큰 산이 되어 있었어...’
홀로 남은 송 교수는 천천히 손깍지를 낀 채 생각에 잠긴다.
조금 전 대화를 통해 느낀 감동의 여운이 아직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래, 서준이에겐 서준이의 역할이 있는 거야. 나에겐 나의 역할이 있는 거고.’
세계를 놀라게 할 천재 작가가 권서준이라면, 권서준이 말한 순문학계를 정화시킬 사람은 바로 자신이었다.
송 교수는 서랍을 열어 끝까지 밀어 넣었던 만년필을 매만진다.
‘아직 펜을 놓지 말라는 뜻인가...’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아있었다.
아직 가보지 못한 더 먼 길이 보인다.
마치 사라진 목표가 다시 생긴 기분.
송 교수는 이내 만년필을 쥔 손에 힘을 준다.
‘그래, 아직이야...’
명치부터 뜨끈하게 올라오는 열기.
그건 오래전에 꺼져버린 창작의 불꽃이었다.
***
송 교수의 부담감과 좌절.
난 그 모든 걸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전생에 느꼈던 것도 그와 같았으니까.
그래서 진심 어린 도움을 줄 수 있었다.
‘고맙다. 덕분에 잊고 있던 걸 깨달았네.’
보기 드물게 미소를 짓던 송 교수의 표정이 떠오른다.
‘이제 걱정할 필요는 없겠어.’
송 교수와 같은 작가들이 순문학계의 뿌리가 되어줘야 했다. 순수하게 작품을 사랑하고, 뜻한 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작가들.
‘그래야 내 작품이 더 빛날 수 있으니까.’
순문학 생태계를 지켜내야 할 존재들 역시 반드시 필요했다. 그래서 오늘의 만남도 의미가 있는 거고.
잠시 뒤,
나는 세 사람이 있는 벤치로 돌아왔다.
“아하, 중간 다리 역할처럼 잘하면 되겠네요?”
“그렇지. 역시 이해가 빠르네.”
타이밍 좋게 인수인계가 끝난 모양이었다.
“어? 인사드리고 왔어?”
“응. 인수인계는 끝난 거야?”
“물론이죠. 이제 나한테 맡기라고.”
감을 잡았는지 장현웅의 표정이 밝았다.
“자, 이제 졸업식 분위기 좀 내야지. 다 같이 사진 찍는 거 어때?”
누나가 휴대폰을 꺼내며 말한다.
“사진은 무슨, 그냥 밥이나 먹으러 가자.”
“그래도 오늘은 너희가 주인공이잖아. 졸업식은 평생 한 번뿐이라고. 얼른 저기 가서 한 번 서 봐.”
엄마까지 등 떠미는 바람에 마지못해 캠퍼스를 배경으로 섰다.
그런데 그때,
의외의 사람이 다가오고 있었다.
“작가님! 권 작가님!”
고개를 돌리니 뜻밖에도 정은미 피디였다.
“어? 피디님이 여긴 웬일이세요?”
“헉, 헉. 우리 작가님 졸업식인데 헉, 헉, 와야죠. 안녕하세요, 헉, 헉 어머니... 권지연 작가님...”
대본 문제로 우리 집에 몇 번 찾아온 터라 누나와 엄마와도 반갑게 인사를 했다.
“후우. 참, 여기요.”
정 피디는 숨을 고는 와중에 들고 온 커다란 꽃다발을 내민다.
“축하드립니다. 학교 다니면서 그런 멋진 대본도 써주시고,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풍성한 꽃다발에선 좋은 냄새가 풍긴다.
“뭐 이런 걸 다 준비하셨어요? 와주신 것만 해도 감사한 데.”
“에이, 그래도 빈손으로 올 순 없죠. 그리고 이거 뇌물이니까 부담 갖고 받으셔야 하는 거 아시죠? 소설 집필 끝나고 돌아오시면 정은미 피디라는 사람을 기억해 달라는 뇌물.”
“그런 거라면 제가 뇌물을 드려야 하는 거 아닌가요? 벌써부터 같이 하자는 작가님이 줄을 섰다고 본부장님께 들은 거 같은데.”
