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80화 (80/203)

80. employment - 고용 (1)

80.

***

교수 연구동.

권서준의 모친과 인사를 나눈 뒤 연구실로 돌아온 송영도 교수는 창밖을 보며 생각에 잠긴다.

영국 피어슨 출판사 올리버 편집장.

본인이 계약하고 싶어도 거절하는 거물급 인사였다. 오죽하면 와이즈 출판사 정영만 회장이 아니고서는 한국 작가에게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그런 올리버 편집장이 서준이의 작품을 탐내고 있어...’

며칠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송 교수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올리버 편집장이 직접 움직이고 있다면 그만큼 권서준에 대한 기대는 확신에 가깝다는 사실만 알 수 있을 뿐.

송 교수는 책장 꽂혀있는 권서준의 작품을 쭉 훑어본다.

과제로 제출한 짧은 단편.

백일장에서 1등을 차지한 시.

연극계에 신화를 쓰고 있는 대본.

그리고 순문학계를 깜짝 놀라게 만든 소설까지.

권서준의 한걸음 한 걸음이 새로운 역사가 되고 있었다.

기뻤다.

자신의 제자가, 한국의 순문학계를 책임질 신성(新星)이 탄생했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찼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거워진다.

자꾸만 바닥으로 내팽개쳐지는 자존감 때문이었다.

‘태양 옆에 선 반딧불의 심정이 이러할까.’

갈수록 초라해지는 자신의 모습에 깊은 회의감이 찾아온다.

송 교수는 의자에 몸을 깊게 묻은 채 애용하는 만년필을 가만히 손 위에서 굴린다.

반짝이던 영감도 사라지고, 어느 순간부터는 하고 싶은 이야기조차 희미해진 기분.

‘그래서 더 서준이에게 의지하는 거고...’

자신이 못다 이룬 꿈을 대리만족하고 싶은 걸까? 그렇게 싫어했던 부모 세대의 바람을 자신이 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들이 아닌, 제자에게.

입맛이 씁쓸했다.

송 교수는 들고 있던 만년필을 쥐었다가 천천히 내려놓는다.

그리고는 이내 보이지 않는 서랍 속 깊은 곳으로 밀어 넣는다.

“하아.”

한숨과 함께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본다.

때마침 새 한 마리가 창공을 누빈다.

경계 없이, 한계 없이 마음껏 나는 새가 부러웠다.

그래, 부러웠다.

저렇게 높이 날고 있는 어린 친구가.

***

십분 남짓한 대화.

장현웅과의 얘기는 깔끔하게 정리됐다.

“가자, 누나랑 엄마 왔는데 같이 사진 찍자.”

“좋지.”

우리는 식사를 할 겸 다시 엄마와 누나가 있는 자리로 돌아왔다.

“어? 서준아!”

벤치에 앉아 캠퍼스를 구경하고 있던 엄마가 나를 보며 손을 흔든다.

“안녕하세요, 어머니. 안녕하세요. 누나. 오랜만에 뵙네요.”

장현웅이 넉살 좋게 인사를 건넨다.

“그래, 현웅이도 이제 졸업이지? 정말 고생했다.”

엄마는 장현웅의 어깨를 두드려주다가 나를 바라본다.

“근데 어디 갔다가 이제 오는 거야?”

“죄송해요. 남자들끼리 할 얘기가 좀 있어서요.”

“어머, 얘 말하는 것 좀 봐.”

넉살 좋은 장현웅의 말에 엄마와 누나가 웃음을 터트린다.

“아 참, 누나 혹시 시간 되시면 저 인수인계 좀 해주실 수 있어요?”

“인수인계?”

“네, 제가 서준이 매니저 하기로 했거든요.”

놀란 누나가 나와 장현웅을 번갈아 보더니 웃는다.

“진짜? 너무 잘 됐다. 둘이 잘 맞잖아?”

“우리 권 작가님께서 제게 기회를 주신 거죠. 제가 혹시 알아야 할 게 있을까요?”

“음, 서준이 일 스타일은 너도 잘 알 테고, 그래 스케줄 관리부터 알려줄게.”

어느새 진지해지는 두 사람의 모습.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일을 잘한다.

제법이네.

벌써부터 제법 든든한 기운도 풍기고.

흐뭇하게 두 사람을 지켜보던 엄마가 말한다.

“참, 조금 전에 송 교수님 만났어.”

“선생님을?”

“어. 네 칭찬 많이 해주시더라.”

엄마는 흐뭇하게 웃으며 말한다.

엄마의 표정만 봐도 대충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예상할 수 있었다.

‘고맙네.’

내 입장에서는 이 학교에서 남은 몇 안 되는 좋은 인연이었다.

‘잘됐네. 인사 한번 드릴 겸 찾아뵙는 것도 나쁘지 않지.’

마침 두 사람은 한창 인수인계 삼매경이었다.

“엄마, 나 두 사람 얘기할 동안 잠깐 선생님 좀 뵙고 올게.”

“그래. 그래야지.”

