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manager - 관리자, 매니저 (3)
79.
***
며칠 뒤.
나는 집 근처에서 다시 한번 오수정 대리를 만났다.
“포스 극단과 조율 끝났습니다. 계약은 연기하기로 했고, 작가님 영국 방문에 맞춰서 진행하는 것으로 했습니다.”
역시나 흠잡을 것 없이 완벽한 일 처리였다.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은요. 참, 권지연 작가님은 잘 지내시죠?”
자료를 정리하던 오 대리가 누나의 안부를 묻는다.
“네, 며칠 전에 와이즈 출판사에 첫 출근 했어요. 이제야 적성을 찾은 거죠.”
“아, 그렇군요. 축하할 일이네요. 근데, 그럼 다른 서브 작가가 필요하지는 않으세요?”
“아직은 괜찮습니다. 만일 다음 작품 들어가게 되면 그때 또 요청할게요.”
“그럼 혹시 매니저는 어떠세요?”
“매니저요?”
“네, 출판 쪽 성공 이후 각종 계약과 사인회 요청으로 바쁘시잖아요. 지금까지야 권지연 작가님이 맡아주셨지만 앞으로 혼자 감당하기에는 버거울 텐데요?”
오 대리의 말이 맞았다.
벌써부터 걸려오는 전화가 많아 휴대폰을 하나 더 살까 고민 중이었으니까.
혼자선 스케줄 관리도 힘들 정도.
유명 드라마 작가들이야 서브 작가로 여럿을 두지만 다양한 장르를 진행하는 내 입장에선 정식 매니저가 있는 게 좋았다.
물론 단순히 매니저라고 하기보단 나와 평생을 함께 갈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했다.
“필요하시면 제가 위에 보고해볼까요?”
적절한 사람을 붙여주려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안 그래도 봐둔 사람이 있습니다.”
예의상 거절하는 게 아니었다.
마침 적격인 사람이 하나 있었다.
***
슬슬 코스모스가 피기 시작하는 계절.
하늘색도 선명해지며 공기도 상쾌했다.
모든 게 청명한 하루.
그러나 장현웅의 얼굴은 그렇지 못했다.
이른 아침 세 가족이 모인 식탁.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젓가락질 소리만 들린다.
그때,
먼저 침묵을 깬 건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현웅이 너, 취업은 어떻게 되고 있냐?”
“...”
매번 입을 다물게 만드는 마법의 단어였다. 목구멍을 넘어가던 밥이 콱 막히는 기분.
옆에 있던 어머니가 재빨리 물 잔을 내민다. 간신히 한 모금 마시자 그나마 조금 살 것 같았다.
“아직... 준비가 덜 돼서요...”
“준비가 덜 된 게 아니라 안 하는 건 아니고?”
“여보...”
옆에 있던 엄마가 말리려 하자 아버지의 미간이 더욱 찌푸려진다.
“당신이 그렇게 물러터지니까 얘가 이 나이 먹도록 정신 못 차리고 이러는 거 아냐?”
“애가 노는 것도 아니고 열심히 하잖아요.”
“열심? 될 법한 일에 열중해도 모자랄 판에 그림? 지금 몇 년째야? 우리가 넉넉하기라도 하면 몰라, 빠듯한 살림에 대학까지 보내줬으면 됐지. 뭘 더 해야 하는데? 이 나이 먹었으면 제 앞가림은 해야 하는 거 아냐?”
차갑긴 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사실 처음 그림을 그리겠다고 했을 때 가장 지지해준 사람도 아버지였고.
그래서 장현웅의 마음도 더 무거웠다.
“길이 아닌 걸 알면 포기할 줄도 알아야지. 붙잡고 있다고 능사는 아니라고.”
“...”
“에휴, 말을 말아야지.”
아버지는 밥그릇 다 비우지 못한 채 일어난다.
원망보다는 죄송한 마음에 장현웅 역시 입맛이 사라진다. 자연스럽게 수저를 내려놓자 어머니가 걱정스럽게 쳐다본다.
“왜 더 먹지?”
“배불러서요...”
장현웅은 도망치듯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는다.
“후...”
한숨을 한 번 내쉰 뒤 다시 펜을 잡는다.
그러나 좀처럼 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결국 툭 펜을 내려놓는다.
양손으로 머리를 쥐어뜯는다.
사실 처음 웹툰을 시작한 이유는 분명했다.
‘돈을 많이 벌 수 있으니까.’
