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76화 (76/203)

# 76. defeat - 패배시키다, 물리치다 (7)

76.

***

드라마 「이옥」 방영 20분 전.

진영민 CP는 타이거 스튜디오 옥상에 홀로 올랐다.

“후우.”

최근 매일같이 느끼는 시청률 압박에 끊었던 담배를 5년 만에 다시 찾았다.

막 불을 붙이려는데 누군가 다가와 담배를 낚아챈다.

“아니, 어떤 놈이...”

확 뒤를 돌아보니 낯익은 얼굴.

하 본부장이었다.

“인마, 기껏 어렵게 끊어놓고 뭐 하는 거야?”

본부장의 핀잔에 진영민 CP가 어색하게 시선을 피한다.

“여긴 왜 올라오셨어요?”

“왜긴, 딱 봐도 이럴 거 같아서 올라왔지. 좋지도 않은 거 왜 또 손대려고 하는 거야?”

진영민 CP는 대답하지 못했다.

불안한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본부장은 이미 진영민 CP의 마음을 아는 듯 혀를 찬다.

“아니, 정작 연출자인 정은미는 시청률 잘 나온다고 신났는데 넌 대체 왜 그래?”

한숨을 한번 푹 내쉰 진영민 CP가 입을 연다.

“아직도 그 자식 작품 아래잖아요.”

지켜보던 본부장이 딱한 듯 고개를 젓는다.

“야, 그건 이제 그만 신경 쓰라니까? 원래 누구 미워하면 본인 마음이 더 상하는 거야. 너는 네 갈 길 가면 된다고 몇 번을 말해? 잘 나가다가 꼭 한 번씩 이러더라?”

“그걸 제가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잖아요. 그래도 한 번쯤은 제가 그 인간들보다 낫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요. 이게 오기이건, 객기이건 상관없이 한 번쯤은 그래야 이 울분이 풀릴 거 같다고요.”

돌덩어리처럼 명치를 짓누르는 이 기분.

누구보다 떨쳐내고 싶은 건 진영민 CP 본인이었다.

벌써 10년이나 이어진 울분에 움켜쥔 주먹에 더욱 힘이 들어간다.

그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본부장이기에 더 말하지 못하고 뒷짐을 진 채 시선을 돌린다.

“그래서, 오늘 결과는 어떨 거 같아?”

“당연히 이겨야죠. 아니, 이길 겁니다.”

“자신 있어?”

“네, 없었는데 권 작가 아이디어 듣고 생겼어요.”

진영민 CP가 고개를 끄덕인다.

지켜보던 본부장도 피식 웃는다.

“그건 나랑 같은 생각이네.”

이내 야경을 향해 시선을 옮긴 본부장이 말을 잇는다.

“이 작품 여기까지 끌고 온 게 권 작가야. 누구보다 이 작품의 흐름을 아는 것도 권 작가고. 게다가 권 작가 말대로 5화 때 승기를 잡는다? 그럼 저쪽 시청률 쭉 빼앗아 올 수 있어. 저쪽이야 지금 매화마다 칼싸움하느라 정신없을 테니까.”

“맞아요. 한두 씬은 멋있어도 주야장천 칼싸움만 하면 그것도 곧 식상해지니까요.”

“그래. 근데 또 칼싸움이라는 게 한번 빠져들면 그것도 재미있게 느껴진단 말이지. 그러니 중간에 한 번 우리 쪽으로 시선을 확 끌어오면...”

“다시 「검은 달」을 봤을 때 상대적으로 이야기가 단순해 보이는 거죠.”

장단이 맞아떨어지는 대화에 본부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 김연숙 작가의 특기인 명대사도 판이 깔려야 명대사지, 저렇게 칼만 휘두르면서 하면 헛소리밖에 더 되겠어?”

“그래서 제가 말했잖아요. 당연히 이길 거라고.”

“그래, 자식아. 그런 자세 좋잖아. 그럼 이제 가서 확인해 보자고. 과연 어느 놈이 나가떨어지는지.”

본부장이 진영민 CP의 어깨를 두드린다.

그제야 진영민 CP의 얼굴에도 편안한 미소가 떠오른다.

***

늦은 밤.

썬샤인 제작사 회의실.