“아이고, 아니에요. 본부장님은 쓸데없는 말씀을...”
손사래를 치지만 사실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번 작품에서 보여준 정 피디의 실력은 놀라울 정도였으니까.
만일 다시 드라마 대본을 쓴다면 내 선택지는 두말할 것도 없이 정 피디였다. 물론 그사이에 더 많은 성장을 이뤄낸다는 가정하에.
그런데 그때,
정 피디가 갑자기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왜요? 누구 찾으세요?”
“아, 그게 저 말고 한 명 더 오기로 했거든요. 아, 마침 저기 오네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정 피디가 손을 흔든다.
누군가 싶어 고개를 돌린다.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컬이 들어간 긴 머리가 바람에 흩날리고,
나풀거리는 원피스에 곧게 뻗은 각선미를 가진 여자가 다가온다.
흡사 연예인이 아닐까 싶은 비주얼.
아니, 연예인이 맞았다.
“작가님, 졸업 축하드려요!”
나를 보자마자 깨발랄하게 달려와 꽃다발을 내미는 여자.
신하율이었다.
“시, 신하율?”
장현웅이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하고, 엄마와 누나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세 사람의 눈빛은 각기 다른 빛을 뗬지만 궁금한 건 하나였다.
‘대체 신하율이 여기엔 왜...’
물론 나 역시 궁금한 내용이었다.
“넌 여기 어쩐 일이야?”
“작가님 졸업식인데 와 봐야죠.”
신하율은 자연스럽게 엄마와 누나한테도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어머니. 이번에 작가님 작품에 출연한 배우인데 작가님한테 도움 받은 게 너무 많아서 이렇게 축하드리러 왔어요.”
“아이고, 연화잖아요. 잘 알죠.”
엄마가 반갑게 인사를 한다.
역시 어른들은 배우 이름보다 배역 이름으로 기억하는 게 쉬운 모양이었다.
“어머, 절 기억해주시다니 정말 감사해요.”
“연기 너무 잘하더라고요. 근데 실물이 훨씬 더 예쁘네요.”
“아, 정말요? 감사합니다.”
근데, 얘 은근 밝은 성격이네.
“하율아, 너 원래 이런 성격이었어?”
“그럼요. 제가 편의점 알바할 때 별명이 미스 친절이었거든요.”
손가락으로 V를 그리며 씨익 웃는다.
웃는 모습 하나는 참 예뻤다.
“근데, 우와, 우리 작가님은 학사모도 잘 어울리시네요. 잠깐만요.”
신하율은 본인 핸드폰으로 나를 찍기 시작했다.
“왜 찍는 거야?”
“당연히 소장해두려고요.”
“뭐?”
“자, 다들 모여 보세요.”
신하율은 마치 사진기사 된 것처럼 말했다. 그러자 정 피디가 나선다.
“에이, 이런 건 피디한테 맡겨야지. 하율이도 얼른 가봐.”
“정말요? 감사합니다!”
신하율이 신이 난 듯 쪼르르 다가와 내 옆에 선다.
“이러니까 마치 가족사진 찍는 거 같아요? 그렇죠, 어머니?”
“그래요? 사람 많으니까 좋네요.”
엄마는 신하율과 나를 번갈아 쳐다본다.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데, 제발 그런 미소 짓지 말라고. 아무 사이 아니니까.
넌지시 눈빛을 보내지만 엄마가 알아 들리는 없었다.
“자, 찍을게요. 하나, 둘, 셋!”
그때, 힘찬 정 피디의 목소리가 들린다.
찰칵.
마치 가족이 된 것처럼 5명이 함께 찍은 사진.
뜻밖의 사람들과 뜻밖의 순간에 찍은 사진이었지만 하나같이 행복해 보이는 얼굴이 내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신하율과 정 피디를 보내고,
우린 학교를 돌아다니며 사진을 좀 더 찍었다.
남는 건 사진뿐이라는 누나의 말 때문이었다.