그림을 좋아하긴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돈 때문이었다.
공부로 성공하기엔 애초에 글렀고, 그나마 좋아하는 그림으로 넉넉하지 못한 집안에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하아, 이젠 포기해야 하나?’
스토리가 문제라는 생각에 문창과로 전과까지 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투고는 죄다 실패하고,
공모전에선 본선 진출도 못 하고 광탈하기 일쑤.
‘그래, 취업 준비가 맞을지도 몰라. 더 늦기 전에...’
꿈은 꿈일 뿐이었다.
아버지의 말대로 포기할 줄도 아는 게 용기였다.
“...”
입술을 곱씹던 장현웅이 외투를 챙겨 일어난다.
온종일 이불 속에 숨고 싶었지만 오늘은 특별한 날이었으니까.
죄송한 마음에 가족들에겐 말도 못 한 대학의 마지막 행사.
졸업식이었다.
***
드디어 졸업식 당일.
나는 조금 이른 시간에 학교에 도착했다.
사실 대학 졸업식은 생각보다 별것 없었다.
특히 가을에 졸업하는 코스모스 졸업은 더욱 그랬고.
학사모를 쓰고 가족, 친구들과 사진을 찍고, 그게 전부였다.
‘벌써 졸업이라니, 믿기지 않는군.’
나는 마지막으로 캠퍼스를 둘러본다.
하늘은 아름답고,
캠퍼스 교정은 푸르렀고,
바람은 더없이 시원하게 불어왔다.
힘든 일도 많았지만 배운 것도 적지 않았던 대학 생활.
추억이 소복소복 쌓인 캠퍼스의 모습을 눈으로 훑으며 옛 기억을 되새긴다.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길게 이어진 현수막이 보인다. 수많은 재학생과 졸업생의 이름 속에 익숙한 이름이 보인다.
저기에 이름 한 번 붙여지는 게 소원이었던 시절이 있었지.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드라마 「이옥」작가 권서준 문창과 4]
[‘덧없는 행운이여’ 와이즈 문학상 당선 권서준 문창과 4]
[희곡 ‘거장의 숨결’ 작가 권서준]
내 이름이 길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2년 남짓한 시간에 참 많은 것이 달라진 상황, 감회가 새로웠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자 엄마와 누나가 나를 보고 다가온다.
“어디 갔었어? 전화는 왜 또 안 받고?”
“아, 무음으로 해서 몰랐네.”
쉬지 않고 걸려오는 전화에 무음으로 해두는 게 일상이 되고 말았다.
“잠깐 산책 좀 하고 왔어.”
“그래, 마지막이니까 한 번 둘러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자, 이거.”
누나가 들고 온 꽃다발을 내민다.
좋은 향기가 물씬 풍긴다.
“졸업 축하해.”
“고마워.”
“고생 많았다, 서준아.”
엄마는 대견한 듯 내 팔을 쓸어내린다.
“고생은 엄마가 더 했지. 우리 남매 대학까지 졸업시키느라 손에 물 마를 일이 없었잖아.”
“그거야 당연하지. 엄만데...”
“하나도 안 당연해. 그러니까 앞으로는 호강만 하시라고요.”
나는 들고 있던 학사모를 엄마에게 씌워줬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그런데 저 멀리 지나가는 사람이 보인다.
어깨가 축 처지고 고개를 박고 걷는 사람.
장현웅이었다.
“어? 쟤 현웅이 아니니?”
엄마가 먼저 알아봤다.
“맞네. 근데 왜 혼자지? 가족들은 안 왔나?”
누나도 의아한 듯 쳐다본다.
나는 녀석의 표정을 보자마자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있었다.
“엄마, 나 잠시만 현웅이한테 다녀올게.”
“혼자 왔으면 차라리 부르지 그래? 이따 같이 밥도 먹으면 좋잖아?”
“잠깐이면 돼. 할 얘기가 있어서.”
나는 서둘러 장현웅을 쫓았다.
***
도서관 뒤편.
한참을 쫓아간 뒤에야 간신히 녀석을 붙잡을 수 있었다.
“야, 장현웅? 장현웅!”
몇 번을 불러도 모르던 녀석이 그제야 고개를 돌린다.
“어, 너 언제 왔어?”
심각하던 얼굴이 나를 보고 나서야 풀린다.
“언제 오긴, 혼자 온 거야?”