커다란 회의실 스크린에 「검은 달」 5화가 흘러나오고 있다.

거친 칼싸움 끝에 목에 칼을 겨누는 악당이 주인공을 깎아지른 낭떠러지로 밀어버린다.

풍덩.

물보라가 피어오르며 주인공이 물에 서서히 잠긴다.

“가자.”

죽었다고 생각한 악당들이 멀어지고.

그러나 뒤돌아선 악당들을 배경으로 물속에서 기포가 올라온다.

그리고 잠시 뒤,

고요한 물속에서 죽은 줄 알았던 주인공의 손이 불쑥 올라온다.

“이대로... 눈을 감을 수는 없어.”

충혈된 눈으로 본격적인 복수를 예고하는 주인공. 그 강렬한 시선 위로 엔딩 크레딧이 올라온다.

“와우!”

짝짝.

회의실에 작은 박수 소리가 울린다.

흡족한 얼굴로 시청하던 구진식 CP였다.

“좋아, 아주 좋구먼.”

중요한 지점에서 임팩트 있는 마무리로 끝난 상황. 연출도 좋았고, 예고편도 공들인 탓에 이슈 몰이도 제대로 할 수 있었다.

‘자, 이 정도면 우리 시청률은 당연히 오를 테고, 그쪽은 좀 어떻게 되려나? 오늘은 확 바닥 좀 안 쳐주려나?’

구진식 CP는 타이거 스튜디오 측 그래프가 확 꺾이길 바랐다.

경쟁사를 향한 본능적인 저주였다.

“야, 저쪽은 어때? 오늘 같은 날 그래프 좀 확 꺾여주면 좋을 텐데 말이야.”

“어?”

그때, 웃으며 시청률을 확인하던 직원의 눈이 커진다.

“왜 이렇게 놀라? 진짜로 그래프가 확 꺾인 거야?”

“네... 그게 꺾이긴 꺾였는데...”

“그래, 이쯤에서 한 번 엎어져 줘야 진영민이지.”

구진식 CP가 신이 나서 직원이 들고 있던 시청률 자료를 낚아채 확인한다.

“어디보자...”

그런데 어딘가 조금 이상했다.

그래프가 꺾이긴 했는데 구진식 CP의 생각과 꺾이는 방향이 달랐다.

그것도 아주 많이.

“어, 어라?”

***

“완벽해, 완벽했어!”

타이거 스튜디오 사무실.

5화가 끝나자 본부장이 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다.

정조와 이옥의 대립이 본격적으로 드러나자 그 묵직한 기세 싸움에 숨 막힐 듯한 전개가 한 화내내 이어졌다.

그리고 드디어 집계된 시청률.

“하아, 떨린다...”

결과표를 받은 본부장이 눈을 조심스럽게 뜨며 결과를 확인한다. 먼저 썬샤인 작품부터 확인했다.

▶ 「검은 달」 시청률 : 11%

“하아, 살짝 떨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저쪽 시청률은 아직 단단하네...”

본부장의 얼굴에 살짝 불안감이 흐른다.

그러나 이어서 「이옥」의 시청률을 확인한 본부장의 눈이 점점 커진다.

“...어?”

본부장은 혹시나 잘못 봤나 싶어 눈을 비비고 다시 보지만 숫자는 달라지지 않았다.

▶ 「이옥」 시청률 13%

분명 13%였다.

“시, 십삼 프로?”

“...네?”

“잠깐만... 「검은 달」이 11퍼센트니까... 여, 영민아... 이겼다... 우리가 이겼다고!”

본부장이 소리를 지르자 사람들의 시선이 모인다.

“우리가 시청률 이겼다고. 「검은 달」을 처음으로 역전했다고!”

“그럼 우리가 1등인 거예요?”

“그래, 이제 우리가 1등이라고!”

“와!!!”

그제야 나머지 사람들도 다 같이 환호성을 지른다.

“그것도 우리 시청률은 올랐고, 저쪽은 머물렀다는 게 의미가 있어.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

“우리 드라마를 선택한 시청자들이 더 많이 생겼다는 뜻이죠.”

진영민 CP가 웃으며 대답한다.

본부장이 이내 감격한 얼굴로 내게 다가온다.

“이게 다 2화 분량을 압축한 덕뿐입니다. 보세요, 이 그래프를...”