학교 앞 식당에서 식사까지 마치고 난 뒤에야 우리는 집으로 향했다.
“이야, 이 차 뭐냐?”
처음 내 차를 탄 장현웅이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주변을 둘러본다.
“선물 받았어. 출판사에서.”
“대단하다. 역시 잘나가는 작가님은 다르네.”
“너도 곧 탈 수 있어. 이번 웹툰 잘해보자고.”
“...응. 나 진짜 열심히 할게.”
장현웅이 야무지게 입을 다문 채 대답한다.
잠시 뒤,
나는 장현웅을 내려주고 집 방향으로 핸들을 틀었다.
“참, 송 교수님은 잘 만나 뵙고 왔어?”
뒷좌석에 탄 엄마가 물었다.
“응. 축하 많이 해주셨어.”
“그래, 좋은 분이더라.”
엄마 말대로 송 교수는 좋은 사람이었다.
열정도, 재능도, 모두 가진 사람.
가르침에 있어서도 진심인 사람.
‘누구와는 다르게 말이지.’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교수라는 직함을 달고 가르침보다는 돈벌이에 혈안이 된 사람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박성규 학과장이었다.
내 작품을 가로채려고 했고, 여전히 대학원생들의 고혈을 빼먹는 악질 중의 악질.
그런데도 여전히 학계 인사로써 잘나가는 중이었다.
지이잉.
그때,
매일연예 윤석훈 기자에게 전화가 온다.
무슨 일인가 싶어 잠시 차를 세우고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윤 기자님. 무슨 일이시죠?”
-네, 작가님. 오늘 제가 작가님 모교에 인터뷰가 있어서 왔습니다.
“인터뷰요?”
-네, 박성규 교수라고 문창과 학과장님 아시죠?
알다마다.
모를 수가 없지
“네, 알고 있습니다.”
-그분과 침체된 연극계를 주제로 인터뷰를 하기로 해서요. 듣기로는 작가님의 작품에 큰 힘을 쓰신 분이라고 하더라고요.
“아, 그래요? 누가 그런 말을 했나요?”
내 말의 뉘앙스를 느낀 윤 기자가 재빨리 포착한다.
-혹시 가까운 사이가 아니신가요? 혹은 집필에 도움을 주셨든지...”
윤 기자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내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전혀요.”
***
늦은 오후.
교수 연구실.
박성규 교수는 기쁜 마음으로 자리에 앉았다. 윤석훈 기자의 인터뷰 때문이었다.
‘역시, 이 맛에 교수하지.’
대중들은 언제나 지식인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그리고 그걸 가장 그럴듯하게 잘하는 사람이 본인이었다.
“안녕하세요. 매일연예의 윤석훈 기자입니다.”
“안녕하세요. 박성규 교수입니다.”
박 교수가 흘러내린 머리를 다시 한번 다듬으며 미소를 짓는다.
“자, 그럼 시작할까요?”
“좋죠. 전 준비됐습니다.”
“음. 본론부터 시작하죠. 최근 연극 동향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시작부터 묵직한 주제였다.
물론 박 교수가 잘 아는 내용이라 문제 될 건 없었다.
“사실 연극계라고 해봐야 대학로에 위치한 160여 개의 소극장이 전부입니다. 그마저도 나날이 비싸지는 극장 대관료, 연극 관람 인구의 감소로 연극 특구다운 모습을 잃어버린 지 오래고요.”
일부러 거창하게 배경지식을 설명한다.
그리고 난 뒤에 본론으로 이어진다.
“현재로는 고작 2,500만 원 남짓한 비용으로 완성도 높은 연극을 만들기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이미 온갖 화려한 볼거리에 젖어 있는 관객을 설득하기도 어렵고요. 정부 차원의 장기적인 지원이 없이는 연극 생태계는 조만간 무너져 내리고 말 겁니다.”
“그래서 현재 공연계가 연극시장과 뮤지컬 시장으로 분화될 수밖에 없었던 거군요?”
“맞습니다. 암담한 상황 속에서 저 역시 연극보다는 뮤지컬 쪽을 고려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요.”