장현웅이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림으로 돈 한 푼 못 벌고, 게다가 취업도 못 한 아들이 어디 염치가 있어야지. 졸업식이라는 것도 말씀 못 드렸어.”
말투에서 진한 죄책감이 느껴진다.
“넌?”
“엄마랑 누나랑 왔지. 안 그래도 너랑 같이 밥 먹자고 하시더라.”
“진짜? 그거 좋지.”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녀석의 표정.
“그나저나, 드디어 끝났네.”
캠퍼스를 바라보는 장현웅의 눈에 복잡한 심경이 떠오른다.
“졸업도 했는데, 이제 뭐 할 거야?”
“글쎄다. 뭐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한숨 섞인 말투.
그러다 이내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
“솔직히 아직 모르겠어. 일단은 알바하면서 생각해보려고.”
“왜? 그림 포기하게?”
잠시 생각에 잠긴 녀석이 천천히 입을 연다.
“그건 아닌데, 모르겠다. 솔직히 말해서 매일 같이 그리기는 하는데 오히려 뭔가 막힌 기분이야. 영혼 없이 선만 따는 기분이랄까? 그렇다고 다 포기하자니, 그것도 쉽지 않네.”
말 그대로 진퇴양난에 빠진 상황.
한숨만큼이나 녀석의 고민은 깊었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취업하는 게 맞긴 한 거 같아. 그게 부모님도 좀 더 좋아하실 거 같고...”
원해서 하는 선택이 아닌 상황에 어쩔 수 없이 떠밀리듯 내린 결정이었다.
그걸 어떻게 아냐고?
그 시절 나 역시 저런 표정으로 글을 썼으니까.
“넌?”
장현웅이 애써 웃으며 묻는다.
“난 조만간 영국 갈 거 같아.”
“영국?”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영국에서 내 희곡에 관심을 보여서.”
“우와, 너 정말 대단하다. 하긴, 최근 성적 보니까 장난 아니긴 하더라.”
“최근 성적?”
내 물음에 녀석이 씨익 웃더니 휴대폰을 꺼낸다.
“이거 봐.”
화면엔 빼곡히 정리되어 있는 파일이 보인다.
장현웅은 내 책 판매 순위와 드라마 시청률 변경 추이를 기록하고 있었다.
“천재 작가의 발자취를 친구인 내가 기억해야지. 누가 물어보면 이 친구가 내 친구라고 말할 수 있게 말이야.”
친구의 성공에 언제나 진심인 녀석.
친구의 실패엔 언제나 진심으로 위로하는 녀석.
생각해 보면 이 녀석 덕분에 졸업을 할 수도 있었다. 이 녀석이 없었다면 전생을 깨닫기도 전에 포기했을 테니까.
이제 마음에 담아왔던 제안을 던질 차례였다.
“현웅아.”
“어?”
“너 나랑 같이 영국 갈래?”
***
“...”
순간 장현웅은 눈을 깜빡였다.
갑자기 영국을 같이 가자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탓이었다.
여행을 가자는 거면 형편이 안 되는 걸 알고 있을 테니 그럴 리 없었다. 다른 이유라고 해도 좀 전에 취업 걱정을 털어놓은 상황이라 말이 되지 않고.
게다가 권서준은 헛소리를 하는 친구가 아니었다. 대체 무슨 뜻일까? 그러나 답은 권서준에게 있었다.
“영국을, 같이 가자고?”
“날 도와달라는 의미야. 앞으로 일이 많이 바쁠 거 같거든. 근데 나도 믿고 맡길 사람이 필요하니까.”
“설마, 매니저를 말하는 거야?”
권서준이 고개를 끄덕인다.
당장 할 일도 없는 상황에서 너무나 고마운 제안이었다.
“그리고 내가 약속했잖아. 너한테 스토리 주기로.”
하긴 약속하긴 했지.
그러나 권서준의 성공과 함께 일정이 바빠진 탓에 물어보지 못한 이야기였다.
‘혹시 서준이한테 부담이 될지도 모르니까.’
친구에게 짐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런데 그 약속을 기억하고 있다니 괜스레 가슴이 뜨끈해진다.
“그림을 그려봐. 우리 이야기를.”
“...어?”
장현웅이 눈을 크게 뜬다.
그제야 권서준의 말이 이해되기 시작한다.
“마치 셜록을 지켜보는 왓슨처럼?”