***

나는 도서관에 잠깐 들른 뒤 연구동으로 향했다. 걸음을 옮기면서 송 교수를 떠올렸다.

최근 송 교수의 집필 분위기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마지막 작품이 무려 2년 전, 그 뒤로 송 교수는 거의 집필을 하지 않았다.

대신 송 교수는 강의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마치 자신의 대타를 찾듯이 간절한 티칭.

송 교수의 마음이 어떤지 나는 잘 알 수 있었다.

‘지독한 슬럼프에 빠진 거야.’

난 그의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직접 연구실을 찾은 거고.

내가 또 은혜를 잊는 사람은 아니니까.

생각에 잠겨 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새 송 교수의 연구실 앞이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서준이 왔구나? 그래, 벌써 졸업이라니 믿기기가 않네.”

“그러게요. 시간이 참 빠른 거 같아요.”

“특히 지난 2년의 시간은 더욱 빠르게 느껴지네.”

그 2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번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내가 변하기 시작한 그 시점.

문득 떠오르는 그 시절의 기억이 떠오른다.

합평, 조별 발표, 그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던 대학 생활. 글 못 쓰는 문창과 복학생의 처지는 비참할 정도로 암울하기만 했다.

선생님들도 무시하고, 자연스럽게 도태되어가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그리고 그 가운데 송 교수의 도움이 컸다.

‘유일하게 내 작품을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었지.’

그 어떤 선입견 없이 작품 그래도 평가하고, 인정하고 이끌어 준 사람. 그게 바로 송영도 교수였다.

자연스럽게 이 연구실에 처음 왔을 때의 기억도 떠오른다. 마치 나의 오랜 후원자 버글리 경을 만난 것처럼 반가웠던 그때의 기분.

그러고 보니 송 교수 역시 버글리 경처럼 지금까지 나에 대한 후원자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정 회장과의 인연을 연결해 준 것도 송 교수였고.

그런데,

지금 송 교수의 눈은 텅 비어 있었다.

그때와 달리 불꽃이 사그라진 얼굴이었다.

‘역시 슬럼프야.’

모든 창작자에게 찾아오는 고질병이자 불치병에 가까운 힘든 과정. 송 교수의 표정에선 그 어떤 열정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창작의 불꽃을 잃어버린 얼굴.

그 불 맛을 모르면 몰라도, 한 번 맛본 사람은 평생 잊지 못했다.

슬럼프에 빠진 예술가들이 술, 마약, 여자에 의지하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었고.

좀처럼 다시 살리기 어려운 창작의 불꽃.

물론 나는 해결책을 알고 있었다.

***

권서준을 마주한 송 교수 기분이 묘하다.

부쩍 커져 버린 녀석의 존재감 때문일까?

아니면 상대적으로 자신감을 잃은 자신의 모습 때문일까?

안개처럼 서서히 느껴지는 위압감에 생각이 많아진다.

“선생님은 잘 지내시죠?”

“나야 강의하고, 가끔 논평 쓰고 하지.”

“그거 말고요. 다음 작품 말입니다.”

“...”

송 교수의 얼굴이 다소 굳어진다.

“아직, 쓰고 싶은 게 없어서 말이야...”

바닥에 끌리는 말꼬리.

제자 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웠다.

차기작에 대한 압박감과 부담감.

동시에 자신의 실력이 노벨문학상에 범접할 수 없다는 한계를 느낀 뒤 펜을 놓고 말았다.

그런데,

또 한 번 벽을 느꼈다.

‘바로 이 녀석의 작품을 봤을 때였지.’

천재라 추앙받던 자신이었지만 권서준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엔 얼마 차이 안 난다고 볼 수도 있지만 결국 일류와 이류는 그 작은 차이로 구분되는 법이었다.

그 어떤 노력으로도 좁힐 수 없는 차이를 느낀 뒤엔 다시 펜을 들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 어쩌면 차라리 글을 포기하고, 인재 육성에 집중하는 게 더 나을지도...’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런데 그때, 권서준이 입을 연다.

“선생님, 다른 건 다 돼도 절필은 절대 안 됩니다.”

마치 자신의 마음을 읽은 듯한 말.

“그게 무슨 소리지?”

“말 그대롭니다. 선생님의 작품을 기다리는 사람이 많으니까요.”

“...내 작품을 기다린다고?”

권서준이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이죠. 그중 한 명이 바로 저고요.”

“...”

송 교수는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젓는다.

“위로는 고맙지만, 이젠 그만하는 게 맞는 거 같아. 내 글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지도 이제는 모르겠고.”

제자 앞에서 할 얘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권서준 앞에선 자신도 모르게 속 얘기를 꺼내고 만다.

‘정 회장님께서 말씀하신 것도 이런 기분인 건가?’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이건 누군가 해결해줄 수 있는 고민이 아니었다. 스스로 찾아내야 하지만 스스로 찾아낼 수 없는 상황.

‘그래서 더 암담한 거고.’

송 교수 역시 쉽게 결정한 건 아니었다.