본부장이 시청률 표를 가리킨다.

정확히 5화에 중반부부터 급격하게 오른 시청률 그래프의 모양.

정확히 내 예상대로였다.

“진짜 작가님의 선견지명은 대단하네요. 따라잡을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단번에 역전까지 하다니... 정말 감탄만 나옵니다.”

진영민 CP까지 격한 반응을 보인다.

하긴 그동안 그렇게 수모를 당했는데 어쩌면 이 정도 반응은 당연할지도.

“감사합니다. 모두 고생하신 덕에 얻어낸 결과죠.”

“이 정도 고생은 고생도 아니죠. 이런 시청률만 얻을 수 있다면 말이에요. 안 그래? 진 CP?”

“맞죠. 아마 촬영 중인 정 피디도 신나서 춤추고 있을걸요?”

안 봐도 훤했다.

“그럼 이제 전 가봐야겠네요.”

“네? 어디를요?”

“한 회 분량이 사라졌으니 다시 채워야죠.”

추가 대본 분량을 채워야 했다.

뭐 물론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오래 걸릴 일도 아니고.

***

다음 날.

기사들은 앞 다퉈 드라마 「이옥」에 대한 성공을 대서특필했다.

[정조-이옥 대립... ‘이옥’ 자체 최고 시청률 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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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CN 사극 ‘이옥’이 또 한 번 자체 최고 시청률 기록을 경신했다.

지난 15일 방송한 ‘이옥’ 5회는 시청률 13%(닐론코리아 제공, 전국 가구 기준)로 동시간대 1위를 차지하는 것은 물론, 자체 최고 기록을 또 한 번 경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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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커뮤니티의 반응도 뜨거웠다.

-속도감 있는 진행에 넋 놓고 봤네.

-이옥 보다가 잠깐 「검은 달」 보려니까 유치해서 못 보겠던데?

└내 말이 칼싸움도 한두 번이지. 매화마다 칼질하는데 난 요리 드라마인 줄.

-배우라는 직업은 진짜 대단한 듯. 이젠 이옥의 대사만 들어도 마음이 울컥거릴 정도네...

-OST 분위기랑 드라마가 너무 잘 맞아서 마음에 더 와닿네요.

-인정받지 못하고 외면당한 이옥의 삶과 강원준의 연기가 진짜 찰떡인 듯.

-처음엔 그저 흔하디흔한 사극인 줄 알았는데... 초반 서사부터 충격적이라 눈을 뗄 수가 없었네요. 배우들의 빈틈없는 연기는 말할 것도 없고, 영상미까지 완벽!

-이런 웰메이드 작품이 있다니... 오랜만에 퇴근이 기다려지는 작품을 만났네요.

-신하율의 목소리와 발음은 진짜 압권이네요. 대사가 귀에 쏙쏙 박히고 집중하게 만들어요. 난 벌써부터 연화 앓이에 빠진 듯.

-진짜 재밌게 잘 보고 있어요. 원래 드라마 본방사수 같은 거 잘 안 하는 편인데 이건 안 기다릴 수가 없네요. 진짜 미친 퀄리티, 감사합니다!

그야말로 화제성 넘버 원.

방송계는 온통「이옥」의 흥행으로 난리가 났고, 사람들은 이옥 앓이 초기 증상을 보이고 있었다.

아주 좋은 소식이었다.

***

2주일 뒤.

썬샤인 제작사 회의실.

8화 시청률을 본 구진식 CP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되묻는다.

“야, 이거 잘못 나온 거 아냐?”

“...맞습니다. 제가 몇 번이나 확인했는데요.”

「검은 달」

분명 첫날 두 자리를 찍었던 드라마였다.

4화에선 무려 13%까지 찍었던 작품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5화부터 11%, 9%, 6%로 떨어지더니 이제는 채 3%가 되지 않았다.

조한웅에, 김연숙 작가 조합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처참할 정도의 결과.

자연스럽게 촬영장 분위기도 말이 아니었다.

철컥.

그때, 오 감독이 씩씩 거리며 안으로 들어온다.

“뭐야? 오 감독이 왜 이 시간에 여기 있어? 지금 촬영 중 아니야?”

“주연 배우가 있어야 촬영을 하죠.”