권서준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마침 영국이면 셜록 홈즈의 나라잖아. 셜록과 왓슨의 환상적인 콤비가 진짜 꿀잼이기도 하고. 어때? 재미있을 거 같지 않아?”
천재 작가로 주목받는 권서준의 모습.
에세이이면서 동시에 웹툰, 게다가 SNS도 하지 않는 천재 작가의 일거수일투족을 담을 수 있는 기사 형식까지.
전혀 새로운 방식의 웹툰이었다.
무엇보다 마음이 끌리는 가장 큰 이유는,
‘재미있을 거 같아...’
가만히 취업만 생각하는 삶보다,
방에 틀어박혀 온종일 늘지도 않는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훨씬 더 재미있을 거 같았다.
‘아니, 살아있다는 걸 느낄 수 있지 않을까..’
기쁜 마음과 함께 순간 현실적인 상황이 떠오른다.
“그럼 나야 좋지만... 정말 그대로 돼?”
“물론이지.”
“그럼, 나 하고 싶어. 다만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데, 이런 도움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어...”
솔직한 마음.
그러자 권서준이 미소를 짓는다.
“같이 기뻐해 주고, 같이 힘들어했잖아. 그거면 충분한 거 아닌가? 우리 친구니까.”
“...”
친구라...
그래, 우린 친구였다.
다만 대부분은 어느 한쪽이 성공하면 달라지는 관계이기도 했다.
그런데,
권서준 이 자식은 끝까지 친구를 포기하는 법이 없었다.
갑자기 명치 부근이 울컥거린다.
그러자 권서준이 인상을 찌푸린다.
“울지 마라. 사내새끼 눈물은 딱 질색이니까.”
장현웅은 코를 훌쩍이며 갑자기 솟구친 눈물을 안으로 갈무리한다.
“안 울어 인마. 울긴 무슨...”
그러나 이미 뜨끈해진 눈시울은 식을 줄을 몰랐다.
그러자 권서준이 어깨동무를 한다.
“가자, 얼른 사진 찍고 밥 먹으러 가자.”
묵직한 무게감.
그게 진정한 친구끼리 나누는 진짜 우정의 무게였다.
***
“얜 무슨 얘기를 하기에 이렇게 안 와?”
“그러게, 할 얘기 있으면 같이 와서 사진 찍고 밥 먹으면서 하지.”
꽤 오래 오지 않는 권서준 때문에 엄마는 목을 빼고 기다렸다.
그런데 그때,
“안녕하세요.”
누군가 와서 인사를 한다.
아들 대학에 아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 보는데, 얼굴이 낯이 익었다.
“아, 서준이 교수님이시군요?”
작년에 공항에서 만난 적이 있는 송영도 교수였다. 안면이 있었기에 엄마도 인사를 나눈다.
“졸업식이라 오셨나 봅니다.”
“네, 그동안 정말 감사합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감사는 오히려 제가 드려야죠.”
“...네?”
엄마는 놀라서 되묻는다.
“서준이가 이뤄낸 일이 엄청나거든요. 학과 내에서도, 학교를 대표해서도 다른 학생들에게 엄청난 귀감이 됐습니다.”
학부모 입장에서 이보다 더한 감동이 있을까. 엄마의 눈시울이 순간 붉어진다.
“정말 훌륭한 아드님을 키우셨습니다.”
“아, 아닙니다. 제가 뭐한 게 있다고요. 그저 우리 서준이가 바르게 커 준 거죠.”
엄마는 얼른 눈물을 삼킨 채 미소를 짓는다.
“집에서 해준 게 없는데 어떻게 이렇게 됐나 싶어요. 그저 놀라울 뿐이죠.”
지켜보던 송 교수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아직 놀라기엔 이르실 겁니다.”
“네?”
“서준이는 이제 시작이거든요.”
송 교수의 확신.
엄마의 눈이 커진다.
사실 송 교수는 확신은 철저히 데이터에 근거한 확신이었다.
며칠 전 친분이 있는 올리버 편집장의 메일 때문이었다.
[권서준 작가의 차기작과 계약할 생각입니다.]
게다가 듣기로는 포스 극단에서조차 녀석의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했다.
젊은 신진작가의 영국 진출이라...
몇 번을 확인해도 믿기지 않은 성과였다.
자연스럽게 송 교수의 가슴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서준아, 대체 넌 어디까지 날아오를 거냐?’
질투도, 시기도 아니었다.
그저 아끼는 제자이자 후배인 한 천재 작가를 향한 기대감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