“아, 교수님께서도요?”
“네, 본교 졸업생이자 희곡작가인 최민준 작가와 작품 하나를 준비를 하고 있거든요.”
차기작에 대한 자연스러운 홍보도 잊지 않았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던 윤 기자가 다음 질문으로 넘어간다.
“말씀하신 대로 연극계 분위기가 많이 암담합니다. 그래도 얼마 전 한 줄기 빛 같은 소식도 있었죠. 바로 작품 「거장의 숨결」인데요. 듣기로는 박 교수님의 지도 학생이었다고 하더라고요.”
순간 훅 들어온 질문에 박 교수는 살짝 어색하게 미소를 짓는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태연하게 거짓말을 늘어놓는다.
“하하하. 그럼요. 서준이는 제가 아끼는 제자 중 하나예요. 그 「거장의 숨결」도 제가 수업 때 내준 과제였거든요.”
“어땠나요? 초고를 보신 유일한 분이시잖아요?”
잠시 고민하던 박 교수가 고개를 젓는다.
“장점이 분명했지만 엉성한 점도 많았죠. 그러나 전 서준이의 가능성을 봤습니다. 수차례 걸친 수정과 노력 끝에 좋은 결과물이 나온 거죠.”
“그럼 교수님이 크게 도와주신 거네요?”
“뭐, 제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사실은 사실이니까요.”
“음. 그렇군요?”
가만히 듣고 있던 윤 기자가 살짝 고개를 갸웃거린다. 뭔가 거슬린다는 표정.
그걸 알아차리지 못할 박 교수가 아니었다.
“왜 그러시죠?”
“그게, 권 작가한테 들은 거랑은 많이 달라서요.”
갑자기 박 교수의 표정이 굳어진다.
“...네?”
“방금 전에 권서준 작가와 잠깐 통화를 했었거든요. 신경 쓰지 마세요. 별 얘기는 없었으니까. 다만, 교수님 말씀과는 좀 달라서 그랬습니다.”
윤 기자가 웃으며 말한다.
“...”
반면에 박 교수의 얼굴이 확 달아오른다. 아마 자신의 허세가 고스란히 드러났을 테지.
“아무튼 인터뷰 감사했습니다. 그럼.”
짧은 인터뷰가 애매한 포인트에서 마무리된다.
철컥.
윤 기자는 문을 닫고 나가고,
박 교수는 분한 마음에 이를 간다.
“권서준, 너 이 자식...”
밀려오는 수치심에 박 교수의 손은 꽤 오랫동안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
며칠 뒤.
신문에선 연일 드라마 「이옥」의 시청률이 화제였다.
“작가님, 드디어 20퍼센트를 넘겼습니다!”
정통 사극, 그것도 요즘 같은 시대에 20%를 넘기다니 난리가 난 상황.
반면에 썬샤인 측은 그야말로 초상집이었다.
CP와 메인 작가의 불화설.
불성실한 태도를 보인 조한웅의 갑질.
게다가 감독의 하차 선언까지.
「검은 달」은 그야말로 좌초 직전의 상황이었다.
모든 건 인과응보였다.
놀랍지도 않은 소식에 나는 자연스럽게 다음 과업을 떠올렸다.
영국에 가기 전 마무리 지을 게 하나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연극 「거장의 숨결」.
그 사이 작품은 매진 행렬을 계속 이어갔다.
‘하지만 아직은 부족해.’
사실 「거장의 숨결」 판권을 가져온 가장 큰 이유는 다른 계획 때문이었다.
현재 한국 연극의 흥행은 한계가 있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내 작품이 닳고 닳을 때까지 반복 상영하고 싶지는 않았다.
‘대신 작품에 다른 옷을 입힐 생각이지.’
오페라에 비해 자유로운 음악.
연극에 비해 제약이 적은 연기.
노래와 춤, 그리고 연기가 어우러진 환상적인 무대가 떠오른다.
지이잉.
그리고 그때, 오늘 극단 서미연 감독에게 전화가 왔다.
타이밍이 아주 예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