“뭐? 조한웅이 또 왜?”

“이번 화에서 자기 모습이 안 멋있다고 수정해 달래요.”

조한웅의 안하무인 태도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엎친 데 덮친 격.

갑자기 밀려오는 두통에 구진식 CP가 관자놀이를 지압한다.

“하아, 그냥 좀 하라고 해. 언제까지 징징댈 거냐고 대체?”

“이게 다 그동안 선배님이 오냐오냐해서 그런 거잖아요. 저도 이젠 모르겠어요.”

“야, 오 감독! 니 작품을 니가 모르면 대체 어쩌자는 거야?”

“감 놔라 배 놔라 실컷 참견하실 땐 언제고, 갑자기 망할 거 같으니까 이제 와서 제 작품이에요? 작품 잘 되면 선배님하고 김 작가가 잘한 거고, 안 되면 제 잘못인가요?”

“아니, 이 친구가 오늘 왜 이럴까?”

“됐고요, 저도 이제 더는 못 해 먹겠습니다.”

오 감독이 쓰고 있던 모자를 바닥에 내던지고는 사무실을 뛰쳐나간다.

“야, 야! 오 감독!”

다급히 불러 봐도 이미 사무실을 나간 오 감독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대로 촬영을 접으면 당장 다음 주 방영 스케줄이 엉망이 되는 상황.

하는 수 없이 구진식 CP가 옆에 있던 김연숙 작가를 바라본다.

“하아, 김 작가도 들었지? 가서 수정 좀 해줘.”

한숨 섞인 말투.

그런데 들려오는 반응이 가관이었다.

“수정은 절대 못 해요.”

“뭐?”

“아니, 갑자기 수정하라면 제가 해야 해요?”

“배우가 촬영을 안 하겠다잖아. 게다가 감독 뛰쳐나가는 거 못 봤어?”

“그러게 CP가 돼서 피디 하나, 배우 하나 컨트롤 못 하면 어떡해요? 나까지 피곤해지게.”

“뭐, 뭐?”

황당한 듯 숨을 토해내던 구진식 CP가 다시 김 작가를 바라본다.

“지금 상황 보고서도 그런 말이 나와? 이게 지금 내 잘못이야?”

“그럼, 제 잘못이에요? 뉘앙스 정말 이상하시네?”

두 사람의 눈에서 순간 불꽃이 튀긴다.

“김 작가, 너무하네. 솔직히 PPL 하나 없는 사극에 제작비 150억 끌어오고, 조한웅까지 붙여줬어. 근데 나 보러 뭘 더 어쩌라는 거야? 이쯤 되면 문제는 다른 데 있는 거 아냐?”

“뭐, 뭐라고요? 그 뉘앙스 뭐예요? 지금 내 대본이 잘 못 됐다는 거예요?”

“양심이 있으면 본인이 더 잘 알겠지. 이 대사들, 솔직히 요즘 트렌드에 맞기나 해? 딱 봐도 1990년대 대하 사극 느낌 나잖아? 아니, 그 정도의 깊이라도 있으면 다행이지. 대사는 올드하고, 줄거리는 클리세 범벅에, 장르는 또 퓨전인데, 이게 되겠냐고.”

“뭐, 뭐예요? 보자 보자 하니까...”

“그러니까 맨날 서브 애들 등골 빼먹지 말고 글 좀 쓰지 그랬어. 그러니까 여태 성장을 못 하는 거 아냐? 그래놓고 지금 누굴 탓해?”

두 사람의 고성이 사무실을 넘어 오 감독이 열어놓고 간 문 때문에 복도까지 울린다.

그리고 그때,

때마침 건너편 회의실에서 인터뷰를 기다리던 한 연예부 기자가 두 사람의 대화를 듣는다.

“오호, 이거 대박인데?”

그동안 완벽한 호흡을 자랑하던 구진식 CP와 김연숙 작가의 불화라...

이보다 재미있는 기삿거리를 찾을 수는 없었다.

타닥타닥 타다 다다닥.

문에 귀를 댄 기자의 손에서 내일 아침을 장식할 기사가 빠르게 작성된다.

[제목 : ‘검은 달’의 김연숙 작가, 구진식 CP 불화설, 사실로 밝혀져...]

다스패치 박두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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