평생 글만 써온 사람이 절필을 고심할 정도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결심이었을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그때, 권서준이 책을 하나 꺼낸다.

“이건...”

송 교수의 눈빛이 순간 흔들린다.

「초원」

자신의 등단 작품이었다.

황무지를 개간하는 한 노인의 삶을 통해 인생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진 작품이었다.

끝내 불모지를 푸른 초지로 만들어내는 엔딩은 다소 환상적이지만 송 교수 자신의 꿈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덕분에 수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받은 것도 사실이고.

책을 바라보던 권서준이 천천히 입을 연다.

“선생님의 작품엔 낭만과 힘이 있습니다. 제가 처음 문창과 과제로 제출한 것도 바로 선생님 작품이었고요.”

권서준은 이내 시선을 옮겨 책장을 바라본다.

거기엔 20대 송 교수 자신이 썼던 작품들이 쭉 진열되어 있었다.

등단과 함께 정 회장과의 인연을 만들어주고, 작가로서 살아가기로 결심하게 만들어준 작품들.

잊지 못할 옛 기억과 함께 감수성이 뭉클하고 솟구친다.

“그래, 그때만 해도 내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 줄 알았으니까.”

혈기 어린 마음에 대한민국 문학계를 바꿔놓겠다고 자신했다. 부커상을 수상할 때까지만 해도 그 꿈을 이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쉽지 않았어. 구태에 젖어든 문학계는 바뀌지 않았고, 한국의 문학은 세계에서 무시당하기 일쑤였으니까. 이젠 나처럼 기성세대가 아닌, 다음 세대에게 그 기회를 넘기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어. 결국 너처럼 이 썩은 문학계를 뒤집을 천재가 간절한 상황이니까.”

자조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러나 권서준의 눈빛은 오히려 단단해진다.

“문학계를 향한 선생님의 열정과 의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학계는 결코 한 명의 천재로 바뀌지 않습니다.”

송 교수의 눈빛이 흔들린다.

권서준은 송 교수의 생각을 정확히 읽고 있었다.

“오히려 문학계가 썩고 고이지 않게 정화시켜 줄 수 있는 연륜 있는 작가들의 깊이 있는 작품이 더 필요한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두 개의 작품으로 세계를 놀라게 할 순 있지만, 결국 그 나라의 문학이 존중받으려면 보편적인 문학 수준이 올라야 하는 거니까요.”

“...”

송영도 교수는 잠시 생각에 잠긴다.

그동안 자신이 치열하게 안고 온 고민이었기 때문이었다.

‘세상을 바꿀 수 없다면 왜 글을 써야 하는 걸까?’

바꿀 수 없는 글은 필요 없다 여겼다.

그래서 이 난국을 타개할 천재 작가를 간절히 기다렸다.

그런데,

오늘에서야 의문에 대한 힌트를 찾은 기분이었다.

세상을 바꿀 만한 글을 쓰지 못해서 좌절하는 게 아니라 나는 왜 글을 써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진다.

‘나는 왜 글을 쓰기 시작한 거지?’

자신의 첫 작품을 보며 생각에 잠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노인의 꿈은 그저 푸른 숲을 한번 보는 것이었다. 그 꿈을 가슴에 간직한 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해나갔다.

황무지를 바라보는 노인은 결코 포기하는 법이 없었다. 무수한 사람들이 놀리고 손가락질해도 하루에 한 포기씩, 풀을 심어 갈 뿐이었다.

그 결과,

황무지는 초원으로 바뀌었고,

노인은 꿈을 이룰 수 있었다.

‘그래, 그거였어...’

그저 글을 쓰는 게 좋았다.

망가진 자신의 인생과 황무지와 같은 이 세상이 바뀌기를 소망하며 그런 세상을 창조해내는 것이 즐거웠다.

순간 잊고 있던 찌릿한 느낌이 뒤통수를 자극하고는 이내 등줄기를 훑고 내려간다.

바로 글이 주는 원초적인 기쁨과 흥분.

‘그래, 내가 해야 할 일은 그저 포기하지 않고 쓰기만 하면 될 뿐인 것을...’

가벼운 전율과 함께 손가락 끝이 가늘게 떨린다.

십여 년의 방황 끝에 드디어 잃어버렸던 목적을 찾은 기분이었다.

그것도 아들뻘인 이 젊은 친구에게서 그 귀한 깨달음을 얻고 말았다.

“넌 대체...”

울컥한 마음에 목소리가 떨린다.

마치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큰 산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그래, 그때도 그랬었지.’

처음 이 연구실에서 권서준과 대화를 나눌 때였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번역하고 알려주던 그때의 기억.

[꺼져라, 꺼져라, 덧없는 불빛이여!]

맥베스의 대사를 번역하던 권서준의 모습을 보면서 느낀 감동이 떠오른다.

놀람과 감탄.

마치 거장을 직접 마주했을 때의 벅찬 감동을 느꼈던 그 순간이 떠오른다.

‘그때, 내가 잘 못 본 게 아니었어...’

권서준은 이미 또 한 명의 거장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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